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 가랑잎 길을 걸어
주말 이틀을 보내면 계묘년이 저물 금요일이다. 일기 예보엔 맑은 하늘에 포근한 날씨이나 미세먼지가 살짝 비칠 날인 듯하다. 평소는 아침 일찍 산책이나 도서관으로 향했으나 아침 식후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온 ‘봄을 기다리는 날들’을 펼쳤다. 70년대 유신 독재에 저항했던 경북대 교수 안재구 박사 개인의 가족사는 분단이 가져다준 이산가족의 옹이로 만큼이나 크나큰 상처였다.
세계적 수학자로 촉망받던 안 박사는 시국 사건 학생들을 옹호했다고 대학에 쫓겨나 서울 사립 대학으로 적을 옮겼을 때 남민전 사건으로 피검 되어 사형을 선고받아 무기로 감형되었다.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 가석방되기까지 10여 년 감옥 생활을 보낼 때 어린 4남매는 청년기를 거쳐 사회인으로 자랐다. 그의 아내와 4남매와 부모가 옥중의 안 박사가 나눈 편지글 모음의 책이다.
3년 전 안 박사는 세상을 떠나고 그의 4남매 자녀 중 둘째 딸 소영이가 가족들이 옥중 아버지와 나눈 육필 편지글을 책으로 엮어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남민전보다 10년 앞선 통일혁명당 사건 때 육사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던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떠올랐다. 공교롭게 두 분은 밀양 출신이었는데 분단 조국의 이데올로기 장벽 앞에 못다 이룬 학문적 손실도 컸다.
안소영 가족의 사적 편지글은 그 시대를 증언한 공적인 기록 문화 유산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닐 듯했다. 부녀간에, 부자간에, 부부간에, 모자간에, 부자간에, 옥중의 안 박사와 옥 밖의 가족들이 나눈 편지글에서 엄혹했던 군사 정권에 대한 비분강개에 앞서 애틋한 가족의 끈끈한 정을 느껴 콧등이 시큰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 책장을 연속해서 펼치지 못하고 멈추기가 여러 번이었다.
옥중 서한을 엮은 책은 중간에서 접어두고 새참이 될 듯한 이른 점심을 해결하고 산책을 나섰다. 근래 다리에 무리가 올까 봐 산행보다 산책을 자주 나서는 경향이다. 집에서부터 걸어 퇴촌삼거리로 나가니 창원천 천변 양지바른 쉼터에 몇몇 할머니들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창이대로를 건너 사림동 주택지에서 사격장으로 올라가 잔디밭 바깥 트랙을 따라 서너 바퀴 거닐었다.
사격장 언덕에는 한겨울인데도 화사하게 핀 노란 민들레를 몇 송이 만났다. 잔디밭을 나와 등산로를 따라 소목고개로 오르니 인적이 끊겨 적막했다. 약수터에서 샘물을 받아 받아마시고 고갯마루로 올라 쉼터에 앉아 잠시 쉬었다. 십자 갈림길에서 정병산은 빼고 소목마을로 가느냐와 봉림산 기슭으로 드느냐였는데, 후자를 택해 북향의 등산로를 따가니 가랑잎이 쌓인 길이 나왔다.
야트막한 산등선을 넘으니 더 호젓한 가랑잎 길이 나왔다. 여름에서 가을까지는 숲이 무성해 등산로가 묻혔다가 낙엽이 진 늦가을부터 겨울과 봄 사이만 산짐승도 함께 다닐 듯한 오솔길이 생겼다. 희미한 등산로를 따라가니 봉림사지 절터로 내려가기 전 약수터가 나왔다. 신라하대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였던 중심 사찰 봉림사는 석축은 흔적조차 없고 기와 조각만 발부리에 채였다.
1,100년 전 여러 스님이 운집해 수도 정진했을 절은 터만 남아 황량했다. 폐사지 모퉁이 일부는 사유지인지 텃밭으로 경작했는데 안내판을 세워두지 않아 주체와 기간을 알 수 없는 유적 발굴이 진행 중이었다. 광복 전후 혼란기 봉림사지와 관련된 유물 가운데 석탑은 시내 어느 초등학교 화단으로 옮겨지고 보물 365호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보냈다.
절터에서 골짜기를 내려가니 지난번 넉넉하게 내린 겨울비로 계곡에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창원 컨트리클럽 입구 엘에이치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자연마을 ‘안담’이 있던 곳으로 내려섰다. 봉림지구 공영 택지 개발 이전 30년 전 안담마을 토담집과 개울은 사라져 아까 지나온 봉림사지를 보는 듯했다. 분재원을 뜰의 운룡매는 봉오리가 부풀고 영춘화가 피운 노란 꽃을 한 송이 봤다. 23.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