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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하지 말라 (잠2-118)
2024년 5월30일 (목요일)
찬양 : 목마른 내 영혼
본문 : 잠24:23-26절
☞ https://youtu.be/hA4UwhQfZq8?si=XL3r19SBlqqlRIGr
어제 작은교회를 심방했다. 목회사관학교 1기생으로 오랜 시간 함께하신 분이다. 평신도 시절 전도왕으로 자신이 맡은 구역식구가 많아 대형버스를 빌려 야외예배를 갈 정도로 탁월한 섬김과 사랑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은사를 가지신 분이다. 지금도 그렇게 영혼을 향한 사랑의 섬김으로 전도하여 영혼을 세워가시고 계셔서 참 자랑스러운 목사님이시다. 어제 15년을 함께 한 전도사님이 얼마나 담임목사님을 자랑하시던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제 5월의 마지막 날이다. 한 달이 또 이렇게 지나간다. 금번 달도 사역을 감당할 힘을 주심에 감사하다. 이 소중한 사역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또한 엄청난 헌신으로 함께하는 모든 후원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이런 소중한 분들의 이름도 빛도 없는 수고가 있어 라마나욧선교회 사역은 오늘도 나아갈 수 있다. 주님, 감사합니다. 소중한 분들을 축복하소서.
오늘은 피곤함으로 오전 시간 쉼을 가지려 한다. 몸이 저항하고 있어 조금은 위로를 해야 하겠다. 오후에는 중보기도세미나 교재를 수정하는 일을 하고 주일 사역과 부흥회 준비를 해야 한다.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본문에는 30가지 현인들의 교훈을 마치고 추가로 교훈하는 말씀이다. 23절
‘이것도 지혜로운 자들의 말씀이라.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
표준 새번역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재판할 때에 얼굴을 보아 재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메시지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까지 번역한다.
<불의에 동의하는 것은 잘못된 일,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건, 상관없이 불의에 동의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삶이란 자리에 불의는 불의가 되어야 하는데 사람에 따라 불의가 의로 바뀌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요사이 말로 <유전무죄>가 된다면 그 사회는 참으로 위험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잠언은 이렇게 말씀한다. 24-26절
‘악인에게 네가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으려니와 오직 그를 견책하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요 또 좋은 복을 받으리라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
아마도 이 잠언을 기록한 솔로몬은 왕인 자신의 비위를 맞추려는 신하들이 하는 많은 아부의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자신이 잘못함에도 옳다고 하는 이들을 겪으면서 그것이 얼마나 백성들을 힘겹게 하는 일이며 미움을 받는 일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했기에 오늘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는 <악인에게 견책하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요, 좋은 복을 받으리라>고 하면서 마지막 26절에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는 말씀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충고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말씀한다. 이 부분을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번역한다. <정직한 답변은 따스한 포옹 같다.>
젊은 날 나는 직선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고,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이가 들고 많은 삶의 자리를 넘어오면서 직선적인 말이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를 조금씩 느끼고 있다.
그래서 부드러운 말로 바꾸려 하지만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부드러운 말이 <잘못된 것에 대해 옳다>라고 말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적당한 말> 즉 <바른말, 정직한 말>을 해주는 것이 진정한 우정이며 사랑이라는 이 말씀이 오늘은 깊이 내게 울림을 준다.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완전한 자라고 한 야고보서의 고백처럼 삶의 자리에 말의 실수가 없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의 사랑으로 품어주고 싶고 사랑으로 세우고 싶다. 진실로 적당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옳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죽이는 말은 결코 적당한 말이 아닐 것이다. 반대로 상대의 낯을 보면서 틀린 것을 옳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말이다. 목사로서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자로 서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오늘 아침 깊은 묵상의 자리에 서게 된다. 주님 ~
<낯을 보아주는 것>이란 말은 <편파성을 보이는 것>이라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즉 기준이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재판의 자리에 편파성이 생기면 그것은 나라의 기준이 무너지는 무서운 일이다. 댐에 구멍이 나서 곧 나라가 윤리적으로 무너질 수 있는 위험스러운 일이다.
말씀을 전하는 종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든 바르게 하나님의 뜻이 전해져야 한다. 들을 수 있도록 전해야 함도 중요하다.
지도자가 누구의 편에 서면 위험하다. 편파성을 가지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진다. 공의, 공정의 자리에 서야 한다. 세상은 그러나 편을 나누고 편파성을 가진 판단을 하라고 요구한다. 국민의 대표자로 뽑은 국회의원이 당의 결정을 국민의 결정보다 우선하는 경우가 편파성의 대표적인 예다.
나는 과연 편파성이 없을까? 나는 과연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주님의 뜻을 전하며 결정하고 있는가? 한때 공의로운 사람이 되고자 신문을 보아도 좌우를 대표하는 신문을 함께보며 공의로운 말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인간이 온전히 공의로울 수 없음과 어쩔 수 없는 편파적 시선이 있을 수 있음을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진실로 주님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편파적 시선으로 상대의 이야기를 무시하게 되고, 때론 편파적 시선으로 무조건 좋게만 듣게 되는 것이 바로 내 모습임을 알게 되었다. 한 영혼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또 그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꿈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자신을 위한 판단을 할 수밖에 없음을 안다. 오직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 뿐이시다.
오늘 주님은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
정말 겸손해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 내가 판단하는 자리에 서려는 욕망을 벗고, 진실로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분의 뜻을 들으려는 마음, 진실로 대안을 찾으려는 마음으로 다가서야 한다. 오늘도 작은교회를 위한 중보기도 교재를 만들며 이런 마음으로 가라고, 또 설교 준비를 하면서 이 마음을 품으라고 주님은 내게 말씀하신다. 아멘. 아멘.
주님, 오늘도 겸손히 재판하는 자리에 설 수 없는 내 모습을 자백합니다. 한 영혼의 귀중함을 알게 하시고,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전할 수 있는 그런 종이 되게 하소서. 감히 재판하지 않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소서. 대안을 찾아내는 자가 되게 하소서.
<중보기도 제목>
1. <웨이브리즈> 플랫폼에 적합한 사람을 보내주사 주님 뜻 이루게 하소서.
2. 목회사관학교를 통해 진짜 목사가 세워지는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3. 100명의 새로운 후원자와 3억의 출자금이 공급되게 하소서.
4. 박정제 목사와 팀원들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하소서.
5. 스페이스 알 사역을 통해 젊은 세대 사역자를 일으키게 하소서.
6. 땡스기브가 세운 틴케이스 공간이 소중히 쓰임받게 하소서.
7. 2024년 작은교회 부흥을 이루는 해가 되게 하소서.
8. 충주 라마나욧이 세워지는 과정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