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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도행전의 말씀 9,31-42>
그 무렵
31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32 베드로는 모든 지방을 두루 다니다가 리따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가게 되었다.
33 거기에서 베드로는 애네아스라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중풍에 걸려 팔 년 전부터 침상에 누워 있었다.
34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그러자 곧 애네아스가 일어났다.
35 리따와 사론의 모든 주민이 그를 보고 주님께 돌아섰다.
36 야포에 타비타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이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카스라고 한다.
그는 선행과 자선을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
37 그 무렵에 병이 들어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어 옥상 방에 눕혀 놓았다.
38 리따는 야포에서 가까운 곳이므로, 제자들은 베드로가 리따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사람 둘을 보내어, “지체하지 말고 저희에게 건너와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9 그래서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갔다.
베드로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그를 옥상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그러자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에게 다가가 울면서, 도르카스가 자기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어 준 속옷과 겉옷을 보여 주었다.
40 베드로는 그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다음 시신 쪽으로 돌아서서, “타비타,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가 눈을 떴다.
그리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
41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운 다음,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다시 살아난 도르카스를 보여 주었다.
42 이 일이 온 야포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 복음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6,60ㄴ-69>
그때에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60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6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65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6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동안 우리가 들어오던 요한복음 6장의 끝부분입니다.
앞 장면에서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임을 선포하시자, ‘유대인들’은 서로 수군거리고(41절) 말다툼(52절)까지 하였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도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라고 투덜거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요한 6,61-63)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이 생명의 빵’일 뿐만 아니라 이제 당신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말씀' 안에 진정한 생명이 있고, '영'인 말씀을 통하여 생명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이신 분’은 말씀을 발설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발설한 말씀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이를 성 그레고리우스는 “말씀은 읽는 이 안에서 자란다.”고 표현합니다.
이토록 성령께서는 에제키엘서(37,1-14)에서 보여주듯이, 죽은 문자인 마른 뼈들에 생기를 돋게 하고 뼈와 살이 붙게 하고, 문자를 성체가 되게 하여 우리가 받아먹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씀'은 “생명을 주는 영”(로마 8,2)이라는 합니다.
이처럼 참으로 신비롭고 놀랍게도 참 생명이 영으로 말씀이 되시어 육화하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성령으로 도유된 독서’(lectio untionis)인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가 생겨나게 됩니다.
성령께서 '말씀의 동반자이며 해석자'가 되시어 성경을 읽는 이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계시헌장(12항)과 가톨릭교회 교리서(111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건네주는 것이므로, 말씀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를 따라 그 속내를 꿰뚫어 읽어야 한다.
그러기에, 성령을 통해서 쓰려진 성경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 많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가고, 예수님께서는 남은 열 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하시며 자유로운 응답을 요청하십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요한 6,68-69)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계시한 바에 따라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으며, 하느님의 거룩한 분임을 믿어 왔고 또 알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예수님을 ‘떠난 제자’와 ‘남는 제자’가 분리됩니다.
다시 말하면, ‘믿어왔고 그래서 아는 자들’은 남은 제자가 되었고, 반면에 알고 믿고자 한 제자들은 떠나갔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에게는 ‘알고 믿는 것’보다 ‘믿어서 알게 되는 삶’이 먼저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생명이신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먹음으로 실행하게 하소서.
저희가 무엇을 하더라도 당신 말씀과 함께 하고, 말씀 속에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요한 6,67)
주님!
제가 떠나야 할 것은 당신이 아니라 제 자신이오니 저 자신을 떠나게 하소서.
떠나온 자신마저 떠나게 하소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더라도 당신 장막에 머물게 하소서!
흔들릴수록 더욱더 뿌리 깊게 내리는 믿음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흔들림 속에서도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 희망에 달려 있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쓸모없는 살덩어리>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오늘 주님께서는 아주 극단적인 표현을 쓰십니다.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옛날에 영지주의자나 이원론의 이단들처럼 육을 죄악시하는 그런 뜻일까요?
옛날에 삼구(三仇) 교리가 있었습니다.
삼구란 석 삼에 원수 구이니 세가지 원수라는 말인데 마귀, 세속, 육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왜 원수입니까?
그 자체로 악하기 때문이고 육신도 그 자체로 악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육신이나 세상을 악으로 만드셨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세속, 육신, 마귀가 원수라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들이 우리가 하느님께 가는 것을 막을 경우만 원수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주님을 따라야 하는데 부모가 막으면 그때 부모가 원수인 것과 같은 뜻입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는 부모인데 부모가 우리의 원수일 리는 없지 않습니까?
프란치스코의 경우, 자기가 복음 말씀대로 사는 것을 아버지 베드로 베르나르도네가 반대하자 주교님 앞에서 옷을 홀라당 벗어 아버지에게 돌려주며 이제부터 하느님 아버지만을 아버지라고 부르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하느님을 선택해야 할 때 그것을 막을 경우 원수인 겁니다.
오늘 주님도 제자들이 당신의 말을 믿고 따라야 하는데 당신의 말을 믿지 않음은 물론 거북하다며 당신을 떠나는 것을 보고 나머지 제자들에게 너희는 어떻게 하겠냐며, 너희도 떠나겠냐며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당신이 전에 있던 곳 곧 아버지께서 계신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보면 너희는 어떻게 하겠냐며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늘로 올라갈 때 이 세상은 떠나야 하고, 하느님께 갈 때 우리 육신은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하지요.
죽어 우리 육신이 부활할 때 지금 이 육, 그러니까 이 살덩어리를 그대로 가져가지 않고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데 이 살은 썩어야 하지요.
오늘 주님께서 쓸모없다고 할 때의 육은 몸(body)이 아니라 살(flesh)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고 할 때 그 육신은 살이 아니라 몸을 말하고, 이 세상의 육신은 지금 이 살을 지니고 있지만 부활한 뒤의 육신은 분명 지금의 이 살을 지니지 않을 것이기에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몸이 건강하기 위해 살을 빼야 한다면, 주님을 따라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더더욱 이 살덩어리를 소중히 여길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라>
어떤 사람이 전혀 새로운 사실을 얘기하면 호기심을 가지고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되지도 않는 소리라고 외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기대를 지니고 귀를 기울이는데 전혀 다른 소리를 하면 속이 상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대놓고 뭐라 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불만을 지니게 됩니다.
누구든 자기가 기대하고 바라는 쪽으로 얘기하면 신이 나고 기분 좋아하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못마땅해 담을 쌓게 됩니다.
그러나 큰 사람은 자기의 기대를 뛰어넘는 소리에 귀 기울일 줄도 알고 거기서 깨우침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신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듣기에 거북해하였습니다.
모르면 스승의 가르침을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인데, 그렇지 못하고 속으로 투덜대고 있었습니다.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하는 사람에게 무엇인들 비위를 맞출 수 있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런 사람은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져도 내 마음이 인간적인 욕망으로 채워져 있다면 '그림의 떡'이 되고 맙니다.
어른 신부님들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본당의 책임을 맡으면 적극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3분의 1이라도 되면 성공이라네.
3분의 1은 관망하는 사람이고 또 3분의 1은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그러니 누구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용기를 가지고 추진하게.”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되돌아가고, 더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나약함을 지니고 사는 신부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여전히 믿을 가능성을 두고 스스로 선택하도록 자유를 허락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요한 6,67)
물론 믿음은 하느님께서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림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믿음이 부족하여 이 사랑을 망각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요?
결국 ‘떠날 테면 떠나라. 잡지 않겠다.’라는 가슴 아픈 말씀입니다.
그런데 남아있던 제자 중 시몬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9)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어야 하겠습니다.
누군가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것을 버리고 그분의 것으로 채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다는 것은 바로 내 생각과 다른 예수님을 닮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며 사는 것입니다.
"너도 떠나겠느냐?"
"아닙니다. 당신에 대해 아직 잘 모르지만,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따르다 보면 당신을 알게 되리라 확신하며 그저 따르겠습니다. 훗날 당신을 등질지 모르지만, 지금 이순간은 당신이 나의 전부입니다. 당신만을 따르겠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당신을 따르고 당신을 느끼기까지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당신을 저의 주님으로 모시고 있음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고백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꼭 끌어안고 살아가면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적을 보여주지 않더라도 당신의 살과 피를 내주시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칩니다.
당신의 몸을 생명으로 주시지만 합당하게 모시기에도 벅찹니다.
그러나 지금 포기하면 당신을 영원히 차지할 수 없기에 당신께 매달립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 6,68)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 이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요즘 계속 봉독되고 있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성장하고 확장되어가는 모습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님의 직제자들이었던 사도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늘따라 수제자였던 베드로 사도의 활약이 두드러집니다.
하루는 베드로 사도가 리따라는 고을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팔 년 동안이나 중풍에 걸려 고생하는 애네아스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 사도는 지체없이 그에게 말합니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사도행전 9장 34절)
그러자 꼼짝 못하고 누워있던 애네아스는 베도로 사도의 말대로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애네아스 입장에서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자리에서 껑충껑충 뛰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활약상은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야포라는 고을에 타비타라는 여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선행과 자선으로 유명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틈만 나면 가엾은 과부들을 위해 옷을 지어 건넸습니다.
그런 타비타였는데 그녀가 병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애통해하면서 그녀의 시신을 씻어 옥상 방에 눕혀 놓았습니다.
옆 고을 리따로 사람을 보내 빨리 야포로 건너와 주기를 청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낸 후 무릎을 꿇고 오랫동안 기도한 다음, 시신을 향해 돌아서서 외쳤습니다.
“타비타, 일어나시오.”
(사도행전 9장 40절)
그러자 놀랍게도 타비타는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를 보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저같았으면 기겁해서 도망쳤을 텐데, 베드로 사도는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운 다음 사람들에게 데리고 가 그녀를 보여주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행한 치유와 기적들은 공생활 절정기 예수님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말 한마디에 오랜 중풍병자가 자리를 털고 벌떡 일어섰습니다.
일어나라는 외침에 죽었던 사람조차 소생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가 행한 기적과 스승님께서 행하신 기적 사이에는 확연한 차이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이름으로, 당신 자신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를 보십시오.
기적이나 치유를 하기 전에 반드시 행했던 예비 동작이 있습니다.
스승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당신의 능력을 주시라고 청했습니다.
그리고 두렵고 떨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기적을 행했습니다.
이것이 명확한 차이점입니다.
내 이름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성령께서 그 자리에 언제나 함께하심을 굳게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늘 자신과 동행하시며 힘이 되어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했던 사도들이 주님처럼 놀라운 기적을 행한 비결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께 청하고, 예수님을 믿기보다 그저 자신의 이름,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선택의 달인 - 사랑의 주님을 선택합시다>
계속되는 부활시기, 파스카 축제의 계절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새 하늘, 새 땅입니다.
어제 서울 수녀원 월 피정 날, 고백성사차 가는 도중 보문역에서 지하철 창에 있는 '우리는'(신춘희) 이라는 시가 좋아 휴대폰에 담았습니다.
지하철을 탈 때마다 눈여겨 보는 창들의 여러 시들입니다.
“너 땜에 웃고, 너 땜에 울고
너 땜에 기뻐하고, 너 땜에 아파하고
그래서 사랑인 거다
사람인 거다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 냄새가 풀풀나는 살아 있는 시입니다.
순간 사랑해서 사람임을 깨달았습니다.
사랑, 사람 혹시 같은 어원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람 향기가 아니라 사람 냄새입니다.
양 냄새 나는 목자가 되라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강조했는데, 정말 사람 냄새가 나는 사랑의 사람이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합니다.
수녀원에 갈 때도 원장 수녀는 꼭 자그마한 먹을 것을 선물하는데 역시 사랑 냄새, 사람 냄새가 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주인공인 베드로 사도에게서도 사람 냄새, 사랑 냄새가 풀풀 납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과 깊은 일치의 관계를 반영합니다.
사람을 치유하고 살리는 모습이 예수님 생전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했던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통해 활약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에 의한 치유와 살림의 기적입니다.
먼저 중풍에 걸려 팔 년 전부터 침상에 누워 있던 애네아스라는 사람의 치유입니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그러자 곧 애네아스는 일어납니다.
그리고 리따와 사론의 모든 주민이 그를 보고 주님께 돌아섭니다.
이어 야포의 죽은 도르카스라는 타비타를 살려냅니다.
베드로는 옥상 방으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다음 시신 쪽으로 돌아서서, “타비타, 일어나시오.”하고 말하자 그 여자는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습니다.
역시 이 일이 온 야포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베드로를 통한 부활하신 주님의 놀라운 치유와 소생의 이적에 감동한 이들이 이를 보고 주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사랑냄새, 사람냄새가 풀풀 나는 그대로 예수님을 닮은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가 '일어나다'로, 루카가 예수님 부활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동사입니다.
베드로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부활한 도르카스입니다.
타비타로 불리는 도르카스의 부활 이야기는 예수님이 소녀를 살리신 복음서(루가 8,49-56)의 일화를 닮았습니다.
애네아스를 치유한 경우처럼 놀라운 사건을 목격한 이들은 베드로가 아닌 주님을 믿게 됩니다.
베드로 자신이 아닌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일어나다'란 말마디입니다.
자주 신자분들에게 강조하는 말이 생각납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파스카의 삶이요, 이래야 영적탄력좋은 삶이다.
그러니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바로 이것이 파스카의 삶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닮아 이런 사랑 냄새, 사람 냄새가 풀풀 나는 사랑의 기적을 행할 수 있음은 순전히 참 좋은 선택의 결과입니다.
타고난 부정적인 것들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참 좋은 선택의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타고난 것들도 많지만 날마다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눈만 열리면 무궁무진합니다.
무엇보다 우선적인 선택이 참 좋은 사랑의 주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선택하면 다른 좋은 선물도 줄줄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는 정말 선택의 달인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을 '선택의 달인-사랑의 주님을 선택합시다'로 정했습니다.
예수님께 실망한 이들이 하나 둘 떠나자 예수님은 마침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말씀하신 후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고 묻습니다.
바로 우리 모두에 대한 물음입니다.
바로 이때 베드로의 지체없는 주님의 선택이 놀랍고 부럽습니다.
바로 주님께 대한 베드로의 깊은 신뢰와 사랑의 반영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드릴 답변도 이것 하나뿐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신 주 예수님을 두고 누구에게 갈 수 있겠는지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말씀하신 주님을 놔두고, 영과 생명의 주님을 놔두고 누구에게 갈 수 있겠는지요.
우리가 선택할 분은 주 예수님 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파스카의 예수님을 선택하여 주님과 깊은 일치의 삶을 살았기에 오늘 사도행전에서와 같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모두가 사랑 냄새, 사람 냄새가 풀풀 나는 사랑의 기적들입니다.
참으로 베드로처럼 파스카의 예수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더욱 인간적이자 신적인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치유하시고 살리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도 주님이신 당신을 선택하여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은 치유와 더불어 기쁨과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
(시편 116,3-4)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말씀은 살아계시기에 때론 우리 실존을 강력하게 건드리며 다가오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지향이 육적이라면, 영이신 말씀의 터치가 부담스럽고 껄끄러운 것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게 하시니까요.
게다가 우리를 둘러싼 하느님 현존, 즉 양심과 자연과 선한 이웃들이 이 말씀에 동조해 내 육적 지향을 거스르는 듯 느껴질 때면, 내가 방향을 선회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이상 불쾌하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마음이 고집과 집착으로 완고해졌다면 더욱 그럴 겁니다.
자신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요, 자신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다(요한 6,53-58 참조)는 예수님의 폭탄선언을 듣고 많은 군중과 제자들이 하나둘씩 떠나게 되는 상황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남은 열두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요한 6,67)
믿지 않는 자, 당신을 팔아넘길 자를 처음부터 아신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십니다.
이미 알고 계셨지만 사랑 때문에 안타까우셨을 예수님 마음에 머무릅니다.
떠날지 말지 묻고 답을 기다리는 순간에는 꽤 큰 용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 6,68)
아! 오늘 시몬 베드로는 메시아 고백 때와 마찬가지로 참으로 핵심적인 신앙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소유하신 분,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심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안다고 덧붙이지요.
저는 '생명의 빵'이라는 예수님의 자기 진술에 '생명의 빵'이라 답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이라고 답하는 베드로에게 흠칫 놀라게 됩니다.
정답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빵이 있습니다."이라는 것을 잘 알 텐데 왜 '빵'이라 하지 않고 '말씀'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빵(육)이 곧 말씀(영)이란 뜻이겠지요.
세상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그 말씀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거나 헛되이 스러지지 않고 반드시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야 마는 실재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어느 누구도 이 말씀과 유리되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말씀의 영향권 밖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저희가 당신 말고 누구에게 가겠느냐는 반문은 지당합니다.
말씀이신 그분이 전부이고 전체인데, 달리 어디를, 누구를 찾아 등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독서에서 베드로는 스승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용서를 체험하고 사랑을 재확인한 그는 성령의 힘으로 중풍병자 애네아스를 치유하고 죽은 타비타를 되살리지요.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간절한 기도가 이를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확고히 믿음으로 이 세상에 드러낸 것입니다.
말씀께서는 과연 믿는 이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고야 마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으로 촉발된 생명의 빵 논쟁은 이렇듯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심을 선포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분의 살과 피(빵)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분을 믿는 우리는 이 지상 순례에서 말씀과 성체를 통해 그분 현존을 누리기에 복됩니다.
또 말씀과 성체로 현존하시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이들, 즉 벗님을 통해 당신이 하신 일을 이어나갈 것이니 세상 또한 복됩니다.
영원한 생명의 빵이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팬데믹 기간에 신부님들과 함께 자전거를 마련했습니다.
처음에는 시간도 많고 같이 다닐 기회가 많아서 자주 자전거 모임을 가졌습니다.
일상으로 돌아오고, 모임을 주도하던 신부님이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가면서 자전거 모임이 뜸해졌습니다.
자전거를 타려면 헬멧, 장갑, 물병과 같이 챙겨야 할 것도 있습니다.
자전거에 대한 흥미가 적기 때문에 자전거 타는 맛을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자전거는 지하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부활과 함께 봄이 찾아왔으니 다시 자전거를 타보려고 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시작은 하였지만 끝을 보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것들에 시간을 빼앗기기도 하고 흥미를 덜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민사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분들을 봅니다.
대부분은 바쁜 가운데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청년들이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봅니다.
학생 때는 복사도 하고, 한국 학교에도 나오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대학에 가면서 언어에 따른 불편을 겪게 됩니다.
한국성당에 나오지 않고 미국성당에도 나가지 않으면서 신앙생활과 멀어지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봉사와 직책을 맡으면서 열심히 다니지만 직책을 내려놓으면서 신앙생활과 멀어지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본당 신부님의 사목방침에 대한 갈등으로 신앙생활과 멀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멀리 이사를 가면서 자리를 잡지만 신앙생활과 멀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늘 말씀하셨던 것처럼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겉에 모인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들고, 병자들을 고쳐주고, 배고픈 사람들이 풍족하게 먹을 수 있도록 표징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새로운 권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건강과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대한 희망입니다.
로마의 식민통치를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희생과 봉사 그리고 겸손과 나눔을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사람들 손에 넘겨져 죽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실망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랐던 베드로는 비록 주님을 배반하고 무서워 떨었지만, 다시금 주님의 사랑을 받았던 베드로 사도는 오늘 제1독서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을 훌륭하게 하고 있습니다.
‘환자들을 치유하고, 죽은 사람까지 살려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그 모든 영광을 예수님께 돌립니다.
동창 신부님 중에는 ‘상설고해사제’를 신청한 친구가 있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싶다고 합니다.
본당 신부를 해 보았기 때문에 후배들을 위해서 자리를 양보하고 싶다고 합니다.
오랜 시간을 보좌신부로 있어야 하는 후배들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마음으로 내린 결정입니다.
이 또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떠나지 않으려는 결정인 것 같아서 보기 좋았습니다.
20년 가까이 ‘도시빈민사목’을 하는 동창들이 있습니다.
사제가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해 준 것이, 가장 아픈 이들에게 해 준 것이, 가장 헐벗은 이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때로 힘들고, 때로 외롭고, 때로 거친 삶을 살아가는 동창들 역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떠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몸은 교계제도에 있지만 마음은 세상의 것들을 따르려 한다면 이미 주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두운 곳에서 양분을 찾는 뿌리의 삶을 외면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꽃의 삶을 추구한다면 역시 주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험난함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고등학교 2년 동안 짝으로 매우 친한 동창이 있습니다.
마음도 잘 맞았고, 재미있는 시간도 함께 많이 보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 후에, 저는 신학교에 들어가 신부가 되었고, 이 친구는 유학을 다녀와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사는 장소도 달라서, 저는 강화에 그리고 친구는 강원도 원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가끔 전화 통화를 하기는 하지만 점점 멀어지게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고등학교 때 그리 친하지 않았던 친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친구와는 만날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신학생 때에도 자주 만났고, 신부가 되어서도 자주 만났습니다.
그렇게 친했었던 의사 친구보다 이 친구와 더 친해졌습니다.
자주 만나지 않으면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어떤 분은 나중에 시간이 많이 남으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주 만나지 않은 관계가 나중에 저절로 가까운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미워하는 사람도 자주 봐야 친한 관계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워하게 되면 아예 보지 않는 쪽을 선택합니다.
무조건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계속된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많은 이가 예수님의 말씀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반대했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면서 떠나게 됩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의 행적을 분명히 계속 보았을 텐데도, 자기 뜻과 다르다는 판단 아래 주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믿음은 계속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을 만나야 커지게 됩니다.
그러나 떠날 생각만 하면, 떠나야 할 이유만을 찾으면서 믿음도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떠나는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도 묻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자신에게 세속적인 이익이 없다고 생각하면, 주님을 떠나고 싶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세속적인 이익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주님을 만나고 함께하면서 베드로의 고백을 외쳐야 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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