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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2,14ㄱ.36-41
오순절에,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36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37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8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39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40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증거를 들어 간곡히 이야기하며,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고 타일렀다.
41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
제2독서
▥ 베드로 1서의 말씀 2,20ㄴ-25
사랑하는 여러분,
20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
21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
22 “그는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그의 입에는 아무런 거짓도 없었다.”
23 그분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당신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24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25 여러분이 전에는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분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돌아왔습니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0,1-1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양들의 문이다.”>
제1독서는 오순절에 베드로가 사도 베드로가 했던 설교의 결론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사도 2,36)
이는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이요 “메시아”로 삼으신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회개하십시오.
~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사도 2,38)
그리고 그는 제2독서인 그의 편지에서 고백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베드 2,2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자와 도둑의 비유”를 통해 당신 자신을 계시해주십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요한 10,7)
‘문’은 드나드는 통로입니다.
곧 ‘문’은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이 “문”은 “드나드는 문”으로 하나의 문이지만 두 방향을 갖고 있습니다.
한 방향은 밖에서 “양 우리”로, 다른 한 방향은 “양 우리” 안에서 밖으로 향합니다.
이 “문”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수평적 이동의 통로로서의 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늘과 땅이라는 수직적 이동의 통로서의 문이기도 합니다.
곧 이 “문”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인류에게 내려오고, 인류의 사랑이 하느님께 올라갑니다.
그러니 ‘생명과 구원의 문’을 나타내줍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는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가는 문으로서 그 문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일치로 들어간다."고 말하며, 크리소스토무스는 성경이 문이라고 해석하며, ‘말씀의 문’을 통해 생명이 드나듦을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는 그 드나듦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동행하는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우리가 “드나드는 문”이라 하십니다.
당신을 통해 들어가고, 또한 당신을 통해 나가는 ‘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드나들고 있는가?
혹은 들어가는 문으로만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들어가면, 나갈 필요가 없는 문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문’은 오히려 다시 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들어가는 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요한 10,3)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양 우리’ 안에 머물러 편안이 자기만의 안식을 누리고자 한다면, 목자에게 귀 기울이지도 않고 목자를 따르지도 않는 양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 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요한 10,4)
목자는 양들을 밖으로 이끌어 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주와 편리로부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울타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차단된 울타리가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열려진 울타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세상을 위해 밖으로 나가는 일입니다.
사랑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
곧 생명과 구원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요 먹이는 일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도 그처럼 ‘성문 밖’으로 나가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가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는 이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요한 10,9)
우리는 분명 “(문을)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면, 주님의 말씀에 따라 ‘문’을 드나들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양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교회의 사명을 이런 말씀으로 일깨우셨습니다.
“안락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길거리로 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손에 흙을 묻힌 더러워진 교회가 되기를 나는 꿈꾼다.”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어떤 성소자>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성소 주일을 맞아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면 나는 좋아할까 생각해봤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부르면 좋아하지 않거나 겁을 냅니다.
제가 부르면 늘 일을 시키기 때문이지요.
이런 생각 다음 누가 부르면 좋아할까도 생각해봤습니다.
깡패가 부르면 당연히 싫어하겠지만 예를 들어 애인이 부르는 것과 어머니가 부르는 것과 주님이 부르는 것 가운데서 어떤 것이 좋아할까 말입니다.
지난주 수녀님들 피정을 동반할 때 “공동생활”이 주제였는데, 피정의 집 동산에 꽃이 만발했기에 다음과 같은 묵상거리를 드렸습니다.
꽃을 보면 그 아름다움을 같이 보고 싶은 존재가 있는가?
아무도 없는가?
같이 보고 싶은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 누구인가?
같이 사는 자매인가?
밖에 사는 누구인가?
아무튼 이때 떠오르는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것과 마찬가지로, 엄마나 애인이 부르는 것보다 주님이 부르는 것이 좋으면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그 반대이겠지요.
그래서 다시 생각해봤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왜 부르시고, 우리는 주님과 어떤 관계인가?
주인과 종의 관계인가? 아니면 목자와 양의 관계인가?
주인과 종의 관계라면 주님께서 일을 시키려 부르실 것이고, 목자와 양의 관계라면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충만케 하시려 부르실 겁니다.
그런데 우리와 주님 관계가 그 어떤 것 하나인지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요.
주님과 우리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 둘 다이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먹이지도 않고 일을 부려 먹는 분이 아니라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충만케 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라거나 복음을 전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당신에게로 부르시고 당신 사랑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나만 부르지 않으시고 열두 사도를 같이 부르시고, 목자가 한 마리 양이 아니라 양 떼를 부르시듯 같이 부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성찰케 됩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나는 혼자 가고 싶은가?
누구와 같이 가고 싶은가?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가?
지금 같이 사는 사람인가?
다른 누구인가?
부부라면 지금 주님께로 같이 가는 동반자인가?
아직도 서로를 향할 뿐 주님께 같이 가지 않는 관계인가?
자식들은 어떤가?
같이 주님을 향하는가?
서로를 향하는 관계인가?
수도자라면 나는 혼자 주님께 가도록 부르심 받은 독수자인가?
같이 주님께 가도록 함께 부르심 받은 공동체 수도자들인가?
다음으로 우리는 소명을 받드는 주님의 일꾼들이라는 것을 보겠습니다.
소명이라는 말 자체가 성소적인 표현입니다.
소명의 소자와 성소의 소자가 부르심이라는 같은 뜻이고, 명령을 받들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이요, 부르심을 받아 명령을 받드는 것을 뜻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주님의 종이요 일꾼들이고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설마 일꾼은 싫고 사랑만 받겠다는 얌체나 어린아이는 아니겠지요?
일을 시킬까 봐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것을 살살 피하는 나는 아니겠지요?
이것을 돌아보게 되는 오늘 성소주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성소자가 많기를 기도하는 오늘 성소주일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은 경청과 소통을 통해 드러난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우리를 신앙에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생각하고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의 봉사직에 부르심을 받는 사람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고 후원하는 날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것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각자의 성소에 충실할 수 있는 은총을 기원합니다.
어린아이 이설아 첼리나는 엄마 아빠와 함께 빠지지 않고 미사참례를 합니다.
아주 귀엽고 이쁩니다.
제가 손을 내밀면 손도 잡아주고 인사도 잘합니다.
물론 수녀님 보좌신부님에게도 애틋합니다.
그런데 제가 늘 입던 수단을 입지 않고 일반 옷을 입은 채 손을 내밀었더니 멈칫하였습니다.
늘 같은 모습이 아니기에 선뜻 손을 주지 않았습니다.
목소리와 모습이 다르니 혼동이 온 것입니다.
아이의 눈은 정확했습니다.
서로 통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많은 관심과 진실한 사랑이 없이는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소통이 잘 이루어지고, 더더욱 주님과의 소통이 긴밀해지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3),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7-28)고 하셨는데, 진정 나는 예수님을 얼마나 알고 그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은 나를 알고 계신데 나는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으면 답답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목소리, 그분의 말씀을 잘 알아들으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분의 목소리에 익숙해야 하고 그분의 행동에 익숙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내 목소리를 줄이고 침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언어는 침묵”(토마스 커킹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묵시록 3장 20절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려면 먼저 고요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내적으로 외적으로 정돈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문을 두드리고 아무리 얘기를 하려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이른 새벽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셨습니다.
조용한 곳에 가셔서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세상살이에 바쁘고 지치고 힘이 들지만 그럴수록 한적한 곳을 찾아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가는 길이 그분 마음에 드는 길인지 알게 되고, 살게 되며, 마침내 그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사실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다른 음성을 따라가는 우리의 욕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움켜쥐고 싶은 것이 있어 주님의 음성을 외면하는 것이지, 주님은 늘 사랑으로 속삭이십니다.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루 잠시 잠깐이라도 성경을 읽으면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침묵 속에서 그 말씀대로 살 것을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감각적으로 들으려 애쓰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펴십시오.
사실 성경은 읽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말씀하시고 나는 듣는 것입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싶으면 먼저 믿음으로 성경을 받아들이십시오.
삶의 위로와 희망, 지혜, 문제의 답, 그리고 구원이 거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십시오.
놀라운 힘과 능력의 손길, 열매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 보내주신 사랑의 편지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우리 삶의 여정에는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읽어줄 수 있는 폭넓은 마음이 요구됩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들어야 하고 부자간에, 부부간에, 이웃 간에도 서로 통해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을 알고 여러분도 저를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의 마음을 알고 존중하고 사랑하며 서로를 지켜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기회를 만들어 성체조배를 하면서 주님과의 속 깊은 만남을 이루시기 빕니다.
오늘 성소주일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성직자, 수도자의 길에 나설 수 있는 젊은이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한 그릇으로 쓰일 성직자, 수도자가 여러분의 가정에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사제가 되고 수도자가 종신서원을 하려면 지금 시작해도 앞으로 10년 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시작하면 결코, 늦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으로 자녀를 봉헌하고 손자, 손녀를 봉헌했으면 좋겠습니다.
성소의 동기는 아주 다양합니다.
별것 아닌 것을 통해서도 부르심을 주십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신부님들께는 쌀밥을 대접하고 밥상에 김이 올라가고 달걀이 놓여 있었기에 그것을 보고 신부가 되고 싶은 꿈을 키운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시골 공소에서 지냈는데 어른들로부터 주일공소예절에 나오는 것으로 칭찬을 듣게 되어 더 열심히 하게 되었고 “너는 나중에 신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공소회장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함께 어울리던 회장님의 아들도 신부가 되었고, 한 명은 수녀가 되었으며, 하나는 결혼하여 자녀에게 성소의 꿈을 키워주고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젊은이들에게 특별 성소의 꿈을 키워줄 수 있도록 간절한 기도와 칭찬과 권고를 게을리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우리 복사들을 미래의 신부님, 수녀님으로 부릅니다.
언젠가 그 소리가 마음을 흔들기를 희망하며.
결혼 성소도 좋고, 수도자, 성직자의 성소가 다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는 것이, 가장 큰 은총입니다.
그중에 다양한 성소로 초대받습니다.
특별 성소인 성직자, 수도자의 부름도 가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니만큼, 가정 안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각 가정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사는 은총을 입기를 마음을 다하여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그분 목소리는 필요할 때 들린다>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기도 하고 착한 목자 주일이며 그래서 성소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라는 말이 계속 반복됩니다.
이는 어쩌면 예수님의 양들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예정설을 긍정하는 의미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우리 선택입니다.
내가 선택해야 상과 벌이 정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 목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운전병을 하였습니다.
군대 차들은 그렇게 정밀하지 않기 때문에 고장으로 인한 사고가 자주 발생합니다.
그래서 항상 귀를 쫑긋 세우고 운전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엔진의 이상한 소리나 나사가 풀려 나는 소리 등을 무시하면 커다란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소리는 더 잘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그 목소리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록펠러는 크리스천이고 가장 큰 부자였지만, 나눌 줄을 몰랐습니다.
성경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35)라고 나와 있지만 그는 고집쟁이였습니다.
그가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서야 이 말씀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래서 나눌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병도 치유되었고 새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분 목소리가 들리려면 내 목소리를 부정해야 합니다.
하와는 뱀의 목소리를 살려두었습니다.
아담은 하와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님께 청할 뿐이지 그분으로부터 이래라 저래라하는 말씀은 듣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순종’하기 위해 기다립니다.
이승복 박사는 어렸을 때 미국으로 이민 와서 미국 대표 기계체조 선수가 됩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까지 노려볼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그만 연습 도중 척추가 망가져 손가락만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식물인간이 됩니다.
이때 어떤 선교사가 그렇게 된 것도 다 하느님의 뜻이고 분명 이것을 통해 큰일을 하실 것이라는 말을 해줍니다.
다른 때 같아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는 이 목소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음 뿐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시 공부하여 의대에 가고 존스 홉킨스 병원 재활의학과 과장이 됩니다.
양은 멍청한 동물이라고 합니다.
앞도 제대로 안 보이고 냄새도 잘 못 맡습니다.
힘도 없어서 맹수들에게 이만큼 좋은 먹잇감은 없습니다.
그래서 목자가 없으면 곧 죽음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말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서 알아듣는 것보다는 그러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알아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 때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고 하는데, 이는 그 한 말씀이 없으면 나의 영혼은 죽은 목숨이라는 뜻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한 말씀을 해주시고 우리를 살리십니다.
이제 우리가 원하는 말씀은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는지 안 들어주시는 지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방향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그분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을 따를 힘입니다.
어떤 병원장 사모님은 매우 돈도 많고 어릴 적부터 성공만 거듭하여 남부러운 것이 없이 살았습니다.
천주교 신자였음에도 점을 치러 다니고 비싼 집과 비싼 차 그리고 비싼 옷을 즐겨 입으며 으쓱하게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의 병원에서 의료 사고가 발생했고 그 당사자는 우리나라 준 재벌이었으며 원 상태로 고쳐 놓지 않으면 이 병원을 망하게 하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그제야 정신이 든 사모님은 하느님께 의지하게 됩니다.
자기의 목소리와 비슷한 무당의 목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습니다.
자기 뜻대로 살아왔던 것이 어떤 고통을 주는 지 알았기 때문에 이제 그와 완전히 반대되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찾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할 때 “사~랑~한~다~”라는 말을 듣고는 완전히 회개합니다.
병원이 잘 되건 안 되건 그건 상관없었습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주님의 말에 보답하고 싶어서 본당에 가서 가장 비천한 봉사부터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일도 잘 풀렸습니다.
그분 목소리가 꼭 필요한 사람이 됩시다.
그러기 위해 나를 믿지 맙시다.
그러면 나와 비슷한 목소리도 믿지 않게 되고, 오로지 나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신 그분 목소리만이 귀하게 여겨지고 비로소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착한 목자에게 합당한 사람은 착한 양이 되는 신앙인 뿐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은 착한 목자이지만, 잠깐 방심하면, 도둑이요 강도, 삯꾼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시골에 살다 보니 비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실감합니다.
오늘 하루 온종일 날씨가 잔뜩 흐리고 비가 오길래 웬 떡이냐 하며 이런저런 모종을 심었습니다.
전문가 농부들이 보시면 배를 잡고 웃으실 모종 작업입니다.
멀리 텃밭에 심었더니 자주 안 가게 되고, 엄청난 잡초 때문에 엄두도 안 나길래, 올봄에는 찌그러진 솥단지며, 금이 간 물통, 다 쓴 간장통 등 폐품에다 흙을 담아 모종을 심었습니다.
작업을 다 끝내고 나니 그럴듯 했습니다.
모종 작업도 만만치 않습니다.
좋은 흙을 퍼오고, 퇴비도 좀 섞고, 잘 배합한 다음, 모종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다뤄 땅에 꽂고, 흙을 다져준 다음, 뿌리가 잘 내리도록 물을 듬뿍 주었습니다.
모종 작업을 하면서,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내게 이렇게 하셨겠지.
나를 소중히 여기시고, 조심조심 다루시고, 애지중지하시고, 잘 자리 잡고 성장하도록 갖은 정성을 기울이시고...
크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그저 백번 천번 감사드리며, 감지덕지하는 성소 주일입니다.
한 본당에 특강을 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자상하신 주임 신부님과 인사를 하고 악수를 나누는데, 신부님 손이 보통 손이 아니었습니다.
제 손도 거칠고 투박하기로 만만치 않은데, 그 신부님 손은 여기저기 굳은 살이 박히고 상처도 많았습니다.
“아니, 신부님께서 무슨 공사판에서 중노동 하시는 분도 아닌데, 무슨 손이 이러시냐?”고 물었더니, 신부님께서, 거의 공사판 노동자처럼 살고 계신답니다.
웬만한 건물 보수나 기계 수리는 직접 다 하시다 보니 손이 그렇게 거칠다고 하셨습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우리 안에 착한 목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한 형제가 저희 피정 집을 찾아오셔서 며칠 머무시다 돌아가시면서 남기신 말씀.
“세상 답답한 날들이었는데, 고속도로가 하나 뻥 뚫린 기분입니다.”
또 다른 자매님께서는 환한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줄기 밝은 빛을 보고 갑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형제들, 하나같이 부족하고 나약하고, 한심하고 웃기는 존재인 줄만 알았는데, 우리를 통해서 한 줄기 빛을 발견했다니,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고, 스스로 대견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주 체험하는 바처럼 오늘은 착한 목자였지만, 잠깐 방심하면, 살짝 초심을 잃어버리면, 주님께서 보시고 슬퍼하실 도둑이요 강도, 삯꾼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언제나 중요한 것이 한결같으며 지속적인 겸손의 덕입니다.
세상의 가치관, 육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영적 생활, 주님 계명에 따른 생활로 넘어가려는 노력입니다.
오늘 성소 주일인 동시에 착한 목자를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의 성화와 성소 증진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이 땅의 모든 사제, 수도자들이 착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겸손하고 착한 목자로 살아가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또 한 가지 염두에 둬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세상 속에 살아가는 모든 평신도들 역시 보편 사제직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가정과 직장, 단체와 사회 안에서 주님을 꼭 빼닮은 너그럽고 착한 목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야겠습니다.
오늘 성소 주일을 맞아 사제와 수도자, 지도자들에게만 착한 목자로서의 삶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각자 주어진 환경과 처지에서 착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목자의 비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요한 10,1)
여기서 ‘도둑’과 ‘강도’는 거짓 예언자, 가짜 메시아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자들이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간다는 말씀은 그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은 전하지 않고 그릇된 이론이나 학설 같은 것만 말하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은 하지 않고 사리사욕만 채우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씀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율법학자들을 경계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기를 즐기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욱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루카 20,46-47)
겉으로는 도와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산을 등쳐먹으니 그자들은 ‘도둑이며 강도’입니다.
그자들의 위선, 교만, 허영은 문이 아니라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목자가 문으로 들어간다는 말씀은 참된 목자는 하느님의 말씀만 전하면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만 한다는 뜻입니다.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라는 말씀과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우리 입장에서는 “참된 목자의 음성을 알아들어야 한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가르치셨을 때의 일이 연상됩니다.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르 1,21-22)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사람들을 압도하는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음을 느끼고 몹시 놀랐습니다.
참된 목자의 음성이라고 느낀 것입니다.
당시에 율법학자들은 옛날의 유명한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사실상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일이었을 뿐이고, 그래서 그들의 말에는 ‘힘’이 없었습니다.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우리 입장에서는 거짓 예언자와 가짜 메시아를 잘 식별해야 하고, 그자들을 멀리 하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 전의 재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루카 21,8)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다!’, 또는 ‘보아라, 저기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이들까지 속이려고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조심하여라.
내가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해 둔다."
(마르 13,21-23)
요즘에도 거짓 예언자들과 가짜 메시아들에게 속는 사람들이 많고, 그자들을 따르는 추종자들도 많습니다.
그자들에게 속아서 따라가는 일의 결과는 늘 고통과 불행입니다.
나중에 심판 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바로 겪는 일입니다.
혼자서만 고통과 불행을 겪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모두 고통과 불행 속으로 몰아넣게 됩니다.
거짓 예언자들과 가짜 메시아들에게 속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회의 가르침을 잘 들어야 하고, 교회 교도권의 판단에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요한 10,7-10)
이 말씀은 다음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6)
“나는 문이다.” 라는 말씀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메시아라는 것과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다른 문이나 길이나 진리나 생명은 없습니다.
만일에 누군가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아닌 멸망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세속 사람들이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에도 해당됩니다.
그런 것들을 얻기를 원하고, 원하는 대로 얻는 것은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고, 오히려 구원에서 멀어지게 되는 일입니다.
여기서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시기 전에 나타났었던 가짜 메시아들을 가리킵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성소 실현의 여정 - 착한 목자 예수님 닮기>
성소주일이면 떠오르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나는 불림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유다인 랍비 신비주의자 아브라함 여호수아 헷셀의 말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합리주의 철학자 데칼트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김춘수의 "꽃"이란 시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우리 모두가 하나하나 주님께 불림 받는 유일무이한 "파스카의 꽃"같은 귀한 존재입니다.
오늘은 4월의 마지막 날이자 부활 제4주일이자 성소주일입니다.
성소주일을 맞이하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담화문이 참 시의적절했습니다.
“은총이며 사명인 성소”라는 주제하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 26,42) 성구를 바탕으로 참 귀한 가르침을 주는 담화문 서두 일부를 인용합니다.
“오늘 우리는 60번째 성소주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성소주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진행되던 1964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하여 제정되었습니다.
하느님 섭리의 이 계획은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들이 개인으로서, 그리고 공동체로서, 오늘날 세상의 고통과 희망, 도전과 성과가운데 우리에게 저마다 주님께서 맡기신 부르심과 사명에 응답하도록 돕고자 합니다.
우리의 사명은 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교회의 친교 안에서, 우리 형제자매들과 함께, 교회 목자들의 인도 아래 수행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하느님의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예외없이 성소 실현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성소가 실현되는 여정은 그대로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는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꿈, 얼마나 멋집니까!
어떻게?
답은 단 하나,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입니다.
참 역설적인 진리가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참나의 성소가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마침 어제 피정자들과 나눈 강의 주제와도 일치합니다.
강의 주제는 “참으로 멋진 그리스도인의 삶-하루하루 날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주님을 따르며 제 삶의 자리에서 사명과 책임을 다하는 삶-” 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소주일이자 착한목자 주일이기도 합니다.
착한 목자 주님은 우리가 안심하고 드나들 수 있는 생명의 문, 진리의 문, 생명의 문이기도 합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의 감동적인 복음 말씀입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나는 문이다’
얼마나 멋진 착한 목자 예수님의 신원인지요!
예수님께는 벽이 없이 온통 누구에게나 사면팔방 활짝 열린 문이라는 것입니다.
문이라고 다 문이 아니라 생명의 문, 구원의 문, 진리의 문은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벽이 변하여 문으로!”
제가 자주 예로 들었던 참 좋아하는 말마디입니다.
참으로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우리의 벽은 점차 넓은 생명의 문으로 사랑의 문, 지혜의 문으로 변해간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벽은 변하여 문이 되고, 부패인생은 발효인생이 되고, 태풍은 미풍이 되는 인생이 펼쳐진다고 참 많이 강조했습니다.
착한 목자하니 고 김수환 추기경님이 생각납니다.
이제는 신화가 되고 전설이 된 분이지만 추기경님에 관한 숱한 일화들은 언제 들어도 신선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하루를 마칠 때면 경당에서 기도를 바친후 그날 받은 편지에 대한 짧든 길든 꼭 친필의 답신을 써 보냈다는 일화입니다.
또 하나는 8백명이 넘는 교구 사제들의 영명축일을 맞이할 때 마다 친히 축하전화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추기경님과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오랫동안 영적우정을 나눴던 어느 수녀님으로부터 들은 일화도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추기경님이 선종전 6개월, 사경을 헤매실 정도로 병석에 누워 지내실 때라 합니다.
어느날 한 자매님이 수녀님을 방문하여 자초지종 남편에 대한 곤경에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며 살려 달라, 도와 달라 애걸복걸하더라는 것입니다.
모함으로 인해 억울하게 4년 선고를 받고 2년동안 수감중이었는데 건강이 악화되어 정신적으로 폐인이 될 위중한 상황인지라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그의 아내가 수녀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수녀님도 딱한 사정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어, 정말 염치불구하고 병석에 계신 추기경님께 탄원서를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추기경님은 참으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망연자실 물끄러미 바라보다 빙그레 웃으시더니 말씀하셨답니다.
“그래, 그러면 수녀가 내 마음을 담아 한 번 탄원서를 써봐!”
추기경님의 격려에 힘을 얻어 수녀님은 온갖 정성을 다해 탄원서를 썼고, 타이핑하여 드리니 추기경님은 정독하신후 간병인의 부축으로 힘겹게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친히 추기경 이름을 쓰고 싸인한 후 직인을 달라하여 또 떨리는 손으로 직인을 찍어 수녀님께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어 수녀님은 곧장 직접 법무부 장관에게 전달했고 법무부 장관은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극적으로 8.15일 광복절 특사로 사면되어 출옥하게 되어 살아났다는 일화이니 그 당사자에게 추기경님과 수녀님은 생명의 은인이 된 것입니다.
돌아가시면서 한목숨 살린 추기경님입니다.
얼마나 인간미 넘치는, 또 사랑과 지혜가 넘쳤던 위대한 어른 김수환 추기경이었는지요!
노인은 많은데 어른은 없고, 선생은 많은데 스승이 없는 시대라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워지는 추기경님입니다.
말그대로 예수님을 닮은 착한 목자 김수환 추기경님이셨습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을, 김수환 추기경님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를 섬기로 오신 착한 목자 영성을 배우고 실천하여 날로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착한 목자 영성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입니다.
종들 중의 종이라는 교황님이 아닙니까!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 섬김의 리더십, 바로 섬김은 복음의 핵심적 덕목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정의되는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입니다.
어떻게 착한 목자 영성을 배우고 실천하여 문이신 주님을 닮아 갈 수 있을런지요!
답답한 벽이 아니라 활짝 열린 주님의 사랑과 지혜의 문, 생명의 문, 구원의 문, 하늘문이 되어 살 수 있을런지요?
셋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회개와 순종과 경청입니다.
첫째, 회개입니다.
평생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살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수행 역시 선택-훈련-습관의 경로를 밟기 마련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 감동하여 마음이 꿰질리듯 아파하는 사람들은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묻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개하십시오.
저마다 죄를 용서받으시고 성령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느님 안 제자리로 돌아가 착한 목자 예수님과 함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명과 책임을 다하면서 복음 선포의 삶에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회개의 완성입니다.
역시 평생 과제입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숙제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아갈 때, 사랑과 지혜, 겸손의 삶이요, 성소의 실현이자 하느님 꿈의 실현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회개한 우리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대로 미사에 참여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분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돌아왔습니다.”
둘째, 순종입니다.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한 주님이십니다.
삶은 순종입니다.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막연한 추상적인 순종이 아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삶은 순종의 여정입니다.
성소 실현의 여정과 함께 가는 순종의 여정입니다.
영적 성숙의 잣대가 자발적 사랑의 순종입니다.
오늘의 제2독서에 나오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주님은 고난과 순종을 통한 종과 섬김의 영성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중 순종하는 영혼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선사되는 치유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순종의 선택이요 순종의 훈련이요 순종의 습관화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야 주님을 닮아 성소의 실현입니다.
셋째, 경청입니다.
경청은 영성의 기초입니다.
경청을 위한 침묵이요 경청할 때 저절로 따라오는 순종과 겸손입니다.
주님과 소통의 대화인 기도도, 형제들과의 원활한 소통의 대화에 공경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 듣는 경청은 영성생활의 필수적 기본요소입니다.
하느님은 마치 침묵중에 모두를 듣는 “귀” 자체요, 모두를 보는 “눈” 자체라 생각되는 분입니다.
참으로 잘 듣고 잘 보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요!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에서도 목자와 양들의 관계는 들음과 따름으로 요약됨을 봅니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참으로 경청하여 주님을 따를 때,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고 성소의 실현, 하느님 꿈의 실현입니다.
역시 경청의 선택, 훈련, 습관이 중요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어 가는 성소 실현의 여정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부각되는 회개, 순종, 경청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소의 실현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시편 23,1)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성소주일인 오늘 미사 말씀들에서는 '부르심과 들음'에 대해 깊이 숙고하라고 하십니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요한 10,3ㄱ)
양들은 기가 막히게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주인이 아닌 사람의 목소리는 단번에 알아차리고 절대로 따라가지 않지요.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요한 10,3ㄴ)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압니다.
이름을 안다는 건 그 존재를 면밀히, 구석구석까지 섬세히 알고 감지하고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양이라도 목자의 사랑에서 소외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그렇게 잘 알아듣는 이유는 먼저 목자가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애정을 갖고 대하며 불러 주기 때문입니다.
그냥 '뭉뚱그려' 막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귀하게 이름을 불러줍니다.
아무개 엄마아빠가 아니고 아무개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 주시는 주인이시기에 그 각별한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할 수가 없지요.
한편, 우리를 아무개로 취급하며 애정없이 부르는 다수의 목소리는 금방 알아듣고 주인이 아님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당신 자녀를 부르시는 방법도 이렇게 개별적이고 각별한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은 확실하기에 그 목소리를 분명히 알아듣고 주인의 뒤를 따릅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생명의 길, 풍성한 생명의 길(요한 10,10 참조)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오순절에 행한 베드로의 설교대목이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2,37)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들은 이들이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묻습니다.
이 질문 안에는, 신앙생활을 하느라고 하면서도 늘 미진하고 부족한 듯한 죄스러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사는 우리의 목소리도 들어 있지요.
한편, 베드로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선포하는 것을 본 사람들의 첫반응은 분명히 부정적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 '들은' 사람들은 그 소리가 사람의 소리가 아닌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들렸을 겁니다.
그래서 마음 아파하며 회개의 길을 찾습니다.
생명의 길을 찾습니다.
세례로 새로 태어나는 길을 걷습니다.
여기서도 부르심(설교)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들음"이 성소의 결실을 맺음을 봅니다.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사도 2,39)
사실 이 부르심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축복입니다.
이 부르심을 알아듣는 이는 누구나 성령을 선물로 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됩니다.
그 부르심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사람은 이 축복을 걷어 차 버리는 것이겠지요.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1베드 2,21)
베드로 사도는 이 은총과 축복이 그저 평안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그런 은총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모범을 보이신 것처럼,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1베드 2,20) 얻게 되는 은총이라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모든 성소의 길은 생명으로 이끄는 축복인 동시에 고난도 겪을 수밖에 없는 십자가의 길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요한 10,4)
"앞장서!"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말씀입니다.
그분은, 자기는 뒤로 빠진 채 양들을 몰아대는 삯꾼이나 양들을 해치고 팔아넘기려는 도둑과 다릅니다.
위험한 광야를 먼저 성큼성큼 헤쳐나가며 길을 만드시고 "발자취"를 남기십니다.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이 "본보기"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
(1베드 2,25)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고 보호자이십니다.
대가에 연연함 없이 사랑 때문에 양들을 돌보고 보살피는 목자이십니다.
그분의 목적은 단 하나,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요한 10,10)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 이 소명 자체가 대가이고 보상이며 완성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하느님의 각별한 개별적인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그 부르심을 단번에 알아듣고 '예' 하고 응답하였기에 지금의 내가 있습니다.
사제로 부르심을 받든 평신도로 부르심을 받든, 수도 성소로 부르심을 받든 결혼 성소로 부르심을 받든 하느님께서 나를 위한 소명으로 불러 주셨음을 기억합시다.
남들이 가는 길이 때론 부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나에게 주시는 은총과 축복의 선물은 나만의 길입니다.
물론 지금 그 길이 모호해 보일 수도 있고 때론 많은 고난도 섞여 있을 수가 있습니다.
거짓 목자의 목소리에 내가 흔들릴 수도 있고, 그분의 목소리가 안 들린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귀기울여 들어봅시다.
저 멀리서 그분은 손짓하며 나를 부르십니다.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들 때문에 잘 안 들리겠지만요.
오늘 성소주일을 맞이하여, 내가 주님의 애정어린 목소리를 처음 듣고 설레었던 그때로 돌아가 봅시다.
그 음성을 다시 기억하고 벗님을 애타게 부르며 손짓하고 계시는 그분을 만나 뵙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저어기 계시네요.
빨리 쫓아가세요.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부활 제4주일은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의 지향을 따라 ‘성소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니 하느님께 일꾼을 청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은 교회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면서 교회를 위해서 봉사할 일꾼을 하느님께 청하자고 하였습니다.
성소는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예언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은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위로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우상 숭배를 일삼는 백성들에게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하느님께 돌아 올 수 있도록 촉구하였습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응답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십계명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잘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성실하게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십계명의 가르침을 어기는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어부들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던 세리를 부르셨습니다.
세리는 세상의 재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열혈당원 시몬도 부르셨습니다.
열혈당원 시몬은 칼로 세상을 바꾸는 길을 포기하고 복음으로 세상을 바꾸는 길을 따랐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들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과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3가지 권한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기쁜 소식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복음서를 만들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말씀을 전하는 책입니다.
복음은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신앙의 신비여! 우리는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주님의 부활을 굳게 믿나이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둘째는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때 사라집니다.
셋째는 병자들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치유하는 사도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의 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은 성공, 명예, 권력에 연연하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교회가 권력과 가까이 있을 때는 부정과 부패가 있었고, 타락하였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교만과 위선을 꾸짖으셨습니다.
과부의 정성과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학식이 많은 사람도, 능력이 많은 사람도 교만의 유혹을 이기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의 문턱이 높아질 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은 교회를 떠나야 했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부활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십자가를 두려워했고, 모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는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갔던 신앙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순교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성소주일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응답하는 신앙이 되면 좋겠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답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겸손한 마음으로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면 좋겠습니다.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성당에서 나와 마트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몇 개의 신호등이 있습니다.
이 신호등 때문에 약간의 불편을 겪기도 합니다.
차가 전혀 없는데도 신호를 한참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이 그새를 참지 못하고 눈치 보며 건너가는 것입니다.
누가 하면 나도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저 역시 급한 마음에 그분을 따라서 무단 횡단을 하려고 한 발을 내딛는 순간, 갑자기 커다란 경적이 울립니다.
진행 신호를 보고 멀리서부터 속도를 높여서 차 한 대가 달려온 것입니다.
진짜 위험했습니다.
몇 초 빨리 건너가려다가 정말 빨리 하느님 나라에 갈 뻔했습니다.
적색 신호등은 분명히 정지 신호입니다.
당연히 멈춰야 합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고 커다란 혼란이 다가옵니다.
문득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즉, 우리 삶 안에서도 잠시 멈춰야 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옳지 못한 길일 때에는 멈춰야 합니다.
그러나 눈치 보면서 멈추지 않고 앞으로만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면서 말이지요.
또 그 멈춤의 시간이 고통스럽다면서 그냥 앞으로만 가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적색 신호도 어느 순간에는 녹색 신호로 바뀝니다.
영원히 적색 신호만 있는 신호등이 없는 것처럼, 고통과 시련으로 멈출 수밖에 없는 그 순간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녹색 신호로 바뀌어서 다시 힘차게 나아가는 때가 분명히 옵니다.
그래서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라는 멈춤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으로 완전히 멈췄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부활이라는 녹색 신호로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습을 따르는 것이 아닌, 주님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만 희망을 간직할 수 있으며, 지혜롭게 지금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주님께만 희망을 둘 수 있음을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히 말씀해주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양 우리에 들어가는 두 부류의 사람을 비교합니다.
하나는 양들의 목자이고, 문이 아닌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도둑이며 강도입니다.
도둑, 강도는 어떤 사람일까요?
성경에서는 유다 이스카리옷을 ‘도둑’이라고 했고(요한 12,6), 예수님 대신 사면받은 바라빠는 ‘강도’라고 했으며(요한 18,40),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장사치들을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즉, 도둑, 강도는 모두 하느님 이름 밑에서 탐욕을 추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름 붙여 부르는 당시 양치기 생활의 관습이었지요.
그만큼 양들을 소중하게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랑을 받은 양이 목자의 목소리를 외면할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모든 것을 내맡기고 우직하게 따라갑니다.
그러나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들리면 산산이 흩어집니다.
우리는 과연 목자를 충실하게 따르는 양의 모습을 취하고 있을까요?
혹시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탐욕을 추구하는 도둑과 강도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을 또 양들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목소리를 따를 수 있는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성소주일인 오늘, 우리를 부르심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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