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미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일[인산일(因山日)]을 기해 만세시위로 일어난 학생중심의 민족독립운동으로 1926년이 간지로 병인년이므로 병인만세운동 (丙寅萬歲運動)으로 불리기도 한다.
2. 배경과 역사
6‧10 만세운동은 순종이 사망한 날짜를 기점으로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이었다. 1926년 6월 10일 일본 경찰의 경계를 뚫고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전국에서 약 5,000여 명의 시위대가 연행되었고, 제2차 조선공산당 탄압사건으로 확대되어 약 100여 명이 대거 검거되었다.
6·10만세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성과 본질을 명확히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준비과정에서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결합 경험은 이후 신간회를 창설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6‧10 만세운동은 1919년 3·1운동, 1929년 11·3 광주학생항일운동과 함께 일제의 무단 통치에 맞선 3대 독립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만세운동 당시 중앙고보 학생 100여명이 선창을 하면서 운동이 시작되었고 이후 그것이 확산되었기 때문에 국가기념일 지정 이전에는 중앙고등학교에서 6.10만세운동을 기념해왔으며 꾸준히 국가기념일 지정의 요구가 있었다. 뒤늦게 6‧10 만세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려 2020년 12월 8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되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이에 따라 2021년 6월 10일부터 보훈처 주관으로 매년 정부 기념행사가 거행되었다.
3. 경과
격문의 내용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 "토지는 농민에게," "8시간 노동제 채택," "우리의 교육은 우리들 손에" 등이었다. 6월 10일 순종의 인산에 참가한 학생은 2만 4000여 명이었다. 군중의 호응으로 시위가 확대되었으나 조직 사이의 유대 결여와 민족진영의 조직약화, 노총계 사회주의계열의 사전체포 등으로 일본 경찰에 저지당하여 곧 실패하였다.
3. 결과(시위 실패
* 좌우합작운동에 영향,
*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영향을 줌,
* 제2차 조선공산당 해체.
이 사건으로 천여 명이 체포, 투옥되었으며, 제2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을 비롯한 다수의 공산당원이 체포됨으로써 제2차 조선공산당이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1927년 신간회·근우회·신정회·연정회 등의 조선인 사회단체 조직과 1929년 11월의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때 송진우는 정인보(鄭寅普)와 함께 순종의 '유칙' 위작(遺勅僞作)을 획책하였다가 발각되어 이루지 못하였다. 그들은 곧 6·10 만세 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종로 경찰서에 불려가 심문을 받았다. 한편 수감된 박헌영 역시 배후 조종 혐의로 고문을 당했으나, 관련이 있다는 근거는 찾아내지 못했다.
그해 11월 송진우는 3·1운동 7주년 기념사 관련 항소에서 패소하고 곧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어 11월 ‘국제농민본부기념사’ 사건으로 징역 6월형이 확정되어 복역하였다가 1927년 2월 일본 신임 천황 히로히토 즉위기념 특사로 출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