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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5/18 부활 제6주간 월요일
바오로와 티모테오는 ‘필리피’에서 선교한다. 그곳은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그들은 강가에서 여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다. 자색 옷감을 팔고 있던 ‘리디아’는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는다. 그녀는 바오로 일행을 돕고자 한다(제1독서). 성령께서 예수님을 알려 주신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깨닫게 하신다. 그러기에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증언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누구나 변화된다. 주님의 능력을 받아 새로운 사람으로 바뀐다. 어떤 박해 앞에서도 용감하게 자신의 믿음을 드러낸다(복음).
<주님께서는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진리의 영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순교자 신태보 베드로는 주문모 신부님께 세례를 받고 정약종, 황사영, 강완숙 등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교우들을 이끌고 강원도로 피신합니다. 그들은 풍수원에서 함께 살면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기록에 등장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우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박해 중에 있는 제자들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보호자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호자’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파라클레토스’인데 이 단어는 우리에게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닙니다. 성령 청원 기도 때 자주 이 단어가 쓰였기 때문인데, 이 용어는 많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도움을 위해 ‘곁에 있도록’, ‘부름 받은 이’라는 기본적인 뜻에서 출발해 법률 용어로 변호자·옹호자·중재자·간청자라는 뜻을 지니며, 안전과 도움과 보호를 제공하는 이로서 도우미·위로자·격려자·의논 상대라는 뜻도 지닙니다.
5월 18일 부활 제6주간 월요일-요한 15,26-16,4ㄱ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할 것이다.” <현재의 순간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서> 오늘 복음 서두에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영, 곧 성령의 파견을 암시하십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성령께서는 한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잘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다가 구금당하셨던 존 월시 몬시뇰께서 오랜 기간 옥고를 치르고 나서 자유의 몸이 된 뒤에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나는 삶의 반평생을 기다리는 데 소비했다.” 이는 맞는 말씀입니다. 추기경님을 포함하여 많은 죄수들은 오로지 교도소에서 풀려날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늘 언젠가 다가올 그날만 무작정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추기경님은 마음을 바꿔먹고 이렇게 다짐하셨습니다. “나는 기다리지 않으리라. 현재의 순간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서 살아보리라.” 그러나 어떻게? 고뇌하던 그 순간 성령께서는 구엔 반 투안 추기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야, 그것은 매우 간단한 것이란다. 성 바오로 사도가 감옥에 갇혔을 때 했던 것처럼 하여라. 다른 공동체들에 편지를 써서 보내라.”(‘지금 이 순간을 살며’, 바오로 딸 참조) 그는 감금상태에서 매일 작은 쪽지에 혼신의 힘을 다한 간단한 묵상 글을 적기 시작했고, 한 소년이 그 쪽지를 집으로 가져갔습니다. 가족들이 모여 추기경님의 글을 필사하여 주변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주변사람들은 또 다시 필사하여 다른 이웃들에게 돌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유명한 ‘희망의 길’이란 책이 발간되었고, 이 책은 전 세계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추기경님께서 정녕 인생의 가장 비참한 순간, 처절한 순간에도 짤막한 편지를 통한 사도직을 행하고 계속한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나에게, 내 삶에 있어 성령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솔하게 매일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 순간을 내 생애 마지막으로 여기고 소중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수적인 모든 것들을 떨쳐버리는 것입니다. 오로지 핵심적인 것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추기경님의 당부처럼 나의 말 한 마디, 손짓 한번, 전화 한 통화, 결정 하나 하나가 나의 삶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는 것, 내게 주어진 단 1초의 순간이라도 낭비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2009년 5월 18일 부활 제6주간 월요일 When the Advocate comes whom I will send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to me. And you also testify, because you have been with me from the beginning. (Jn.15.26-27)
제1독서 사도행전 16,11-15
복음 요한 15,26─16,4ㄱ
옛날, 한 나라의 국왕이 오랜 기다림 끝에 사랑스러운 왕자를 얻었습니다. 왕자가 세례를 받던 날에는 온 국민이 몰려와 축하를 전했고, 하느님도 천사를 축하 사절로 보내 진귀한 선물을 선사했습니다. 천사들은 국왕에게 지혜, 고귀함, 힘, 건강, 재력, 영민함, 지식 등의 선물을 차례로 바쳤습니다. 마지막 천사의 차례가 되었을 때 딱히 내놓을 것이 없었던 천사는 ‘불만’을 선물하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국왕은 “내 아들은 이미 천사들이 선사한 선물을 열한 개나 받았으니 살아가는 동안 그 어떤 불만도 품지 않을 것이오.”라며 기분 나쁜 마음을 숨기고 그 선물을 거절했지요.
몇 년이 지난 뒤 무럭무럭 자라난 왕자가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그는 영민하고 건강했으며 성정이 온화하고 박학다식했습니다. 게다가 마음속에는 그 어떤 불만도 없었습니다. 왕자는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며 안주했고 나라를 더 부강하게 만들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 국왕을 모시는 대신들 역시 현실에 안주하기는 마찬가지였지요. 결국 그의 나라는 오래지 않아 이웃 나라에게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불만이라는 부정적인 것 역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긴 부정적인 것 역시도 긍정적인 것으로 쓰시는 주님이 아니십니까? 그래서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심을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려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고 또 행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의 것이라면 좋은 것 나쁜 것 상관없이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진리의 영을 보내주십니다. 바로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고 고통과 시련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을 증언할 수 있는 진리의 영인 것입니다. 이 진리의 영인 성령을 우리는 세례와 견진을 통해서 받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미 받은 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합니다. 이는 비누를 예로 들으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손바닥이 무척이나 지저분한 상태입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비누를 가지고만 있다고 해서 지저분한 손이 깨끗해질까요? 아닙니다. 내가 수돗가로 가서 물과 비누를 이용해서 손을 씻어야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많은 이들이 이렇게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즉, 성령을 받고도 저절로 또 스스로 성령이 활동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제대로 활동하지 않는다고 불평과 불만도 갖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누구에게 있습니까? 바로 “나”에게 있습니다. 이제 주님으로부터 받은 성령을 이용해서 주님을 증언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지만 주님의 참된 제자라 불릴 수 있습니다. ![]() 내게 그러한 용기를 주면 나는 가장 험한 산도 홀로 오를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장애물을 디딤돌로 바꿔놓을 수 있다.(게일 브룩 버켓) 행복유예선언(박성철) ‘유예선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분간은 미룬다거나 언제까지 보류해둔다는 말이지요. 사람들은 행복에 있어서도 이 유예선언을 한 채 행복을 미루거나 보류해두려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막연히 내게도 행복한 때가 오겠지 하고 이 다음에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사람에게는 행복도 찾아가기를 꺼립니다. 지금 당신의 현실은 다이아몬드가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에겐 다이아몬드보다 더 휘황찬란한 일상이 있습니다. 늘 곁에서 힘을 북돋워주는 가족, 아침이면 출근할 직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오랜만에 떠오른 밝은 보름달을 바라 볼 수 있는 당신의 일상. ‘행복유예선언'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을 미루지 말고 당신의 일상에 참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길..... 그러지 않다면 먼 훗날 당신의 묘비엔 이런 글이 씌어질지 모르기에.... ‘오늘은 늘 행복하지 못하고 내일은 행복해질 거라 굳게 믿었던 사람 여기 잠들다'라고
부활 6주간 월요일 - 증거자 성령님
미국에서 어떤 신부님께 함께 공부하시던 스님 두 분이 성경을 읽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 신부님은 종교의 편협한 시각을 넘어선 그 스님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성경 두 권을 스님들에게 선물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 뒤 성경을 읽고 계시냐고 물어보았더니, 그 스님들은 성경을 몇 장 읽지 못하고 포기하였다고 대답했습니다. 일주일 만에 세상을 만들고, 형제끼리 죽이고, 가족끼리 서로 속이고, 이스라엘 아닌 다른 민족들을 마구 죽이는 하느님을 접하고는 그런 허황되고 불공평하고 자비롭지 못한 하느님을 자신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더랍니다. 정말이지 신앙이 없는 사람이 성경을 읽어 내려가면 도대체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거룩한 말씀이라고 받아들이며 수백 년간 전 세계 베스트셀러 자리를 놓치지 않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은 어쩌면 잔인하고 자신의 백성만 알고 질투심이 강하고 무서운 분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성경도 거룩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과연 그런 허황된 이야기들이 거룩한 말씀이 되게 하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바로 “성경은 성령님의 영감(靈感)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으로부터 글을 쓰는 이들이 진리를 그 안에 기록하도록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보통 책이 아니라 ‘거룩한 책’이 되었고 ‘하느님의 말씀’이 된 것입니다. 만약 ‘성경’이 성령님의 영감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되었다면,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 즉 ‘성자 예수님’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주보성인인 예로니모 성인은 ‘성경’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의 글이 성령님의 중재로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계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교회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의 계시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사랑’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이 둘 사이에 있어야 둘이 한 몸이 되어 하나가 다른 하나를 계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 몸은, 육체와 영과 영혼으로 되어있습니다. 육체는 보이지 않는 영혼을 계시합니다. 육체는 영혼의 상태를 나타내줍니다. 영혼이 겁을 먹으면 심장이 빨리 뜁니다. 이는 육체가 놀라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혼이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는 육체가 영혼을 배신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혼은 그 사람을 싫어하는데 육체는 거짓으로 그 사람을 좋아하는 척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점점 더 나아가 영혼은 진실을 알고 있는데 육체는 계속 거짓말만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육체가 영혼을 올바로 계시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육체와 영혼을 연결시켜주는 영이 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영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활기를 얻게 되는데 죄를 지으면 성령님께서 그 사람 안의 영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야하는데 결정적으로 성령님이 충만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모습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해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특별히 첫 제자들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도 유다인들이 무서워 그 분을 증거하지 못하고 숨어서 한 집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내려오시고 나서야 제자들은 비로소 밖으로 뛰쳐나가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우리들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 분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령님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길거리에 나가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아무리 떠들고 다녀도 사람들은 콧방귀만 뀌게 되는 것입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피가 빠져나가면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가 생명을 상징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 피 안에 ‘산소’가 있어야합니다. 산소가 빠져나간 피는 죽은피라 생명을 상징하지 못하고 아무 쓸모가 없어 버려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셔야합니다. 성령님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죽음이 무엇인지밖에 보여주지 못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깁시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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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느 순간에는 육체가 영혼을 배신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혼은 그 사람을 싫어하는데 육체는 거짓으로 그 사람을 좋아하는 척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점점 더 나아가 영혼은 진실을 알고 있는데 육체는 계속 거짓말만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육체가 영혼을 올바로 계시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육체와 영혼을 연결시켜주는 영이 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영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활기를 얻게 되는데 죄를 지으면 성령님께서 그 사람 안의 영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