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神)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
와룡산(개구리 소년들이 실종된 산이다)을 내려와 용산 지하도를 지나기 전 왼쪽 편에 돼지국밥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이 여러 집 있다. 그러나 딴 집에 손님이 없을 때라도 ‘성주돼지국밥’은 언제나 손님이 바글거린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17년 전이구나. 퇴임을 한 그해 이른 3월이었지 싶다. 그날은 영등할매가 며느리와 함께 오는지 꽃샘추위가 몸을 사리게 했다. 와룡산에 올랐다 내려와 성주집을 지나는데 큰 가마솥에서는 허연 김이 오르고 손님들은 허발 든 것처럼 국밥에 코를 박거나 훌쩍이고 있었다. 그날따라 나도 허출했고 따끈한 국밥 한 그릇이 간절했다. 나는 성주집의 문고리를 잡았다. 그순간 갑자기 기억창고의 문을 벌컥 열고 튀어나온 사라지지 않는 기억 하나가 영화의 플래시백(flashback)처럼 클로즈업 되었다.
교직에 첫발을 들인 그 해 겨울방학이었다. 안동 역 개찰구를 빠져 나온 내가 대합실에서 새벽인데도 마중 나온 어머니와 마주 서 있었다. 어머니는 무슨 보물을 만지듯 나를 살갑게 어루만지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은 비바람에도 스러지지 않을 들꽃처럼 순했다. 어머니께 팔이 잡힌 채 대합실을 나서는데 ‘마뜰’ 쪽에서 뜬 해가 새벽을 걷어내고 있었다. 역 앞은 갑자기 햇살로 부산해졌다. 어머니는 역전을 둘레둘레 살폈다. 나도 따라 살폈다. 늘어선 가게마다 걸린 큰 가마솥에서는 무럭무럭 허연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머니가 침을 꼴깍 삼키시며 말했다.
“야야 우리 국밥 한 그릇씩 하고 가자, 응?”
어머니는 잡고 있던 내 팔을 아이들처럼 흔들며 간절히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저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그때 나는 주머니 사정을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애와 만나 저녁을 먹고, 영화라도 한편 본 후, 8.15 과자점에 들러 차라도 한 잔 하려면 여유가 없었다.
“난 별 생각 없는데….”
나는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내쳐 걷기만 했다. 어머니는 설핏 실망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바로 낯빛을 바꾸며 말했다.
“그러자. 그럼 우리 집에 가서 빠꾹 해먹자.”
그러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느새 간밤의 눈처럼 명징해 제비원 부처님을 닮으셨다.
붓다도‘음식이 가장 중요한 재화’라 하였는데 평생 처음인 어머니 청을 하찮은 일로 걷어찬 것이었다.
‘이런 무지렁이 또라이 같은 놈이 아가리에 국밥은 처넣으려고?’
나는 집을 향해 비 맞은 개처럼 어슬렁거리며 어머니 생전에 해드린 일들을 돌이켜보니 너무나 후회스럽고 수치스러워 억장이 무너졌다. 나는 어머니 생전에 용돈 한 번 넉넉히 넣어 드린 적이 없었고, 근사한 집에 모셔 좋아하시는 음식 한 번 대접해 드린 적도 없었다. 하물며 평생 옷가지 하나 사드린 적 없으니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여행은 혹여 꿈도 꿔보지 못한 맹추였다.
나는 집을 지나 내쳐 걸으며 김도향의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노랫말을 떠올렸다. 거백옥蘧伯玉)은 50세가 되자 지난 49년의 인생이 잘못된 줄을 알았다고 했는데, 나는 이순이 넘어서야 ‘참 바보 같은 인생.’이었음을 깨우치니, 오현 스님이 입적하기 전에 남긴 시구가 꼭 나를 두고 한 꾸짖음 같았다.
천방지축 기고만장
허장성세로 살다 보니
온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
그동안 나는 곡두가 되어 바다에서 쟁기질을 하며 노닥거리거나 돼지발톱에 봉숭아물 들이고 있었다. 이제 하늘을 우러러 땅을 친들 무슨 소용 있으랴. 바닷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이었다. 앙가슴에 비수가 파고들고, 뭍에 오른 물고기 신세가 되어, 남은 생을 등 펴고 살기 틀렸음을 절감했다. 씻을 수 없는 마음의 멍을 들여다보자 멀리 나가 있던 정신이 그제야 되돌아왔다.
퇴임 때가 가까워 오자 선배들의 조언이 있었다. 특히 학창시절 한 동네에 살던 대학교수로 있는 선배의 직설적인 조언은 내 결심을 더욱 굳게 하였다.
‘죽을 때 돈 갖고 갈 거냐?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먹고, 갖고 싶은 것 있으면 그것도 명품으로 챙겨라. 가고 싶은 곳 있으면 해외든 어디든 몸 성할 때 다녀와야 한다. 아끼고 발발 떨다 팔다리 못쓰면 후회해도 늦는 법이다’
선배의 말이 정수리를 울려서가 아니라 난 퇴임 훨씬 전부터 퇴임 후를 준비한답시고 적금을 부으며 시동을 걸었었다. 퇴임하는 전해에는 전국 명승지를 돌아보기 위해 SUV인 렉스턴 중에서도 톱클래스를 구입하였었다. 하지만 나는 가던 길을 되돌아 U턴하여 집을 향하듯 허접스러운 모든 계획을 ‘막살’하고 무릎을 접었다. 허망하고 어머니에게 잔인한 생각이 들어서다. 인생은 이벤트가 아니다. 허물을 벗지 않는 뱀은 죽는다 했다. 그날은 중천에 낮달이 뜨고 있었음을 지금도 기억한다.
역시 팔자 도망은 못하는지 인생은 내 생각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진한 아쉬움이 묻어나 짠했지만 자승자박自繩自縛 자작지얼自作之孼이요, 자업자득自業自得이었다. 내 눈물을 내 손등으로 닦지 않으면 어머니에게 죄스러워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에겐 형제 중에 막내로 태어나 불면 날아갈까 쥐면 부서질까‘둥개둥개’하시던 어머니의 어르는 음성이 몸 가장 깊숙이 새겨진 문신처럼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이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어머니는 생전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장 5절)’하시며, 나와 함께 주님께 나아가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나는 당장 그날 이후 다가오는 첫 번째 주일에 아내와 함께 주님께 무릎을 꿇고 어머니께 속죄 하였다. 역시 크리스천인 아내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으나 입은 째졌다. 그리고 고주망태로 즐겼던 술을 물경 석 잔으로 줄였다(경천동지, 아는 사람은 안다).
또, 퇴임 후 지금까지 모임이외에 나 혼자서 한 끼도 외식을 한 적이 없다. 공자도 음식남녀(飮食男女)는 인지대욕(人之大慾)이라 했다. 인간은 누구나 뜨겁게 사랑하고 싶고, 맛있는 거 먹고 싶고, 재미있게 놀고 싶은 것이 기본 욕망 아니겠나. 나라고 별반 다름 있겠나. 그러나 나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태복음 7장 14절)’는 하나님 말씀처럼 좁고 협착한 길을 걷기로 했다.
영화나 책을 통해 찜해 놓았던 다른 나라의 명승지와 전국 각지를 섭렵하며 즐기기로 한 계획도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어쨌거나 간에 가로지나 세로지나 완전 ‘삼식이’되었다. 자고로 구차한 삶도 내색하지 않고 생을 마주해온 아내는 삼식이라도 교회에 같이 가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하는 듯 했다. 나도 염치가 있는 놈, 집 청소와 설거지는 내 담당이다. 온 집안을 유리알 닦듯이 손으로 하나하나 걸레질한다.
지금까지 나를 위한 물품 구입은 팬츠나 러닝셔츠, 양말 정도다. 도리어 설레지 않는 물건들은 바리바리 싸서 처분하였다. 외국 여행? 퇴임 전에 일본 한 번 갖다온 것이 전부다. 여러 곳에서 권했지만 이 핑계 저 핑계했다. 지난 달 동기회 때, 모재(석오균)가 나를 보고 ‘여행을 자주 했으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아쉬워했다. 나는 핑계로 소설가 마르셀 푸르스트의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한 구절, '발견을 위한 진정한 탐험은 새 풍경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다'라고 둘러대려다 민망스러워 삼켜버렸다. 모재는 다만 ‘방구석 여포’라 해야 하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구들장군인 내가 보기에 딱했던 모양이었다.
물감 번지듯 흘러간 세월이 17년, 이제 돌아보아도 내 욕망을 채우지 못한 것에 대해 손톱만한 후회도 없다. 도리어 희한하게 고목에 새순이 돋듯 몸은 깃털처럼 가볍고 존재 자체가 한없이 홀가분해졌다. 모습이야 영락없는 늙다리 소장수 형상이지만 뱃가죽은 그래도 王자가 뚜렷하다. 王자가 꿈틀거려야 존재감을 느끼는 확증편향에 매몰되어 운동중독증에 걸린 게 탈이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지금이 딱 좋다!’
2020 만해평화대상 수상자인 태국 아속(Asoke·'환희'란 뜻의 태국어) 공동체 설립자 포티락(86)은 ‘행복이란, 환상의 가면을 쓴 고통’이라면서 ‘행복과 고통은 동전의 양면이기에 고통을 피하려면, 행복 또한 버려야 한다.’고 갈파했었다.
이제 욕망을 꾹 눌러 참으며 구절양장의 산길을 꼬치 꿰듯 뚫으며 지나온 세월의 오묘한 맛을 깨우치고 있다. 옛말에도 욕심 없는 사람이 행복하다 하지 않았는가. 추사가 다산의 맏아들 정학연에게 말한 입이 근질근질해도 참으라는 득구불토得句不吐랄까.
내 눈물을 기워주시던 어머니와 몌별한지 어언 40년, 해가 갈수록 더 새록새록 돌아 보이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어머니는 인생의 산마루를 내려가고 있는 자식을 걱정해 시인 정호승의 시 ‘슬픔이 기쁨에게’를 읊어 나를 깨우쳐 주셨다.
첫댓글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과 아쉽고 후회스러운 추억은 누구나 공유하고 있다네.
그래도 신앙을 이어 받은 것은 하늘에 계신 어머님에 대한 가장 큰 효도일세.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잠3:1-2).
반석 이 사람아
성경 말씀이 꼭 어무이가 내게 하시는 말씀 같으노.
그래서 그런가?
내일은 몰라도 건강 하나는 조오타!
인생은 후회의 연속이라 했던가?
언제나 꿋꿋하고 강인한 모습의 자네에게
이런 여린 가슴앓이가 있을 줄은 몰랐네.
나도 어머니께 잘못해드린 일이 많아
이 글 읽으며
그 때 왜 그랬던가? 후회하며 속죄하고 있네.
어머니!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울진 교육청에 근무 할 때였다
아버지로 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 친구들과 백암 온천에 놀러 왔다 (울진 관내 온천임) 그냥 전화해 본다고 했다
나는 출장 명령을 받고 출발 준비 중이었다
바쁘면 안 와도 된다고 했다
아버지 속 마음은 고향 친구들 앞에 아들 자랑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가지 못했다
출장을 바꾸고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장학사 초임 시절이 었는데 주머니에 돈이 없었던 것이다
그 후로 그것이 마음에 죄가 되어 아직도 문득 문득 불효막심한 놈으로 나를 아프게 한다
나나, 자네나, 한마음이나,
돌아가신 부모님께 저지른 씻을 수 없는 멍을
문신처럼 새기고 사는 모양이다.
그런데 말이다. 늙어서 그런가,
생체기가 난 마음에 새살이 돋질 않아...
다 된 늙은이 눈물나게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