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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자료실 스크랩 퇴계이황선생의 묘소를 찾아
Bliss Kim 추천 0 조회 74 18.05.19 09: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퇴계이황




2017.  2.  19일 퇴계이황 묘소가는길(산에보이는 묘소가 퇴계이황의 며느리 묘)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산 24-29번지

입구에 비석(양진암고지)

양진암고지는 퇴계가 공부하던 집터였고. 그 뒤 약150m 언덕에 산소가 있다


퇴계이황선생의 며느리 묘소가 보입니다.

퇴계이황선생의 며느리 묘. (도로에서 약70m)

오르막을 오르다 보면 퇴계 선생 며느리인 봉화 금 씨 묘소를 먼저 만나게 되는데, 죽어서도 시아버지를 봉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퇴계 선생의 정신처럼 꾸밈없는 묘소. 마치 문지기 역할을 하는 듯 초입에서 반겨주는 봉화 금 씨 묘소를 지나 조금 더 오르면 퇴계 선생의 묘가 나옵니다. 소박한 묫자리는 고즈넉하다 못해 고요합니다. 묘 뒤편에 있는 소나무들은 변치 않는 정신문화를 일깨워주기라도 하듯 사시사철 그 자리에 머뭅니다.

(죽어서도 시아버지를 모시겠다는 유언에 따라 거기 썼다고 한다)





퇴계이황 묘비  (도로에서 약170m 올라와서)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라는 글씨와 함께손수지은 간략한 명문을  비석뒤면에 썼다

퇴계이황 묘  (도로에서 약170m 올라와서)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산 24-29번지


退溪(퇴계) 李滉(이황, 1501~1570)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동방18현의 한사람,
본관 진보, 호 退溪(퇴계), 도산 온혜리에서 좌찬성  李埴(이식)과 춘천박씨 사이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이러한 올곧은 자세는 어디에서 비롯 되는가?

우리는 여기서 선생의 전실인 의성김씨가 낳은 2남1녀와 퇴계이황의 모친인

춘천박씨부인 사이에서 출생한 5형중 막내가 퇴계이황이다. 

‘춘천박씨부인’을 주목하게 된다.  전실인 의성김씨가 낳은 삼남매까지

모두 여덟명의 자식을 양육 하였다 한다.

학문 연구에 밤낮을 가리지 않던 부친은 39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다음 해에 사망하였기에 퇴계 선생은 생후 7개월 만에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던 것이죠.

 32세에 홀로된 부인은 생업을 혼자 책임지고 자식들 교육도 힘쓰면서, 특히 편모자식 소리를 듣지 않도록 몸가짐과 학문연마를 독려하였다. “문자를 배운적은 없으나… 의리로 비유하여 사정을 밝히는 생각은 사군자(士君子)와 다를바 없었다”라고 선생은 어머니 묘갈명을 썼다. 그리고 “네 자질은 현감 하나로 족하다”는 어머니 말씀을 평생 가슴에 새겨서, 벼슬에 큰 뜻을 두지 않았음을 자식들에게 술회 하기도 하였다.  춘천박씨부인이 세상에 크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많은 자식들 양육과 생활문제로 집안일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천성적인 어머니 성품으로, 알고있던 지식과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만 생각하면서, 자녀들로 하여금 실천궁행 하도록 가르친 가정적 배경도 작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고 보면 부인은 대단한 삶의 지혜로 세상을 읽은 분이라고 여겨진다.  춘천박씨가문의 따님으로 우리나라의 대현(大賢)을 낳은 훌륭한 어머니 박씨부인! 이분은 율곡선생을 낳은 강릉의 신사임당과 함께 우리 강원도가 낳은 위대한 어머니이시다. 두분 어머니들은 모두 강원도의 따님으로서, 각기 다른 삶과 인생으로 여성교육의 큰 가르침을 남기셨다. 춘천에는 퇴계선생과 관련한 전설들이 많이 있다. 퇴계동, 공지와 공지천, 문암서원 등. 특히 문암서원은 퇴계선생을 배향하던 곳인데 지금은 멸실되어 자취도 없을 정도다, 6세에 천자문, 12세에 숙부로부터 논어를 배우고

특히 도연명의 시를 좋아하였으며, 20세에는 주역공부에 몰두하였다.

27세에 진사, 성균관에 들어가 사마시에 급제한뒤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官界(관계)에 진출 하였다.

박사. 전적. 지평. 성균관사성을 역임하고 을사사화 후 건강을 이유로 관직을 사퇴하고 46세에 고향인 토계(하계)에
양진암을 지어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생활에 들어갔다.


퇴계이황 묘소에 참배을하고~~


퇴계이황 묘 뒤에서 본


[묘비]

묘비의 방향이 전면이 아니고 측면이다.  퇴계선생은 1571년 12월 8일 71세로 돌아가시기 전날  장조카를 불러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것,
비석은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고만 세길것,  유밀과를 쓰지말것등을 유언으로 당부하였다 한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직역하면 '도산에 물러나 만년을 숨어산 진성 이씨 묘')라고 적혀 있고 이황이 자신의 일생을 짧게 정리한 글인 자명(自銘)이 있다. 생전에 이황이 유언으로 '조정에서 장례를 치러준다고 해도 사양하고 묘비명도 따로 부탁하지 말고 내가 남긴 이 글만 묘비에 새길 것'이라고 정해 두고 조카에게 이를 지키도록 전했다. 그러면서 '기대승 같은 이가 글을 쓴다면 분명 장황하게 글을 써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아직 젊은 기대승이 지나치게 자신을 띄워주는 것을 경계한 듯. 그러나 이황 같은 거유뭐?의 묘갈문을 간단히 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었는지

묘갈문을 쓰기로 결정이 나 버렸고, 결국 기대승이 묘갈문을 쓰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묘비석은 묘의 앞에 있지만, 퇴계 묘비의 비석은 퇴계의 말을 어긴 것 때문에 죽은 퇴계의 눈치를 보아 퇴계의 묘 오른쪽에 세웠다

후손들이 예장을 거절하였으나 조정에서  재차 예상을권고하여  어쩔수 없이 받아들였다고 하며 그래서 비석에 관직을 새기지 않았고

비석위치도 정면을 향하지 아니하고 옆으로 향하여 세웠으며 그 뜻을 받들어  지금도 후손들은 제수를 간단히 준비하여 검소한 제례를 지낸다고 전하고 있다.









퇴계이황 선생의 며느리묘소 뒤모습


결혼 생활에서도 스트레스가 엄청났던 퇴계

퇴계는 21세에 허씨 부인과 혼인했는데 27세 때 부인이 둘째 아들을 낳고 한 달 만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30세에 안동에 귀양와 있던 권질(權礩, 1483-1545)로부터 딸을 거두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고 재혼하였는데, 권씨 부인은 정신이 흐려진 상태였으므로 집안 살림을 제대로 꾸려 나가기 힘들었기에 선생의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숙부가 형장에서 맞아 죽고 숙모가 관비로 끌려가는 등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것을 겪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죠. 그나마 권씨 부인도 첫 아이 출산 중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토록 힘든 가정상황이었으니 건강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퇴계의 첫 부인이 사망한 뒤의 자녀 양육과 살림은 측실이 들어와 맡았다고 합니다.퇴계의 장남 준은 61세까지 살았으나, 차남 채는 태어나자마자 모친을 여읜 탓인지 22세로 요절했습니다. 손자인 안도와 순도는 부친상을 당한 다음 해에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고, 영도는 비교적 장수했습니다. 이후로는 자손이 번성했다고 합니다.

퇴계는 부친 이식과 모친 춘천 박씨부인 사이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학문 연구에 밤낮을 가리지 않던 부친은 39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다음 해에 사망하였기에 퇴계 선생은 생후 7개월 만에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던 것이죠.그리고 부친과 마찬가지로 너무 열심히 공부에 몰두하느라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20세 때 용수사에서 먹고 자는 것도 잊은 채 ‘주역’을 읽고 그 뜻을 밝히는 데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평생 동안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에 시달리게 되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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