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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요한 1서의 말씀 1,5―2,2>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5 듣고 이제 여러분에게 전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6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7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9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10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2,1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13-18>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6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17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8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오늘 기념하는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축일'은 무죄한 이들의 고통의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이 ‘죄 없는 아기들이 학살당한 일’은 겉으로는 헤로데의 잔인한 학살을 드러내지만, 실상은 메시아가 태어났음을 알려줍니다.
곧 그들의 죽음은 구유에서 태어난 아기가 메시아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메시아가 나타나심에 대한 지상의 왕의 두려움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헤로데의 죄 없는 아기 학살을 두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레미아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라마에서 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 2,18)
이는 예레미야가 아들을 잃은 야곱의 아내 라헬의 통곡을 들어 예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마리아를 신약의 ‘새로운 라헬’이라 칭합니다.
곧 라헬이 일생동안 고통을 겪고 죽음의 고통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면, 마리아 역시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루카 2,35) 십자가의 고통을 겪음으셨던 ‘고통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또 라헬이 예레미아서에서 ‘이스라엘의 어머니’(예레 31,15)라 칭해지듯이, 마리아는 요한묵시록에서 “예수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을 가리켜 메시아 어머니의 “후손들”(묵시 12,17;12,1-6 참조)이라 칭하기에 전체 ‘교회의 어머니’라 칭해집니다.
그리고 라헬이 하느님 앞에서 지상의 자녀들을 위해 슬퍼하며 울음으로 전구했듯이, 마리아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가장 유력한 ‘기도의 전구자’가 되십니다.
또한 우리는 ‘무죄한 어린이의 희생’을 들으면서 앞서 있었던 모세가 히브인들을 억압하면서 저질렀던 어린 사내아기들을 살해한 사건을 기억합니다.
사실 파라오와 헤로데, 그들은 모두 자신을 지키고자 빛을 두려워한 이들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러한 완고함과 자기중심적인 폭력과 독선과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지 않는지 잘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자신의 왕국의 지키기 위해 사랑의 왕국을 저버리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이유를 확고하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마태 2,14)
이는 하느님께서 베푸는 구원의 역사는 그 어떤 어둠에도 방해에도 아랑 곳 없이 반드시 이루지리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기 때문에 다른 죄 없는 아기들이 살육당한 소식을 들었을 때, 아기 예수님의 어머니 마음은 어떠했을까?
살인자 아닌 살인자가 되어버린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분명 죽어가는 아기들의 “울음소리”보다 어머니들의 “애끊는 통곡소리”가 훨씬 더 컷을 것입니다.
아기들의 슬픔은 한 순간이었고 그들의 죽음은 슬픔의 끝이었겠지만, 아기를 잃은 어머니들의 슬픔은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그 죽은 아기 어머니들의 아픔을 마리아는 통째로 짊어지셔야만 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의 아기가 희생되어 다른 아기들을 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토록 그녀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차라리 죽는 것보다도 더 큰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에 모든 책임을 떠맡아 고통을 받아야 했던 마리아는 또다시 아무런 죄도 없는 당신 아드님 예수님의 죽음을 떠맡아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죄 없으면서도 타인의 허물을 뒤집어써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인가 봅니다.
아기 예수님도 훗날 타인의 허물을 뒤집어쓰고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혹 ‘무죄하면서도 억울함을 당할 때’가 있다면, 바로 그 일을 순교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주님!
어처구니없고 황당할 때,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때,
그 슬픔을 넘어 구속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 2,18)
주님!
자신의 아기 때문에 다른 아기들이 살육당할 때, 어머니 마음은 미어지셨을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의 아기를 희생시켜 다른 아기들을 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토록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죽는 것보다도 더 큰 아픔을 짊어지는 일인가 봅니다.
그러니 저희도 어처구니없고 황당할 때,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때,
어머니 마리아처럼 슬픔을 넘어 구속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언젠가, 묵상을 하던 중 프란치스코가 몇 살에 돌아가셨는지 따지다가 저는 너무 많이 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이 있는지, 언젠가 죽을 것인데 왜 사는 것인지, 오래 사는 사람은 왜 오래 사는 것이고, 일찍 죽는 사람은 왜 일찍 죽는 것인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많은 사람은 오래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일찍 죽는 것인지, 이 세상에서 많은 일을 하면 훌륭한 삶이고 그렇지 않으면 삶을 잘못 산 것인지.
그런데 많은 일, 업적, 장수, 이런 것을 생각하니 왠지 다 그런 것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고, 오래 산다는 것도 추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런 것을 초월하는 삶의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이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인데, 그런 것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가치랄까, 가치 기준이랄까, 그런 것이 꼭 있을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아무리 많은 업적을 이 세상사는 동안 남겼다 해도 결국 죽고 마는데 자기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결국 죽고 마는데 그것이 자기에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잘 살고 못 사는 것의 절대적인 기준은 무엇이겠습니까?
제 생각에 그리고 매우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잘 죽는 것입니다.
아무리 영화로운 삶이었어도 죽을 때 잘못 죽으면, 다시 말해서 최후가 좋지 않으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지요.
그리고 젊어 아무리 칭송받는 삶을 살았더라도 변절한다면 그 인생도.
그렇다면 다시,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이고 그 기준이 무엇인지 묻게 되는데, 그것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죽음이 잘 죽는 죽음이고, 그리고 그것은 또 영원하신 하느님 손 안에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시간적으로는 영원을 향하여 정렬되어 있어야 하고, 인격적으로는 하느님을 향하여 정렬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당장의 이익과 즐거움과 만족을 위해 인생이 이리저리 흔들리면 안 되고, 대열이 흩어져서도 안 되며, 이 사람에게 끌려가고, 저 사람에게 끌려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겠지요.
오늘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은 하느님께 직행한 아기들의 죽음입니다.
헤로데에 의해 죽었지만 실은 주님 때문에 죽은 아기들이고, 그래서 오래 살아 죄에 오염되는 일 없이 하느님께 직행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축일의 의미는 거대한 질문에 대한 교회의 답입니다.
선하신 하느님에게서 어떻게 세상의 죄와 악이 나오는지?
사랑이신 하느님이신데 어찌 세상에 고통이 있으며, 죄 없는 사람과 착한 사람이 고통을 더 받는지?
하느님은 사랑하시기에 우리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고, 자유를 주셨기에 죄를 짓기도 하고 죄로 인한 악도 발생하며, 자유를 주셨지만 유한한 이 세상에서는 한계를 주셨기에, 유한한 이 세상에서 유한한 인간이 겪는 것이 고통과 죽음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고통과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입니다.
다만 그 고통과 죽음이 영원과 하느님을 향한 고통과 죽음이냐 아니냐, 하느님을 위한 고통과 죽음이냐 아니냐가 다를 뿐이고 관건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순교자의 피>
성 예로니모는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순교자들의 희생과 증거의 삶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그들의 모범을 따라 주 하느님께로 나갑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하며 주님의 품을 찾은 첫 순교자 스테파노, 오늘 기억하는 죄 없는 어린이들의 순교는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열정을 일깨워 주며 또한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큰 화를 불러오는지 가르쳐 줍니다.
헤로데는 두 살 이내의 아기를 모조리 죽여서(마태 2,16) 자기의 권력을 넘보는 싹을 잘라 버리고자 했습니다.
이런 일은 이미 이스라엘이 한창 피어날 때 이집트에서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과 생명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아들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
(탈출 1,22)
이런 일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도처의 전쟁도 그렇고, 2021년 2월 18일 실시간 세계 낙태 건수는 무려 5,662,422 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낙태 건수는 정부 추정치만 연 3만3천여 건에 이릅니다.
2005년에는 34만 건이나 되었죠.
출생아는 2020년 27만 명을 밑돌았으니 소리소문없이 낙태로 희생되는 생명들이 얼마나 많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보호받아야 할 태아들이 어머니 뱃속에서 죽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부모들의 이기적인 마음과 인간의 이기심이 무죄한 생명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유린하고 있으니 그들의 통곡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어린아이를 방치하고, 방치를 넘어 학대를 일삼은 부모 이야기가 종종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모성과 부성을 잃어가는 세태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보다 태아의 생명권이 우선이라는 사실은 양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질투심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요셉은 한밤중에 천사가 전해준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마태 2,13)
요셉은 그 말씀을 듣고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습니다’(마태 2,14).
온갖 어려움을 감당하며 지체없이 발길을 옮기는 요셉의 태도는 곧 순교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은 일상 안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몸에 배어있는 행동입니다.
우리도 언제 어느 때 부름을 받던지 기꺼이 따라나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순교는 일상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말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자기 의지를 희생으로 바쳤다면 그 사람을 감히 순교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하느님의 손길과 안배는 언제나 함께 합니다.
악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련과 고통,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분의 손길과 요청에 단호히 응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순교자들이 이 지상에서 소멸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천국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어떤 처지와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의 뜻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무죄한 아기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이 기나긴 어둠 속의 방황이 끝나면, 우리로 하여금 밝은 햇빛 아래로 걷게 하십시오>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자질이나 덕성이 심각하게 결핍된 리더,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리더로 인한 폐해는 언제나 무고한 사람들에게로 돌아갑니다. 특히 한 나라의 지도자가 그러할 때 폐해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히틀러가 그랬습니다.
네로 황제가 그랬습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우리나라 역사 안에서 쉽게 그런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고,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 역시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습니까?
그 한 사람의 그릇된 생각,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습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역시 마찬가지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을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즉흥적이고, 또 얼마나 포악한지, 얼마나 앞뒤 생각 않고 행동하는지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그는 동방박사들에게 속은 것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습니다.
머리 뚜껑이 활짝 열리다 보니 이성을 잃었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해서는 안 될 명령을 내렸습니다.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당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들은 이유도 묻지 않습니다.
말도 필요 없습니다.
다짜고짜 애지중지, 금지옥엽, 키우고 있는 사내아이들을 부모가 보는 앞에서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갑작스럽게 생떼같은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들의 통곡 소리가 하늘에 닿을 지경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랄 일이며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무고하게 학살당한 그 어린아이들의 영혼을 당신 사랑의 품 안에 거두시어 큰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께서는 죄 없이 죽어간 아기 순교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무엇인가를 원하시리라 믿습니다.
개념 없는 지도자, 정신 나간 리더들의 돌발행동으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움직이는 것, 불의 앞에 침묵하지 않는 것,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것, 참 정의, 참 진리의 길을 따라 움직이는 신앙인이 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을까요?
뿐만 아니라 더 요구되는 행동이 있습니다.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희생자들을 치료하기, 통제 불능인 자동차를 멈추게 만들기...
이 무서운 시절의 소란이 끝나면
우리에게
확신의 시절을 주십시오.
이 기나긴 어둠 속의 방황이 끝나면,
우리로 하여금
밝은 햇빛 아래로 걷게 하십시오.
거짓의 굽은 길이 끝나면,
우리에게
당신 말씀의 길을 열어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께서 우리의 범죄를 씻어주실 때까지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견디게 하여 주십시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전한다는 말을 했습니다(루카 2,10).
‘메시아 강생 소식’은 ‘온 백성에게’, 즉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한 것은 아닙니다.
(적은 수의 사람들만 기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워하거나 싫어했고, 어떤 사람은 놀라기만 했습니다.
‘메시아 강생 소식’에 대해서 관심 갖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메시아께서 태어나신 곳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헤로데는 왕권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기득권층 사람들에게는 ‘메시아 강생 소식’은 ‘듣기 싫은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동방 박사 이야기에 나오는 사제들과 율법학자들, 예루살렘 주민들은 그 소식을 듣고 놀라기는 했는데(마태 2,3), 그들은 놀라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메시아 강생’ 자체에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의 머리글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요한 1,4-5)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요한 1,11)
헤로데가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학살한 일은 헤로데 한 사람만의 범죄가 아닙니다.
메시아 강생을 반기지 않은 사람들(싫어한 사람들)과 무관심했던 사람들도 공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베들레헴에서 벌어진 일과 호세아서 11장의 예언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오복음에 인용되어 있는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라는 말만 보면, 예수님이 이집트로 피난가셨다가 돌아오신 일을 복음서 저자가 새로운 ‘출애굽’으로 해석한 것처럼 보이는데, 호세아서 11장을 근거로 해서 보면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나의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그러나 내가 부를수록 그들은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들은 바알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우상들에게 향을 피워 올렸다.”
(호세 11,1-2)
호세아서 11장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등지고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 것을 꾸짖는 말씀이고, 회개하라고 호소하는 말씀입니다.
호세아서에 있는 ‘내 아들’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라는 말은 “이집트에서 구출했는데도 왜 나를 배반하느냐?” 라고 꾸짖는 말씀입니다.
호세아서의 원래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마태오복음의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라는 말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셨는데도 사람들은 메시아를 반기기는커녕 박해했고, 죽이려고 했다.” 라고 꾸짖는 말이 됩니다.
베들레헴에서 벌어진 일은 ‘하느님의 뜻’이었나?
아닙니다.
‘인간의 범죄’입니다.
“베들레헴의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한 일이다.” 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피해자들의 심정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너무 일방적인 해석입니다.
아기들은, 또 그 부모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런 해석이 피해자들에게 위로가 될까?
예수님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감만 커질 것입니다.
이런 의문들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천사는 요셉에게만 말했나?, 아기가 있는 다른 집에도 말했나?
요셉은 곧 일어날 일을 혼자서만 알고 그냥 떠나버렸나? 아니면 다른 집에도 알려 주었나?
예수님만 살고 다른 아기들은 죽는 것이 하느님의 계획이었나?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안전만 신경 쓰시고 다른 아기들은 외면하셨나?
천사를 미리 보내실 거라면, 헤로데를 막든지, 헤로데가 보낸 군인들을 막는 것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아기 예수님만 보호하고 다른 아기들은 외면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또 천사는 요셉에게만 말한 것이 아니라 다른 집에도 말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마태 1,19) 다른 집의 사정을 외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떠나기 전에 어떻게든 다른 집에도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다른 천사가 헤로데와 군인들을 막는 일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복음서 저자가 기록한 것은 일의 결과뿐입니다.
우리는 그 과정이 실제로 어땠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나중에 죽으려고 아기 때에는 죽음을 모면한 것은 아닙니다.
복음서는 미리 잘 짜놓은 각본이 아니고, 예수님의 구원 사업은 그 각본대로 진행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고, 즉 살리려고 오신 분인데, 헤로데 같은 자들은 구원받기를 거부하고 ‘죽을 길’로 갑니다.
그런 자들 때문에 베들레헴의 아기들 같은 억울한 피해자들이 생기는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오늘날까지도...
범죄를 막고,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인간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직도 여전히 우리의 숙제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빛과 어둠의 싸움 - “회개하라! 기억하라! 잊지마라! 역사는 반복된다!”>
“이들은 하느님과 어린양께 바친 맏물로 사람들 가운데에서 속량되었으니,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리라.”
(영성체송)
1978년 초판 이후 300쇄 이상을 찍은 조세희 작가의 중편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란 스테디 셀러를 기억하시는지요?
여전히 큰 울림을 주는 소설의 내용은 지금도 영원한 현재 진행형입니다.
소설 중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도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계획이 아니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고통을 알아주고 그 고통을 함께 져줄 사람이었다.”
바로 그 조세희 작가가 3일 전 12.25일 80세로 영면했습니다.
그가 남긴 명언 몇마디를 오늘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에 나눕니다.
“당신은 비겁한 자의 자식, 억울한가? 그럼 분노하라!”
“이 땅에서 바로 이 시간에 ‘행복하다’ 믿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다음 두 부류중 하나다.
하나는 도둑이고 하나는 바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죽으면 하늘의 별이 된다고 믿는 것, 고통으로 잠 못 이루고 우는 사람이 있는 한 그 한 사람을 위해 신화는 계속돼야 한다고 끝끝내 믿는 것.
이게 혁명의 정의다.”
“역사의 빛나는 순간엔 늘 절규하는 사람이 있었고, 순간의 역사가 빛나는 건 그 사람의 절규가 진실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절대로 냉소주의에 빠지지 말라.
그것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국민을 괴롭히는 적들이 제일 좋아하는 일이다.
이 시간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쓰러지지 않을 철기둥을 박아두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버텨내면서 빛이 보이는 곳으로 달려가야 한다.”
“역사에서 절대 생략은, 도약은 없다.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를 어느 날 하루아침에 훌쩍 뛰어 넘어 새 세상으로 갈 수는 없다.
더디더라도 누군가는 한 걸음씩 밀림을 헤쳐 나가야만 앞이 확트인 개활지의 환한 빛을 만날 수 있다.”-
현대판 예언자와도 같은 통찰이 번뜩이는 잠언같은 말마디들입니다.
빛과 어둠의 끝없는 싸움의 인류 역사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어둠이 빛을, 거짓이 진리를 이겨본 적이 없다 하지만 때로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입니다.
오늘은 성탄 8부에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이 있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됩니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중인 죄없는 자들의 반복되는 악순환의 죽음입니다.
얼마나 많은 죄없는 영혼들이 죽음이었고 죽음이고 죽음이겠는지요!
해결되지 않은 미완의 사건들은 계속됩니다.
세월호 사건이 그렇고 얼마 전의 10.29 참사로 인한 죄없이 죽은 159명 젊은 영혼들의 죽음이 그러합니다.
얼마 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10.29 참사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성탄 대축일 미사” 때는 강론 대신 유가족들의 슬픈 사연을 들었다 합니다.
우리를 영원히 잊지 말아 달라는 문귀,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 라는 말마디를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철저한 회개와 연대, 기억일 것입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죄없는 이들의 아기 순교자들 축일엔 당시 1000명 정도의 베들레헴 주민에 약 20명 정도 아기들이 폭군 헤로데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모세 때 잔인한 폭군 파라오에 죽은 죄없는 아기들의 죽음이 반복된 것입니다.
바로 이 죽음은 빌라도에 의한 예수님의 죄없는 죽음의 전조와도 같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죄없는 이들의 죽음입니다.
오늘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은 교회가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아침 성무일도중 위로가 되는 초대송 후렴, 찬미가, 후렴을 나눕니다.
1. 초대송 후렴; “무죄한 어린 순교자들의 화관이신 그리스도 나셨으니 어서 와 조배드리세.”
2.찬미가; “깨끗한 아기들의 죄없는 죽음, 주님을 위하여서 빛을 발하니, 천사는 두 살 아래 모든 아기를, 하늘로 옹위하여 데려 갔도다.”
3.후렴1; “어린이들은 마치 어린양처럼 뛰놀며, 그들을 구원하신 주님을 찬양하였도다.”
후렴2; “그들은 사람들 가운데 구출되어 하느님과 어린 양에게 바쳐진 첫 열매이며, 아무런 흠없이 하느님의 옥좌 앞에 서 있는도다.”
후렴3; “영원한 그리움이 그들 위에 있고, 기쁨과 즐거움이 따르겠으며, 걱정과 한숨은 사라지리라.”
오늘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은 파스카 주님 덕분에 위로와 구원을 누리지만, 주님을 모르는 죄없는 이들의 죽음은, 특히 10.29 참사 희생자들은 어떻게 되겠는지요?
우리 교회는 이들을 기억하고 저희들은 감히 이들에게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오늘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과 더불어 우리는 국가가 그 책무를 다하지 못해 억울하게 죽은 159명의 젊은 20대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미사를 봉헌합니다.
참으로 오늘 우리가 명심할 사항은 빛과 어둠,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끊임없는 싸움에서 꼭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두 가지입니다.
1 “회개하라! 기억하라! 잊지마라! 역사는 반복된다!”
악순환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는 회개가 필수입니다.
우리 안팎은 선과 악,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의 영적 싸움터입니다.
끊임없이 선과 빛,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님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란 말씀이 불쌍한 159명 희생자들에도 해당된다 싶어 고맙습니다.
저절로 주님의 자비를 청하게 됩니다.
2. “빛속에 살아가십시오!”
하느님은 빛이시며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줍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인물이 오늘 복음의 요셉입니다.
얼핏보면 요셉과 헤로데의 싸움인 듯 하지만, 실은 하느님과 헤로데의 싸움, 빛과 어둠의 싸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빛 속에 하느님의 인도를 받는 빛의 사람, 요셉을 어찌 어둠과 거짓의 폭군 헤로데가 이길 수 있겠는지요!
노력과 더불어 은총입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회개로 주님의 선과 빛, 진리 중에 살아가는 분투의 노력이 제일입니다.
이래야 반복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죄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죄없이 죽은 억울한 이들에게 주님의 자비를 청하고, 이런 악순환의 역사가 우리 현실에서 반복되지 않도록 끊임없는 회개와 기억의 삶, 빛과 진리의 삶을 살도록 이 거룩한 미사 중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찬미하나이다, 주 하느님.
주님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나이다.
눈부신 순교자들의 무리가 주님을 찬양하나이다.”
(복음 환호송)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다소 무겁습니다.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마태 2,16)
유다인들의 임금이 될 아기가 태어났다는 동방 박사들의 말에 불안해진 헤로데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아기들을 무자비하게 죽입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을 빠져나간 뒤에 벌어진 일이지요.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마태 2,13)
하느님께서 천사를 통해 성가정을 이집트로 피신시킨 덕에 아기 예수님은 목숨을 건집니다.
다른 아기들이 하느님께 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직 예수님의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마태 2,18)
이 복음 말씀은 읽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말을 삼키고, 그저 아기를 잃은 베들레헴 어머니들의 슬픔을 애도하고 연민하게 되지요.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서 누군가를 대신해 피해를 입거나 죽음을 당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의도해서 떠안기도 하고, 영문도 모른 채 당하는 일도 부지기수지요.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아기 순교자들은 후자에 속할 것입니다.
이천 년 전에, 그리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이 세상 라헬들의 비통한 울음은 성모님의 슬픔 안에 함께 녹아 뒤엉켜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요한 서간의 저자는 타인을 위해 스스로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1요한 2,2)
죄 없는 아기들이 제 목숨을 바쳐 수호한 아기 예수님께서 훗날 인류의 죄를 속량하는 어린양이 되시어 당신을 희생하십니다.
원죄의 그늘에 갇혀 있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죄의 짐을 벗고 영원한 생명을 되찾게 되었지요.
어쩌면 우리가 누리는 생명은 이처럼 다른 누군가가 희생한 생명 덕분일지 모릅니다.
이렇게 생명이 생명으로 이어지는 고리를 통해 우리에게까지 건너온 것이지요.
우리가 먹는 음식부터, 태어나서 여태까지 받아온 보호와 돌봄, 의학과 법률과 신앙 등 모든 영역을 깊이 관상해 보면, 자신을 비워 타인에게 보탠 생명의 흔적이 가득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누리는 생명이 얼마나 무한히 가중된 무게의 가치인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지요.
그래서 생명 하나하나가 그토록 소중한 것인 게지요.
"이들은 하느님과 어린양이 바친 맏물로 사람들 가운데에서 속량되었으니,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리라."
(영성체송)
교회는 육신의 소멸이 끝이 아님을 믿기에 순교자들이 누리는 천상 영광을 확신합니다.
모든 생명이 소중하기에, 생명을 살리는 모든 희생은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하지요.
순교의 보상은 천상에서 누릴 지복직관의 행복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주님의 성탄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축제 한가운데에서, 무죄한 아기 순교자들의 천상 탄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해 못하는 이 역설이 저마다 상실의 응어리를 한두 개씩 안고 사는 우리에게 어쩌면 희망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기꺼이 내놓았건 잃어버렸건 우리가 이웃과 세상에 보탠 생명은 사랑과 위로로 배가되어 누군가를 좀 더 행복하게 해 줄 터이고, 우리 또한 지복의 희망을 선사받은 것이니까요.
오늘 세상의 모든 라헬들이 이 희망을 만나 눈물을 그치고 위로받기를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무죄한 죽음과 상실의 고통이 사라질 그때까지 지치지 않고 기도와 연민을 보태며 함께할 수 있기를 다짐하며 바래봅니다.
오늘 특별히 낙태로 인하여 영문도 모르고 생명을 잃게된 어린 영혼들을 미사중에 기억합니다.
주님, 당신의 십자가 희생으로 이들에게 영원한 안식과 생명을 주소서.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2000년 전입니다.
헤로데 왕은 동방박사들이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이 태어났다는 ‘메시아’의 소식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헤로데는 보고를 받은 후에 이렇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2살 이하의 어린아이는 모두 죽여라.’
동방박사에게 ‘메시아가 태어난 곳을 알려 주시면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라고 했던 말과는 전혀 다른 결정을 내렸습니다.
헤로데의 결정으로 예루살렘에는 아이를 잃은 부모님들의 통곡소리가 가득했습니다.
이제 막 아이를 출산한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요셉과 함께 이집트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마태오는 이런 일들이 성경에 예언된 사건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사후약방문’이었을지 모릅니다.
만일 헤로데가 2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모두 왕궁으로 초대했으면 어땠을까요?
그래서 성대한 잔치를 열어주었으면 어땠을까요?
그러면 마태오 복음사가는 또 다른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하느님의 구원이 시작되었다고 했을지 모릅니다.
지난 10월 29일에 158명이 숨지는 ‘참사’가 있었습니다.
사고의 책임자를 찾아서 문책하는 것도 참사의 수습 방법입니다.
다시는 그런 참사가 생기지 않도록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세우는 것도 참사의 수습 방법입니다.
특별수사본부가 엄정하게 수사를 하는 것도 참사의 수습 방법입니다.
국회에서 국정조사를 통해서 진상을 밝히는 것도 참사의 수습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가슴에 품고 하늘나라로 떠나보내야 했던 유족들의 아픔 마음과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그분들의 슬픔을 위로하면 좋겠습니다.
참사의 책임규명과 진상규명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린 유족들의 슬픔을 대신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공감하고, 함께 위로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언젠가 역사는 그날의 사건을 기억하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날의 아픔을 우리는 함께 공감했다. 비록 슬픔이 컸지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어떤 분이 고통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고통은 우리의 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아이가 뜨거운 것을 못 느낀다면, 아이가 추위를 못 느낀다면, 아이가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이는 어른으로 성장하기 전에 신체장애를 얻을 것입니다.
고통은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몸을 위험으로부터 피하게 만들어 줍니다.
고통은 소중함을 알게 합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자녀들을 더욱 소중하게 여깁니다.
이는 출산의 고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가에게는 자신의 쓴 작품들이 무척 소중할 것입니다.
그런 작품을 쓰기 위해서 수많은 날을 고민하고 갈등했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공동체를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소방공무원이 위험을 무릅쓰고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태석 신부님께서 저 멀리 아프리카에 가서 모든 것을 내어 주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도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인생이 기쁨과 즐거움만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탄의 기쁨은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도 아닙니다.
그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축복을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이 참된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철저한 섬김이요, 나눔이었습니다.
권력을 지녔지만 사용하지 않았고, 섬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 할 길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주님!
세상을 떠난 무고한 사람, 억울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중학생 때, 등하교를 같이했던 동네 친구가 있었습니다.
집이 가까워서 학교까지 함께 걸어갔고, 집에 올 때도 같이 걸어왔습니다.
아마 중학생 때 제일 친했던 친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날 함께 걸어오면서 학교의 반 친구 흉을 제가 말했습니다.
이 친구는 자기 공부만 하고 너무 이기적이라는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말을 들은 친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네가 더 심해.”
이 말에 기분이 좋지 않아 인상을 쓰자, 착한 친구는 “농담이야.”라면서 얼버무렸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저를 떠올리면서 흉을 봤던 친구보다 분명히 더 심했던 것 같습니다.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아이가 바로 저였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며, 당시에는 왜 이렇게 남에 대해 흉을 많이 봤나 싶습니다.
사실 남 험담하는 사람이 공통점은 자존감이 낮다고 하지요.
자신에게 불만이 많고 열등감이 심해서 다른 사람에 대해 험담하게 된다고 합니다.
제가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흉이 흉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은 부메랑이 되어 다시 저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주는 대로 받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칭찬은 칭찬을 낳고, 험담은 험담을 낳습니다.
때로는 여기에 이자가 붙어서 돌아오기도 합니다.
적대감을 가지고 하는 부정적인 말과 행동이 아닌,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이 가득 담긴 긍정적인 말과 행동이 우리의 말과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이자까지 더해서 더 좋은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을 기념합니다.
갓 태어나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린 헤로데 대왕은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요?
어린아이를 죽인 것은 자기 권력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서였지요.
하지만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로, 절대 적지 않은 나이였습니다.
실제로 이 악행을 저지르고 얼마 못 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못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끝까지 행복할 수 없었던 헤로데 대왕이 만약 사랑으로 아기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늘 나라에서 구원의 길이 활짝 열렸을 것입니다.
우리도 끝까지 나의 욕심과 이기심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며 말과 행동에 늘 사랑을 가득 담아야 할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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