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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정에 심어 놓은 국화가 화창하고 따스한 첫 몽오리를 필려고 하는지
노란 색깔을 띠고 있습니다.
교정을 돌아서 해변가가 있는 건물뒤로 돌아가는데 차가운 늦가을 바람과 함께
서늘한 바다의 냉기가 덮칩니다.
이곳은 항상 사람의 체감온도가 늘상 양극화 되어 건물 앞쪽은 봄이고
뒷쪽은 겨울인데 건물 뒤쪽은 항상 그늘지고 으스스한 바닷 바람만 불고
앞은 늘상 햇빛이 있는 양지입니다.
오늘 아침 문득 교회생활이 또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나자신은 막달라 마리아같은 누림만을 가지며 주님만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지만
주님은 바울과 같이 음지에서 수고하며 매맞으며 자신의 온존재를 부을 사람이 또한 필요했습니다.
나는 감히 바울의 흉내도 낼수 없는 자이지만
주님이 제시한 것은 오늘날은 바울의 수고와 바울의 이상을 가진 수많은
단체적인 한 바울을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바울은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늘 자신을 낮추며 겸손하며 일생을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자신을 관제로 다 부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라는 이름 앞에 사도라는 말을 붙혀 (사도바울)이라고 명하길
좋아하는데 나같은 자는 사도라는 말의 참된 내재적 본질을 깨닳는데만 해도
일생이 소모 된다는것을 요즘은 조금 알것 같습니다.
누구나 한번쯤 자신도 사도가 되어 그러한 위치와 자리에서 일해 보고 싶은 욕망을 가질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사도라는 말의 본질이 어디서 비롯되었고 어떠한 내재적인 공과를 배운자의
태도와 동기와 목적아래 있느냐 입니다.
지난 종교안에 있던 시절의 삶은 사도바울이 되고자 열망한 수많은 사람들이 내곁을 스쳐
지나 갔고 그들이 내게 던져준 많은 기억의 편린들은 많은 아픔과 회한을 남겨 두었습니다.
오늘새삼 여전히 그들이 내주변에서 떠나지 않고 자의든 타의든 맴돌고 있음을 보며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것을 알고
주님께 이러한 모든 상황을 그대로 가져가 보았습니다.
회복안에 들어온 것은 주님의 주권이었지만 오랜세월이 지나고 나서
저가 본 단순명료한 한가지 사실과 목표는 그리스도와 교회이며
많은 진리의 내용이 있지만 바울이 제시한 이상을 보며
바울의 삶을 사는 단체적인 한 본을 세우는데 일부분으로서 남겨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고봉의 진리와 이상은 다 열렸고 이제 남은 건 지방교회 생활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 사람의 생활의 실재를 표현하는우주적인 몸의 건축을 위해 본이 세워지는것뿐입니다.
이 과정에 많은 눈물과 폭풍과 소용돌이 가운데 우리가 잇다고 봅니다.
종교안에서 살아온 많은 날들의 아픔은 많은 사람들이 이상은 높지만 본이 되는데서
실패했기 때문이고 심지어 심하게 부패하고 타락되어 가는 현실을 목도했기때문입니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싫지만 몇가지 사항을 가지고 나자신을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외치는 높은 말씀과 갈망에 비해 그들의 삶이 하나님이 요구하는
도덕성을 거의 상실했다는 문제입니다. 나는 아직 한번도 종교안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중
도덕성에 흠이 없는 사람을 단 한사람도 만나보지를 못했습니다.
우리가 영이나 양심이라고 말할때 높은 도덕성의 외적인 표현이 필요합니다.
그들의 지위와 명성이 높을수록 그들의 내면을 곁에서 보면 실망할 나름입니다.
그들 역시 이중적인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봅니다. 그 자세한 내용은 입에 닮기도
역겨울 정도입니다만 많은 내용이 있지만 주된 내용은 주로 돈과 간음에 관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늘상 깨어있지 못한 자에게 환경을 주시거나 완악해져 있는 사람에게
어떠한 상황에 떨어지는 것을 허락하시는 분입니다.
어느곳이고 처음에는 다들 성령으로 열심을 내지만 나중에는 거의다 육체로 전락하였는데
알고보면 시작 자체가 성령이 아니고 자아가 동기 였고 성취였다는겁니다.
우리가 높은 명성과 높은 목표를 가지고 있더라도 우리의 삶은 늘상 그영의 통제와 제한속에
자신을 가둬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방교회안에서는 아무리 투명한 상태에서 영안에 말한다 하더라도 가정이 있는
자매나 형제에게 형제님 혹은 자매님...사랑합니다...하고 꽃다발을 갖다가 줄수 있는
사람은 희박합니다.
주님과 지체들의 눈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마음이 있더라도 스스로 제한안에 두어 지기 때문입니다.
이문제를 과소 평가하고 자신하지 말아야합니다.
지방교회안의 생활은 보호하는 뚜껑이 있는 생활입니다. 이것은 율법이나 규례나 통제가 아닌
그영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인해 조성된 생태계입니다.
많은일이나 업적을 쌓기 보다는 자신스스로가 손상당하지 않고 보전 되는것 자체가
더 중요한 부분일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다른 환경안이라고 마음대로 행동하는것은 주님의 면전을 떠나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안에는 이것이 되질 않습니다.
지난날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명분으로 밤낮 남여가 모여 철야기도다 뭐다 하여 가정을
등한시하여 깨진 수많은 가정들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허락한 행동반경을 벗어나서라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고야 마는
어리석은 고집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마치 하나님의 사명으로
오도하도록 거짓되이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블레셋 족속의 어른 아이 가축까지 멸절을 시키라고 했는데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하는 척 하면서 기실은 자신의 이론과 논리를 하나님 앞에 관철하려 했는데
사울의 내재적 본질을 이미 하나님은 간파하셨기에 기름부음을 거두어 다윗에게 부었던 겁니다.
모든것이 무절제하며 속에서 하고싶은 대로 말하며 거룩함과 세상적 천박함이
마치 영성의 표현인양 오도되어 사람들을 어둠과 혼돈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의도는 내가 의롭다거나 이런 것을 세세하게 꼬집어 흠과 티를 지적하자는데
전혀 있지 않습니다.
모든것이 다 겸손하게 배우는 자세와 태도로 경청하는 좋은 교훈의 재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없었다면 신약이 오지 않았을겁니다.
감동적인 설교를 하고나서 멀찌감치서 있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존경을 받고
자신의 허물이 폭로 되는걸 두려워함으로 자신의 주변을 성역화하고 터부시하며 몇몇사람들을
자신의 사람들의 대변인으로 삼아 아예 교통과 대화의 통로를 막아버리거나 조금 개혁적이라는
사람들은 너무나 인간적이고 세속적으로 사람들과 억지로 친밀하게 가까워지려고들 합니다.
이런 맛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사명이라는 미명하에 사역자가 되길 원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며
존경받는 맛에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안팍이 다른 삶의 사이클안에 몰입하게되고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 자신의 자아를 성취하는데 사용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종류의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사도였고 진정한 겸손을 알고
하나님을 위한 진정한 거룩한 분노를 아는 자였습니다.
니형제님은 진정한 사도의 영을 가진자였다고 봅니다.
그는 어머니와의 문제로 인해 충분히 항변 할수 있었는데 교회를 위하여 6년을
주님의 안배에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종교안에서는 사역자라는 명분으로 더욱 더 덮여지고 용서되고 심지어는
말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문제가 있다고 뒤집어 씌우기 까지 하며 협박등으로
위해를 가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빠질수 없는 한가지는 돈문제에 있어서 자유로운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겁니다.
교회돈을 자기 개인 돈인양 마구잡이로 써놓고 이를 덮고 감추기 위해 이를 정당하게
추궁하는 사람들을 마치 교회의 문제아 인양 몰아세워 결국 또 하나의 분열이 양산되게 합니다.
---주님의 종을 치는자는 형벌을 받고 그래서 교만해서 암으로 죽고 교통사고 나서 죽었다...라는
식의 또하나의 왜곡된 영성을 무기로 사람들을 기만하고 협박합니다.
아....얼마나 많은 날들이 어둠과 혼돈의 터널을 스쳐간 날들이었는지...
사람들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사랑과 용서와 하나님의 의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한국사회는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종교등 모든 방면에 다른 나라에 비해 원칙이
뚜렸하게 정립되지 않고 두리뭉실 인정과 감상적인 동정으로 인해 그냥 넘어가는
경향이 아주 심한 곳입니다.
주님은 무조건 모든 것을 덮는 분이 아니고 오히려 드러내시며 치료받으시길 원하십니다.
그것이 호미로 막을것을 가래로도 못막게 된다는 말이 적용되는 부분입니다.
드러낼것은 드러내시며 덮을것은 덮는것이 하나님의 왕국인데 문제는
그영의 통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인간적인 정리와 관념으로 어떤 문제를
문제로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동정으로 덮여지고 심지어 영성으로 미화 되기까지 하여
결국은 그들이 회개하고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영원히 박탈 당한다는데서 하나님 앞과 성도들 앞에
전혀 두려움을 갖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신을 변호하며 자신을 미화하기까지 합니다.
이 얼마나 자신을 스스로 높히고 기만하는 교만함인지....
그러나 교회는 아무리 우리가 볼때는 문제가 많고 죄가 많은것 같이 보일지라도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을 표현하며 간증하는 흠과 티가 하나도 없는 그분의 사랑스런 배필입니다.
이곳은 떠날래야 떠날수가 없는 영원한 하나님과 사람의 영원한 상호 거처로서
스스로 나갈수도 없는 곳이 교회 입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회복안에 들어 올때 수많은 방황을 멈추고
이제사 여기가 내가 안식할 곳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지만 교회안에 들어 왔다고 모든것이 끝난것만은 아닙니다.
여전히 모든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든 죄를 지을수도 있고 다윗과 같이 허물이 있을수도 있는데
종교안에서는 주님 앞에 나가지 않고 회개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강팍해져서
사울과 같이 되는사람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 사실인데 종교안에서는 아무도 이에 대해 말하지
않고 어떤 이는 죽을때까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일생살다가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그에게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임을 봅니다.
그러나 당신의 몸인 교회는 반드시 그분의 자녀이고 몸의 지체라면 말씀하게 되어 있음을 찬양합니다.
여전히 몸안에 생활함을 소망하고 감사할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허물과 죄따위로 고민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그분께 나아오는 자녀들을
그분의 은혜와 긍휼로 넉넉히 치료하고도 남을 분이심을 찬양합니다.
나아오지 않는 자는 다 반대로 강팍해지고 주님을 대적하고 속이는 자가 되기에...
지난날 종교안의 사람들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배필이라는것을 모르기 때문에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여전히 자기식대로 말씀을 해석하고 죄를 가리고 하나님과 성도들을
속이려 하기에 하나님은 지금도 마음 아파 하십니다.
바울의 눈물은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낮아지고 겸손하여 성도들에게 나아갔다는
증거입니다.
오늘같이 스산한 날은 갓피어난 국화꽃잎에 따스하게 비추는 사랑스런 햇살같은 주님앞에
자꾸만 가고만 싶어지는 시간입니다.
첫댓글 좋은 글이군요. 제 체험과 관잘을 따르면 지방입장에 돌와와도, 조성의 문제는 동일한 문제더라구요. 그러므로 반대도 어느정도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진리의 인도와 영성적 실행이 있다면 말입니다. 사람을 돕는 것의 관건은 우리편, 당신편을 가르지 않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 가 함께 그분 안에서 자라는 것이 관건..
하나님의 정하신 길의 실행이라는 메시지 끝을 형제들과 넘기며 한숨과 기도가 나왔습니다. 사람으로서는 결코 이길을 갈수 없음을 봅니다. 이형제님의 이 메시지가 성경에서 온 큰 빛이며 이 시대에 마지막 남은 큰 산이라는것에 대하여...이길이 쉽다면 수많은 세월과 시행착오를 거쳐 이런 메시지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 봅니다. 하나가 되는건 무엇이 기준과 적용이 되느냐가 관건인것 같습니다. 우리가 무슨일을 하든 이런 점에 깊은 고려와 느낌이 있다면 지난날의 고통을 되풀이 하지는 않을것 같습니다^^
교회 생활이 축복인 것은 늘 주변의 지체들이 많이 있기때문입니다. 종교안의 상황이 어둡고 혼돈스러운것은 그들의 주변이 온통 인의 장막으로 쳐져 있기때문이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는 사이클이 차단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불행은 그들이 주님께 신실한것 같지만 그들의 동역자가 될만한 사람들을 귀가 어둡고 시야가 흐려져서 그들의 적으로 만들어서 결국 분열이 확산되게 한것입니다. 사람으로 인해 세워진 것은 사람으로 인해 망할수 밖에 없습니다. 몸안에서는 이런일이 없습니다. 주님의 몸이며 여전히 주님의 역사를 신뢰하기에...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