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월 첫날에
이월 첫날은 목요일로 시작했다. 우리나라 남녘 해안에는 중국으로부터 건너온 저기압으로 형성된 기압골로 강수가 예상되었다. 잠을 깬 새벽녘 베란다 창으로 빗방울이 스친 자국이 보였다. 근래 목요일 오후 연금공단에서 신중년 대상 스마트폰 교육 강좌를 수강하느라 시간을 비워두어야 한다. 그리하여 아침나절 도서관에 머물다 공단 뷔페에서 점심을 때우고 교육장으로 갈 예정이다.
아침 식후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외동반림로를 따라 걸었다. 결빙이 되지 않은 반송 소하천 냇바닥에는 겨울을 나는 흰뺨검둥오리 한 쌍이 뒤뚱뒤뚱 주둥이를 밀고 다니며 먹이활동을 하고 있었다. 외양으로는 암수가 구분되지 않는 오리는 짝짓기 계절이 아님에도 금실이 좋아 두 녀석은 언제나 붙어 다녔다. 그보다 바깥 웅덩이에도 한 쌍이 더 보여 아까 그 녀석들로 착각할 정도였다.
원이대로를 건너 창원 레포츠파크 동문에서 폴리텍대학 구내 들어섰다. 학생이나 교직원들이 드나드는 차량을 볼 수 없는 한적한 캠퍼스였다. 가랑비가 가늘게 내려 손에 든 우산을 펼쳐 써야 했다. 나목으로 겨울을 나면서 꽃눈이 부푸는 벚나무를 바라보니 새벽에 내린 적은 양의 비에도 가지에는 투명한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 정도면 산간지대는 상고대가 맺힐 현상을 볼 듯했다.
교육단지로 들어 방학을 맞은 전문계 공업고등학교와 인접한 창원도서관으로 갔다. 자차를 몰아 이제 막 출근하는 직원들과 같이 2층 서가로 올랐다. 비치된 책 가운데 관외로는 대출이 불가하다는 테이프가 붙은 종교와 명상에 관한 책 두 권을 골라냈다. 원불교로 출가한 최정풍 교무가 쓴 ‘큰 봄에’와 불교 명상 수행으로 널리 알려진 탁닛한의 ‘고요히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이었다.
우리나라 종교에서 재정 운영이 투명하고 신앙인들은 일반적 통념보다 진보 성향으로 알려진 원불교다. 저자는 소태산 마음학교 대표로 ‘마음 아득한 변혁의 시대, 위로와 성찰로 마음 꽃을 피우기’ 위해 평소 남긴 ’마음편지‘라는 짧은 글을 추려 엮은 책이었다. 원불교 교리와 무관한 독자에게 마음의 고요와 평안을 가져다주는 구절들이 자연에서 취한 사진들과 편집되어 있었다.
탓닉한이 쓴 책은 몇 귄 읽은 바 있는데 그의 근황을 알게 되었다. 탓닉한은 1926년생 베트남인으로 2차 세계대전 종전 이전 달랏 후에 왕국 뚜 히에우 사원에서 출가해 미국으로 건너가 비교종교학을 공부했다. 미국에서 베트남전을 반대한 운동을 주도해 귀국이 좌절되어 프랑스로 건너가 ‘플럼 빌리지’라는 명상공동체를 운영한 명상가로 한때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탓닉한이 출가 전후 살았던 달랏은 내가 올겨울 초등 친구들과 다녀온 베트남 여행지 남부 고원으로 프랑스 식민지 후에 왕국이었다. 그는 반전 평화주의자로 낙인찍혀 귀국이 좌절되자 프랑스로 망명해 명상공동체를 운영하다 노년에 뇌출혈이 와 치료차 태국을 방문했다가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하고 모국 베트남으로 가서 96세 생애로 코로나 와중인 2022년 1월에 입적한 분이었다.
아침나절 도서관에 머물며 펼쳐본 책은 서가 제자리에 두고 집으로 가져가 볼 책을 두 권 집었다. 서강대 한국어교육원과 주한 대사관 한국어 교육을 담당하는 신효원이 쓴 ‘어른의 어휘 공부’와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에서 연구와 교육을 담당한 남성현이 쓴 ‘반드시 다가올 미래’였다. 어휘와 기후 위기는 평소 내가 관심을 가진 분야라 속도감 있게 책장을 넘길 수 있을 듯했다.
점심때가 다가와 스마트폰 교육장으로 향했다. 팔룡터널 입구 업무용 빌딩 1층 한식 뷔페를 찾아 건축 현장 인부들과 섞여 식탁에 마주 앉았는데 땀내 작업복에 안전모를 벗은 노동자들이 경건하게 여겨졌다. 식후 터널 근처 팔룡 근린공원을 찾으니 연안 김씨들이 모여 살다 떠난 죽전마을 옛터 기림비가 나왔다. 이후 3층 스마트폰 교육장으로 가서 신중년들과 시간을 함께 보냈다. 24.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