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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위시차(眞僞視次)
진실과 거짓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뜻으로, 인간사회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그 일을 보는 관점과 시각의 차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眞 : 참 진(目/5)
僞 : 거짓 위(亻/12)
視 : 볼 시(見/5)
次 : 버금 차(欠/2)
요즈음 대한민국을 뒤흔들어 가장 혼란으로 빠져들게 하는 괴물은 가짜뉴스인 것이 틀림없다. 청담동 술집사건을 비롯해 많은 가짜 뉴스들이 연일 신문과 방송을 통해 국민들을 혼란하게 한다.
사실도 아닌 것이 사실인 것처럼, 또 사실이 허위인양…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목소리 큰 사람이 주도권을 쥐고 흔드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분열되고 찢어져 도저히 봉합의 처방조차 없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자기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막무가 내는 세상이 되었다.
한 스님이 비탈진 계곡을 따라 걷는데 앞서가던 여인이 발을 헛디뎌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스님은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히 뛰어들어 여인을 끌어안고 나왔다. 그런데 여인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물을 잔뜩 들이켠 탓으로 기도(氣道)가 막혀 숨을 쉬지 못했다.
스님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자기가 할 일을 다 하지 않는 것은 수도인(修道人)으로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여인을 눕혀놓고 가슴을 눌러 물은 토하게 하고 입을 빨며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그 덕분에 여인은 '푸우~'하고 숨을 내쉬며 깨어났다.
그때 이 광경을 지켜보던 같은 절의 스님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스님이 여인을 끌어안고 희롱(戱弄)하다니, 여인의 몸에는 손도 대지 말라는 계율(戒律)을 지키지 않는다면 스님이라고 할 수 없지 않는가?" 이어서 "평소 정진에만 힘쓰는 줄 알았는데 저럴 수가?"하고 분개했다.
그리고 사음계(邪淫界)에 빠진 스님은 응당 징계를 받아야 한다며 그길로 달려가 주지 스님에게 고해 바쳤다. 때문에 여인을 구해준 스님은 파계승(破戒僧)으로 낙인이 찍혀 사문(沙門: 불교에 출가하여 수도에 전념하는 사람)에서 쫓겨났다.
스님은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붙들고 나는 결백하다고 일일이 변명하고 다닐 수도 없었다. 스님은 이 일을 통해서 내 눈으로 직접 본 사실도 다르게 인식 될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진위시차(眞僞視次)란 인간사회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그 일을 보는 관점과 시각의 차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옛 선조들은 욕심보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배려하는 도량(度量)이 넓은 사람을 군자(君子) 혹은 대인(大人)이라고 했고, 자기 욕심만 차리고 주위를 돌볼 줄 모르는 사람을 소인(小人)이라고 했다.
가짜 뉴스로 잠시 동안만이라도 주위에 관심을 갖게 하고, 그들이 보내주는 작은 기부금에 만족하여 재미를 느껴서, 자기가 하는 일이 사회나 국가적으로 큰 해악(害惡)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하고, 크게 잘한 일로 치부하고 있는 것을 보면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러한 사람들이야 말로 국론(國論)을 분열시키고, 상대를 비방하는 풍토를 진작시켜 망국(亡國)의 지름길을 택한 자와 다를 바가 없다.
조선을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 것도 가짜뉴스를 고집한 간신(奸臣)들의 자기 욕심과 허영(虛榮)때문인 것으로 파악되며, 반대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의(義)를 고집한 충신(忠臣)들 때문에 국가는 다시 살아났음을 역사를 통해 우리는 절실히 느끼고 있다.
능력이 모자라 잘못을 저질렀으면 나중에 잘못을 인정하고 그 죄 값을 받으면 오히려 사람같이 보인다. 그 반대로 자기의 잘못을 끝까지 합리화 하려는 말로 돌려막음질하는 사람을 진정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현명한 선조(先祖)들은 이러한 소인(小人)들에 대하여 경계의 글로 경고하고 있다. '남을 헤아리려면 먼저 자신을 헤아려라, 남을 해치는 말은 도리어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곧) 피를 머금어 남에게 뿜으면 먼저 자신의 입이 더럽혀져야 한다.(欲量他人 先須自量 傷人之語 還是自傷 含血噴人 先汚其口/ 욕량타인 선수자량 상인지어 환시자상 함혈분인 선오기구)' 강태공(姜太公)의 가르침으로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보인다.
자신을 알고 분수를 아는 것이 오히려 자신을 지키는 일이요, 사회와 국가를 살리는 길이다. 많이 배우고 높은 직위에 있는 자들 일수록 더욱 절실히 깨달아 매사에 조심해야 할 것이다.
상대를 탓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
太公曰(태공왈): 欲量他人(욕량타인)이어든 先須自量(선수자량)하라 傷人之語(상인지어)는 還是自傷(환시자상)이니 含血噴人(함혈분인)이면 先汚其口(선오기구)니라.
태공이 말하였다. “다른 사람을 헤아리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을 헤아려 볼 것이다. 다른 사람을 해치는 말은 오히려 스스로를 해치는 말이 될 것이다. 피를 머금어 다른 사람에게 내뿜으면 먼저 자신의 입이 더러워질 것이다.”
대개 인간관계든 또는 사회생활에서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상대방을 탓하게 된다. 그럴 경우 상대에게서 그 잘못된 원인을 찾기도 어렵지만 설령 찾았다고 해도 고치기는 더욱 어렵다.
반면 자신에게 잘못된 원인을 찾게 되면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상대방에게서 그것을 찾는 것보다 더 쉽고 또한 (자신의 의지 여부에 따라서) 고칠 수도 있다. 그래서 옛 성현은 모든 일에서 좋은 결과를 얻고자 한다면 상대방에게서 잘못의 원인을 찾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라고 충고했다.
예를 들어 맹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데도 그 사람과 친해지지 않으면 오히려 그 사람을 좋아하는 내 마음이 절실했는가를 헤아려본다. 온 마음을 다하고 온 힘을 쏟아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데도 잘 다스려지지 않으면 오히려 나의 지혜가 부족하지 않았는지 헤아려본다.
예의를 갖추고 다른 사람을 대우했는데도 그 사람이 예의로서 나에게 화답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 사람을 공경하는 내 마음이 온당했는가를 헤아려본다. 열심히 일을 했는데도 얻으려고 원했던 것을 얻지 못했다면 다시 자신에게 잘못의 원인이 없는가를 돌이켜 헤아려본다.
어떤 일에서든 잘못의 원인은 자신을 헤아려 자기에게서 구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올바로 서게 되면 천하의 모든 것이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맹자의 말은 '맹자' 이루 상편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 '명심보감'의 '欲量他人(욕량타인) 先須自量(선수자량)', 곧 '다른 사람을 헤아리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을 헤아려 볼 것이다'라는 구절과 그 뜻이 잘 들어맞는다고 하겠다.
아울러 '傷人之語(상인지어) 還是自傷(환시자상)', 즉 '다른 사람을 해치는 말은 오히려 스스로를 해치는 말이 될 것이다”는 구절과 그 뜻이 배합하는 경구(警句)는 '채근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채근담에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다. “다른 사람의 단점을 보면 정성을 다해 가려주고 마음을 다해 덮어주어야 한다. 만약 다른 사람의 단점을 폭로해 온 세상에 드러낸다면, 이것은 나의 단점으로 다른 사람의 단점을 공격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미련하고 어리석다면 좋게 잘 가르쳐서 깨닫도록 해주어야 한다. 만약 분노하는 마음을 드러내고 미워하는 말을 내뱉게 되면, 이것은 나의 미련함과 어리석음으로 다른 사람의 미련함과 어리석음을 구제하겠다는 꼴이다.”
대개 사람들은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에서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다른 사람을 해치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면 이렇게 반응한다. “그 사람이 잘못했기 때문에 잘못을 지적한 것인데 무엇이 잘못되었느냐?”고. 또한 “그 사람이 애초에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내가 화를 내며 잘못을 나무라겠느냐?”고.
다시 말해 잘못을 저질러 원인을 제공한 사람에게 잘못이 있지, 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채근담은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가르침을 준다.
첫째, 다른 사람의 단점과 잘못을 드러내 말하는 것은 자신의 단점과 잘못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둘째, 다른 사람의 미련함과 어리석음을 미워하거나 분노하게 되면 도리어 자신의 성격과 기질만 나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의 단점과 허물을 드러내 고치려고 하다가 자신의 단점과 허물만 깊어지게 되는 한심한 꼴을 모면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막말, 듣는 이보다 먼저 자기 스스로가 더럽혀진다
인(仁)은 공자 철학의 핵심이 되는 단어다. 흔히 ‘어질다’로 번역하지만 단순히 착하고 너그러운 데 그치지 않고, 모든 좋은 덕목을 포괄하고 있는 개념이다. 개인 수양의 목표이자,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공자는 '인'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해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논어'에는 제자들이 '인'이 무엇이냐고 묻는 장면이 계속 나온다. 그때마다 공자는 제자의 수준과 성향에 맞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데, 제자 사마우에게는 "인자는 말을 참는다(仁者 其言也訒·인자 기언야인)"라고 대답해 준다.
인(仁)이 무언가 거창한 개념이라고 생각했던 사마우가 “정말 말만 조심하면 인자가 되는 것입니까?”라고 재차 묻자, 공자는 “실행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이 말이니 인자가 어찌 조심하지 않겠느냐?” 하고 대답했다. 사마우는 말이 많고 조급한 성품이기 때문에 공자는 특별히 그 결점을 지적한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인(仁)은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한마디로 하면 사랑(愛)을 말한다. 제자 중에서 좀 어리석은 축에 들었던 번지가 묻자 대답해 주었던 말이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면 그것이 곧 인(仁)이라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사마우에게 가르침을 준 것도 말의 관점에서 사랑이 있는 사람이 행해야 할 점을 알려준 것이다.
여기서 공자의 첫번째 가르침은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것이다. ‘말을 참는다’, 즉 ‘기언야인(其言也訒)’에서 인(訒)은 ‘더듬는다’의 뜻도 포함하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하지 말고 마치 말을 더듬는 사람처럼 하라는 뜻이다.
마음에 있는 말을 그대로 쏟아내게 되면 마음속의 감정도 함께 쏟아져 나오게 된다. 특히 마음속에 분(憤)이 있다면 말에도 분이 담겨 나와 결국 상대방을 공격하는 말, 상처를 주는 말을 하게 된다. 마음속에 고민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괴로움과 답답함이 상대방에게 전염되고 분위기가 침울해지고 만다. 한자 인(訒)은 말(言)과 칼(刃)이 합쳐져서 이뤄진 글자다. 마치 혀 옆에 시퍼런 칼날이 있듯이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경계다.
또 한가지 공자의 가르침은 바로 ‘말은 곧 그 사람 자신이다’라는 명제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과 인생관이 집약돼 입으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경박한 사람은 그 말이 가볍고, 인격이 여문 사람은 말이 무겁고 오히려 행동이 민첩하다.
君子欲訥於言 而敏於行
(군자욕눌어언 이민어행)
군자는 말은 더디게 하지만 행동은 민첩하다.
君子敏於事 而愼於言
(군자민어사 이신어언)
군자는 일은 민첩하게 하고 말은 신중하다.
'논어'에 실려 있는 이 성어들은 모두 그것을 가르친다. 지식이 많고 지혜가 깊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말의 무게를 잘 알고 있기에 쉽게 말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역설의 철학자인 노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지자불언 언자부지).”
지혜롭고 지식이 많은 사람은 오히려 말이 없다. 확실치 않은 것을 말할 수 없기에 말을 삼가는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에 떠들고 다닌다. 빈 수레가 요란한 것이다.
'말을 참는다'의 반대는 요즈음 유행하는 '막말'이라고 할 수 있다. 막말은 어학사전을 보면 '되는 대로 함부로 하거나 속되게 말함'이다. '말은 곧 그 사람 자신이다'라는 관점에서 보면 막말을 하는 사람은 함부로 살거나 속된 사람이다. 물론 잘못된 일에 대해 건전한 비판은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라고 해도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려면 그 말에 최소한의 품격이 있어야 한다. 특히 사회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말로써 다른 사람을 더럽히려 한다면 먼저 자기 스스로가 더럽혀진다. '명심보감'에는 이렇게 실려 있다. “다른 사람을 헤아리려면 먼저 자기 자신부터 헤아려라. 남을 해치는 말이 도리어 자신을 해치게 되고, 피를 머금어 남에게 뿜으면 먼저 자기 입이 더러워진다(欲量他人 先須自量. 傷人之語 還是自傷, 含血噴人 先汚其口/욕량타인 선수자량. 상인지어 환시자상, 함혈분인 선오기구).”
바보야, 문제는 관점이야
송나라에 큰 부자가 있었다. 어느 날 소낙비가 내려 집의 담장이 무너졌다. 이를 본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당장 담장을 수리하지 않으면 도둑이 들 것 같아요.” 같은 날 이웃집 사람이 찾아와 같은 말을 했다. “담장을 고치지 않으면 도둑 맞을 걸세.” 공교롭게도 그날 저녁, 부잣집에 도둑이 들었다. 부자는 누구를 범인으로 추측했을까. 맞다. 이웃이었다. 아들에 대해서는 의심은 커녕 준비성이 있다며 대견하게 생각했다. 똑같은 말도 입장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는 이야기이다.
시사점은 한마디로 “바보야, 문제는 (논점보다) 관점이야”다. 논점과 관점의 차이를 영어로 살피면 한결 이해가 쉽다. 논점은 ‘point’, 관점은 ‘point of view’이다. 논점은 논의나 논쟁의 중심이 되는 문제점이다. 관점은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할 때, 그 사람이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 또는 처지, 사물과 현상에 대한 견해를 규정하는 사고의 기본 출발점을 뜻한다.
위 이야기에서 논점은 ‘무너진 담장으로 인한 위기 예방’이다. 똑같은 논점이었음에도 관점에 따라 도둑과 위기 예측자로 갈렸다. 꼭 부자 영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종종 현실에서 이런 실수를 범한다. 갈등의 원인은 관점에 있는데, 논점에서 맴도느라 해결점에 도달하지 못한다.
관점을 살피지 않고 논점만으로 다투면 논의는 빗나가고, 협치(協治)는 요원하다. ‘여기가 중심 포인트’라고 악을 쓰고 주장해 봤자, 입장에 따라 중심과 변두리는 수시로 바뀐다. 관점이 문제인데 논점을 가지고 갑론을박(甲論乙駁)을 벌이니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논점 공격의 칼날을 들이대 봤자 서로 상처만 깊어진다. 논점 방어의 방패로 막아보지만 또 다른 약점들이 계속 나오니 끝이 없다. 섬멸하거나, 소진되거나…. 대국이나 파국을 벗어나 결국 해결책에 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답은 관점에 있다.
첫째, 내 관점부터 살펴라. 내 관점을 알아야 상대와 이야기할 수 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스승 무학(無學)대사가 한 다음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돼지의 눈으로 보면 모두 돼지로 보이고 부처의 눈으로 보면 모두 부처로 보입니다.” 나부터 바꿀 것은 없는지 돌아보라. 같은 행동과 발언도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보는 사람의 시력, 시각이 더 중요하다.
상대의 실수에 ‘네가 그러면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라며 부정적인 낙인을 찍지는 않는가. 못 미더워 일을 못 시키는 건지, 안 시켜서 못 미더워지는 것인지 인과 관계를 파악해보라. 필패(必敗)의 시각을 가진 관리자 밑엔 필패의 구성원만이 모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세상이 온통 역주행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역주행한 것이 이유일 수 있다.
둘째, 상대의 관점을 읽어라. 상대의 관점 해독은 환경, 배경 이해와 통한다. 관점을 알기 위해서는 부분, 표면이 아니라 전체, 이면을 읽어야 한다. 상대편 사람은 무엇이라고 말할까. 어떤 배경에서 이 말과 행동을 하게 됐을까. 어떤 면에서 그 말이 진실일까. 관점을 알수록 일도양단(一刀兩斷)의 섣부른 판단 실수가 줄어든다.
한 고교 상담교사가 들려준 이야기이다. “문제 학생들을 상담하면서 얻은 교훈은 ‘나쁜 학생은 없다. 아픈 학생이 있을 뿐이다’였죠. 욕설에 대한 훈계 열 마디보다 집안형편을 조사해 관심을 표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어요. 말보다 맘이 먼저입니다. 상대의 관점을 읽어야 맘이 보이더라고요.”
셋째, 우리의 관점을 개발해라. ‘바람직함’은 나만의, 너만의 옳은 주장, 최고의 의견이 아니다. 너도 좋고, 나도 좋을 수 있는 공동의 관점을 반영한 제안이다. 가치는 같이할 때 빛난다. 원대한 가치의 외바퀴보다 원만한 가치의 두 바퀴가 잘 굴러간다.
관점(觀點)
사람에게는 저마다 오감이라는 프레임이 있다. 똑같은 사물, 똑같은 현상을 마주해도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느끼는 바가 똑같지 않은 이유다. 사고(思考)가 버무려진 범주는 더욱 딴판이기 마련이다. 한날한시 한 뱃속에서 나와도 행동거지가 다르다고 하지 않던가. DNA는 그 복잡하고 오묘한 구조만큼이나 지문이 모두 다른 것처럼 태생적 특성을 부여한다.
타고난 것에 이러구러 환경적 요인이 덧대지면 관점(觀點)이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읽고 해석하게 된다.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인간관이 되고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은 앵글이 되는 식인데 굳어지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좀처럼 결박을 풀 수 없는 심연 상태가 된다. 어떤 관점이 골수에 박혀 있느냐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인간사 갈등과 반목의 시원(始原) 중 하나가 관점의 차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제아무리 이타적인 성향의 사람이라도 본능적으로 자신의 관점에서 타인을 바라보는 법이다. 피붙이라도 나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없고 다른 사람은 내가 될 수 없어 내 마음 같지 않으니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내 관점만 주입하며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지 않으면 거북한 일이 발생하곤 한다.
천륜인 부모 자식 간이 그렇고, 부부지간이 그러하고 형제자매 간이 그러하며, 천륜 비슷한 친구지간도 그러하다. 순간 뇌가 시킨 대로 움직였을 세 치 혀로부터 서운·섭섭하고, 서럽고, 야박한 감정 따위가 뒤엉킨다.
생리상 비교적 덜 농밀한 사회라는 공간은 관점의 상이가 더욱 예민하게 작용한다. 노사 간이 그렇고, 직장 상하 또는 동료 간이 그러하며 이해관계인 간이 그러하다. 갑을이 존재하는 판인지라 대게는 을이 과포화의 스트레스를 받는다. 경제 활동을 넘어선 사회 구성원 간 시각차도 엄연하다. 이를테면 빈부 격차가 그렇고, 장애와 비장애 간 장막이 그러하며 노인문제와 복지문제 등을 바라보는 견해가 그러하다.
예를 들어 정부가 그토록 입에 침이 마르게 장점을 부각시키는 임금피크제가 왜 노동계에는 뜨거운 감자가 됐는가 하는 데서 관점의 차이는 도드라진다. 정치판에서의 관점지차는 사분오열이나 이합집산의 단초가 되기도 해 이미 애정이 결핍된 관객에게 고도의 피로감을 주곤 한다. 배려하고 이해하는 관점이면 답이 보이련만, 기왕이면 가진 자가, 힘 있는 자가 베풂의 관점을 갖는다면 가정이 평화롭고 사회가 안정되련만, 말이 쉬운가 보다.
누군가는 ‘아는 게 병’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모르는 게 약’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벌써 이만큼이나 했다고 자위하고, 누군가는 아직 이것밖에 못했다고 푸념한다. 같은 비행기를 탑승한 누군가는 너무 낡아 불안하다고 핀잔하고, 누군가는 너무 낡았다는 것은 추락한 적이 없다는 의미이니 안심이라고 토닥인다. 뉘앙스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세상엔 낙관적인 사람이 있고 비관적인 사람이 있다. 적극적인 사람이 있고 소극적인 사람이 있다. 물론 어느 쪽이 맞고 틀린 것이 아니라 다름일 뿐이다.
다만 절망보다는 희망을, 부정보다는 긍정을 바라보는 힘만으로도 일신이 편한 게 인지상정이다. 누구나 로또에 당첨돼 일확천금을 얻지 못한다. 누구도 돌보지 않고 건강을 장담할 수 없다. 누구도 노력하지 않고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 안간힘을 쓴다고 부자가 되고, 건강하고, 바람을 성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사에 에멜무지로보다는 어기차게 덤벼보길 갈망한다.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고 자애심을 키우는 관점을 갖는 데는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는다.
나약한 우리가 재미삼아 기대보는 점(占)보다는 세상과 소통하는 관점(觀點)을 관용과 긍정을 윤활유삼아 기름칠하고 조이는 게 이문 남는 장사가 아닐까 싶다.
▶️ 眞(참 진)은 ❶회의문자로 真(진)의 본자(本字)이다. 사방팔방(八) 어느 곳에서 보더라도(目) 올바른 것으로 참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眞자는 '참'이나 '진실'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眞자는 目(눈 목)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眞자는 본래 鼎(솥 정)자와 匕(비수 비)자가 결합한 글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鼎자는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던 큰 솥을 뜻하고 匕자는 '수저'를 표현한 것이다. 신에게 바치는 음식은 참되면서도 정성이 담겨야 할 것이다. 그래서 眞자는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음식을 바친다는 의미에서 '참되다'나 '진실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眞(진)은 (1)참 거짓이나 허식이 아님 (2)진실(眞實)의 도리(道理). 진리(眞理) (3)일시적이 아님 변하지 아니함. 상주 불변(常住不變) (4)섞임이 없음. 순수(純粹)함 (5)자연(自然). 천연(天然) (6)해서(楷書). 진서(眞書) (7)일부 명사(名詞) 앞에 쓰이어 참된 거짓이 아닌의 뜻을 나타내는 말 (8)중국의 국호(國號)로 춘추시대(春秋時代)의 12열국(列國)의 하나 (9)삼국(三國)의 위(魏)를 이러서 그 권신(權臣) 사마염(司馬炎)이 세운 왕조(王朝) (10)후진(後晉) (11)진괘(晉卦) (1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참 ②진리(眞理) ③진실(眞實) ④본성(本性) ⑤본질(本質) ⑥참으로 ⑦정말로 ⑧진실(眞實)하다 ⑨사실이다 ⑩참되다 ⑪명료(明瞭)하다 ⑫또렷하다 ⑬뚜렷하다 ⑭똑똑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참 심(諶),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거짓 가(仮), 거짓 가(假), 거짓 위(僞)이다. 용례로는 말이나 태도가 참답고 착실함을 진지(眞摯), 거짓이 아닌 사실을 진실(眞實), 진실하여 애틋한 마음을 진정(眞情), 잘 알려지지 않거나 잘못 알려지거나 감추어진 사물의 참된 내용이나 사실을 진상(眞相), 정말과 거짓말 또는 진짜와 가짜를 진위(眞僞), 참된 마음을 진심(眞心), 참된 도리를 진리(眞理), 거짓이 없이 참으로를 진정(眞正), 진짜 물건을 진품(眞品), 진실하고 솔직함으로 참되어 꾸밈이 없음을 진솔(眞率), 실지 그대로의 경계를 진경(眞境), 인위적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성질을 진성(眞性), 진실하여 잘못이 없음을 진제(眞諦), 진짜와 가짜 또는 참과 거짓을 진가(眞假), 참된 값어치를 진가(眞價), 참뜻으로 참된 의사나 진실한 의의를 진의(眞意), 주로 얼굴을 그린 화상 또는 사진을 진영(眞影), 진정에서 우러나온 거짓이 없는 참된 이야기를 진담(眞談), 실물의 모양을 있는 그대로 그려 냄을 사진(寫眞), 마음이 꾸밈이 없고 참됨을 순진(純眞), 임금의 화상이나 사진을 어진(御眞), 공리를 관찰하는 지혜로써 진제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일을 견진(見眞), 사물의 진상을 알게 됨을 득진(得眞), 하늘의 뜻을 받아 어지러운 세상을 평정하고 통일한다는 어진 임금을 일컫는 말을 진명지주(眞命之主), 농담이나 실없이 한일이 나중에 진실로 한 것처럼 됨을 이르는 말을 가롱성진(假弄成眞) 또는 농가성진(弄假成眞), 마음과 몸이 아주 깨끗하여 조금도 더러운 때가 없음을 일컫는 말을 순진무구(純眞無垢), 형태나 사념 따위 현상을 초월한 참된 모습을 이르는 말을 무상진여(無相眞如), 너무도 깊고 그윽하여 그 진면목을 알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 도를 닦는 마음이 뛰어나서 차별이 없는 자리에 있는 진인을 일컫는 말을 무위진인(無位眞人), 사람의 도리를 지키면 뜻이 가득 차고 군자의 도를 지키면 뜻이 편안함을 일컫는 말을 수진지만(守眞志滿), 자성은 바뀌거나 없어지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라는 뜻을 이르는 말을 자성진여(自性眞如),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지경임을 일컫는 말을 여진여몽(如眞如夢), 천진함이 넘친다는 뜻으로 조금도 꾸밈없이 아주 순진하고 참됨을 일컫는 말을 천진난만(天眞爛漫), 가짜가 진짜를 어지럽히고 거짓이 진실을 뒤흔든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이가난진(以假亂眞) 등에 쓰인다.
▶️ 僞(거짓 위, 잘못 될 와)는 ❶형성문자로 偽(위)의 본자(本字), 伪(위), 訛(와)와 통자(通字), 伪(위)는 간자(간자), 化(와)는 동자(동자)이다. 뜻을 나타내는 사람인변(亻=人; 사람)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일을 하다의 뜻을 가지는 爲(위)로 이루어져, 사람이 일부러 하다의 뜻이 전(轉)하여 거짓말하다, 속이다의 뜻이 있다. ❷회의문자로 僞자는 '거짓'이나 '속이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僞자는 人(사람 인)자와 爲(할 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爲자는 코끼리를 조련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하도록 하다'는 뜻이 있다. 고대에는 코끼리를 길들여 짐을 나르거나 재주를 부리도록 했다. 야생에 살던 코끼리를 인간이 길들여 기른다는 것은 분명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僞자는 코끼리를 길들이는 모습의 爲자에 人자를 결합해 인간이 인위적으로 코끼리를 길들이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거짓'을 뜻하게 되었다. 그래서 僞(위, 와)는 어떤 말 앞에 붙어 거짓의 뜻을 나타내는 말로 ①거짓 ②사투리(=訛) ③잘못 ④작위(作爲: 의식적으로 꾸며서 하는 행위) ⑤속이다 ⑥그릇 되게 바뀌다 ⑦그런양 나타내 보이다, 그리고 ⓐ잘못 되다(와) ⓑ틀리다(와) ⓒ고치다, 변화시키다(와)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거짓 양(佯), 거짓 가(假),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바를 정(正), 참 진(眞)이다. 용례로는 위조한 화폐나 지폐를 위폐(僞幣), 본래의 속셈이나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거짓으로 꾸미는 것을 위장(僞裝), 진짜와 비슷이 물건을 만듦을 위조(僞造), 잘못 쓰이고 있는 글자를 위자(僞字), 본심에서가 아니라 겉으로만 하는 착한 일 또는 그것을 함을 위선(僞善), 거짓말이나 허언을 위언(僞言), 딴 사람이 그 작자가 만든 것처럼 비슷하게 만듦 또는 그 작품을 위작(僞作), 위조한 책을 위본(僞本), 위조한 도장으로 가짜 도장을 위인(僞印), 거짓으로 우는 체함을 위곡(僞哭), 거짓 답변을 위답(僞答), 거짓 이름을 위명(僞名), 위조한 물건을 위물(僞物), 거짓으로 꾸민 역사를 위사(僞史), 가짜 편지나 비슷하게 만든 가짜 책을 위서(僞書), 거짓 성인을 위성(僞聖), 짐짓 악한 체함을 위악(僞惡), 겉으로만 사양함을 위양(僞讓), 거짓 증명함을 위증(僞證),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꾸민 것을 허위(虛僞), 정말과 거짓말이나 진짜와 가짜를 진위(眞僞), 속여 꾸밈을 교위(矯僞), 양심을 속이어 거짓을 꾸밈을 사위(詐僞), 거짓을 꾸밈을 식위(飾僞), 거짓으로 속임을 모위(冒僞),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함부로 거짓으로 꾸며 만듦 또는 그러한 거짓을 남위(濫僞),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그럴듯이 꾸민 거짓을 무위(誣僞), 행동이 경솔하고 거짓이 많음을 요위(澆僞), 간사한 거짓이나 간사하고 거짓이 많음을 간위(奸僞), 거짓으로 속임을 궤위(詭僞), 거짓으로 그럴듯하게 꾸미어 행함을 이르는 말을 설가행위(設假行僞), 권한이 없는 자가 타인 명의의 문서를 제멋대로 작성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유형위조(有形僞造), 어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편할 대로 쉬울대로 쫓아 함을 이르는 말을 종편위지(從便僞之) 등에 쓰인다.
▶️ 視(볼 시)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볼 견(見; 보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示(시)는 신이 사람에게 보이다, 見(견)은 눈에 보이는 일이라는 뜻으로 視(시)는 똑똑히 보이다, 가만히 계속하여 보다, 자세히 조사함으 말한다. 見(견)은 저쪽에서 보여오는 일, 視(시)는 이쪽에서 가만히 보는 일을 말한다. ❷회의문자로 視자는 '보다'나 '보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視자는 示(보일 시)자와 見(볼 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갑골문에서는 示자와 目(눈 목)자가 합한 형태였다. 여기서 示자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을 그린 것으로 '보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보이다'라는 뜻을 가진 示자에 目자가 결합한 視자는 '신이 보이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단순한 의미에서의 '보다'나 '~로 여기다', '간주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視(볼 시)는 ①보다 ②엿보다 ③보이다 ④간주하다 ⑤맡아보다 ⑥본받다 ⑦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살필 찰(察), 살필 심(審), 조사할 사(査), 검사할 검(檢), 볼 감(監), 벼슬 감(監), 바라볼 조(眺), 보일 시(示), 볼 견(見), 볼 람(覽), 볼 관(觀), 볼 열(閱), 나타날 현(顯)이다. 용례로는 빛의 자극을 받아 눈으로 느끼는 것을 시각(視覺), 눈이 가는 방향을 시선(視線), 눈으로 봄과 귀로 들음을 시청(視聽), 눈의 보는 힘이 미치는 범위를 시야(視野), 눈이 보는 힘이 미치는 범위를 시계(視界), 돌아다니며 실지 사정을 살펴 봄을 시찰(視察), 물체의 존재나 형상을 인식하는 눈의 능력을 시력(視力),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를 시정(視程), 사무를 봄을 시무(視務), 존재나 있는 값어치를 알아주지 아니함을 무시(無視), 경계하기 위하여 미리 감독하고 살피어 봄을 감시(監視), 주의해서 봄이나 자세히 눈여겨 봄을 주시(注視), 가볍게 봄이나 가볍게 여김을 경시(輕視), 착각으로 잘못 봄을 착시(錯視), 가까운 데 것은 잘 보아도 먼 데 것은 잘못 보는 눈을 근시(近視), 먼 데 것은 잘 보이고 가까운 데 것은 잘 보이지 않는 시력을 원시(遠視), 눈을 돌리지 않고 똑바로 내쏘아 봄을 직시(直視), 간섭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음을 좌시(坐視), 눈길을 주어 한동안 바라보는 것을 응시(凝視), 돌아다니며 보살핌을 순시(巡視), 업신여기거나 냉대하여 흘겨봄을 이르는 말을 백안시(白眼視), 안중에 두지 아니하고 무시한다는 말을 도외시(度外視), 따뜻하고 친밀한 마음으로 본다는 말을 청안시(靑眼視), 백성을 제 자식처럼 여긴다는 말을 시민여자(視民如子), 죽음을 삶같이 여기고 두려워하지 아니한다는 말을 시사여생(視死如生), 죽는 것을 고향에 돌아가는 것과 같이 여긴다는 뜻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한다는 말을 시사여귀(視死如歸), 보고도 보지 못한 체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시약불견(視若不見), 보기는 하되 보이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시이불시(視而不視), 우물 속에서 별을 본다는 뜻으로 우물 안에서는 겨우 몇 개의 별밖에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이 사사로운 마음에 가리우면 견해가 한 편에 치우치게 됨을 이르는 말을 정중시성(井中視星), 열 사람의 눈이 보고 있다는 뜻으로 세상 사람을 속일 수 없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십목소시(十目所視), 범이 먹이를 노린다는 뜻으로 기회를 노리며 형세를 살핌을 비유하는 말을 호시탐탐(虎視眈眈), 눈으로 먹고 귀로 본다는 뜻으로 맛있는 것보다 보기에 아름다운 음식을 좋아하고 몸에 맞는 것보다 귀로 들은 유행하는 의복을 입음을 이르는 말을 목식이시(目食耳視) 등에 쓰인다.
▶️ 次(버금 차/머뭇거릴 차)는 ❶회의문자로 피곤하여 하품(欠)하며 다음으로 미룬다는 뜻과 二가 이수변(冫: 고드름, 얼음)部가 되어 두 번째를 뜻하여 '버금'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次자는 '버금'이나 '다음', '차례'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次자는 二(두 이)자와 欠(하품 흠)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여기서 二자는 단순히 침이 튀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입에서 침이 튀는 모습은 남을 나무란다는 뜻이다. 그래서 次자는 ‘마음대로’나 '비방하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하지만 후에 '버금가다'나 '다음'이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본래의 의미는 더는 쓰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여기에 心(마음 심)자를 더한 恣(마음대로 자)자가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次(차)는 ①버금(으뜸의 바로 아래), 다음, 둘째 ②다음에, 이어서 ③안, 속 ④차례(次例), 순서(順序) ⑤부차적(副次的)인 것 ⑥거처(居處) ⑦곳, 장소(場所) ⑧장막(帳幕), 임시(臨時) 거처(居處) ⑨자리, 위계(位階) ⑩진영(鎭營), 병영(兵營) ⑪성좌(星座), 성수(星宿: 모든 별자리의 별들) ⑫여관(旅館) ⑬빈소(殯所), 여막(廬幕) ⑭때, 기회(機會) ⑮번, 횟수(回數) ⑯행렬(行列) ⑰가, 근처(近處) ⑱재료(材料), 감 ⑲매기다, 차례(次例)를 정하다(定--) ⑳늘어놓다, 줄지어 세우다 ㉑(뒤를)잇다 ㉒엮다, 편찬하다(編纂--) ㉓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到達--) ㉔머무르다, 묵다 ㉕머뭇거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유의어로는 亞(버금 아, 누를 압, 흰흙 악), 仲(버금 중), 副(버금 부, 쪼갤 복, 쪼갤 핍, 쪼갤 벽), 番(차례 번, 날랠 파, 땅 이름 반) 등이다. 용례로는 어떠한 상태가 조금씩 진행하는 모양을 차차(次次), 순서있게 벌여 나가는 관계나 그 관계에서 본 하나 또는 여럿을 각각 선후로 구분하여 벌인 것을 차례(次例), 일반적인 공간의 넓이의 정도를 나타내는 수 또는 어떤 사물을 생각하거나 행할 때의 입장 또는 그 정도를 차원(次元), 다음의 시기를 차기(次期), 둘째 아들을 차남(次男), 최선의 다음 정도를 수석의 다음 자리 또는 그 사람을 차선(次善), 일의 순서나 방법을 절차(節次), 차례대로 차차나 점점을 일컫는 말을 점차(漸次), 앞으로나 차차를 일컫는 말을 장차(將次), 여러 차례를 누차(屢次), 두 번째나 두 차례째 또는 또 다시나 거듭하여 다시를 일컫는 말을 재차(再次), 웃어른이 길 가는 것을 높이어 일컫는 말을 행차(行次), 책 따위의 기사의 순서나 목록을 목차(目次), 어떤 사물의 부수적인 것을 부차(副次), 이 해의 차례는의 뜻으로, 제문의 첫머리에 쓰는 문투를 이르는 말을 유세차(維歲次), 잠깐도 떠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조차불리(造次不離), 연한이 차서 퇴직할 차례를 이르는 말을 거관당차(去官當次), 관계의 차례를 밟지 않고 특별하게 벼슬에 올려서 씀을 이르는 말을 불차탁용(不次擢用)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