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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시작 1,1-11
1 테오필로스 님,
첫 번째 책에서 저는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처음부터 다 다루었습니다.
2 예수님께서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분부를 내리시고 나서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다 다루었습니다.
3 그분께서는 수난을 받으신 뒤, 당신이 살아 계신 분이심을 여러 가지 증거로 사도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4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계실 때에 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나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기다려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며칠 뒤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6 사도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 물었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
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8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10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 동안 그들이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렇게 말하였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 1,17-23
형제 여러분,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18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빕니다.
19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빕니다.
20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21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22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의 끝 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오늘은 주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신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주신 날입니다.
그 누구도 열지 못했던, 아벨의 의로운 피로도, 아브라함의 굳은 믿음으로도, 모세의 열성으로도, 예언자들의 충성으로도, 결코 그 누구도 열 수 없었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닫힌 하늘의 문을 그리스도께서 열어주신 날입니다.
오늘 말씀의 전례는 모두 ‘승천’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시는 장면인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자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흰옷을 입은 사람 둘이 나타나 말합니다.
“왜 하늘만 쳐다보고 서 있느냐?”
(사도 1,11)
하늘, 그것은 지붕이 없는 저 위 어디쯤의 어느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이 무소부재하시니, 그 모든 곳이 하늘입니다.
특별히 하느님이 내 안에도 계시니, 내 자신이 하늘입니다.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거처이니 말입니다.
제2독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 편에 앉히심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복음은 승천하시어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을 전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승천에 대한 이야기가 몇 군데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담의 6대 후손인 에녹이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하느님께서 데려가셨는데(5,24), 이를 두고 히브리서에서는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옮아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1,5).
열왕기 하권에는 예언자 엘리야를 하느님께서 회오리바람에 태워 하늘로 데려 올라가셨고(2,11), 토비트서에서는 라파엘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2,20).
그런데 승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곧 사도신경의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믿나이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하늘”이 물리적인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듯, “승천”도 물리적인 하늘의 어느 공간에 좌정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승천”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로 어느 한 장소로 있던 예수님께서 이제는 어느 공간에서나 같이 계시는 새로운 모습으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심을 의미합니다.
곧 승천을 통해서 육신의 모습은 사라지셨지만,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신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심과 동시에 우리에게도 그 영광을 주시려 찾아오심을 뜻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
이처럼 “승천”은 떠나감이 아니라 오히려 오시어 함께 계심을 말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는 새로운 모습으로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시요, 벗이요, 동반자이십니다.
그러니 영광의 왕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이 식탁의 자리에 와 계십니다.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당신의 몸과 피를 먹이십니다.
이토록 “주님 승천 대축일”인 오늘은 우리에게 복이 내리는 날이요, 우리가 영광을 입은 날입니다.
“승천”은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받았다.”(마태 28,18)라고 말씀하셨듯이, 영광스럽게 하늘나라에 들어가시어 모든 것의 주님이 되신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지상 삶의 완성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삶은 우리가 단지 기억할 수 있는 과거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현양되신 주님께서는 이제 장소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으시며, 항상 우리에게 가까이 현존하심을 의미합니다.
곧 세상 끝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권능을 지니신 주님으로 살아계시고,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영광을 모든 민족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마태 28,19-20)
오늘은 홍보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의사소통의 참된 힘은 ‘이웃되기’(제48차 홍보주일 담화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이웃이 될 수 있는가를 답하셨습니다.
곧 어려운 형제를 돌보아주는 것이 이웃이 되는 길임을 밝히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사소통이 고통을 달래주는 향유가 되고,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맛좋은 포도주가 되길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웃되기’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승천의 삶이 될 것입니다.
곧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며 걸으며, 동료와 손을 잡고 걷되 다름 아닌 그분과 함께 걷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마태 28,20)
주님!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가르침을 배워 익히고 지키는 자 되게 하소서!
당신께 뿌리박고 살아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게 하시고, 어디에 있더라도 당신께 눈을 떼지 않고 당신께 속한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이 되고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영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며 부활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실망과 좌절에 빠진 제자들에게 사랑의 승리를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협조자 성령을 약속하시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길 부탁하셨습니다.
마침내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시며 하늘나라로 올라가셨는데, 우리는 이것을 승천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닌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각자의 소명을 다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실망과 좌절 속에 애타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더없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 충만한 기쁨을 끝까지 누리고 싶은 것이 제자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셔서 하느님 품으로 가십니다.
사도행전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에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미성숙한 제자들을 남겨둔 채 떠나가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노래 한 곡 불러 드리겠습니다.
“떠나는 이마음도, 보내는 그 마음도
서로가 하고 싶은 말 다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꼭 한마디 남기고 싶은 그 말은
너만을 사랑했노라. 진정코 사랑했노라.
사랑의 기쁨도 이별의 슬픔도
이제는 너와 나 다시 이룰 수는 없지만
그래도 꼭 한마디 남기고 싶은 그 말은
너 만을 사랑했노라. 진정코 사랑했노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한없이 사랑하셨습니다.
떠나면서도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요한 14,2) 하시며 당신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시며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언제나 제자들이 있었고,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나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품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이 생명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하리.
이 목숨 다 바쳐서 영원히 사랑하리.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진정 제자들에게는 예수님 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 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행복의 원천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과의 관계 형성에 있습니다.
나를 용서하시며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신 성령께서 늘 옆에 계시다는 믿음으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항상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있고, 우리 마음에는 늘 예수님으로 충만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읽고 또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제 더 이상 육안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동시에 시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존재로 바뀌셨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하느님과 천사들, 성인들은 하늘에 머물고, 땅속에는 마귀나 악인들이 사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의 사명을 다 마치시고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가셨다는 뜻을 담아 승천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지만, 인간의 세계를 떠나지 않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오늘 우리를 통해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님으로서’ 활동을 계속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시며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언제, 어느 곳에나 현존하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제자들이 있는 곳에서.
그러므로 두려워 말고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예비자 확보를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명을 주셨으니 그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기쁜 소식이 되지 않으면 복음은 선포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비워 주님으로 충만히 채워야 하겠습니다.
마음이 굳어져 있으면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비어 있지 않은 그릇에 무엇도 담을 수 있겠습니까?
내 것을 내려놓고, 우리의 거처를 마련해 주시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 찬 날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한 사람도 있지만 더러는 의심하였습니다.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저절로 믿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의 눈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 1,11)는 의미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임마누엘” 주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천함으로써 부활하신 주님을 제대로 만나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승천하는 삶만이 사랑인 이유>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주님 부활과 승천은 그 사실성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안에서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주신 것으로 이해하면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승천하는 삶이 아니면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하고 명령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먼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하느님 자녀가 되어 이웃들도 가르침과 세례로 그렇게 만들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사제직이라고 합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사제란 “하느님이 될 것이고 다른 이를 하느님이 되게 하는 것”(CCC, 1589)라고 정의합니다.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 ‘은총’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할 때 알게 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진리’입니다.
어떤 자녀도 이 은총과 진리를 통해 태어나지 않는 자녀는 없습니다.
부모가 주는 양식을 먹으며 그 부모의 자녀임을 믿게 되고 그러면 그 부모가 알려주는 진리를 닮게 됩니다.
율법만으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인데, 사랑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으십니다.
어쨌건 사제직은 중간에서 남편에게 받아 자녀의 지위를 높여주는 어머니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과 농사를 짓는 한 농부가 그해에는 워낙 농사가 잘되어 먹음직스러운 사과들이 많이 열렸습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자기 사과 중 가장 좋은 것들을 임금님께 드리려고 궁궐로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문지기들은 의복도 입지 않고 임금님을 만나려는 농부를 들여보내 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는 나름대로 가장 좋은 옷을 골라 입고 왔습니다.
그러나 궁궐을 출입하는 귀족들의 옷에는 비길 바가 못 되었던 것입니다.
농부가 실망하며 돌아서는데 마침 밖에서 궁궐로 돌아오던 왕비가 이것을 목격합니다.
왕비는 마차에서 내려 슬픈 표정의 농부에게 자초지종을 듣습니다.
그러고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며 그에게서 사과를 받아서 궁궐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옷을 차려 입고 금 쟁반에 사과를 담아 임금님 옆에서 직접 깎아 드렸습니다.
임금은 사랑스러운 왕비가 깎아 주는 사과를 맛보고 매우 흡족해하였습니다.
왕비는 그제야 그 사과는 밖에서 기다리는 한 가난한 농부가 임금을 위해 가져온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당장 그 농부를 불러들이라고 하여 그에게 좋은 의복과 상을 주며 언제라도 수확한 것을 자신에게 직접 가져와도 된다고 허락하였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왕비’와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 하늘로 승천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라고 하십니다.
반면 자기 것을 내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여기면 어떨까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이용하게 됩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들을 너무도 사랑해서 평생 가진 것을 다 팔아가며 아들을 가르쳤습니다.
아들이 결혼하여 어머니를 모시는데 어머니는 아들에게 더 잘해 주기 위해 아들에게 잘못 하는 것 같은 며느리를 못살게 굽니다.
며느리는 자살하고 아들은 어머니를 더는 안 보겠다며 떠나갑니다.
어머니는 “내가 평생 너만을 위해 살았는데,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니?”라며 서운해합니다.
어머니는 과연 사랑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은 어쩔 수 없이 모기입니다.
내가 무언가 내어준다 생각해도 그것을 통해 나의 부족한 것을 채우려 할 뿐입니다.
이는 상대를 행복하게 하기보다는 부담스럽게 합니다.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은총과 진리를 받아 전해 주는 일입니다.
진정한 사제직만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승천하는 삶’입니다.
교리서는 “십자가가 승천의 시작”(662)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시는 일은 죽음을 각오하는 것인 것과 같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다가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당신 안에 잉태하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성모님을 통해 성령이 엘리사벳과 그 태중의 아기에게 가득 찹니다.
성령을 중개하는 일이 사랑입니다.
곧 은총과 진리를 받아 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나의 뜻을 죽이고 하느님의 뜻을 향하는 승천하는 삶만이 사랑인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 무엇도 주님과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에 제자들은 주님과 또 한 번의 이별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번 이별은 지난번 이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이별입니다.
지난번 헤어짐이 고통과 슬픔의 이별, 엄청난 상처와 충격, 큰 두려움을 가져다준 이별인데 비해, 이번 이별은 축제의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마치 부모님 효도 관광 여행 떠나는 분위기입니다.
영영 이별, 이제 떠나가면 다시 못 뵐 마지막 작별이 아니라 또 다른 만남을 전제로 한 잠깐의 이별입니다.
스승님과의 첫 번째 이별 때의 분위기가 기억납니다.
떠나가시는 예수님께 대한 예의도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목숨이 두려웠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후환이 두려워 멀리멀리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비겁하게 골방에 숨어서 전해오는 소식을 듣곤 했습니다.
제자로서의 도리를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이별은 철저하게도 다른 분위기입니다.
예수님 부활 체험 이후 그제야 눈이 밝아진 제자들, 늦게나마 귀가 뚫린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실체를 파악하게 됩니다.
이제야 드디어 그분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자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제대로 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명명백백해졌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더 이상 그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었습니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죽기 살기로 예수님을 전하는 일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이었기에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기쁜 얼굴로 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비록 스승님께서 자신들을 떠나가지만, 제자들은 한 가지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 무엇도 스승과 제자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진리 말입니다.
그 어떤 권력자도, 그 어떤 두려움도, 죽음조차도 스승과 제자 사이를 떨어트려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제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 어떤 상황에서나 스승께서는 자신들과 함께 하시리라는 사실을 완전히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더 이상 외로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소외시킨다 할지라도 그분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크게 신경 쓸 것도 없습니다.
그저 그분께서 내 일생 전체에 걸쳐 함께 해주실 것이니 감사하고 기뻐하며 찬양 드리는 일, 그것만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 등장하는 두 천사의 질문이 계속 제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사도행전 1장 11절)
이 말이 제겐 이렇게 들리더군요.
‘너는 왜 아직도 왜 뜬구름 속에서 살고 있느냐?
왜 움직이지는 않고 그럴듯한 미사여구만 늘어놓느냐?’
어쩔 수 없는 교회의 본래 모습은 하늘만 쳐다보는 모습이 아니라, 인간 세상 한복판으로 내려가는 모습입니다.
죄와 타락과 고통이 뒤엉킨, 그래서 짜증나고 힘겨운 인간 세상 한가운데로 내려가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과거 교회는 보통 도시의 한 가운데,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곤 했습니다.
세상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높은 곳에 고색창연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성에 따르면, 교회는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인간 세상 가장 한복판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교회는 죄인들을 까마득한 교회의 첨탑 위로 끌어올리기보다, 죄인들이 득실대는 삶의 현장 한가운데로 스며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라진 까마득히 높은 하늘로 향했던 우리들의 시선을 이제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돌릴 때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곳에 승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승천>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타니아 근처’에서 승천하셨다고 기록되어 있고(루카 24,50), 사도행전에는 ‘올리브산’에서 승천하셨고, 그 산은 안식일에도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사도 1,12).
두 기록을 합하면, 예수님께서는 베타니아 근처에 있는 올리브산에서 승천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도 걸어갈 수 있는 거리’는 1km 정도이기 때문에 ‘예루살렘 근처’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의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라는 말은 그것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아니라, 그렇게 믿는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스테파노 순교자는 순교 직전에, 예수님께서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인다고 증언했습니다(사도 7,56).
어떻든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는 말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라는 천사의 말은 “하늘만 쳐다보지 말고 ‘땅도’ 바라보아라.”로 해석합니다.
우리는 하늘도 바라보아야 하고 땅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하늘만’ 보고 땅을 안 본다면, 그것은 ‘이웃 사랑 없는’ 신앙이 되어버리는데, 신앙에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반대로, 땅만 보고 하늘을 안 본다면, 그것은 ‘주님의 뜻’을 외면하고 이웃 사랑만 중시하는 일이 되는데, 사랑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린 것으로 변질되어버립니다.
신앙 없는 사랑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인 종교입니다.
신앙은 사랑으로 실천되고, 사랑은 신앙으로 완성됩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직접 목격한 일을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셨다.” 라고 표현했는데, ‘예수님의 승천’을 하늘이라는 특정 공간으로 가신 일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로 오르셨다는 말은 하느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요한 1,2)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신 일입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승천’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으로 당신의 존재 방식을 바꾸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라는 말씀을 이미 하셨습니다(루카 17,21).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에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 가운데’를 ‘우리 마음속’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이라는 우리의 믿음이 올바른 것임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언제나 항상 우리를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마르코복음서 저자는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마르 16,20).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구세주이시며, 구원을 받기를 바란다면 예수님만 믿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사도 4,12)
우상을 숭배하고, 미신을 믿고, 세속의 명예, 권력, 재물 같은 것만 찾는 것은 아무 권한도 없는 것들에게 자기 인생과 목숨을 맡기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을 외면하는 일이기 때문에 구원의 반대쪽, 즉 멸망을 향해서 가는 일입니다.
여기서 ‘권한’은 구원하거나 구원하지 않을 권한입니다.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은 당신이 하시던 일을 계속하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은 ‘모든 사람들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죽어서 천당 가는 것만을 신앙생활의 목표로 삼으면 안 됩니다.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하고, 모두가 ‘함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1티모 2,4)
그런데 말만 잘하는 것으로는 복음을 선포할 수 없습니다.
충실한 신앙인의 삶 자체가 복음 선포이고, 하느님 나라와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이 승천하신 주님의 뒤를 따라서 승천하는 일의 시작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영적승리의 삶 - 사랑하라, 희망하라, 기뻐하라, 선교하라>
“환호소리 높은중에 하느님 오르시도다, 하느님 오르시도다.”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이 우리를 승천의 기쁨으로 가득 채우는 기분입니다.
제일 좋은 시절 5월 성모성월에 계속되는 파스카의 축제 시기입니다.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사랑, 파스카의 희망,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승리 등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단 하나 파스카의 영성이 있을 뿐이겠습니다.
요즘 참 아름다운 파스카의 계절입니다.
수도원 주변에도 신록의 풀과 나무들로, 온갖 꽃들로 가득합니다.
주목되는바 유난히 파스카의 시기에 피는 꽃들은 노란색이 많다는 것입니다.
산수유, 개나리, 영춘화, 민들레, 수선화 그리고 지금 곳곳에 한창인 애기똥풀꽃들이요 이꽃이 지나면 달맞이꽃들이 피어날 것입니다.
파스카의 색깔은 신록에다 이 샛노란 색깔 둘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듭니다.
겨울을 통과해 부활의 봄을, 승리의 봄을 맞이한 파스카의 신록의 잎들에다 샛노란 파스카의 꽃들입니다.
어제 눈길이 가지 않는 버려진 공터에 활짝 피어난 샛노란 애기똥풀꽃들을 보는 순간 떠오른 “꽃자리”란 글입니다.
“자리 찾지 않는다
자리 탓하지 않는다
그 어디나 뿌리 내려 하늘 사랑
활짝 꽃피어 내면
바로 그 자리가 꽃자리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다”
행복은, 구원은, 은총이자 선택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요, 구원이자, 어디나 꽃자리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요즘 제가 각별히 강조하는바 영적승리의 삶을 위한 “선택, 훈련, 습관”의 수행생활입니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이자 제57차 홍보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홍보주일 담화도 은혜롭습니다.
이 담화문이 발표된 날은 가톨릭 언론인의 수호성인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기념일인 1월24일 선종 400주년을 맞이한 날입니다.
담화문의 주제는 “마음으로 말하기: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여야 합니다(에페4,15)”입니다.
공감이 가는 부분을 일부 소개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고통스러운 여정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동행하시며. 당신 자신을 강요하지 않고 보여 주시고, 일어난 사건의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사랑으로 여십니다.
17세기 초 제네바의 주교였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유명한 말씀 가운데 하나인 “마음은 마음으로 말한다”는 여러 세대의 신앙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는데, 존 헨리 뉴먼 성인은 이 말씀에서 영감을 받아 ‘마음은 마음에게 말한다’(Cor ad cor loquitur)를 좌우명으로 정합니다.
‘말을 잘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라는 말씀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신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승천昇天이란 말과 연상되어 떠오르는 죽음을 뜻하는 소천召天, 귀천歸天이라는 말마디입니다.
하늘이 상징하는 바 우리의 본향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하늘입니다.
주님 승천으로 이젠 텅 빈 공허한 하늘이 아니라, 희망과 기쁨, 위안을 주는 하늘이, 주님이 그리울 때 마다 바라보는 하늘이, 하늘길이, 하늘문이 되었습니다.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은 바로 주님의 결정적 영적승리의 삶을 상징합니다.
승천하심과 동시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초월과 내재의 파스카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영적승리의 삶을 위한 네가지 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첫째, 사랑하라!
무엇보다 우리의 평생 주님이자 스승이자 도반이신 파스카 예수님을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며 우정을 날로 깊이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영예롭고 자랑스러운 일인지요!
제2독서에서 바오로의 기도를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얼마나 큰 은혜가 따르는지 가슴 벅차게 나열되고 있습니다.
사랑할 때 사랑의 기적, 사랑의 수행, 사랑의 찬미, 사랑의 봉사, 사랑의 성사, 사랑의 신비가, 사랑의 관상가, 사랑의 시인등 끝이 없습니다.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을 사랑할 때, 예수님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우리가 지닌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우리는 그분의 강한 활동력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 축복과 은총의 통로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으며,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놀랍고 고마운 것은 하늘 높이 초월해 계시면서 동시에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초월과 내재의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말 그대로 우리와 늘 함께 계신 임마누엘 하느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니 이런 주님과 평생 우정의 사랑을 깊이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행복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필생의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저절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저절로 교회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교회의 모습을 바오로 사도가 장엄하게 묘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비단 가톨릭의 교회뿐 아니라 온우주, 온인류의 교회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사랑만으로는 반쪽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듯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인 형제자매를 사랑해야 비로소 온전한, 완전한 주님 사랑입니다.
둘째, 희망하라!
사랑이 우선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을 사랑할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할 때, 이 사랑의 샘에서 샘솟는 희망입니다.
사랑의 눈이 열릴 때 온통 희망의 표징들로 가득한 세상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희망 중의 희망이 승천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궁극의 사랑이자 희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희망이 힘입니다.
희망이, 꿈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궁극의 희망은 오늘 승천하신, 또 우리와 늘 함께 계신 주님이십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희망이신 주님을 선택하여 부단히 희망을 훈련하는 것이며 희망을 습관화할 때 비로소 행복한 삶입니다.
셋째, 기뻐하라!
희망과 기쁨이 한세트입니다.
희망이 사라지면 기쁨도 사라집니다.
사랑의 주님이자 희망의 주님, 기쁨의 주님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한결같이 사랑할 때 사랑의 샘에서 샘솟는 희망이자 기쁨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쁨입니다.
파스카의 기쁨, 찬미의 기쁨, 감사의 기쁨, 만남의 기쁨, 환대의 기쁨, 살아있음의 기쁨, 사랑의 기쁨, 아름다움의 기쁨 등 끝이 없습니다.
살아있는 영성의 표지가 기쁨입니다.
도대체 모든 것을 다 지녔다 해도 사랑이 없다면, 희망이 없다면, 기쁨이 없다면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습니다.
새삼 기쁨도 은총의 선물이지만 동시에 기쁨의 선택이요 기쁨의 훈련이요 기쁨의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사랑도 희망도 기쁨도 행복도 살아야 할 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 꽃자리입니다.
제1독서 승천하시는 주님을 넋을 놓고 바라보는 갈릴래아 사람들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오실 것이다.”
이미 오셔서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신, 바로 하늘 높이 하느님 곁에 계시면서 동시에 우리와 함께 계신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주님과 이미 시작된 지상천국의 기쁨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넷째, 선교하라!
마지막으로 선교하라입니다.
선교는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선교는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 주신 지상명령입니다.
사랑하라, 희망하라, 기뻐하라, 최종 귀결점이 ‘선교하라’입니다.
결코 자폐적인 이기적 게토의 섬같은 교회가 아니라, 우리 요셉 수도원처럼 ‘환대의 사랑’으로 세상에 활짝 열려있는 교회여야 합니다.
찾아오는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의 사랑으로 맞이하는 것이 우리 요셉 수도원의 선교사명입니다.
주님 사랑의 진정성은 선교의 열매로, 사랑의 꽃은 선교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아니 우리 삶 자체가 선교입니다.
관상의 사랑과 활동의 선교는 분리된 것이 아닌 하나입니다.
밖으로는 주님의 선교사,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바로 이것이 우리의 자랑스런 신원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지상명령, 선교의 명령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민족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바로 오늘 지금 여기가 세상의 중심이자 복음 선포의 자리입니다.
강요가 아닌 저절로 마음을 감동感動, 감화感化하여 선교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주님과 사랑의 일치를 통한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승천 대축일에 승천하신 주님으로부터 결정적 영적승리의 비결을 배웁니다.
영적승리를 위한 네 가르침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사랑하라!
둘째, 희망하라!
셋째, 기뻐하라!
넷째, 선교하라!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교회를 한없이 사랑하고, 주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며, 주님과 함께 늘 기뻐하고, 끊임없이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의 삶을, 영적승리의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도 비유를 많이 드셨습니다.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조개에 들어있는 진주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누룩이 든 빵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보물과 같으니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 는 비록 시작은 작을지라도 끝에 가서는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우리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달란트의 비유가 있었습니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가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을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나눌 때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많은 당부를 하셨습니다.
갈망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목표가 확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막달레나는 주님을 한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은 갈망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참으로 복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의심했던 토마 사도는 “나의 주님, 나 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형제들과 빵을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하는 미사의 원형입니다.
양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착한 목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목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이니, 성령께 의탁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입니다.
어머니께서 시골에 가실 때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며칠 전부터 준비를 하셨습니다.
반찬을 미리 만들어 놓으셨고, 빨래도 다 해 놓으셨습니다.
큰 형님에게는 동생들 잘 돌보라는 당부를 하셨고, 동생들에게는 형의 말을 잘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아서 며칠은 신나지만, 집은 엉망이 되곤 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오시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시골에 가시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골에서 무슨 일을 하고 오시는지도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머니가 오실 때까지 형제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것입니다.
밥을 먹으면 설거지도 깨끗하게 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학교에도 가고, 연탄불도 꺼트리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돌아오시면 흐뭇한 모습으로 형제들을 칭찬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등잔에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100배의 결실을 맺었던 농부의 모습입니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40일 동안 함께 계시다가 이제 ‘하느님’께로 올라가신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는 우리들의 자세를 전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주님은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
그리고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승천하시는 주님을 넋 놓고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신앙의 신비를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충실하게 전하기 위해서 교회는 오늘을 ‘홍보주일’로 정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주님을 충실하게 전할 수 있을까요?
꽃이 아름답게 피면 그 향기가 바람에 날아갑니다.
많은 벌과 나비는 꽃이 찾아가지 않았어도 그 향기를 따라서 꽃에게 오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향기가 된다면, 우리의 발과 손이 주님을 전하는 발과 손이 된다면, 많 은 사람들이 그런 우리를 보고 교회를 찾아 올 것입니다.
바다로 세상의 모든 물이 모이는 것은 바다가 높은 곳에 있지 않고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겸손함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면, 고독과 외로움 때문에 방황하는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선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음 선포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주님 부활 시기를 지내면서 지난 6주 동안 있었던 주님 말씀의 핵심 키워드를 살펴봅니다.
“갈망, 믿음, 나눔, 착한목자, 진리, 참된 평화”
이러한 삶을 충실히 사는 사람은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느 연구기관에서 미국의 백만장자들을 면담하면서, 그렇게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일을 선택한 동기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백만장자가 된 이유를 자신의 전공을 살리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백만장자 대답의 1위는 아주 뜻밖이었습니다.
글쎄 ‘우연한 기회에’(29%) 이라는 답변이었습니다.
2위는 27%는 시행착오에 의해서, 3위는 예전 직업과의 관련성 때문에(12%), 4위는 이전 고용주가 놓친 기회 때문(7%)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결국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며, 어쩌다 한 일로 돈을 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공통점을 하나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일을 사랑하고 즐겼다는 것입니다.
일을 사랑하고 즐기는 사람이 소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과연 지금 자리에서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기뻐하십니까?
삶 안에서 사랑이 가득하면 기쁨도 저절로 생깁니다.
가족을 사랑하면 집에 들어가는 것이 기쁘고, 직장에서의 일을 사랑하면 직장 출근이 기쁩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어떨까요?
성당 가는 것이 기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사랑은 단순히 자기만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삶 전체 안에서 사랑을 키워 기쁨의 삶을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행복은 사랑 안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이 세상일을 모두 마치고 승천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에 우리는 더 크게 느낄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 동안 제자들과 만나시며, 그들이 부활의 증인으로서 전할 하느님 나라의 신비와 복음의 기쁨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만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뵙고 엎드려 경배합니다.
하느님께 경배드리는 모습입니다.
성당 안에서 모든 신자가 성체 앞에 무릎을 꿇거나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셔서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6-20)라고 명령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따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을 직접 만날 그날을 기대하면서, 사랑으로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서 열심히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함께하시는 주님이시기에 용기를 내어 살 수 있습니다.
기쁨의 시간을 계속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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