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한 삶2-9. 대박 말고 완판
50대인 나에게 휠라는 지나간 올드 브랜드이다. 그러나 지금 중고등 학생들은 그 사실을 들으면 깜짝 놀란다. 그들이 가장 열광하는 소외 가장 ‘힙’하고 ‘핫’한 최신 패션 브랜드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추억 속 한물 간 브랜드를 이 시대에 가장 잘 나가는 브랜드로, 부활을 이끌어 낸 촉매제가 있다고 해서 궁금한 마음에 한 번 나도 사 보았다. 주인공의 이름은 ‘메로나 슬리퍼’였다.
휠라와 빙그레의 콜라보레이션으로 출시된 슬리퍼였다. 식품과 패션의 협업은 좀 생경스러운데 제품을 받아 보니 묘하게 잘 어울린다. 말 그대로 푸르딩딩한 메로나 색깔의 길쭉한 슬리퍼다. 3000족 정도의 한정판으로 출시했는데 눈 깜짝 할 사이에 완판되는 바람에 사고 싶어도 못 산 고객들이 구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실제로 여중생 30명이 공부하는 교실에서 보여 주면 세 명은 눈이 뒤집어져서 그날로 삼디다스와 이별을 구한다. 물론 나머지 27명은 관심조차 없다. 단지 10%만 좋아하는 물건이라니 실패한 제품이라고 봐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지 않다. 적은 수의 고객이 좋아하는 물건을 적게 만들어 이윤을 남기면 되니까. 휠라의 체질 개선은 이 흐름을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실 팬데믹 이전부터 시작된 흐름이다. 지금의 젊은 시대는 새롭고 특이한 아이템에 목말라 있다. 전 국민의 90%가 알고 있고 갖고 있는 대박 제품에는 딱히 관심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스마트폰을 접했으며 인터넷을 공기처럼 느껴 온 세대다. 이들은 SNS를 통해 나와 코드가 맞는 소수의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함께 호들갑 떨 수 있는 공동체가 된다. 코드가 맞는 작은 ‘우리’와 친해지면 가까운 곳에 있는 큰 ‘우리’에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들은 400번 휘저어 달고나 커피를 만들어 먹는다. 모든 사람이 다 그 고생을 할 필요는 없지만 단 걸 좋아하면 힘들어도 한다. 랜선으로 응원하며 즐거워해 줄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요즘 잘 나가는 기업들은 젊은 세대들이 요구하는 바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다. 진주햄, 백설 같은 올드 식품 브랜드 로고부터 유튜브에서 시작된 캐릭터까지,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마켓에서는 이색 굿즈들이 눈에 띈다. ‘덕질’하기 좋은 아이템들은 주로 적은 수량으로 만들어져 온라인에서 판매되니 유통 상에서 발생하는 리스크 또한 최소화한 셈이다. 그 안에 스토리텔링까지 들어 있으면 금상첨화다.
이런 제품도 눈에 띈다. 미국 테네시 대학의 티셔츠다. 플로리다에 위치한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가고 싶은 대학의 티셔츠를 사 입고 오라는 과제를 내 주었다고 한다. 하버드나 스탠퍼드, 예일과 같은 미국의 유명 대학교들은 로고를 브랜드화한 상품을 만들어 판다. 그 초등학교 근처 마트에서도 우리 돈 4~5천 원 정도의 가격으로 팔고 있었으니 크게 부담스러운 과제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릴 적부터 테네시 미식축구 팀의 광팬이었던 한 소년은 가난한 형편 때문에 그 5천 원짜리 티셔츠조차 사 입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소년은 갖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비슷한 색깔의 티셔츠를 꺼내어 손수 종이에 그린 로고를 붙여서 갔다. 걱정할 엄마를 위해 직접 그림을 그려 입다니,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한가.
그러나 야속하게도 다음 날 아이의 티셔츠는 철없는 반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어 버린다.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를 보며 속상했던 선생님은 기지를 발휘했다. 바로 테네시 대학에 직접 전화하여 아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이다. 테네시 대학 측도 이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더니, 아이가 만든 티셔츠를 직접 공수해 갔다. 얼마 후, 아이의 손글씨와 똑같은 모양의 로고가 박힌 티셔츠가 판매되기 시작한다. 티셔츠에 담긴 스토리도 함께 퍼져나가 4만 장 모두 순식간에 완판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것을 소비하고 싶어하는지, 영리한 선생님과 테네시 대학 모두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상품의 가격과 성능만 보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상품,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이미지와 스토리텔링을 원한다. want와 like가 만나는 그 지점에 신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때는 사람들이 명품 브랜드의 가방을 메고 있으면 빚을 내서라도, 아니 짝퉁을 사서라도, 똑같은 걸 들고 나가던 때가 있었다. 판에 박힌 듯 똑같은 디자인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그룹 내 지위를 확인하던 시대도 있었다. 기업들은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대박상품을 만들기 위해 혈안이었고 똑같은 설계도로 수백만 개를 찍어 낼 수 있는 제품만이 이익을 낸다고 인정받았다.
그러나 지금의 흐름은 기존의 현상들을 비웃는 것만 같다. ‘당신 빼고 다 샀어’나 ‘70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제품입니다’와 같은 말들은 더 이상 자극이 되지 않는다. 나는 기업에 강의를 나갈 때마다 이제 ‘대박이 아닌 완판’의 시대라고 말한다. 완판을 좀 풀어 쓰자면 ‘다품종 소량 생산’쯤 되겠다. 물론 타깃은 좁아지고 고객 수는 적어진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좋아할 제품을 만들면 실패하지 않는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기술로 소비자의 요구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고 3D 프린팅 기술로 적은 수량도 크지 않은 비용으로 생산 가능하지 않은가.
비대면 시대에는 젊은 층뿐 아니라 기성세대도 변화한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want뿐 아니라 like도 소중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이다. 좋아하는 것도, 원하는 것도 더욱 정교해지고 구체화될 테니까.
이제 사람들은 문화적 체험을 통해 기쁨을 찾고 want와 like가 적절히 맞물리는 지점에서 지갑을 열 것이다. 그렇게 점차 효율적이고 적정한 삶을 즐기는 시대가 올 것이다. 만족감이 스마트해지는 사회, 개인이 중요해지는 사회, 2020년 전 세계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가르침이 아닐까.
*위 글은 고려대학교 심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교에 심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인지심리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아트 마크먼 교수의 지도하에 인간의 판단, 의사결정, 문제해결 그리고 창의성에 관해 연구하였고, 현재는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면서 아주대학교 창의력연구센터장을 지냈고 게임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으면서 대학교 각종 교육기관, 기업에서 왕성하게 강연하고 있고, ‘어쩌다 어른’, ‘세바시’, ‘책 읽어 드립니다’, ‘나의 첫 사회생활’ 등 다수의 프로그램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게 있는 “김경일”교수의 저서 ‘적정한 삶’ 제2장 ‘비대면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들’ 중 일부를 옮겨본 것입니다. 그 외 저자의 저서로는 “지혜의 심리학”, “이끌지 말고 따르게 하라”, “어쩌면 우리가 거꾸로 해왔던 것들”, “십 대를 위한 공부사전” 등이 있고, 역서로는 “혁신의 도구”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