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오감(五感)을 살려라 2 / 이종수 (시인)
모든 감각기관은 쓰지 않으면 굳어버리기 마련이다. 기계적으로 살다 보면 바쁜 삶의 우선순위대로 감각을 쓰게 되기도 하여 그야말로 순차적으로 감각이 스러지기도 한다. 하나를 알면 열을 안다는 말처럼 어느 하나를 건드려주면 무한한 상상력과 직관으로 빛나던 것이 기계적인 사고관처럼 굳어버린 뒤에는 진정한 시를 쓸 수가 없게 된다.
새벽은 모과 냄새를 가지고 있다 세계가 박동할 때마다 핏줄 꿈틀거리게 하는 그것은 아침이 되려는 시간의 상큼한 발효 냄새 푸르름 배인 미명 속의 그 샛노란 향기를 도시 아이들은 이제 석유 냄새와 구별하지 못한다 멀리 초롱거리던 샛별이 흐릿하다 도시는 자꾸 시골로 들어가 새 도시를 만들고 나는 도시로 나와 자꾸 모과 냄새를 잃는다 신선한 새벽을 잃고 동트는 풍경을 잃는다 이제는 뼈가 쑤시고 머리가 아프다 그래, 모과 냄새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모과 냄새는 아침의 발원지 제 몫만큼 계속 샘솟아야 한다 제 몫만큼 계속 흘러가야 한다
- 배한봉, <모과 냄새>
‘새벽’ ‘푸르름’ ‘미명’ ‘아침’이란 다르면서도 한 몸에서 태어난 말은 모과 냄새에서 발원한다? 맞는 말인가? 어디까지나 그렇게 느낄 뿐이다. 그렇지만 그 느낌은 모과향을 낸 방향제와는 다르게 가슴 깊숙이 들어오는 오감을 말해준다. ‘상큼한 발효 냄새’이자 끝없이 ‘샘솟고’ ‘흘러가는’ 오감. 그 모과를 나무에서 따서 가슴 깊이 냄새를 맡고 누군가에게 맡아보라고 줄 때도 그대로 전달되는 그것은 단순한 냄새뿐만이 아니다. 모과가 온몸으로 나무와 살았던 모든 것이 전달되는 것이다. 뼈가 쑤시고 머리가 아프게 된 것은 ‘신선한 새벽’을 잃고, ‘동트는 풍경’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더 이상 ‘푸르름 배인 미명 속의 그 샛노란 향기’를 맡을 수 없게 되었고, 그 발원지가 어디인지, 제 몸과 마음에서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오감으로 말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어떤 영혼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붉은 절벽에서 스며나온 듯한 그들과
목소리는 바람결 같았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구름과 풀을 뜯고 있는 말, 모든 그림자가 유난히 길고 선명한 저녁이었다
그들은 붉은 절벽으로 돌아가며 곁에 선 나무에서 야생사과를 따주었다
새가 쪼아먹은 자리마다 개미들이 오글거리며 단물을 빨고 있었다
나는 개미들을 훑어내고 한입 베어물었다 달고 시고 쓰디쓴 야생사과를
그들이 사라진 수평선, 내 등 뒤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
바람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그들이 건네준 야생사과를 베어물었을 뿐인데
- 나희덕, <야생사과>
이것은 당도 100%의 문제가 아니다. 맛으로 느끼기 전에 향기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인가 사과나 포도를 먹으면서 본연의 향기보다 ‘달다’는 표현으로만 과일을 음미하고 평가해 온 것을 떠올려보라. ‘붉은 절벽에서 그들’과 나누는 ‘영혼의 얘기’를 이해할 수 있는가. 어쩌면 사과나 모과도 뼈가 쑤시고 머리가 아픈 끝에 ‘바람소리’와도 같은 깊은 숨결을 지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에게서도 우리는 그런 향기를 바란다. 생김새와 돈의 유무를 떠나서 그 사람 본연의 사람 냄새를 바란다. 그 말에는 우리가 여러 가지 이유로 잃어버린 것들이 켜켜히 쌓여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유기농당근 42%(미국산) 유기농오렌지과즙 25%(이탈리아산) 유기농사과즙 22%(터키산) 유기농토마토즙 8%(이탈리아산) 채소혼합즙 2%(국산) 레몬과즙 1%(이스라엘산)
유명한 가게에서 파는 유기농야채과일즙에 적힌 이 글을 어머니한테 읽어드렸습니다 한평생 농사지으며 살아오신 어머니는 단 한마디만 하셨습니다.
“지랄하네. 그걸 누가 믿노!”
- 사정홍, <단 한마디>
모과 냄새도 바로 그 ‘단 한마디’다. 친절하게도 유기농야채과일즙 함유량에 다국적 첨가물을 자랑해도 ‘한평생 농사지으며 살아오신’ 어머니에게는 믿을 수 없는 장난질에 불과한 것이다. 엑기스 시대, 미각만 살아있는 시대에 살고 있어서 흙, 바람, 햇빛, 비, 일이 만드는 오감을 잃어버린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늦은 저녁밥을 먹고 어제처럼 바닥에 등짝을 대고 누워 몸을 이리저리 뒤집었다
산굽이처럼 몸을 휘게 해 둥글게 말았다 똥을 누고 와 하던 대로 다시 누웠다
박처럼 매끈하고 따분했다 그러다 무심결에 창가에 무릎을 모으고 앉았다
천천히 목을 빼 들어 올렸다 풀벌레 소리가 왔다
가을의 설계자들이 왔다
저기서 이쪽으로, 내 귀뿌리에 누군가 풀벌레 소리를 확, 쏟아부었다
쏟아붓는 물에 나는 흥건하게 갇혀 아, 틈이 없다
밤이 깊어지자 나를 점점 세게 끌어당기더니 물긋물긋한 풀밭 깊숙한 데로 끌고 갔다
- 문태준, <가을 창가>
달걀 속에 붙은 막처럼 숨쉬는 ‘가을 창가’라 생각해 보자. ‘기관 없는 신체’라 부르는 아직 덜된 것이 여러 기관을 가진 생명체로 바뀔 수 있는 ‘막’과 ‘창’으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를 듣고 있는가? ‘가을의 전령사’에서 ‘가을의 설계자’로 진화한 풀벌레 소리를 어떻게 듣고 있는가, ‘저기서 이쪽으로, 내 귀뿌리에’ ‘확 쏟아부’은 것처럼 들었다 했다. ‘쏟아부은 물’에 ‘흥건하게 갇혀’ ‘물긋물긋한 풀밭’으로 끌려간다고 했다. 풀벌레 소리 말고는 시가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 만큼 ‘매끈하고 따분’한 무심결에 ‘가을의 설계자’들이 온몸을 일깨운 것이다. ‘귀구녕이 멕혔냐? 제발 귀 좀 밝게 열고 살아라’ 하고 말하는 듯 보인다.
모든 감각이 제대로 살아있어도 이렇다. 그러면 어느 하나를 잃고 나면 어떨까?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 않고 살아왔다
시력을 잃어버린 순간까지 두 눈동자를 굴렸다
눈동자는 쪼그라들어 가고 부딪히고 넘어질 때마다 두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는데
짓무른 손가락 끝에서 뜬금없이 열리는 눈동자
그즈음 나는 확인하지 않아도 믿는 여유를 배웠다
스치기만 하여도 환해지는 열 개의 눈동자를 떴다.
- 손병걸,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점차 시력을 잃어버리게 된 시인은 우리와 똑같이 ‘직접 보지 않으면/믿지 않고 살아왔다’고 한다. 오감이 만들어내는 상상력이나 이해력 모두를 생각해 보자. ‘스치기만 하여도 환해지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갖게 되기까지 얼마나 괴롭고 아팠을까? 이것은 모두 ‘직접 보지 않으면/믿지 않고 살아’온 탓이다.
저수지 둑길을 걷는데 사람들이 던지는 돌멩이에 고인 물 일어나는 소리 천 년의 잠을 깨는 것 같아서 화들짝 귀가 열렸다
가던 걸음 멈추고 몸을 낮추니 이름 모를 풀잎들 날갯짓 소리 출근길 와글와글 풀벌레 소리 시퍼렇게 살아 있다
더는 흐를 수 없는 물일지라도 아래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끝내는 푸른 몸으로 일어나는 것이어서 제 아무리 하찮은 목숨일지라도 그 만큼의 소리를 지니고 있었구나!
내 몸을 관통한 소리 따라 스르르 일어서는 바람 캄캄한 길 뒤틀린 관절 유쾌한 소리로 일어설 수 있으려니 어둠 속 풀 한 포기라도 괜찮겠다
- 손병걸, <소리를 보다>
위에 보기로 든 시들이 만나는 합수머리 같지 않은가. ‘내 몸을 관통한 소리’는 ‘푸르름 배인 미명 속의 그 샛노란 향기’이자 포박하듯 시인을 끌고 가는 ‘풀벌레 소리’이자 ‘영혼의 얘기’를 담은 ‘야생사과’ 이지 않은가. ‘제 아무리 하찮은 목숨일지라도/그 만큼의 소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아침이 되려는/ 시간의 상큼한 발효냄새’를 알게 되면서 뼈가 쑤시고 머리가 아픈 내 몸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단순한 감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시들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1. 아버진 늘 흥얼거리셨다 다방서 놀다 오시거나 내 손 잡고 유달산 오를 적이나 가사 없는 노랠 입에 달고 다니셨다 기나긴 서해 길 소금 가득 싣고 떠난 배가 바람만 싣고 돌아왔다 아버지 와이셔츠엔 몇 날 며칠 화투판에서 묻어왔음직한 누런 담뱃진이 배어 있었을까 먼 길 돌아와 납작 날 업고 뱅뱅 도는 아비 등에서 곡조가 퍼지면 내 뱃속이 화답했다 몇 알갱이 소금 같은 것이 짠하게 녹아내리는 등짝 나는 아마도 흰소리를 허공중으로 늘어뜨리는 누에의 더운 입김을 보았을 것이다
2. 애인도 같고 붓다도 같은 젊을 적 아버지가 부쩍 자주 찾아오신다 그럴 제면 잊혀진 흐미 소리 비슷한 게 들린다 하나의 노래에 두 가지 음정이 섞여 나온다는 광활한 몽골 초원의 노래가 내 속에서도 울려 퍼진다 세상구멍이란 구멍 다 열어 젖혀 바람은 온갖 소리를 빚어내고 땅 밑까지 길을 낸 뿌리, 단단한 음계를 딛고 풀들이 쑥쑥 자라나고 대지의 목숨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장아장 들어가 기울이면 죽은 뼈와 산 살이 화답하는 소리 하늘과 땅과 내통하는 소리 서로 다른 방향에서 와서 하나가 된다 군홧발 소리 몽둥이 소리 쫓겨가는 소리 배고픈 소리 괜찮다 괜찮다 쓰러진 짐승들 일으켜 세우는 소리 내 안에 숨어 사는 유령들이 이 구멍 저 구멍서 튀어나온다 -아버지 얼마나 집어 삼킨 걸까요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요 -흐이미, 그렇게 많어? 울 애기 혼자서도 외롭지 않것네 -흐미, 내 입에서 밀려 나오는 하얀 실타래 -흐이미, 지 바깥 것들 데불고 하늘을 부르지 -흐미, 제 안엣 것들 토해내며 땅을 부르지
3. 이제 아버지 없이도 나는 두 개의 곡조를 부를 줄 안다 부재가 노래를 완성했다 이제 사랑 없이도 사랑과 놀 줄 안다
- 김해자, <흐미>
‘세상 구멍이란 구멍 다 열어 젖혀 바람은 온갖 소리를 빚어내’는 것을 안 뒤로, 아버지의 부재 뒤에, ‘안엣 것들’과 바깥 것들‘이 내는 것들을 불러 모아 사랑과 놀 줄 알게 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대지의 목숨들이 쏟아져 나오고’ ‘죽은 뼈와 산 살이 화답하는 소리’야말로 ‘하나의 노래에 두 가지 음정이 섞어 나온다’는 ‘광활’함이자 ‘하늘과 땅이 내통하는 소리’인 것을 안다는 것은 쓰러지고 쫓겨가고 배고픈 소리들까지 사랑하게 된 시인이란 직업? 의식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흐미’는 [khoomei흐미, 후미, Х??мей회메이, Чуми추미]란 말로 원래(原來) 몽골의 투바 공화국 전통 음악의 일종인 목 노래다. ‘흐미’창법(Overtone singing, 배음창법(倍音唱法))이라고도 하는데 ‘위~’를 기본으로 하는 노래(아래윗니를 붙이기도 하고 떼고도 부르는데 혀 끝은 아랫니에 대고도 혀 중간 부분은 입천장에 거의 닿으므로 두 가지 음이 동시에 나게 된다는 것)가 몽골 초원의 하늘과 땅이 내통하는 소리인 것이다. 아울러 짠하게 녹아내리는 아버지가 먼 길 돌아와 가사 없는 노래처럼 ‘흐미’ 하고 내던 사투리이자 곡조인 것이다. 오감을 다 불러내어 말하지 않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임을 시인은 서로 다른 시로 묻는 것이다. ‘사랑 없이도/사랑과 놀 줄’ 알아야 한다고. ‘사랑’과 논다는 것은 바로 굼뜨고 아프기만 한 내 몸이 뀌뚫리는 일을 겪은 다음에야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사내는 이미 새의 종족, 지리산 아래 섬진강 가 여기 저기 세 들어 산 지 오래되었다. 지금은 경상남도 하동 땅 덕은리 언덕, 맹지(盲地 ) 위의 前 폐가에서 산다. 일부러 저 먼 강 건너편에서 이쪽을 건너다보고 점찍었다는 언덕마루, 이 눈 먼 땅에다 저의 눈을 두기로 한 것. 새가 둥지 틀 데를 고를 때 흔히 하는 객관식이다. 역시 섬진강의 필법이 잘 내려다보이는 물마루, 시퍼런 물굽이와 새하얀 모래톱이 서로 부드럽게 껴안으며 태극 문양을 이루는데, 저기 새들이 자주 논다, 놀거나 말거나 이 마루에선 자잘한 새 발자국들 전혀 보이지 않아 백사장은 늘 깨끗하고 물은 계속 새 것이다. 그는, 강물을 찍어 백사장에다 쓴다. 무리를 버린 새, 무리의 울음을 좇아 오토바이를 타고 날아가는 촌철의 사내가 있다.
- 문인수, <새들의 흰 이면지에 쓰다-시인 이원규의 집, ‘물마루’>
‘단 한마디’가 ‘촌철’인 셈이다. 어쩌면 남들에게는 애먼짓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는 촌철의 사내는 왜 집 이름을 ‘물마루’라고 지었을까? ‘흐미’에서처럼 자신의 숙명을 아는 것일까? 세 들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어느 집에 고집하고 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의 집을 찾은 시인은 한눈에도 ‘저 먼 강 건너편에서 이쪽을 건너다보고 점찍었다는’ ‘물마루’를 알아본 것이다. 새들의 ‘흰 이면지’이자 ‘둥지’에 사는, 시인의 아주 쉬운 객관식 문제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끝없이 샘솟고, 흘러가는 섬진강의 ‘필법’이라는 또 하나의 위대한 시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촌철’의 시이자 ‘촌철’의 삶을 ‘흐미’창법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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