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인혼(人魂)을 잡는 귀조(鬼爪)
수십 명의 귀영(?影)들이 번쩍거리며 동시에 쳐들어 왔다.
맨 앞에 앞장 선 두 인영은 일련의 괴이한 웃음을 동반하며 쏜살같이
회랑으로 덮쳐 왔다. 그들은 안면에 조차 인광이 가득해 반짝 반짝
빛났기에 진면목을 전혀 볼 수 없었다. 그들의 길게 풀어헤친 머리가
바람에 춤추듯 휘날렸다. 어두컴컴한 이곳에서는 정녕 진짜 귀신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손에는 인광이 번쩍거리는 짧은 갈퀴가 있었다. 그
갈퀴 끝은 번쩍거렸고 갈퀴 고리는 '띵띵'하는 소리를 냈는데 그 역시
사람의 혼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다른 한 사람의 수중에는 검이 있었는데 이 갈퀴와 검의 길이는 한 척도
채 안 됐다.
이 '유령군귀'들이 이토록 짧은 병기들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니 그들이
매우 괴이한 초식의 무공을 지녔으며 매우 위험천만한 초식임에는
분명했다.
갈퀴고리가 울리는 소리와 함께 갈퀴가 허공을 가로지르면서 쾌락왕을
찔러갔다.
심랑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대왕께서는 편안히 앉아 계십시오."
손을 휘젓자 그 '유령벽귀(幽靈??)'는 비명을 지르면서 떨어져 나갔지만
벽린검이 이미 심랑의 귓가에 와 닿았다. 심랑이 곧 젓가락을 내밀어 그
검을 잡았다.
그 '유령벽귀'는 가지고 있는 힘을 다 썼지만 그래도 검을 빼낼 수가
없었다.
심랑이 기분좋게 말했다.
"게 맛이 일품인데 귀하께서도 맛을 보시겠소?"
그는 왼손으로 큰 게 한 마리를 집어서 번개같이 빠른 속도로 이 가짜
귀신의 코를 집었다. 비명소리와 함께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뒹굴다가 간신히 일어서서 날아가듯 달아났다.
심랑은 젓가락으로 아직도 검을 잡고 있었는데 다시 중얼거렸다.
"유령의 물건은 싫으니 도로 너희들에게 돌려주마!"
말과 동시에 젓가락을 떨치자 벽린검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날아갔다.
마침 '유령군귀' 중에 하나가 덮쳐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벽광(?光)이 눈
앞에 나타나자 혼비백산하여 몸을 뒤로 곧바로 제꼈다. 그러나 벽린검은
그대로 그의 어깨를 관통했다.
순식간에 심랑은 손쉽게 세 명을 물리쳤다. 유령문의 위험천만한 신법과
초식은 심랑에게는 마치 어린애 장난이나 같았다.
'유령군귀'들은 비록 회랑 주위를 난무하며 귀소를 흘렸지만 감히 덤비는
자가 없었으며 그들의 귀소조차 떨고 있는 듯했다.
쾌락왕은 뚫어질 듯이 심랑을 주시하더니 찬사를 흘렸다.
"좋았어 ! 정말 좋았어 !"
"대왕께서는 과찬의 말씀입니다."
"하, 하, 그대는 원래 본왕의 목숨을 취하려고 왔었는데 지금은 몇 번이나
본왕을 위해 출수를 했소. 또 그대는 도처에서 본왕을 헐뜯고 욕하더니
지금은 이토록 공손한 태도......"
그는 안색을 굳히며 매섭게 다그쳤다.
"그대는 도대체 뭘 노리는 것이지?"
"대왕께서는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하, 하!"
"그대가 대체 어떤 음모를 꾸미는지 본왕은 직접 듣고 싶군."
"음모는 없습니다. 단지......"
갑자기 다섯 인영이 동시에 덮쳐왔다.
칼, 갈퀴, 검, 쇠망치, 채찍 등 벽광이 번쩍이는 다섯 개의 병기가
전후좌우에서 심랑을 향해 일제히 공격해왔다. 그들의 초식은 기괴할 뿐만
아니라 매우 악랄했다.
독고상은 여전히 심랑의 뒤에 서있었지만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심랑은 긴 소매를 펼쳐 벽린검을 막았다. 칼을 사용하던 사람은 그의 힘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검을 쓰는 자에게 부딪쳐 갔다. 두사람은 함께
넘어졌다.
갈퀴를 사용하는 사람은 곧장 심랑의 눈을 향해 찔러갔다. 그러나 갑자기
'땅'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갈퀴는 술잔에 끼워졌다. 입에는 어느새 작은
접시가 집어 넣어졌고 몸도 '펑'하면서 생선을 담는 큰 접시 위에
쓰러졌다. 심랑은 웃으면서 젓가락으로 그의 머리를 찍었다.
"대왕께서는 이 활어(活魚)의 맛이 어떤지 보시지요?"
쇠망치를 사용하던 자는 이 광경을 보고는 잠시 멈칫하더니 미친 듯이
망치로 심랑의 머리를 치려했다. 심랑은 어느 새 삼 척이나 옆으로 비켜나
있었다.
결국 그의 일격은 채찍에 가해졌다. '칙'하는 소리와 동시에 망치도,
채찍도 땅에 떨어졌으며 두 사람은 늑골이 마비되면서 쓰러졌다.
심랑은 거수투족(擧手投足)지간에 또 다시 다섯 명을 쓰러뜨린 것이다.
이 수법은 매우 간단한 것처럼 보였지만 노리는 부분과 공격의 신속도,
정확도는 더이상 절묘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바로 심랑 무공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쾌락왕은 차갑게 물었다.
"그대가 그렇게 힘들여 싸우는 것은 바로 본왕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오?"
검을 쓰는 자는 다시 일어나 일 검을 찔러왔다. 심랑이 웃으며 대답했다.
"바로 대왕께 보여드리려는 것입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검을 쓰는 자의 머리를 큰 접시로 눌러 버렸다. 이제
탁자 위에는 활어 뿐만 아니라 '생 새우'도 추가됐다.
'유령군귀'는 더욱 초조해지자 난무했고 휘파람소리도 더욱 매서워졌지만
점점 멀어져 갔다, 그들은 이 같은 절세의 무공을 단 한 번이라도 본
적조차 없었던 것이다.
심랑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새들이 좋은 나무를 선택해서 안주(安住)하듯이 사람도 좋은 주인을 찾아
섬기려 합니다. 저도 강호를 유랑하면서 큰 사업을 창출하려 했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너무 빈약했지요. 대왕께서 저의 뜻을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쾌락왕의 눈빛이 빛났다.
"그대는 내게 의지하려고 왔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심랑이 손을 놓자 그에게 눌렸던 두 사람은 곧 꽁무니 빠지게 도망갔다.
쾌락왕은 온 정신을 심랑에게만 집중할 뿐 다른 사람은 전혀 개의치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대는 과거에......"
"강호를 유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그의 주인을 위해 일하는 것이 당연하듯,
뜻이 맞으면 합치고 뜻이 다르면 헤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제가
비록 과거에 인의장을 위해 일했지만 지금은 옛날과 사정이 다릅니다."
"지금 그대의 뜻은 어떤가?"
심랑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인의장은 이미 너무 노쇠하여 더이상 저처럼 야망이 있는 사람이 머무를
곳이 아닙니다. 현 정세에서 인의장 외에 과연 또 누가 저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는 오만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과연 그 누가 나 심랑을 받아들일 자격이 있을까요?"
쾌락왕이 통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본왕 뿐이지."
"바로 그렇습니다. 옛 한왕이 한신을 받아들였 듯, 대왕께서도 저를 못
받아 들일 이유가 없죠."
쾌락왕은 갑자기 웃음을 멈추었다. 그의 안면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대갈일성했다.
"심랑, 정말로 그럴 마음이 있는가?"
"그럴 마음이 없다면 뭣하러 이곳에 왔겠습니까?"
쾌락왕은 그를 뚫어질 듯이 한참 동안 주시했다.
심랑도 역시 그를 주시했다.
두 사람의 눈길 속에 점차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독고상이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이 자는 속마음을 예측할 수 없으니 절대 그냥 놔두시면 안 됩니다."
쾌락왕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나무랐다.
"꺼져라!"
독고상의 몸이 한 차례 떨리더니 안색이 크게 변했다. 이 '꺼져라!'하는
소리는 지금까지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었다. 손발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는 조용히 물러갔다.
쾌락왕은 그를 본 척도 안했다.
"심랑아! 심랑아! 그대가 진심으로 그럴 의사가 있다면 그것은 그대의
행운일 뿐만 아니라 나의 복이기도 하지. 본왕도 그대의 도움을 얻는다면
마치 호랑이가 날개를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거요."
"감사합니다."
돌연 쾌락왕이 매섭게 말했다.
"하지만 거짓이라면......"
이때 갑자기 멀리서 괴이한 휘파람소리가 들려왔다.
괴이한 웃음으로 난무하던 '유령군귀들이 갑자기 날뛰면서 휘파람소리와
함께 가버리자 하늘 가득 떠돌던 도깨비불도 간데없이 사라졌다.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조금 전만해도 음산하고 괴이했던 지옥이 일순간
아름답고 조용한 정원으로 돌아왔다.
달빛은 다시 대지를 감싸고 산들바람이 불어와 나무 그림자를 흔들었다.
만약 심랑에게 혈도를 찍힌 벽의인이 그곳에 쓰러져 있지 않았다면 방금
일어났던 일들이 단지 악몽이었던가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심랑이 웃으며 말했다.
"이 자들은 오는 속도도 빨랐지만 사라지는 것도 매우 빠르군요."
"방금 온 자들은 단지 '유령문'의 보잘 것 없는 유령들일 뿐, 이곳의
허실을 염탐하러 보내진 자들이지. 진짜 무서운 자들은 이제 곧 도착할
것이네."
"'유령여귀'의 소문을 들었는데 대단하더군요."
"하, 하, 그녀가 비록 하늘을 통하는 재주가 있다해도 그대와 내가 이곳에
있는 한 그녀도 어쩔 수는 없을 것이네."
쾌락왕 같은 인물에게 이만큼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심랑 스스로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내심 매우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을 금치 못했으나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제 의사의 진위여부를 이제는 이이겠습니까?"
쾌락왕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대의 진의가 무엇인지 본왕은 더이상 개의치 않네. 단지 그대 같은
인재를 얻기 위해서라면 본왕은 한 번쯤 모험을 해보고 싶은 걸세."
"감사합니다."
"듣자하니 중원 무림에 왕련화라는 대단한 인물이 있다는 말을 들었네."
심랑이 탄식을 하며 말했다.
"그 자의 간교하고 악랄한 심계와 수단은 당금천하에서 비교할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특히 그의 행적은 신비하고 괴이하여 종적을 찾을 수가
없지요. 또 역용술이 뛰어나 더더욱 막기가 힘든 인물입니다."
"그대를 그와 비교하면 어떤가?"
"그와 제가 생사결투를 한다해도 누가 이길 지는 미지수입니다."
쾌락왕은 안면을 실룩거렸다.
"아! 뜻밖에도 강호에 자네 말고도 그런 실력을 지닌 청년이 있다니......
그의 내력은 어떠한가? 무공은 누가 전수했나?"
"그것은......"
심랑은 말하다 말고 갑자기 웃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현 강호에서 가장 신비한 내력을 지닌 세 사람이 있는데 누군지
아십니까?"
"모르네."
"하나는 심랑이고 또 하나는 왕련화입니다."
"그럼 나머지 하나는?"
"나머지 한 사람은 바로 대왕이십니다."
쾌락왕은 한껏 소리내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맞아, 과연 옳은 말이군. 나와 그대의 내력은 강호의 그 누구도 모르지.
아, 나와 그대 외에도 왕련화가 있었군."
그는 한참이 지나자 다시 말을 꺼냈다.
"그대들이 서로 적인 것이 다행이군. 그렇지 않고 그대 둘이 서로 손을
잡는다면 본왕은 아마도 멀리 숨어야 할 걸세. 그대들이 천하를 호령하는
것만 도리없이 먼 발치서 구경하면서 말이지. 하, 하!"
"하, 하, 그가 대왕에게 몸담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대왕도 이
심랑을 그냥 놔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그 '유령여귀'의 내력이 뭣인지 궁금하군. 그녀의 나이 또한 결코
많지 않을 텐데. 본왕은 그녀가 어떻게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어
이런 유령들을 통솔할 수 있는지 보고 싶다오."
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곧 눈길을 먼 곳에 고정시켰다.
"대왕께서 기다리실 필요도 없이 그녀는 이미 도착했슴니다."
어두운 정원에 갑자기 등불이 나타났다.
백사(白紗)를 몸에 걸치고 탐스러운 귀밑머리를 높이 틀어올린 열여섯
명의 소녀들이 궁등(宮燈)을 들고 달빛 가득한 정원을 지나 아리따운
자태로 걸어왔다.
그들의 걸음걸이는 사뿐했으며 자태 또한 매우 우아했다. 몸에 단
장신구들이 바람으로 인해 맑은 소리를 자아냈고 가벼운 옷감은 바람
속에서 휘날렸다. 그들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듯했다.
조금 전에 왔던 자들이 지옥의 악마들이었다면 지금은 천상의 선녀들이 온
것이다. 이 얼마나 큰 변화인가! 이 또한 얼마나 기분 좋은 변화인가?
쾌락왕은 그 아름다운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유령문의 인물들이 다 이렇듯 아름다운 소녀들이라면 본왕은 언제라도
환영이오."
열여섯 개의 분홍색 궁등은 붉은 불빛을 발했다.
강철처럼 단단한 윗몸을 내놓은 팔 척 대한(大漢) 두 명이 가마를 들고
궁등사이를 걸어왔다. 두 대한은 일곱 색의 비단 바지를 입고 머리에는
진주로 장식한 일곱 색깔의 높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심랑이 말을 꺼냈다.
"저 가마 안에는 필시 유령여귀가 있을 듯합니다. 과연 기세가
대단하군요."
"그녀의 간도 작지는 않지."
열여섯 명의 소녀들은 가까이 와서 절을 하고는 곧 한 일자로 섰다.
두 명의 대한이 걸음을 멈추자 가마 뒤에 있던 궁장을 한 소녀가
종종걸음으로 나섰다. 그 소녀는 가마의 휘장을 열고 절을 하면서 말했다.
"궁주께서는 부디 가마에서 내리시죠."
가마 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쾌락왕은 이곳에 있느냐?"
심랑은 이 '유령문' 장문인의 목소리가 필시 음산하면서도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괴이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목소리는 아름다고
매혹적인 것이 가히 뇌살적이었다.
그는 여전히 아무런 내색도 않고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쾌락왕도 역시 가만히 사태만 관망했다.
궁장소녀가 답했다.
"쾌락왕은 이곳에 있습니다."
"그는 어째서 본 궁주를 영접하러 나오지 않았느냐?"
궁장 소녀가 눈동자를 반짝이더니 간드러지게 웃었다.
"아마 술에 취했나 봅니다."
"술에 취한 자는 본 척도 않는 것이 상책이다. 돌아가자. 그가 깬 후에
다시 와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네!"
이렇게 되자 쾌락왕은 더이상 관망할 수만은 없었다.
"이왕 왔으니 그대로 남는 것이 좋을 걸?"
가마 안의 사람이 대꾸했다.
"이제 보니 취하지 않았군."
"본왕은 한 말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취하지 않았다면 어찌하여 나를 영접하러 나오지 않았느냐?" 쾌락왕은
한껏 소리내어 크게 웃었다.
"어린 계집애가 감히 본왕으로 하여금 영접을 나오라고 하다니, 수명이
짧아질까 두렵지 앓느냐?"
"난 일파의 장문인이야. 그대가 영접 나온다고 해서 그대 신분에 손상이
가지는 않을 텐데?"
궁장 소녀가 맞장구쳤다.
"그렇고 말고요. 어떤 사람은 우리 궁주를 영접할 자격조차도 없죠."
쾌락왕이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궁주이고 난 대왕이다. 세상에 대왕이 궁주를 영접하는 경우가
어디 있나?"
궁장 소녀가 까르륵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당신의 그 대왕은 가짜니까요."
쾌락왕은 자신을 가짜라고 하는 궁장 소녀의 말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럼 너의 그 궁주는 진짜란 말이냐?"
가마 안에서 갑자기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난 또
쾌락왕이란 자가 매우 음산하고 냉혹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주
재미있는 분이었군요, 대왕과 궁주 모두가 가짜이니 궁주가 당연히 대왕을
알현해야겠죠."
심랑은 이 말소리가 너무도 귀에 익었다. 하지만 누구인지는 도대체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만약 유령여귀가 그와 말을 나눈 적이 있었다면
이토록 부드럽고 고운 음성을 절대로 잘못 듣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령궁주는 웃음소리와 함께 가마에서 내렸는데 과연 소녀였다. 그것도
절색이었으며 그녀의 몸에서는 추호의 귀기(?氣)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선녀와 같았던 것이다. 그녀는 몸에 비록 겹겹이 가볍고 얇은
사의(紗衣)를 걸쳤지만 오히려 그녀의 자태를 더욱 곱고 맵시를 돋보이게
했다. 그리고 얼굴은 비록 얇은 사(紗)로 가려 놓았으나 그녀의 진면목을
볼 필요도 없이 용모는 가히 천하절색임이 분명했다.
바람이 불자 몸에 걸친 옷들이 팔락였다.
그녀의 몸은 마치 바람에 쓰러질 듯, 궁장 소녀의 어깨를 잡고 사뿐사뿐
걷는 모습이 흡사 구름 위를 거니는 듯했다.
쾌락왕의 눈에 갑자기 횃불 같은 빛이 스쳤다.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녀가 귀신임을 불쌍히 여겨......"
심랑이 웃으며 맞받아쳤다.
"꽃을 꺾지 말지어다."
쾌락왕은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탁 치더니 긴 웃음을 터뜨렸다.
"절묘하군. 수십 년 동안 찾았는데 그대가 바로 나의 지기(知己)였어."
유령궁주는 사뿐한 걸음으로 회랑에 들어서서는 곧장 어지러진 접시들로
난장판이 된 긴 탁자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는 술잔을 들고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무지하고 속된 자가 대왕의 흥취를 깼으니 천첩이 사죄를 하겠습니다."
"그렇지. 그건 마땅히 사죄해야지."
유령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대왕께서는 너무 심한 벌을 내리지 마시옵소서. 소녀는 정말
견디기가 어렵사옵니다."
그녀의 표정은 너무도 가련해서 동정을 금치 못하게 했는데 가히
뇌살적이었다.
"하, 하, 하, 본왕이 어찌 너를 심하게 벌 줄 수 있겠느냐. 그녀에게 어떤
벌을 줄까?"
끝의 말은 물론 심랑에게 한 것이었다.
"대왕께 술 석 잔을 따르는 벌을 주시죠."
쾌락왕은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
"이 같은 미녀가 술을 따라주다니, 본왕은 마시기도 전에 이미 취했네."
유령궁주는 은주전자를 들어 술을 따랐다.
"대왕께서 만약 천첩의 손이 더럽다고 생각지 않으신다면 이 한 잔의 술을
받아 주시지요."
불빛 아래 그녀의 섬섬옥수는 마치 백설처럼 희고 부드럽게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눈이 말을 한다지만 그녀는 손조차도 말을 하는 듯했다.
그녀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아예 남에게 괴롭힘을 당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누구든지 그녀를 보면 가련하게 느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잔혹하게
그녀를 정복하고 싶은 충동이 들어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의 양손은 마치 가련하게 여겨달라고 애원하는 듯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치 자신을 짓밟아 달라고 청하는 듯했다.
쾌락왕은 이미 혼이 날아간 사람 같았다.
"너의 양손이 더럽다고 한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손은 다 잘라버려야
할 것이다."
술잔을 받자 쾌락왕의 뒤에서 손이 하나 나오면서 술에다 한 방울의
이름모를 약물을 떨어 뜨렸다.
약물이 술에 떨어졌지만 전혀 반응이 없었다. 술에는 독이 없는 것이다.
유령궁주가 탄복했다.
"대왕의 부하는 정말로 세심하군요. 단지......"
"단지 소인의 좁은 소견으로 군자의 넓은 마음을 가늠했다는 건가?"
그는 머리를 쳐들고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본왕도 벌로서 그대에게 술을 한 잔 따르지."
그는 그 술잔에다 술을 따른 후 유령궁주의 손에 건냈다.
유령궁주는 술잔을 받고는 은근한 웃음소리와 함께 말했다.
"천첩은 몸이 허약해서 술기운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 술도 대왕께서 저를
대신해서 마셔 주시지요?"
"미녀를 대신해서 술을 마신다는 것은 본왕도 환영하는 바이지만 적어도
그대는 한 모금이라도 마셔야 되겠지."
유령궁주는 고개를 떨구었는데 마치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는 듯했다.
얼굴을 가린 면사를 살짝 들고 가볍게 한 모금을 마신 후 양손으로 술잔을
들어 쾌락왕의 면전으로 보냈다.
"대왕, 당...... 당신...... 당신은 정녕 천첩이 더럽다고 생각지
않나요?"
말소리가 떨리는 것이 마치 부끄러움을 못 이기는 듯 했다.
쾌락왕은 희색이 만면했다. 마치 각은 새처럼 아름답게 앉아 있는 이
여가가 바로 강호 사람들이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 하는 '유령문'의
장문인임을 잊은 듯 했다.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크게 웃었다.
"세상 모든 가인(佳人)들의 침이 전부 맛있는 술로 화해서 본왕이 일일이
맛을 다 볼 수 있도록 하고 싶구나."
술잔을 받아 들고는 막 마시려는 찰나에 갑자기 한 손이 나와 술잔을
눌렀다.
"이 술은 마실 수 없습니다."
쾌락왕은 눈빛을 빛내면서 느긋하게 물었다.
"자네도 이 술을 마시고 싶다 이건가? 좋아, 본왕이 자네에게 양보하지."
심랑은 술잔을 받아 들었다.
"저도 이 술을 마실 복이 없나 봅니다."
그가 술을 땅바닥에 쏟자 곧 술이 튀기면서 연기로 화했다.
유령궁주가 놀랐다는 듯 소리쳤다,
"어머...... 술에 독이 있군요."
심랑이 말했다.
"술에 독이 있었다는 것을 설마 궁주께서 모르지는 않겠죠?"
유령궁주가 부드럽게 대꾸했다.
"술은 대왕께서 손수 따르신건데 천첩이 어찌 알겠어요?"
"바로 대왕께서 손수 따랐기 때문에 궁주께서 독을 넣었어도 남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겠지요."
"제가...... 제가 독을 넣었다니...... 당신...... 괜한 누명을......"
"그 면사를 살짝 들췄을 때 궁주는 이미 손을 썼습니다. 남들은 손이나
몸에 독을 지니고 있지만 궁주는 그 앵두 같은 입술에도 극독을 감출 수
있으니 정말로 탄복할 따름이오."
유령궁주는 가볍게 탄식했다.
"당신의 눈에도 아마 독이 있는 것 같군요."
쾌락왕이 탁자를 치면서 소리쳤다.
"네가 독을 넣었느냐?"
유령궁주는 고개를 떨구었다.
"천첩이 잡아 뗄 수 있나요?"
"간이 부어도 단단히 부었구나."
"소녀는 어렸을 때부터 간이 약했습니다."
"너는 본왕이 단숨에 너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유령궁주는 고개를 쳐들고 비웃듯 크게 웃었다.
"천첩은 대왕께서 차마 저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죠."
비록 얼굴을 살짝 가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웃는 모습은 가히 사람의 혼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하, 하, 하, 하. 그렇군. 본왕은 비록 남을 복종시키는 수완은 있지만
꽃을 꺾는 손은 없지."
심랑이 살짝 미소지었다.
"군왕은 가인을 중히 여기니......"
유령궁주가 심랑을 바라보았다.
"이 분은......"
"심랑이라고 하오."
유령궁주는 그에게 매혹적인 웃음을 보냈다.
"공자께서는 이렇듯 영준하신데 어째서 남의 노비이기를 자처하는 거죠?"
"가인이 귀신이 되고저 자처하는데 저라고 어찌 노비로 자처하지 않겠소."
유령궁주는 뚫어질 듯이 그를 주시했다. 그녀의 눈빛은 가려진 면사를
통해서 마치 안개 속의 화살처럼 심랑을 향해 꽂혔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아리따운 몸이 흔들리더니 쓰러질 듯 했다.
궁장 소녀가 급히 그녀를 부축하고는 처참하게 말했다.
"이럴 수가, 우리 궁주의 마음의 병이 도졌어요!"
쾌락왕이 눈쌀을 찌푸렸다.
"마음의 병?"
"저의 궁주께서는 나쁜 사람만 보시면 곧 마음의 병이 발작을 한답니다."
"그렇다면 나와 심랑이 악인이라는 말이군."
그 궁장 소녀는 눈을 부라리며 심랑을 노려보더니 입을 삐쭉 내밀었다.
"바로 이 사람이에요."
심랑이 웃으며 답례했다.
"과찬의 말씀이오."
궁장 소녀는 이를 갈았다.
"당신이 우리 궁주의 병을 발작시켰으니 어서 책임지세요."
"내가 아무리 회춘을 할 수 있는 실력이 있다고 해도 가인의 마음의 병을
고칠 수는 없을 것 같소."
궁장 소녀가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이 만약 궁주의 병을 고치지 못하겠다면 난 목숨 걸고 당신과
싸우겠어요."
눈을 크게 뜨고 하얀 치아를 악무는 표정은 정말로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쾌락왕은 재미있다는 듯 유쾌하게 웃었다.
"귀여운 아가야, 예쁜 아가야. 내가 네 궁주와 원앙침상에 같이 들게되면
어찌 너만을 이불이나 개라고 남겨 두겠느냐!"
귀여운 아가는 수줍음에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아이...... 이제 보니 대왕께서도 악인이었군요."
"추호의 모자람도 없는 악인이지."
귀여운 아가는 눈동자를 굴렸다.
"그렇다면 궁주의 마음의 병은 대왕 때문에 발작했을지도 모르겠군요?"
쾌락왕은 더욱 유쾌하게 웃으며 심랑의 어깨를 쳤다.
"자네가 덕봤군."
귀여운 아가가 말했다.
"대왕께서 여인을 아끼신다면 우리 궁주의 이 가련한 모습을 보시고도
병을 고쳐 줄 생각이 없으시단 말인가요?"
"물론 고쳐 줘야지."
유령궁주가 양손으로 가슴을 감싸 안으며 처참하게 말했다.
"천첩의 병은 치료하기가 어렵습니다."
"무슨 말이냐. 천하에 못 고칠 병이 어디 있느냐?"
"약만 있으면 치료가 가능하지만 그 약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있다면 구하면 되는 거지."
유령궁주가 부드럽게 물었다.
"대왕께서는 진심으로 천첩의 약을 구해 주실 건가요?"
"본왕이 만약 그대의 약을 구해 준다면 그대는 어떻게 보답을 하겠나?"
유령궁주는 고개를 떨구었다.
"대왕께서 어떠한 요구를 하셔도 천첩은 다 따르겠습니다."
"어떠한 것이라도?"
유령궁주는 고개를 더욱 떨구었다.
"네!"
"좋아, 그럼 어서 약을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는지 말해다오."
"그 약은...... 대왕의 몸에 있습니다."
"응?"
귀여운 아가가 끼어들었다.
"그 약이 비록 대왕의 몸에 있긴 하지만 아마 주기가 아까우실텐데요."
쾌락왕이 가볍게 나무랐다.
"조그만 계집애가 감히 본대왕을 이렇듯 얕잡아 보다니."
귀여운 아가는 눈동자를 빛냈다.
"대왕께서는 정말로 아까워하지 않으실 거죠?"
"하, 하, 가인이 진짜 귀신으로 화한다면 본대왕 또한 당장의 아픔을 면할
수 없을 것이네."
귀여운 아가는 사뿐하게 절을 했다.
"대왕께 감사드립니다."
"대체 어떤 약인지 어서 말해 보거라."
귀여운 아가는 눈을 깜박거리더니 말했다.
"마음의 병은 마땅히 마음의 약으로 치료해야 하는 것을 대왕께서도 알고
계시죠?"
쾌락왕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물었다.
"마음의 약?"
귀여운 아가가 생긋이 웃었다.
"대왕의 심장을 저희 궁주에게 주신다면 궁주의 병은 금방 나으실
겁니다."
쾌락왕의 안색이 잠시 변하더니 곧 앙천대소를 날렸다.
"계집년, 역시 본 대왕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구나!"
"군왕(君王)은 허언을 않는다고 했는데 대왕께서도 하신 말씀은 마땅히
이행(履行)하셔야 합니다."
쾌락왕은 웃옷을 펼쳐 가슴을 내보였다.
"자, 본왕의 심장이 여기에 있으니 맘대로 가져가라!"
귀여운 아가는 다시 한 번 절을 했다.
"대왕께서는 과연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심니다. 저희 궁주의 병이
낫는다면 대왕의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어요."
그녀는 비수를 꺼내들고 곧 쾌락왕에게로 다가갔다.
쾌락왕이 갑자기 매섭게 외쳤다.
"잠깐!"
그 외치는 소리가 마치 벼락 같았다.
귀여운 아가는 몸을 한 차례 떨더니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대...... 대왕께서는 설마 약속을 어기시려는 건가요?"
"본왕의 심장은 절색의 가인만이 먹을 수 있다. 그러니 그대의 궁주에게
친히 와서 취하라고 해라."
유령궁주가 나섰다.
"정히 그러시다면 천첩이 명에 따르죠."
쾌락왕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웃었다.
"어서 오너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칼날은 이미 그의 가슴에 와 있었다.
쾌락왕은 정말로 꼼짝하지 않았다.
바로 이때 갑자기 대갈일성이 들렸다. 유령궁주의 인영이 거꾸로 칠
장(七丈)씩이나 물러났다. 그녀의 앞에는 대나무 같이 깡마른 흑의인이 서
있었는데 바로 독고상이었다.
"아이고, 쾌락왕은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구나."
귀여운 아가가 경멸하듯이 말하자 쾌락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본왕은 비록 승락을 했지만 남들이 승락을 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유령궁주가 웃으며 물었다.
"대왕께서 설마 그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 테죠?"
"본왕이 죽으면 그의 밥벌이도 끝장이 난다오. 민생고가 달려있는 문제라
본왕도 그에게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군."
유령여귀는 독고상을 바라보았다.
"남이야 호숫물에 주름을 만들든 말든 그대가 무슨 참견이지?"
독고상이 냉랭하게 말했다.
"내게도 마음의 병이 있어 그대의 심장을 먹어야만 치료가 되기
때문이오."
유령여귀가 물었다.
"진심이오?"
"그대가 진심이라면 나도 진심이오."
"난 당신의 대왕처럼 그렇게 속이 좁지가 않아요. 자, 당신에게 드리죠."
그녀는 곧 손을 내밀어 주저없이 자신의 상의를 찢었다.
순간 백옥같이 흰 가슴이 드러났다.
부드럽고 풍만한 그 모습은 불빛 아래 사람의 혼을 뒤흔들어 놓았다.
쾌락왕과 심랑은 얼이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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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했습니다~~감사합니다
재밌게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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