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시를 보는 눈 1 / 이종수 (시인)
시를 처음 접했을 때 이야기다. 중학교 시절이었는데 그때는 껌종이에 적혀있는 인생과 자연을 노래한 시들에 매료되었다. 그것이 내 것인 양 모으며 싯귀에 젖어 살았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마라”(뿌쉬낀) 의 시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연애편지 한 대목이나 조금 어려운 삶에 써먹기만 했다. 실제 뿌쉬낀이 평생 부모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고 경제적 곤란에 시달렸으며 권력의 탄압까지 받으며 불행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알지 못하고 시를 이해하고 말았다. 먼훗날이 되어서야 그가 권력, 금전의 예속을 싫어하고 진정한 저항시인이며 자유와 사랑을 바탕으로 영혼과 심장의 목소리가 담긴 시를 남겼다는 것을, 러시아 예술가들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시를 먼저 만나고 시를 써서 시인으로 거듭 나는 것 사이에는 오랜 시간의 장벽이 있었다. 시에도 생명이 있어 다른 누구로부터, 시를 쓴 자신으로부터도 완전 독립해 있어서 자칫하면 죽거나 상처를 입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나의 내부에서 날것 그대로의 생명력을 갖고 있는 것을 시로 쓰는데 먼 길을 돌아왔다는 것이다. 마음속에 새로운 시 한 편을 만들어 내는데 그 어느 일과는 다른 흥분과 집중, 어렴풋이 잡히는 윤곽, 부피, 색채, 서서히 마무리되는 형태 같은 것이 자리 잡기에는 공중에 붕 뜬 채로 신변잡기와도 같은 감상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대학에 와서야 시를 다시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때도 막연한 관념의 그늘을 벗어나기란 어려웠다. “어둔 대로 사위가 하늘/머리를 풀며 흔들리는/어린 나무 곁에 우러러 서면/막 퍼부을 것 같은 빗소리에/ 젖어오는 상큼한 동공//넓다 보니 깊어/그리 무거운 마음들이 슬며시/물기되어 내릴 때/외진 마을 꿈꾸는 물소리는 차웁고”(<아침으로의 몸짓>)처럼 주워들은 관념들 뿐이었다. 정작 꿈틀거리는 실체 앞에서도 “신립이여, 당신은 아는가/일체의 말로 풀리지 않는 몸짓으로/ 되새김질해야 하는 세상 얘기를”(<신립장군 화상 앞에서>)처럼 내 자신의 상념만 풀어넣고 있었다.
가뭄에 단비와도 같이 새로운 시의 눈을 뜨게 된 것도 그만큼 멀 수밖에 없었다.
너를 꽂을 때면 겁이 난다 허술하게 꽂은 죄로 떨어져 수직인 너의 서슬 푸른 겨눔으로 인해 언제 화를 입게 될 지 어디에 도사리고 있다가 내 발바닥을 덮칠지 대가리만 큰 널 힘주어 누르지만 언제 내 발바닥, 심장까지 겨눌지 모를 너의 반항을 두려워한다
풀라타너스에 찢긴 채 널려 있는 종이쪼가리들 바람에 흩날리는 대열에서 큼지막한 대가리만 끊어져 아픈 나무의 정맥만 찌르고 있는 녹슨 네 침을 보면 항시 겨누고 있는 적은 누구인가 너로 하여금 움츠리게 되는 심장 백주 대낮 너의 반항을 더 예리하게 만드는 건 누구인가
- <압정>
작품전에서 처음으로 칭찬을 받았던 시다. 관념 타령에 실체가 없다는 지적만 받아오다 새로운 시각에서 본 압정의 서슬 푸른 겨눔이 좋다는 칭찬을 받고서야 그동안 먼 길을 헤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시를 계기로 내가 쓰고자 하는 대상을 마음속으로 그려보고 다시 바라보고 더불어 살아보라는 선배 시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새벽녘 목청을 다듬으며 칠성무당벌레마냥 높은 곳에 오른다 누구나 아침 맞을 준비를 하고 있을까 잠깐 벼슬을 쭈뼛거리다가 길게 한 소리 뽑는다 높은 곳에 올라 보니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가 거느린 암탉들처럼 멍청해 보인다 폐계 천 원 폐계 천 원 한다는 양계장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 튀김닭으로 팔려가고 닭도리탕으로 팔려가는 저 수백 단으로 쌓인 유통의 나라를 굽어보며 그레꼬로망 선수처럼 발바닥을 닦아본다
아침이 온다고 다 같은 아침이 아닌데 아침만 질러놓고 나면 이 나라 모두 아침 빗자루질 같을 거라는 막연한 몽상을 하며 지난밤 닭장 횃대에서 자다 쥐들에게 뜯겨 살이 다 드러난 암탉들을 거느리고 한껏 목을 꼿꼿이 세운다 양계장에서 팔려온 암탉들 끌고 운동도 시켜야지 그래야 살이 맛있어지지 자, 이제 휴게소로 나가볼까 존경하는 주인아저씨, 벌써 일어나 나를 보러 오는 걸 잘 봐 내가 얼마나 신임받는 줄 조금 있다가 보면 알게 될 거야 몸생각 한다고 촌닭, 토종닭 아니면 먹질 않는 사람들의 머릿속이나마 꽉 채워주려면 꼭 내 연기가 필요하지 단칼에 쓰러져 죽는 시늉하는 일품 연기를, 연기가 끝나면 양계장 닭으로 바꿔치기하는 아저씨도 일품이지 어차피 못 쓰는 날갯죽지 조금 아픈들 대수로냐 휴게소 가든 벼슬살이 이만하면 좀 좋아 휴게소 가든 닭도리탕 정치하는 맛에 세월 가는 줄 모르는 재미 말이야
- <장닭공화국> - 199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여러 번의 신춘문예 도전 끝에 얻은 <장닭공화국>은 압정에서 말한 ‘누구’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써 본 것이다. 그때가 김영삼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가든정치(가신정치,계파정치)하는 장닭에 빗대어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말한 그의 정치철학을 마음껏 비틀어댔다. 그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풍자 특유의 맛이었지만 변두리의 말이 아닌 정곡을 찌르는 시로 당당하게 굳게 닫힌 중앙의 문을 열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함께 낸 다섯 편의 시도 선자(選者)들의 관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한 편이라도 급이 떨어지면 안 되는 최종심 자리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시의 삼각주 같이 중요한 깨달음과 발견을 가져다 보는 시가 있는 것 같다. 그때 무렵 온몸을 바쳐가며 국토기행 같은 것을 하고 있었는데, 그제서야 사람이 보이고 천둥과 번개의 중심으로 들어간 듯한 짜릿한 충격과 시의 눈이란 무엇인지 알게 된 것 같다.
막 바람과 구름길에서 놀다가 송광에서 선암 가는 길을 잃어버릴 뻔했습니다 어린 나뭇잎들이 두들기는 하늘 고의춤에 천둥 번개까지 감춘 줄 모르고 시오리 길처럼 늘어져 능선을 감추고 마는 구름에 놀다가 비를 만났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빈 줄 알았는데 아름나무 아래 갓 자라 오르는 잣나무까지 젖었습니다 산꼭대기가 늘 뾰족한 것은 고인 물이 썩는 이치와 같을까 쉴 틈도 없이 마음만 바빠집니다 그저 뚫린 게 문구멍이라고 내리막길에 접어드는데 디딤발이 자꾸 뒤틀려 산 무게만큼 눌러앉습니다 뒷덜미를 낚아챌 것처럼 이슥한 산이 젖는 소리는 꼭 귀신 울음 같아 자꾸 뒤돌아보게 합니다 정나미 뚝 떨어지게 산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 떠나고 싶어 안달이다가도 젖고 쉴 데 없어 서두르는 내 마음 같아 오히려 오기가 생겨 젖은 빨래마냥 더덜거리며 산 구경을 합니다 내려오자마다 득달같이 뒤흔들던 천둥과 번개는 어디로 가고 비마저 쟁쟁거리는 산꼭대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려 화살촉 같은 햇살만 구리거울 물웅덩이에 떨어져 산은 된장국처럼 풀립니다
- <조계산>
조계산을 넘다가 비에 홀딱 젖고 내려오니 선암사 일주문이다 못물 쟁쟁하게 후들기던 비가 그치고 난 뒤의 연꽃 같은 일주문 앞에서 절밥 한 그릇 사무치게 그리운데 비웅덩이마저 한 소끔 끓어넘친 된장국처럼 둥둥거리는데 두꺼비 한 마리 법당 쪽을 보고 앉아 있다 돌계단에 강단지게 앉은 해태마냥 오복탕 뜨거운 물을 품어내는 돌두꺼비마냥 그윽하게 법당을 바라보고 있는데 방금, 고매古梅한 수천 수만의 꽃잎을 던져버린 매화나무 같기도 하고 비를 머금은 천년 돌담 같기도 하다 아니, 시루떡 고물 같은 몸을 벗고 새신랑처럼 천왕문으로 기어간다 어기적 뻐기적 절밥 얻어먹으러 들어간다
- <선암사 두꺼비>
그런 점에서 송광사를 넘어 조계산을 거쳐 선암에 이르는 길은 나에겐 황금코스와도 같았다. 저절로 받아 적게 되는 말씀과도 같다고 할까. 그런 순간은 흔히 오는 것은 아닌 듯하다. 일부러 시상을 떠올리려 다니는 여행에서는 맛볼 수 없는 천둥치고 번개 치는 그 가운데서 얻는 좋은 시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그물보다 작살을 써서 물고기 잡길 좋아한다. 물안경을 쓰고 바윗돌 깊숙이 자기들만의 먹을거리를 즐기는 고기들의 숨통을 찾으며 오래오래 숨을 참는다. 그래서 몸에서는 빠가사리, 메기, 쏘가리 냄새가 난다. 붕어를 그대로 푹 삶은 물은 인삼보다 더 치고, 빠가사리백숙을 어느 보약보다 더 치고, 쏘가리 쓸개를 곰쓸개보다 더 치며 강에서 살던 시절. 강이 키워준 물힘과 물고기 정신을 가르치기 좋아한다. 그래서 이야기할 때 입을 보면 물 만난 고기 같다. 물고기들이 가장 많이 잡히는 그믐밤의 물살 소리가 난다. 여울을 거슬러 오르는 물 튀김 소리, 몸 비트는 소리로 말하며 바윗돌 사이를 구르는 시간을 잊는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강의 몸집에서 큰 물고기들의 타는 눈빛과 어찌 보면 작살과 같이 물살을 가르는 고기들의 몸집들을 쓰다듬으며 그들의 정령과 살을 안주 삼아 거친 詩로 부대끼는, 또 하나의 강으로 살고 있다.
그의 친구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이자 어부이자 시인이자 공자, 예수님보다 더한 강이다. 여름이면 밤숲 아래 천막을 치고 서울이나 수원, 청주에서 찾아오는 불알친구들, 형, 동생들에게 물고기를 잡아다 어죽과 빠가사리 백숙, 쏘가리회, 붕어탕을 끓인다. 온통 어수선하게 늘어놓은 양념이며 냄비, 숟가락, 짝 안 맞는 젓가락이 모두 함께 녹아 둘도 없는 맛이 되는 강. 잊지 않고 찾아주는 사람들이 좋아 한나절 작살질에 시퍼런 몸뚱이로 돌아와 내려놓는 고기들이 그렇게 평화스러워 보일 정도로 그 좋은 고기들과 밥을 한 푼도 안 받고 베푸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도 도 닦는 게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강물, 밤숲처럼 잠을 자고 있다.
- <남한강>
평생 강을 떠나지 않고 사는 어부와 그의 친구 시인 이야기를 남한강이란 연작으로 쓰던 시인데 이 시 또한 산문시의 매력을 맛보게 해 준 계기였다. 산문시의 근원을 따라가 보면 먼저 스승이 되어준 많은 시인들이 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너’에 대한 ‘나’의 고독한 여백이었습니다. 속으로 운 바위의 노여움이며, 그렇게 참은 이끼의 고요한 노래 더불어, 나는 성터에선 숨가쁘지 아니하였습니다. 진작 그가 깃발을 묻고 황황하므로 하여, 그의 정력이 이념보다 더 아롱져 있는 곳. 허허히 산이마에 휘불리면서 지평을 가꾸신 그의 시도가, 있고자 한 높은 손짓이며 일체였음과 같이, 나는 그 자리에 나를 지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김상억, <성터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하면서 만난 시인데, 허투루 말하는 것 하나 없이 ‘너’에 대한 ‘나’의 고독한 여백이란 말로 성터를 표현한 긴장 앞에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장자(莊子)의 <양생주편(養生主篇>에 나오는 포정해우(庖丁解牛)를 만난 듯한 느낌. 단숨에 소의 숨을 끊고 고기와 가죽과 뼈를 골라내는 솜씨를 보는 듯했다. 그의 소 잡는 솜씨를 본 문혜군 양혜왕이 어떻게 그런 솜씨를 배울 수 있었냐는 물음에, “처음에는 소가 보였지만 3년이 지나자 소가 사라졌습니다. 눈으로 소를 보지 않고 마음으로 소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도(道)인데, 도를 얻은 후 도의 흐름에 따른 손놀림만 남았고 그 이치에 따라 가죽과 고기, 살과 뼈 사이로 칼을 움직여 소가 생긴대로 따라갑니다. 평범한 백정은 달마다 칼을 바꾸고 훌륭한 백정은 일 년마다 칼을 바꾸지만 저는 19년 동안 칼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리하지 않고 도리와 이치에 따랐기 때문입니다.” 하고 말하는 대목을 생각나게 한다. 이것이 시를 보는 눈이지 않을까.
이러한 시의 발견은 오랫동안 혼자 고민하게 하고 버리고 다시 쓰는 계기가 되었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김종삼, <墨畵>
이선관 시인의 <살과 살이 닿는다는 것은>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림을 그린 그야말로 ‘묵화’의 느낌과 몸 깊은 데서 오는 탄식을 보여주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시를 보는 눈은 살아있지 않는 것에서도 생명을 느끼게 해준다.
고장난 기계를 분해하다 뒹구는 쇠구슬을 본다 아주 작은, 사랑의 최초 형식인 알(卵) 같은 눈동자를 본다
돌아갈 때나 멈추었을 때나 혹은 해체되어 이렇게 나뒹굴 때도 눈감지 못하는 노동자를 가진 기름에 흠뻑 젖은 기름공주
지금 누군가 불안하다면 그대 망가져서 반짝이는 눈빛은 무엇인가 실패한 사랑도 삶이 아니냐 사랑이 쉽지 않더라
기름공주, 네 눈동자는 어느 지극한 마음의 마지막 그리움을 보여주는 진신사리를 닮았더라.
- 조기조, <기름공주>
기계를 다루는 노동자의 눈에 시로 다시 태어난 기름공주를 보라. 기계의 부품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이 사랑의 최초 형식인 알을 떠올리게 하고 평생 기름에 흠뻑 젖어 사는 노동자의 삶과 끝없이 실패하기만 하는 고된 삶의 연속에서 튀어나와 어려운 사랑과 그리움을 보여주는 진신사리로 거듭 나는 것을 보라. 죽은 것이지만 그것에서 사람의 삶만큼 치열했던 사랑이자 그리움을 뽑아내는 시인의 눈이 빛나는 대목이다.
이번에는 농부이자 시인인 분의 시를 보자. 이땅에 바친 삶의 굴곡과 염원을 보여주는 시에서 독자와 시를 쓰는 다른 이들에게 이처럼 끈끈한 대상이 있는지 묻게 한다.
눈 비비고 일어나 앉은 논과 마주 앉아 있다 서로의 눈빛이 닿는 곳에 약속의 말들이 부딪치며 쨍그렁 소리를 낸다
- 박운식, <해뜨는 들판>
벼논에 햇살이 가득 내리고 있습니다 자꾸 내려서 논바닥으로 벼잎 속으로 금빛 꼬리를 물고 하루종일 들어가고 있습니다
밤이면 어둠 속의 별들도 풀벌레 울음도 소쩍새 울음도 꽃잎 흔들던 바람도 논 속으로 벼잎 속으로 슬금슬금 들어가고 있습니다
저것들이 어둠 속에서 같이 어울려 무슨 일을 하는지 쿵더쿵 쿵더쿵 떡방아 찧는 소리 같기도 하고 소 몰아 논 가는 소리 같기도 하고 풍물소리도 아련히 들리는 듯하고 홀딱 벗고 무슨 일을 하는 소리 같기도 하고 깊은 어둠의 논 속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어림짐작만 해봅니다
- 박운식, <벼잎 속으로>
영동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시인의 초기 시와 최근 시다. 쟁기질을 하다가 큰 돌에 걸린 소리마저 햇빛이 부딪히는 소리로 들린 농부의 마음이 ‘아버지의 논’이란 시집으로 다시 돌아온 시인의 이야기가 얼마나 더 구성져졌는지 보여준다.
너희가 해마다 죽을 힘 다해 거둔 것들 죄 앗아 한 방에 꼬라박은 인간 말종들이 있다
그게 나다 농민이다 그렇지 않은가 논밭이여?
더러는 운수납자와 몸 바꾸고 싶은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북극성에 수하를 걸어 암호를 묻기도 했다
무시래기 같은 헐한 삯도 없이 널 부려 이룬 폐허여 염하다가 놓친 놈 같이 푸르뎅뎅한 몰골이여
네 등골에 빨대를 꽂은 인간이 나다 농민이다
- 이중기, <논밭이여 미안하다>
영천땅 농부 시인은 앞서 말한 시와는 다른 눈으로 논밭을 말하고 있다. 가장 앞서서 부려먹으면서도 작황에 따라 둘러엎기도 하고 끝내 지켜내지 못한 농부로서의 참혹한 폐허를 말해주는 것 같아 함께 분하기도 하고 한없이 죄스러워지기도 한다. 이것은 또 다른 시에 구체적으로 이어진다.
우리 마을 부처 하나 자꾸 운다, 꾸역꾸역 운다
트랙터 경운기도 못 들어가는 습지 정강이까지 빠지는 무논에 건달농사꾼 막내아들이 돌 처넣던 날, 덤프트럭 꼬나보며 담배 한 갑 다 태우고 늙은 부처 또 울었다, 붉게 울었다 어금니는 다 빼버리고 앞니 몇 개만 남은 월계어른 꾸역꾸역 자꾸 울었다
비바람 들이치는 머슴살이 헐한 삯으로 장만한 첫 땅, 뒷골 벙어리 무논 한 팔백 평 그 찡한 생의 첫 문장에 복상나무 심던 날, 복상나무 잔뿌리가 자꾸 눈 속으로 파고든다며 늙은 부처 월계어른 붉게 울었다
이놈아, 이놈아 …… 꾸역꾸역 울다 재가 되었다
- 이중기, <늙은 부처 붉게 울었다>
얘야 여시골 논다랑이 묵히지 마라 니 어미하고 긴 긴 해 허기를 참아가며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괭이질해서 만든 논이다
바람 불고 비가 오고 눈이 오고 꽃이 피고 새가 울고 아픈 세월 논다랑이 집 삼아 살아왔다 서로 붙들고 울기도 많이 했었다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 묵히지 마라 둘째 다랑이 찬물받이 벼는 어떠냐 다섯째 다랑이 중간쯤 큰 돌 박혔다 부디 보습날 조심하거라
자주자주 논밭에 가보아라 주인의 발소리 듣고 곡식들이 자라느니라 거동조차 못하시어 누워 계셔도 눈 감으면 환하게 떠오르는 아버지의 논
- 박운식, <아버지의 논>
두 시 모두 땅을 일구면서도 아버지의 아버지가 몸으로 일군 대업을 지키지 못할까 노심초사하며 다시 다짐하는 시를 보는 눈이 그대로 들어있다. 이것은 어느 농사꾼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시를 읽는, 시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땅과도 같은 삶에게 묻는 것이다.
나를 이렇게 진흙논에 쑤셔박아 밟아 뭉개도 되는 거냐 그래 피눈물이 난다 내가 니 자식 같은 놈이 아니라 니 어미 아니 하늘이다 언제나 마음 변하지 않고 수수만년 너와 나 같이 살아왔는데 못된 놈들 지 어미 아비를 하늘을 하얀 쌀밥이 되는 나를 트랙터로 뭉개버리다니 어떤 후레자식이 저 착하고 어진 놈을 미치광이 망나니로 만들었지
어느 가을날 저 착한 벼들이 나에게 눈 부라리며 야단치며 눈물 흘리는 것을 처음 보았네
- 박운식, <못된 놈들>
조국근대화니 새마을운동이니 뭐니 해싸며 공장 굴뚝, 안테나 개수로 저울질하던 나라 힘이 다 어디서 나온 지 알어? 내 주인으로 모셔운 땅과 농사꾼들이 있었기에 된 것이제 누구 하나의 서슬 푸른 크리스마슨지 카리스만지 그 걸로 된 지 알어? 다 허튼소리여 얼룩백이 황소가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하며 흰소리 하지 말어 우리들이 도가니살 같은 땀 바쳐 몸 바쳐 올린 동네방네 밥상 술상, 대학 보내고, 회사 살리고, 빚 막고, 냄비 때우고, 문구멍 때우며 살린 거란 걸 몰라서 쓰나 산 나고 사람 났듯이 말은 바로 해야지 하루갈이 이틀갈이 사흘갈이 이랑이랑 고삐 매고 코뚜레 씌워 갈아엎은 거름땅을 보면서도 딴소리여 뼛골 바쳐 갈쳐놨더니 지 잘난 줄 안다더니 꼭 그 짝이네 되새김질이라도 했길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뿔 빼고 굽 갈고 벌써 개가 됐을끼다
산이나 들에 누런 빛으로 보풀을 날리며 잠드는 겨울 얼럴럴 상사디여, 큰눈이 내려 내 서러운 가죽을 덮으면 다음해에는 대풍이 든다고 한 것도 그 흰 둥치 둥치마다 평화로웠던 사람들이 날 알아모셨던 까닭이지 지금같이 소끔이 내려갔느니 올라갔느니 저울질 안 해도 한눈에 부처님 모시듯 했지 그러니 나랏돈에 이황이나 이이보다는 쥔네 아니면 우리를 그려넣어도 될 일이제 머리 바쳐 살 바쳐 꼬리까지 바쳐 세운 줄 모르고 어디서 배부른 소리여
- 이종수, <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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