중부지부 산행이 꾸려지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제가 사는 공주의 동네 산악회(예전에 제가 산대장을 맡았던)나 전전하고 있습니다.
클럽에 요 정도의 귀여운 산행기를 올려도 결례가 아닐는지요.
무량산, 용궐산, 벌동산.
세 개의 산이 각기 독립적으로 섬진강을 끼고 솟아 있습니다.
이 산들은 흘러온 줄기가 다르면서 묘하게 서로 바라보며 모여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산을 한 번에 돌아보자면,
능선을 타는 것이 아니라
산 하나를 온전히 넘어서 내려간 다음에야 다른 산을 오를 수 있습니다.
우선, 무량산(587m)은
호남정맥 팔봉산에서 갈라져 나온 성수지맥의 대미를 장식하는 봉우리답게 우람합니다.
구미리(강정마을)에서 각시봉을 거쳐 오르니 30분이 걸립니다.
초반이라 몸이 가볍습니다. 배낭에 식량과 식수가 충분하니 마음에 여유도 있습니다.
정상엔 전망이 시원하지 않아서 그대로 내려오다가 한 장 찍어 봅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4시간,
산행 전에 5시간 반이라 생각하고, 세 개의 봉우리를 정상적인 산길로 걸어볼 생각이었습니다.
트랭글을 찾아보니 세 봉우리를 한 번에 하신 분이 몇 분밖에 안 계시지만,
그 가운데 가장 빨리 하신 분이 7시간대에 주파하셨더군요.
조금 거칠게 이동해서 5시간 반이면 어렵지만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산행 시간은 4시간으로 정정되었습니다.
동네산악회에서 더러 있는 일인데, 어쩌겄습니까. 순창까지 온 김에 채계산 출렁다리 구경간다고.
마음이 급해집니다.
정상적인 산길을 다 버리기로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용궐산도 사진에 보이는 산비탈을 그대로 직진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언뜻 보기보다 길더군요.
지나온 무량산입니다.
시간이 있었으면 어치고개로 해서 임도를 타고 내려왔겠으나 사진에 보시는 비탈을 그대로 뚫고 내려왔습니다.
용궐산(646m)은 묘하게 다른 산과 줄기로 이어지지 않은 독립적인 산입니다.
산악회에선 오늘 용궐산만 둘러보고 내려와 밑창 뚫린 요강바위 구경하다 버스까지 걸어내려갑니다.
능선에 올라서니 정상에 산악회 선두 대여섯 분이 용궐산 하늘길로 올라와서 쉬고 계십니다.
잠시 인사를 나누고
요강바위로 내려오니 2시간 반이 소요되었습니다.
1시간 반이면 벌동산을 거쳐 갈 수 있을까, 아니면 그냥 내려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제 두 다리가 어느덧 산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길 아닌 비탈로.
온갖 가시가 만반의 태세로 갖추고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따라 가볍게 맘 먹고 반바지를 입고 갔는데
온다는 비라도 오면 좋겠는데
바람도 없고, 계곡을 치고 오르니 바람이 없을 수 밖에. 바람들이 다 어디 놀러간 건지 후텁지근합니다.
돌들은 지금껏 사람에게 밟혀본 적 없노라며 다 일어서 있습니다.
어디서 멧돼지인지, 제법 낮고 힘센 콧바람 소리가 울립니다. 겁도 안 납니다.
벌동산(461m)은 섬진강 상류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만나는 회문산(550m)에서 줄기가 이어집니다.
섬진강이 빚어놓은 대표적인 산 가운데 하나입니다.
정말 힘들게 능선으로 올라섭니다.
거미줄에 하두 질려서 이젠 거미줄이 입 안으로 들어와도 떼어내지 않습니다.
정상적인 등산로도 이 모양이긴 하지만, 그래도 시간 여유가 있었다면 그 길을 택했을 겁니다.
좌우지간에 길이 없습니다. 아, 사람 구경 해본 지 오래되었구나.
그 능선에서 한 번 더 치고 올라야 벌동산 줄기를 만납니다. 호남에 와서 멋모르고 올랐다가 팔개, 죽습니다.
그러고보니 여기까지 오면서 거의 쉬질 않았군요.
바위 끝에 앉아 가져온 사과 세 개를 한 입에 먹어치우는 괴력을 보입니다. 오늘 전체 휴식시간 6분.
산악회 일행을 따라 용궐산을 다녀온 마눌님 전화가 옵니다. 정해진 4시간을 다 소진해 간다고.
걱정 마시라고, 이제 내려만 가면 된다고.
그런데... 그게 문제였습니다.
벌동산 정상에서 빤히 버스가 내려다보이길래 그쪽으로 거칠게 치고 내려섰더니 으아~~~ 바위절벽입니다.
바위 위에는 그 귀하다는 부처손이 아주 지천으로 깔려있습니다.
바꿔말해, 여기로 내려서 본 멍청이가 일찍이 없었다는.
거의 오류 없는 추측이 등골을 오싹하게 합니다.
조금 돌아내려가면 되지 않을까,
발길을 옮겨봅니다.
소용없습니다. 바위를 밟고 옆으로 게걸음쳐서 2km 가까이 이동해야 합니다.
아주 환장할 지경입니다.
그러나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곧장 추락입니다.
비 맞은 바위가 저를 유혹합니다. 죽은 나무, 산 나무가 마구 섞여 있고, 가시덤불들이 한데 엉켜 있습니다.
그러기를 내려서는 데까지 거의 1시간이 걸립니다.
그 사이, 버스는 채계산으로 떠나고.
도로로 내려섰을 때 다리를 긁고 지나간 흔적들이
무슨 아라비아 문자 같기도 하고. 외계문자 같기도 하네요. 괜찮습니다. 하루이틀 있는 일도 아니고.
아무튼 용궐산이나 무량산 수준인 줄 알고 덤볐다가 순창 벌동산에서 순장당할 뻔 했습니다.
오후의 따끈한 도로를 걸어
구미리 마을로 돌아와서 시계를 보니 꼭 5시간 30분이 걸렸습니다.
택시는 좀처럼 잡히지 않는데
버스는 채계산에서 순창에 있는 식당으로 떠나갑니다.
마을 주민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택시를 수배해서 식당으로 가 반가움을 나눕니다.
기사양반 왈, 벌동산? 우리 순창 사람들이 다른 산은 다 가도 그 산은 안 갑니다. 전체가 바우 덩어리잖어요.
고작 5시간 산행에 말이 길었습니다.
추석 잘 쇠시고요.
첫댓글 와우...막말로 개고생하셨습니다....사진을 보니 산3개를 고스란히 다 타고 넘어야할 상황이라 만만치 않게 생겼습니다..ㅎㅎ
ㅎㅎ 꼴랑 5시간 산행. 부끄럽습니다. 그저 안부를 전할 뿐입니다. ^^
수고하셨습니다
아?!
눈물나게 반갑네요.
어찌 지내셨어요? (정은 가늠할 수 없이 솟아나지만 이하 생략)
이 트랙이 정답입니다.
저도 원래 계획에는 이렇게 걸으려고 했었는데 ...
섬진걍이 빚은 산행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시간을 갖고 안전하고 즐거운산행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대대로님께서 친히 격려와 위로와 염려를 해 주시니 힘이 납니다.
제 처지가 그러하고 상황은 추측하시는 대로입니다.
차차 발길이 차분해지겠지요. 늘 건승하시기를 빕니다.
용궐산이 참으로 슬랩이 멋지던데요...ㅎ
내려갈려는데 딱걸려서..
그래도 내려가버렸죠...ㅎ
섬진강 강바람이 빚어낸 걸작으로 보이더군요.
즐기시는 모습과 열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팔개대장님의 무용담^^
상처많은 영혼이 아름답죠~
홀로 고생 엄청나게 하셨네요.
그래도~ 만족된 산행이셨을까나요??
ㅎㅎㅎ
재미는 있었는데 쬠 짧은 게 그러츄. ^^
1년 미만.
잘 지내시고, 추석도 잘 쇠시고.
섬진강변에 용궐산도 멋지지만 채계산도 빼놓을 수 없는 산이죠
남해 고속도로 오담\보면 살짝 보이기도 하구요
친구님 덕분에 잊었던 섬진강변의 산들을 생각해보게됩니다.
산만 보거나 산과 강을 나누어 생각해 왔었는데
방장님을 알게 되면서
산과 강을 함께 보는 마음이 생긴 것 같습니다.
늘 만안경승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