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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에서 전도하는 빌립 8:2~8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 빌립이 사마리아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마술사 시몬 8:9~13
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그들이 따르더니
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13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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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스데반이 죽은 후, 사울은 교회를 없애고자 성도들을 옥에 넘깁니다. 흩어진 성도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데, 빌립은 사마리아성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며 표적을 행합니다. 더러운 귀신이 나가고 병이 나으니 그곳에 큰 기쁨이 있습니다. 빌립의 전도로 마술사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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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에서 전도하는 빌립 8:2~8
박해와 흩어짐은 복음 전파의 새로운 기회입니다. 스데반이 죽임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기던 사울(바울)이 교회를 없애려고 합니다. 이에 예루살렘에 있던 신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집니다. 신자들의 흩어짐은 복음이 확장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들은 1장 8절 말씀대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으로 나아갑니다. 빌립은 사마리아성에 내려가 복음을 전합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빌립은 사마리아성에서 복음을 전하며 더러운 귀신을 쫓고 많은 병자를 고칩니다. 그로 인해 사마리아성에 큰 기쁨이 넘칩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평강과 희락의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 더 깊은 묵상
박해로 인해 신자들이 흩어질 때, 빌립은 어디로 가서 복음을 전했나요?
내가 복음을 들고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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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사 시몬 8:9~13
사마리아성에는 속임수로 기적을 베푸는 마술사 시몬이 있었습니다. 마술사 시몬 이야기는 빌립이 사마리아성에서 전도하는 이야기(5~8절)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는 이야기(8:26~40) 사이에 나옵니다. 이는 참믿음과 거짓 믿음을 대조하려는 의도입니다. 빌립은 성령의 권능으로 복음을 전했지만, 시몬은 성령의 능력을 오해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과 에디오피아 내시는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가졌지만, 시몬은 기적만 좋아하다가 멸망하리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8:14~23). 시몬은 놀라운 표적과 능력을 행하는 빌립에게 매료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권능을 좇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믿음에 기적이 따를 수 있지만, 기적이 나타난다고 항상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 더 깊은 묵상
마술사 시몬은 왜 빌립을 쫓아다녔나요?
나는 믿음과 기적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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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투명한 미래에 담긴 의미
인생길을 걷다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가슴 아픈 일들을 겪기도 한다. 그 일이 왜 하필 내게 일어났는지 이해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느 것도 이유 없이 허락하시지 않는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이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 본 적이 없는 길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더라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자기 인생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늘 익숙한 발걸음만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영혼은 우리가 가 보지 않은 길, 익숙하지 않은 길로 하나님이 인도하실 때 깨어난다. 그때 우리는 긴장 속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을 기다리고 따르게 된다.
눈앞에 알지 못하는 길이 펼쳐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제까지의 인도하심과는 다른 새로운 명령을 주신 것이다. 가 보지 않은 길을 만나게 될 때는 하나님의 새로운 명령이 주어졌음을 기억하고 기대하라.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은 단계마다 꼭 필요한 명령을 신속하게 주신다. 우리 앞에 놓인 불투명한 미래는 하나님의 비상하고 새로운 명령을 들을 수 있는 기회다.
방황의 시대, 방향이 되다 / 이재훈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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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사도행전 8장 7~8절
스데반의 순교는 복음 확산의 계기가 됩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성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귀신이 추방되고 질병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나, 그곳에 '큰 기쁨'이 넘칩니다. 복음은 한 사람의 인생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와 도시를 바꿀 수 있습니다. 복음은 슬픔을 기쁨으로, 어둠을 빛으로,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힘이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보기에 좋은 것으로 인생을 치장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절대 필요는 오직 '복음'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방법 외에는 하나님의 일을 이룰 다른 길은 없다. - 존 프레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제 삶의 시련과 공동체에 닥친 위기마저도 복음을 전할 기회로 바꾸실 것을 기대합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인기를 믿음의 결과인 것처럼 착각하지 말고, 바른 말씀 위에 굳건히 서게 하소서.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채워져 복음을 향해 전진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505 온 세상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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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며, 우리를 지켜 주시고, 우리의 다음 행보까지도 세밀하고 준비하고 계획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를 가던지 주님의 말씀을 증언하고, 복음을 전하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도록 하자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 자신은 내려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높이면서, 그분의 제자로서, 그분의 일꾼으로서, 그에 합당한 삶의 모습을 지켜 나가도록 최선을 다하자
그땅의 사람들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시고, 그들이 주님의 제자로, 주님의 자녀로 거듭날 수 있게 되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도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하자
주님 앞에서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생각하면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주님의 제자로, 주님의 일꾼으로 한결같은 모습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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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은 스데반의 순교를 슬퍼하며 장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데반을 죽인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교회를 잔멸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외에는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지방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역전의 하나님의 뜻을 세상이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욥9:12)
그래서 그들이 박해하면 할수록 복음은 더 멀리 퍼져나간 것입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행8:4)
그때 하나님께서 빌립을 통해 버림 받은 자들로 여겨지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더러운 귀신들을 내쫓으시고 병자를 고치시니,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사탄의 권세에서 자유케 되었고, 그 성에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8:8)
세상은 결코 주께서 원하시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115:3)
세상은 결코 주의 손을 금할 수 없습니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단4:35)
왜냐하면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은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위대하시며 우리 주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도다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시135:5~6)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영을 누가 폐할 수 있겠습니까?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14:27)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작정하신 모든 선하신 계획들도 반드시 속히 행하실 줄 믿습니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욥23:13~14)
그때 우리가 큰 기쁨의 하나님께 나아가 큰 기쁨으로 기뻐하게 될 줄 믿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시43:4)
그때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줄 믿습니다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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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눈을 속이는 마술로 생계를 이어가고 그곳에서 권세를 누리던 시몬이라는 사마리아 사람은 빌립을 통한 성령의 역사를 바라보며 놀랐고 자신도 세례를 받게 됩니다. 진실하고 능력 있는 복음 앞에선 그 누구도 압도 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 앞에선 모든 영혼들이 고침을 받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그 모든 것들의 실체가 되고, 항상 보고자 하지만 결코 인생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들의 변하지 않는 확실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마술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 했지만, 주님은 빌립이 성령의 권능으로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며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증인이 되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오늘도 그 증인으로서의 부르신 사명자의 삶을 신실하게 살아내며 오직 여호와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하나님의 자녀 되길 간절히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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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짐으로 펼쳐진 새로운 전도의 장” 김소리 목사
스데반 집사가 죽자 예수를 믿는 제자들을 유대지도자들은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사울(회심하기 전의 사도바울)은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마땅히 여깁니다.
그 날에 예수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집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웁니다.
그러나 사울은 교회를 잔멸하기 위해 성도들을 핍박하며 각 집으로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가둡니다.
사울과 유대지도자들의 엄청난 핍박 속에서 하나님은 가만있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핍박하는 사울을 회심시켜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영적지도자로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흩어진 사람들을 복음 전파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위기와 고난과 고통이 있을 때 하나님은 가만 계시지 않으시고 회복시켜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 성으로 나려가 그리스도의 백성에게 복음을 전파합니다.
무리가 빌립의 말을 듣고 표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릅니다.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낫는 놀라운 일들이 그곳에서 벌어지므로 그 성은 큰 기쁨으로 넘칩니다.
하나님은 사마리아 땅에 큰 기적을 베푸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자랑하고 소개할 때 그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영육 간에 회복이 일어납니다.
그 성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거짓으로 마술을 행하며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합니다.
시몬은 자신이 신적인 존재로 행동을 하며 영적으로 사람들을 혼란하게 만듭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습니다.
시몬도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랍니다.
시몬은 빌립을 따라다니며 세례를 받고 빌립을 통해 나타나는 표적과 능력을 배우려고 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시몬은 베드로로부터 큰 책망을 받습니다.
믿음에는 기적이 따르지만 기적만 따르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하루도 흩어져 복음을 전하며 말씀대로 행하며 사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예수님만이 나의 그리스도 나의 구원자라는 복음을 분명히 믿습니다.
이 복음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바르기 붙잡고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눈에 보이는 것에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주님 주시는 은혜에 매일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오늘도 나를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감사드리며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7월5일 인천대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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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환경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환난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도무지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는데, 하나님 때문에 답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절망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좌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어떤 상황 가운데서 희망을 가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어려움도 주시기만, 그 모든 어려움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이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행8: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합니다.
스데반이 순교한 후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하고 교회에 큰 박해가 있으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역사는 끝이 났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초대교회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보면 큰 박해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이 어디로 흩어졌습니까?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이것은 결국 어떤 말씀을 성취한 것입니까?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성취한 것입니다.
행1장 8절에 “행1:8.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만일 초대교회에 큰 박해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절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큰 박해로 인해서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로 사마리아로 모든 땅으로 흩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가운데서 큰 박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어떤 큰 어려움이 있습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 그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끝이 났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앞에서 큰 박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스데반을 위하여 크게 울더라 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큰 기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초대교회는 스데반의 죽음으로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성경의 저자는
그 큰 슬픔이 어떻게 변했다고 합니까? 큰 기쁨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큰 슬픔이 변하여 큰 기쁨이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초대교회는 스데반의 죽음으로 큰 박해가 있었지만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3절과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라고 합니다.
그리고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여기서 빌립이 왜 사마리아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전했겠습니까?
스데반은 분명 초대교회의 박해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너희가 복음을 예루살렘만 아니라 유대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하는 말씀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복음을 예루살렘과 유대에만 전 할 수 없어서 사마리아까지 내려갔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이 내려가기를 싫어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들인보다 못한 사람들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도 빌립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사마리아로 내려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그가 행하는 표적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한 마음으로 빌립이 한 말을 따랐습니다.
이 표적은 어떤 것입니까?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래서 여러분 언제 표적이 나타납니까? 언제 기적이 나타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복음을 전했을 때입니다.
우리는 항상 먼저 표적을 구합니다. 기적을 구합니다. 그래서 그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증거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언제 기적이 일어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했을 때입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 기적으로 말미암아 8절에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 어떻게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믿어야합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슬픔가운데 있으면 하나님도 슬픔가운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절망가운데 있어도 하나님은 절대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을 일을 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그 어떤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또 그 어떤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큰 슬픔이 있어도 그 슬픔이 변하여 큰 기쁨이 되게 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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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가장 기쁜소식입니다. 이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과 지역에는 기쁨이 용솟음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개그맨들이 주는 웃음과 차원이 다릅니다. 이 기쁨은 영원한 기쁨입니다. 가슴이 뜨거워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싶어하십니다.
이 소식을 전하여 이 슬픔의 땅을 기쁨의 땅으로 만드는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놀라운 복음을 맡겨주셨습니다.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지 맙시다.
하나님이 흔들기 전에 빨리 이 기쁜소식을 온 땅에 증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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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에겐 스데반의 죽음이 실패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실망과 당혹스러운 사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스데반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은 증명하고자 합니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확장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현재의 모습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하나님의 섭리로 돌아 볼 때 의미 있는 사건으로 변하는 것을 경험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기쁨이 넘치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우리의 인생은 실패할 수도, 성공할 수도 있으나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드러날 것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동참하시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마술사 시몬은 복음을 온전히 알지 못하고 겉모양을 보고 쫓았던 자였습니다. 그는 마술이 주는 능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자신의 능력 아래에 무릎을 꿇게 하는지 알았습니다. 마술사 시몬은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을 보여 주었던 빌립을 쫓게 되며,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할 때 일어난 성령의 능력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 능력을 소유하게 되면 자신이 갖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영광과 권위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마술사 시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깨어서 조심해야 합니다. 복음의 참 능력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 복음을 이용할 때가 있습니다. 성령의 권능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낮아지심으로 의에 순종하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과 연합하는 삶을 통해서 참 복음을 세상에 전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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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데반의 순교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와 주변 여러 지역으로 확장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소명에 열심을 다하였지만, 그들의 시야는 예루살렘과 유대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은 그들만의 복음일 뿐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성령을 받으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지만 말입니다(행 1:8). 이후 10장에서 베드로가 환상 중에서 깨우침을 받기까지, 그들은 여전히 인종적, 종교적으로 유대주의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은 내 안에서만 복된 소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열방을 품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복음은 땅 끝을 바라보고 있는 복음입니까?
2.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이런 유대주의를 스데반의 순교로 깨뜨리셨습니다. 스데반이 죽고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일어나자(1,3)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서 지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지키고, 집사와 성도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1). 그렇게 흩어진 사람들이 한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4). 그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자신들의 소명이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일이 부르심인 것을 알면서도,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있을 때,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바꾸시기도 합니다. 신자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잊지 마십시오.
3. 스데반과 함께 집사로 선출된 빌립의 전도사역이 특별히 소개됩니다. 그는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큰 열매가 있었습니다(6~8).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이 생겼습니다(8). 이 소식을 들은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게 된 것을 확인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보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믿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위하여 안수하고 기도하자, 오순절 성령강림 때처럼 그들도 성령을 받았습니다(17). 유대만이 아니라, 사마리아에도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사마리아의 오순절로 불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순절 날 교회에 성령을 부어주셨지만, 사마리아 사람들도 하나님의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을 확증시켜 주시기 위해서, 사도들 앞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똑같이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이로써 누구도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사마리아로 확장되었습니다.
4. 놀라운 성령의 역사 속에서도 거짓 역사는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시몬을 통해 확인하게 하시고, 각성하고 주의하게 하십니다. 시몬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주술적 능력으로 사로잡던 마술사였습니다(9~11). 빌립의 전도를 통해 그는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녔다”고 말합니다(13). 그는 빌립을 통해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에 놀랐습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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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큰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로 인해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 흩어졌고, 흩어진 사방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 복음의 전파로 인해 큰 기쁨이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어려움을 주시는 것은 이유가 있다. 박해가 없었다면 성도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에서 서로 떡을 떼며 교제하고, 기도하고 예배하였을 것이다.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박해를 허락하시고 성도들을 흩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게 하셨다.
나에게 박해가 있고, 어려움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어떠한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통해 나를 성장시키시고, 하나님을 더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것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한 겪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된다.
박해가 임할 때 감사하자. 이것은 하나님의 인정이다. 내가 이러한 고난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라는 하나님의 인정이기에 감사하며 불평하지 않고, 이 어려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 듣기를 힘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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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속의 사람들은 현실의 삶에 묶여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미래의 삶을 보며 자유합니다(8:1~3절).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한 사울은 그의 죽임 당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합니다(3절). 아무튼 그날 이후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가 본격적으로 박해를 받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도들 이외에는 모두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등으로 흩어집니다(1절). 교회 공동체는 모이기를 힘써야 하지만 아울러 복음을 들고 각각의 삶의 자리로 흩어져야 합니다. 장래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을 소망하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복음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바라기는 ‘죽으며 죽으리라’는 그러한 순교자적 신앙을 갖고 좀 더 적극적으로 복음 전도자의 삶이기를 원합니다. 이 땅에 발목이 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날마다 내 자신을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가기를 결단합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나타난 사회적 변화는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사명을 지금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오늘도 하나님의 사람답게 나를 위한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삶에 우선순위를 두며 살아갈 수 있기를(행 7:54~8:3절)
복음의 능력과 은혜와 권능을 힘입고 살아가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사도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냅니다. 두 사도는 성령 받기를 기도하며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습니다. 이에 시몬은 돈을 드려 두 사도가 가진 권능을 사려고 하자 베드로는 시몬을 저주하면서 회개하라는 베드로의 말에 순종합니다. 두 사도는 말씀을 증언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은 반목과 갈등을 해결하는 길을 열어 줍니다(14~17절).
사마리아로 내려간 빌립은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고, 큰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이 사실이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도들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선교에 대한 열매를 다지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보냅니다. 사마리아에 도착한 두 사도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14~15절).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그곳으로 가서 그들로 하여금 성령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놀랍습니다. 사마리아는 우상 숭배의 대명사격인 지역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 멸망 이후에 이방인과의 혼혈이 이루어진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같은 동족임에도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과 다름없는 개와 같이 취급하며 상종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곳에 빌립을 통해 복음이 들어갔고,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이 성령을 받기를 기도했고,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게 됩니다(17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쌓였던 해묵은 감정들 즉 반목과 갈등이 복음을 통해 무너져 내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반목과 갈등 관계 속에 있는 나라와 민족이 복음을 통해 화해와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복음은 내 안에 있는 미움과 시기, 질투를 사라지게 합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게 하는 그 사람마저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끔 역사합니다. 나와 보이지 않는 경쟁의 상대인 그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 마음이 여전이 내 안에 있는 걸 보면 난 아직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지역으로 내려가 그들이 성령을 받기를 기도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나와 경쟁을 해야 하는 상대에 대해 이제 어떠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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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빌립의 사역
스데반의 순교는 복음의 걸림돌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Ac 8:4–5) 특별히 스데반과 함께 사역자로 세워졌던 빌립이 사마리아에 첫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은 유대인들과는 아주 가까우면서도 먼 지역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과거에 북이스라엘이 위치하였던 곳으로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이후 앗수르 제국의 정책에 의해 민족의 정체성이 없어지고 여러 민족이 섞인 혼열민족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 신학마저도 이단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믿었는데 그것마저도 유대인들의 모세오경과는 조금 다른 자신들만의 모세오경이었습니다.
감정적으로도 유대의 하스몬 왕조 때 사마리아 지역의 세겜 성이 위치한 그리심산에 있던 성전을 헐어버림으로 인하여 매우 안 좋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넘어 2차 복음 확장시대가 시작되면서 전해진 복음은 단순하면서도 진실한 면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Ac 8:7–8) 빌립은 그리스도를 선포하였습니다. 복음이기에 유대인이 종족과 해묵은 감정을 넘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쳤습니다.
복음은 많은 것을 평등하게 합니다. 지역과 육체의 질명과 형통을 평등하게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여전히 차별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가진 사람과 복음을 듣는 사람에게는 이제 그러한 것이 의미없음을 알게 되면서 평준화가 이루어집니다.
복음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부요함에 교만하고, 가난함에 기죽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아직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복음이 들어가도 여전히 부자와 가난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제는 복음 때문에 기뻐합니다. 모두가 기뻐할 수 있습니다.
2.시몬의 반응
사마리아 지역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Ac 8:9) 그는 마술로 사마리아 지역에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마술이 속임수인지 아니면 악령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마 속임수적인 측면이 더 강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빌립이 사마리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이적과 표적이 일어났을 때 그것에 놀라면서 따라다니기 시작합니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Ac 8:13) 시몬의 세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논의가 많습니다. 그런데 가짜일 가능성이 많아 보입니다. 그래서 시몬이 '믿었다'는 뜻은 실제 믿음이 아니라 믿는 '외적인 모양'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몬은 빌립이 전하는 설교의 내용이 아니라 그의 이적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성경시대에 이적은 표적으로서 그가 하는 말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적 자체가 메시지는 아닙니다. 그런데 시몬은 이적 자체를 메시지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메시지에 이르지 못하고 이적에서 멈추어 버리게 됩니다.
시몬의 모습에서 말씀보다 기적이 우선순위인 사람의 결말이 어떤지를 아주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이 전해질 때 부차적인 것이 함께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는 '표적'이 필요하였기에 표적이 있었습니다. 또한 한국교회의 초기에는 참으로 못살던 때이기에 '물질적 복'이라는 것이 믿음과 함께 전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필요하였던 것이기보다는 사람들의 간절한 요청 때문에 복음과 함께 일어나곤 하였습니다.
때로는 도덕이 복음과 함께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도덕은 믿음으로 일어나는 거룩과 매우 비슷하기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부차적인 것입니다. 그러한 부차적인 것에 매여 있으면 복음 그 자체를 모르게 됩니다. 부차적인 것의 강조로 인하여 복음이 오염될 때가 많습니다.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생에 있습니다. 그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복음이 사마리아라는 특수한 지역에서 막힌 담을 무너뜨리고 전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복음은 이 땅의 모든 것을 평등하게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복음으로 최소한 우리의 마음안에서 평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복음이라는 아주 큰 산 앞에서 이 땅의 모든 것은 지극히 낮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복음으로 불평등을 조장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불평등하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시몬이 기적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자칭 신앙인들이 복음이 아니라 물질이나 세상의 것에 사로잡혀 있기에 여전히 불평하고 여전히 세상의 것에 중요한 것입니다. 기적도 아무것도 아니요, 돈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복음을 가진 사람만이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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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을 통해 사마리아에도 복음이 전해지자 그 성에 기쁨이 넘칩니다.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를 놀라게 하던 시몬도 빌립의 전도로 세례를 받고 그를 따릅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4절 예루살렘의 박해를 피해 흩어진 성도들은 발길이 닿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고 많은 성도들이 핍박을 받으며 옥에 갇히는 상황인데도, 복음은 더욱 빠른 속도로 널리 퍼집니다. 교회의 위기가 선교의 기회가 된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세상의 핍박은 늘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며, 안팎으로 성장시키는 동인이 되어 왔습니다. 오늘 내 삶에 닥친 위기도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전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5~8절 흩어진 사람들 중에 집사 빌립(6장 5절)은 유대인이 배척하던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복음을 전합니다. 그 성에 복음이 증거되자, 어둠이 물러가고 악한 권세 아래 있던 이들이 자유를 얻습니다. 소외와 미신의 땅 사마리아에 참 해방과 기쁨과 치유의 역사가 임합니다. 복음은 악의 속박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참 하나님만을 예배하게 합니다. 그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의무만이 아니라 은혜로 받은 특권이요, 고된 수고만이 아니라 기쁨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9~11절 빌립의 전도를 듣고 세례를 받은 자들 중에 마술사 시몬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스스로 큰 자라 자처하면서 마술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던 자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마술에 현혹되어, 그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까지 부르며 추종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술은 사람들에게 ‘놀라움’만 줄 뿐, 복음이 주는 ‘기쁨과 자유’(7,8절)를 주지 못합니다. ‘호기심’만 키울 뿐 ‘회심’을 얻지 못합니다. 오감을 자극하는 기이한 현상에 현혹되지 말고, 내 영혼을 일깨우는 복음의 진리에 마음을 더욱 기울이십시오.
12,13절 시몬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던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제 그의 마술보다 더 큰 능력인 예수의 복음 앞에 순복하여 세례를 받습니다. 거짓되고 헛된 권세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구원)에 이릅니다. 심지어 시몬까지도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통치 앞에서는 그 어떤 능력도 무기력할 뿐입니다. 내가 변한 것처럼 그 사람도 변화시켜주실 복음의 능력을 믿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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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잘못된 지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사울처럼 교회를 무너뜨리려 하지만, 복음의 지식으로 가슴에 가득 찬 사람은 오히려 복음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써 세상의 묵은 때를 씻어버리고 우리 마음 밭을 기경함으로써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복 된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9~13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악의 세력은 스데반 집사를 죽음으로 위협하여 복음을 방해하려고 했지만, 스데반의 순교는 오히려 복음이 이방 땅으로 퍼져나가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한 집사의 순교는 오히려 빌립이라는 또 다른 집사의 발걸음을 이방인의 땅인 사마리아로 옯기게 했습니다. 그곳에는 시몬이라는 자가 마술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서도 미혹당하지(?) 않았는데, 진작 사마리아인들은 기적과 비교할 수 없는 마술에 미혹되어 높은 사람까지 즉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9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기적을 보고서도 그 담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기에 예수 그리스도조차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사마리아인들은 작은 속임수인 마술에 현혹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저들에게 복음이 먹혀들었다는 것입니다. 마술이라는 속임수에 현혹되었던 저들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12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견고한 유대인들은 진작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못했는데, 진작 이방인이 사마리아인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그리고 자신의 동족인 아닌 유대 청년으로부터 비롯된 복음을 받아들였던 것입니까?
사마리아 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누구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했던 질문에 녹아 있습니다(요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이해한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와 우리민족 사마리아인들은 예배할 수 없는 존재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는 반대로 심령 깊숙한 곳에 예배자로서의 갈급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그 마음이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자를 말합니다. 목이 마른 자가 샘물을 찾으며, 낮은 곳에 처한 자가 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복음은 낮은 곳으로 흐르지 결코 높은 곳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겸손한 자를 향하지 교만한 자를 향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은 있었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아닌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당시 유대인들이 어리석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오늘날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자들 역시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복음은 참된 예배를 갈망하는 자들에게 흘러가는 것입니다(요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누가 참된 예배자입니까? 누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까?
눅 18:10-13,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눅 18:9). 자기 인생에 배에 오르신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의 반응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기적을 보고도 담대한, 즉 자신의 의에 취해서 견고한 자아를 가지고 있는 자에게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는 심령가운데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위험한 사람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으면서 견고한 의의 장벽을 치고 있는 종교인들입니다.
오히려 마술로 사람들을 속였던 시몬은 성령의 역사를 보고서 이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가졌습니다(9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어떻게 보면 그는 큰 잘못을 했지만 그동안 그동안 쌓아온 명성과 이권을 모두 내려놓은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사도들은 시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 어떤 이유라도 여러분 자신에게 의롭다는 견고한 진에 쌓이는 것을 깨닫게 되거든 즉시 무너뜨리시기 바랍니다. 복음에 반하는 그 어떤 것이라도 용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만의 냄새가 풍긴다면 비록 아무리 경건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과감하게 떨쳐버리시기 바랍니다. 경건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며 죄의 어떤 모양에서 돌아서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습관적으로 기도를 시작할 때에는 먼저 자신을 살피시고 겸손의 두 팔을 벌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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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 사마리아 성의 모든 사람들이 시몬이 행하는 마술에 놀라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자라고 칭송했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나타나는 현상을 높이 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그런 것에는 도대체 관심이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훌륭하면 거두절미하고 높은 평가를 주기 때문이지요. 곧 과정보다는 결과이고, 속보다는 겉이지요. 바로 본문의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 좋은 샘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술사 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관심은 온통 드러나는 현상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빌립의 기사와 표적입니다. 더러운 귀신들이 떠나가고, 중풍병자와 지체장애인들이 나으니 그로서는 그 신비한 현상만을 우러러 본 것입니다.
그는 빌립에게 무엇이 있는지 통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빌립 안에는 거룩한 영이 있습니다. 복음이 능력이 되게 하는 원천입니다. 사실 빌립이 한 일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뿐입니다. 결코 빌립이 이적과 표적이 일어날 줄 알고, 그것을 기대하며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증거될 때 그런 능력이 나타났을 뿐이지요. 아마 전하는 빌립이 더 놀랬을 것 같습니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은 물리적인 능력과 영적인 능력 등으로 나타납니다. 병이 낫고, 필요한 것이 공급되며,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물리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구원 받는다면 그것은 영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굳이 비교한다면 물리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능력이 한결 상위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사람의 영혼만큼 값진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만약 어떤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고 그 영혼이 구원 받는다면 그처럼 귀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곧 표적과 기적이니까요. 곧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큰 능력을 말합니다. 영광스럽게도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그런 능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빌립과 같이 우리에게도 거룩한 영이 있습니다. 그것이 능력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능력이 능력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깨끗한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영은 오르지 거룩한 곳에 계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그 일은 우리는 죽고 다시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날 때에 일어나는 일이지요. 곧 참된 세례를 통하여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마술사 시몬에게 그런 능력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설령 세례를 수차례 받았을지라도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살아나지 않으면 도무지 성령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드러나는 현상만을 쫓는 시몬이 아니라, 성령께 붙들림을 받는 빌립이 되기를 원합니다. 자신이 드러나는 자는 성령의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거룩한 영의 통로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진정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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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에 전해진 복음(사도행전8:4-13절)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것은 지위의 고저나, 인종이나, 지역으로 제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로 인정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특히 초대 교회 시절 선민적 배타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모든 사람을 인정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복음은 우리만의 것이며, 우리 민족에게만 구원이 있고,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생각의 벽을 뛰어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인종과 지역을 철폐하는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해지기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만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은 박해라는 방법이셨습니다. 고난이라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집중되어 있는 훈련된 사람들을 흩어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러한 인종적, 지역적인 편견의 벽을 뛰어 넘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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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마리아, 유대인들이 그렇게 무시하고 상종조차도 하지 않으려 했던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박해라는 바람을 타고 빌립이라는 촉매를 사용해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박해가 시작되자 사울은 이제 본격적인 핍박 자로 등장합니다. 본문 3절은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잔멸할 새라는 말은 “모욕을 주다', '더럽히다', '파괴하다'의 뜻을 지닌 말입니다. 이 말은 시80:13절에서 멧돼지가 포도원을 짓밟아 황폐화시킨 것을 나타낸 70인역의 표현 중에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렇게 사울이 미친 멧돼지처럼 날뛰는 상황에서 복음은 행1:8절을 말씀을 성취라도 하듯이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복음의 말씀이라는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말씀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 흩어져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예루살렘은 선교의 센터로서 존재해야 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본문은 사도들이 남아있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아직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서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도들이 자신들이 거기 남아 있는 것은 의무라고 생각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아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 전도(5-8절)
그런데 누가는 이 복음이 가장 먼저 사마리아에 전해진 것을 주목합니다. 그리고 그 일은 일고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인 빌립 집사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사마리아 전도에 대해서 8장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예루살렘과 갈릴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주님이 예루살렘과 나사렛, 갈릴리를 오가신 것을 압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이 사마리아를 피하기 위해서 여리고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만큼 사마리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대감은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전도가 가지는 비중은 생각보다 큰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적대감은 무려 천 년 간이나 지속되어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적대감의 진원지는 분열왕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르호보암에게서 여로보암이 열 지파를 찢어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졌을 때부터 이들은 서로 적대관계였습니다. 그러다가 주님 오시기 전 722년에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점령당하면서 수많은 주민들이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심각한 일은 이방인들이 그 땅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은 이방인들과 섞임으로 인해서 사라졌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인종과 종교 면에서 혼합된 길을 걷게 되자 주전 6세기경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할 때 사마리아인들의 도움을 거부하는 배타성을 띠게 됩니다. 그리고 주전 4세기에 이르러 사마리아 분파가 그리심 산에 유대인들과 경쟁하여 성전을 세우고 모세 오경을 제외한 구약성경을 거부하게 되자 그 분파는 완전히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혈통과 종교 양면에서 잡종이라고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이교도이며 분파주의자라는 것입니다. 요4: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그랬습니다. 이렇게 뿌리 깊은 반목관계에 있는 사마리아에 복음을 증거 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이방인들에게 증거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빌립 집사의 사마리아를 향한 첫 걸음은 높게 평가되어야 합니다.
복음이 유대인들의 민족 종교로서 머무르지 않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해지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변화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어리석음이 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박해의 불똥이 튀기면서 사마리아가 복음으로 불타게 하신 것입니다.
빌립 집사가 복음을 들고 사마리아로 갔다는 것은 그가 복음을 바르게 이해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것은 사마리아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당시에 이 벽을 뛰어 넘기란 하늘보다도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에 박해의 바람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불똥이 튄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영원히 넘지 못할 것 같았던 편견의 벽이 헐리는 순간입니다. 사람취급도 하지 않던 사마리아인들이 형제요 자매로 인정되는 순간입니다. 얼마나 감격적인 순간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 시대의 기독교를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생명의 복음을 잊지 말고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술사 시몬(9-13절)
시몬이 누구입니까? 사마리아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의 직업은 마술사입니다. 언제부터 마술사입니까? 전부터 그랬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꽤 오래된 마술사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마술사는 여러 번의 연습을 통해서 눈속임을 하는 마술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요. 이 사람이 이런 기막힌 마술로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아 갔습니다. 본문에 사용된 놀랐다는 말은 헬라어로 엑시스테미(ejxivsthmi)입니다. 이 말은 제 정신을 잃었다, 혹은 매혹시키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몬은 신비적인 마술을 사용해서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훔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낮은 사람에서 높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이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었고 주목했습니다. 본문의 청종했다는 말은 믿고 따랐다는 의미보다는 아주 주목해서 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의 술법이 얼마나 신묘 막측했는지 사람들이 말하기를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11절은 다시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마술에 심취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큰 능력’이란 말은 최고의 신성에 대한 표현인데, 그렇다면 사마리아인들은 시몬을 신이 이 땅에 내려온 것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놀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2세기중반의 사마리아 출신의 순교자 저스틴 마터라는 분은 시몬이 권능의 마술을 행하므로 신으로 간주되었고, 심지어 그를 기념하는 동상을 세워서 기념하는 로마인까지 있었다고 했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에 들어왔고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하기 시작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사마리아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그랬습니다.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그랬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누가는 의도적으로 표적을 앞에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 뭔가 마술적인 것을 강조하고 싶지 않습니다. 먼저 말씀이 전해졌습니다. 그리스도가 전해졌습니다.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시몬의 마술에 깊이 빠져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 사람들이 빌립의 전도를 듣고 남녀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6절에는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래 서로 왕래하지 않았던 사마리아입니다. 물론 사람취급을 하지 않는 것은 유대인들이지요. 그렇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많은 아픔과 원한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이 빌립을 핍박하고 죽인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고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은 놀랍기만 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주인공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아니라 시몬입니다.
마술사 시몬! 그는 오랫동안 군림해 왔던 사람입니다. 지칭 큰 자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청종하는 것을 당연시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시몬도 예수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정상적인 반응이라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자 은장색을 팔던 데메드리오가 사람들을 선동해서 저 사람이 복음을 전하므로 장사도 안 되지만 우리 신 아데미가 홀대를 받는다고 부추겨서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 시몬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 후에 끈질기게 빌립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면서 그 나타나는 표적과 능력을 보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참 재미있는 사실은 여기서 놀랐다는 말이 앞에서 마술을 보고 놀란 사람들이 놀란 것과 똑같은 단어라는 것이지요.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냥 푹 빠진 것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빌립에게 푹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몬은 빌립을 통해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표적을 자신의 마법과 연결해서 이해한 것입니다.
오늘 묵상에서 중요한 것은 빌립 집사를 통해서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있었어도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시대에 빌립 집사를 사용하셔서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지게 하시고 큰 기쁨이 있게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이 우리의 편견 때문에 소외되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마음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박해로 흩어진 수많은 사람 중에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전도의 주역이 되었던 것처럼 소외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 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자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측량할 수 없는 크신 성호에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옵소서
스데반 집사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고,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자 이러저러하게 말하라고 매수하여 거짓 증인을 세워 하나님을 모독한 죄목을 붙인 자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는 현장을 기록한 말씀을 묵상합니다..
위협과 죽음 앞에서 비겁하지 않고 주의 복음을 증거한 스데반 집사의 기록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과 너무나도 큰 차이가 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조그만 핍박과 불편한 상황이 되어도 비겁해지며
위기 소침해져서 주의 증인되는 일에 입을 다물어 버리는 비겁한 ...
그리하여 은혜와 권능으로 주를 증거하지 못하는 일들이 나의 삶 ....
우리는 많은 말들을 쏟아 놓으나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지 못함...........
성령 충만함을 사모하지 않고 ...
자신을 의지함이었나이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성령 충만함 만이 주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조건이건만 ...
죄와 허물로 죽었던 나를 ..
옛 사람인 자신을 잘도 용납하고 성령을 의지하지 않는 불순종이 몸에 배어 있었으니 ...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마음 속의 싸움터에서
성령을 따라 살지 않으며
주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고
죄 고백을 하지 않은
씻지 못한 심령으로
여전히 세상이 주는 것들에 마음과 몸을 빼앗겨 있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고백한 나의 죄를 사하시고
여전히 사랑하사
고백한 심령을 깨끗하게 하신 주의 보혈의 능력을 신뢰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여 주를 증거하는 날이 되기를 간구합니다.
오늘 성령께서 주장하심으로 내가 있는 자리에서 주님께서 나타나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가는 길을 아시고
갈 길을 인도하시며 기쁨이 멈춘 곳에서도
은혜를 더욱 넘치게 하시는 놀라운 사랑을 다시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여호와를 높이고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령의 충만함으로 증인 된 삶을 누리는 주님의 자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