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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전도 사명 22:17~21
17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8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9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위기 상황에서 로마 시민임을 밝힘 22:22~29
22 이 말 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23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24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대
25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26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이라 하니
27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28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29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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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주님이 자신을 이방인에게 보내셨다고 바울이 말하자, 유대인들은 더 듣지 않고 바울을 죽이자고 소리 지릅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데려가서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명하자, 바울이 로마 시민을 죄도 정하지 않고 채찍질하느냐고 합니다. 천부장은 로마 시민인 그를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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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전도 사명 22:17~21
회심 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때 그는 황홀한 중에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일은 회심 후 예루살렘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일어났을 것으로 봅니다(9:26). 주님은 유대인들이 그의 증언을 듣지 않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완악함’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박해자로 있다가 회심했기에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신을 알아줄 것으로 생각했으나, 주님은 바울을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2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바울은 자신의 의도와 달리 주님의 명령과 지시를 따라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었다고 간증합니다.
● 더 깊은 묵상
성전에서의 환상을 통해 주님이 바울에게 주신 사명은 무엇인가요?
내 의도와 계획을 내려놓고 주님의 명령과 지시를 따를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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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상황에서 로마 시민임을 밝힘 22:22~29
주님이 미리 알려 주셨듯이(18절), 유대인들은 바울의 증언을 듣지 않습니다. 이방인에 대해 언급하자 유대인들은 극렬하게 분노해 바울을 죽이려 합니다. 하나님이 이방인을 그분의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말이 그들에게 모욕감과 적개심을 준 것입니다. 천부장은 무슨 이유인지 알기 위해 바울을 채찍질해 심문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때 바울은 로마 시민임을 밝혀 채찍질당할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당시에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어디서든 예우를 받았고, 재판받을 때도 권리와 혜택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이라는 특권을 복음 전도를 위한 상황에 적절하게 사용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직분이나 재능 등은 복음 전파를 위한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 더 깊은 묵상
바울이 위기 상황에서 로마 시민임을 밝힌 이유는 무엇인가요?
나는 복음 전파를 위해 나의 직분이나 재능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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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으로서의 사명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가르치면서, 학생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비보를 몇 차례나 들었다. 학생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학업의 부담을 주어서일까? 과학도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정신적인 기본을 다져 주지 못해서일까? 학생들의 잇단 자살로 나는 거친 물살에 떠내려가는 조각배 같은 심정을 느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내 연구실 문 앞에 “항상 열려 있어요.”라는 메모를 붙였다. 마지막 순간에 찾아갈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내게 찾아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인내하며 연구해서 위대한 과학자가 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전공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지식과 그 너머의 진리를 알아야만 한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성경책을 읽고 창조주를 만나야 한다고 전한다. 짧다고 무시하기엔 너무 긴 인생, 여름옷만 입고 겨울까지 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 준다. 영원에 비하면 너무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과학자들은 확률을 신봉하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은 확률보다 크시다. 행복과 생명 방정식의 열쇠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살의 유혹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지식과 그 너머 / 이재규_ 비전과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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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 사도행전22장 25, 28절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며 심문의 부당성을 제기합니다. 바울은 개인의 유익을 위해 특권을 악용하지 않고, 복음의 진보를 위해 선용합니다. 특권은 악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성질이 결정됩니다. 성도는 주어진 권한을 자기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 이름을 드러낼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한을 그분 뜻에 맞게 활용할 때, 권한은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됩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해 끝까지 따르는 이가 비전의 사람이다. - 하용조
오늘의 기도
하나님, 험하고 막막한 믿음의 길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확실한 위로가 됨을 경험하게 하소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제 인생을 사용하시니 오직 기쁨으로 순종하게 하소서. 제 삶의 조각들을 하나도 허비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에 요긴하게 쓰실 것을 기대합니다.
오늘의 찬송(새 292 주 없이 살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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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나를 택하여 주시고, 그분을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내가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 지금까지 주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당신의 뜻을 알게 하시고, 당신을 보게 하시고,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신 그 모든 경험들을 잊지 말고,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도록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도록 하자
- 그분을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내가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는 증인이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노력들을 계속해 나가도록 하자
- 나를 택하시고, 나에게 섬겨야 할 부족 사람들에게로 인도해 가시는 그분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나아가고, 그들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올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을 위해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더 깊이 고민하고, 실천해 나가는 시간이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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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은 지금까지 율법에 열심이던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간증하였습니다. 그가 변화된 것은 전적인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일방적으로 자신을 찾아오시고 구원하신 예수님의 긍휼로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이 받은 이방인 사도의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는지를 말합니다. 이를 통하여 유대인들도 이방인 전도의 사명을 영접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성전에서 이방 땅으로 보내심)
17-18절을 보십시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바울이 성전에서 기도할 때였습니다. 바울이 회심한 후 처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때, 즉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한 후 3년간 아라비아에서 체류한 다음 예루살렘을 방문한 때(사도행전 9장 2 갈라디아서 1장 17-19)라고 봅니다. 바울이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 중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는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은 장소가 성전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성전은 거룩한 장소이므로 그곳에서 바울이 계시를 받았다면 어느 누구도 그 계시의 진정성에 대해 함부로 시비를 걸 수 없습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증언해도 예루살렘 사람들이 듣지 않을 테니 너는 예루살렘을 나가 멀리 이방인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에게 내려진 계시는 즉시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29에 의하면 헬라파 유대인들이 바울과의 견해 차이에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바울의 증거를 듣지 않은 극단적인 한 예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나가는 것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 땅으로 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는 바울)
19,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자신이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회당에서 때리고 스데판을 죽이는 것을 찬성하고 증인이 된 것을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회심을 체험한 바울은 자신이 이전에 저지른 일이 하나님을 훼방한 자들을 징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를 믿는 자들을 박해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과거에 잘못한 일들을 숨기려 하지 않고 솔직히 고백하였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한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 반문하였습니다.
바울이 저지른 잘못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일이었을 것입니다(7:57-60).
바울은 자신이 직접 돌을 들어 스데반을 치지는 않았지만 그를 죽이는 일에 찬성하였고 그를 죽이는 일에 가담한 자들의 옷을 지켰습니다. 이제 바울은 스데반을 재평가하고 있는데, 그를 가리켜 주의 증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증인은 요한계시록 2장 13, 17장 6에서 처럼 순교자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흠정역에서는 순교자(martyr)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고 과거에 자신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일을 다시 회상하여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떤 학자는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 남아 유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생각할 때 감히 이방인에게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과분한 일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재차 이방인에게 보내시는 예수님)
21절을 보십시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다시 한번 바울을 멀리 이방인에게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의 이야기가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이든, 주님은 재차 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명령을 반복하여 내리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것이 이방인에 대한 전도의 사역을 맡기기 위한 것임이 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 바울 자신에게는 예수님의 이 명령을 통하여 이방에 대한 복음 전파가 그가 받은 소명임을 확인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방인 전도는 바울이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만나주신 예수님이 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뿐 아니라 온 세계만민이 구원을 받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세계 50억의 인구가 눈에 밟혔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이즘에서 벗어났고 헬라어를 잘하는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바울을 없이하고자하는 유대인)
22-23절을 보십시오.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이방인이라는 말이 나오자 유대인들은 격분하였습니다. 바울의 조심스러운 연설을 잠잠히 듣던 무리들은 바울의 이방 선교 소명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치 휴화산이 폭발하듯이 다시 아우성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금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21:36). 그들은 바울을 없이하자 살려둘 자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옷을 벗어던지고 티끌을 날렸습니다. 오히려 살려둘 자가 아니라는 첨가어는 상황이 더 악화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에 대해서 배타적이며 우월의식과 선민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연속되는 세 개의 현재 분사형 떠들며, 옷을 벗어던지고, 티끌을 날리며는 격렬한 분노와 흥분으로 인하여 종잡을 수 없이 설치고 날뛰는 난폭한 군중들의 모습을 매우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위에 언급된 세 가지의 표현은 극한 감정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구약성경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개 비통, 울분, 애통함을 표현하는 행위로 묘사됩니다(욥 2:12 삼하 16:13 계 18:19). 그들은 다만 즉각적인 분노를 표현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이 대단하였습니다. 자신들과 이방인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도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자 그들은 영접지 못하였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하는 것도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강한 유대이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헛된 민족적 자부심이 강하였습니다. 유대인을 보면 요나서에 나오는 요나와 같습니다. 자신들만 구원받고자 합니다. 이방인이 죽는 것은 개의치 않습니다. 이방인이 구원받으면 차라리 자신이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세계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세계 만민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
이를 볼 때 하나님은 세계 만민이 구원받기를 원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에 유대인이 이방인 선교를 영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 자신도 이방인 선교를 영접지 못하자 하나님은 세 번이나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잡아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이방인 전도를 하였지만 이방인 선교에 적격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거부 없이 이방인 선교를 영접하는 적격자였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선민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는 헬라어를 잘하였습니다. 그는 이방인 선교를 영접하고 그를 위해 기쁨으로 평생을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쓰셔서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로마의 복음화를 이루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순종하는 자를 친히 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넓은 마음으로 이방인 전도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좁은 유대이즘을 회개하고 넓은 하나님의 마음을 영접해야합니다.
(바울을 채찍질하고자하는 천부장)
24절을 보십시오.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 대”
천부장은 히브리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무슨 메시지를 전했는지 몰랐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영내로 데리고 가서 채찍질하여 심문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유대인 청중들에게 말할 때 아람어로 말했으므로, 천부장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다만 군중들의 흥분으로 보아 바울에게 무엇인가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채찍은 가죽 끈에다 쇠조각과 뼈를 매단 것이며 이것으로 심하게 맞을 경우 불구자가 되거나 죽기까지도 하였습니다.
이 채찍질은 로마인이 아닌 사람이나 노예를 심문할 때 사용하였는데, 지방에서는 자유인에 대해서도 공공연히 채찍질을 가하여 심문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의 고백에 의하면 그의 전도 활동 중에 매를 맞는 고난을 많이 당했는데,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태장(笞杖)을 세 번 당했고 한 번은 돌로 맞았다고 합니다(고후 11:24, 25).
(로마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는 바울)
25-26절을 보십시오.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이라 하니”
바울은 자신을 치고자 가죽줄로 매자 로마 시민인 나를 재판도 하지 않고 때릴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는 뱀처럼 지혜롭게 핍박을 피하였습니다. 당시에는 혐의자에게 채찍질을 가하기 위해 기둥이나 말뚝에 채짹질하기 좋은 위치와 자세로 묶었습니다.
이때 채찍질의 표적은 대개 등짝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로마시민의 권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로마 사람들은 발레리안 법과 포르시안 법에 의해 보호를 받았습니다.
로마인은 정당한 재판에 의해 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채찍질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이 법을 어기고 함부로 채찍질을 가할 때는 엄격한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쥴리안 법은 로마 시민들이 로마 법정에 호소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습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이 아무런 혐의도 없고 재판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부당한 채찍질을 가하려 한 데 대해 항의를 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시민을 통하여 로마에 복음을 전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로마시민권을 이용하여 로마에 가고자 하였습니다. 빌립보 전도에는 그대로 채찍에 맞았지만 이번에는 채찍을 거부하였습니다.
백부장이 천부장에게 로마 시민인데 어찌하려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말을 들은 백부장은 매우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고한 로마 시민을 결박하여 채찍질을 가한 것은 명백한 범법행위였고 그것에 대한 처벌이 어떤 것인지는 백부장 본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임을 확인한 천부장)
27절을 보십시오.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
천부장이 네가 로마 시민이냐고 묻자 그러하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백부장의 보고를 들은 천부장은 상당히 당황한 듯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경우라면 피의자인 바울을 자기에게 불러 사실 여부를 묻는 것이 상례일텐데 지금은 그가 직접 바울에게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네가 로마 사람이냐"에서 “네가” 의 위치가 강조적인 자리에 있는데 이는 뜻밖의 상황에 직면한 천부장의 당황한 모습을 반영합니다.
이에 비해 바울의 대답은 담담하고도 단호합니다.
그는 자신이 로마 사람인 것을 애써 증명하려 하거나 설명하려 하지도 않고 단지 간단하게 그러하다고만 대답합니다.
천부장은 바울의 단호한 대답에 대해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증명서를 요구하거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당사의 로마 시민들은 토가라는 긴 겉옷을 걸침으로써 로마 시민임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토가는 착용이 불편했기 때문에 국가적 행사등이 있을 때 외에는 잘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바울이 이 토가를 입고 있었다면 로마 군대에 의해 연행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민족적 배타성이 강한 예루살렘이었으므로 더더욱 토가 옷을 입지 않았을 것입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 시민인 것을 알고는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시민인 바울)
28,29절을 보십시오.“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
천부장은 많은 돈을 들여서 로마 시민권을 산 사람이나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당시에 로마 시민권은 로마인이 아니고서는 몇몇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매우 중요한 자격이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은 정부의 고위층이나 로마를 위해 뛰어난 공헌을 했던 사람들에게만 선별적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런 만큼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상당한 명예와 권리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시민권이 뇌물에 의해 주어지기도 했고 로마 황제들이 국고를 충당하기 위해 시민권을 공개적으로 팔기도 했습니다.
특히 황제 글라우디오 때에는 그의 아내까지도 이 시민권을 팔아 치부하였다고 합니다.
이 천부장의 씨족명이 글라우디오인 것을 감안할 때(23:26) 황제 글라우디오 치하에서 시민권을 산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천부장의 생각에는 자기는 많은 돈을 들여 시민권을 샀는데 전혀 돈이 많아 보이지 않는 초라한 바울의 외양을 볼 때 어떻게 시민권을 취득하게 되었는지 의아하였습니다. 바울이 나면서 시민이라는 말은 바울의 아버지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가문이 언제, 어떻게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 시민인 것을 알고 결박한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그를 심문하려던 자들은 물론 심문을 명령했던 최고 책임자 천부장도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천부장은 뒤에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허위 보고서를 총독에게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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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을 향해 아버지와 형제들이라고까지 부르며 히브리어로 자신이 만난 예수님에 대해 증언 하였지만 그들은 막무가내로 바울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였습니다. 바울을 쇠사슬에 묶여 있었지만 하나님의 손길을 따라 로마 군인들에 의해 안전하게 보호된 상태로 유대인들을 향해 진실로 하고자 하는 예수님에 대해 증거한 것입니다.
이 모든 내용을 알아듣지 못한 군인들은 그를 데리고 진영안으로 들어와서 채찍질하며 신문하려 했는데 바울은 다시 헬라어로 자신이 ‘로마시민’이며 불법적인 매질과 결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체포되었을 때 부터 말했다면 그 증언의 기회도 없이 그는 따로 격리되었겠지만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라는 치외법권의 특권을 스스로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기 보다 복음의 진보를 위해 남겨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지식, 재물 그리고 생명까지도 인생을 만드시고 그 길을 주관하시는 분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때 하나님의 뜻이 그 영혼을 통해 이 땅에 펼쳐지고 이뤄지는 것입니다. 과거 스데반을 죽이고 예수를 핍박했던 길에 섰던 사울처럼 생명을 없애고 영혼을 죽이는 일에 서지 않고 결박 가운데에서도 예수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바울과 같이 오직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외치는 소리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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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 로마시민권 취득에 관한 차이로, 천부장은 돈으로 샀지만, 바울은 모태서부터라는 것입니다. 로마시민권은 원래 로마에 사는 시민에 한합니다. 하지만, 로마시민이 아니고서도 일부 사람에게 특혜로 주어지기도 합니다. 대개 정부의 고위층이나 로마를 위해 뛰어난 공헌을 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뇌물에 의하거나 황제들의 국고를 충당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팝니다. 특히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는 그의 아내까지도 이 시민권을 팔아 돈을 챙겼다고 합니다. 천부장은 돈으로 로마시민권을 취득한 사람입니다. 출세 지향적인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성경에 근거해서 보더라도 매우 충직한 사람으로, 업무에도 빈틈이 없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바울 살해 의도를 알고 한밤중 큰 병력을 풀어 가이사랴로 보낼 때 총독에게 자세하게 그 상황을 설명한 편지도 함께 보냅니다. 처신도 나무랄 데 없습니다. 그이 이름은 글라우디오 루시아입니다. 그의 기사는 성경에 무려 3장에 걸쳐 (21:31-23:34) 나옵니다. 하지만 그가 주님을 영접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만약 그가 바울을 통해 주님을 믿었다면 저자 누가가 그런 기록을 단연코 빠트렸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사도 바울과 직접 만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업무로만, 자신의 진노에 유익이 될지 안 될지 그런 것에만 신경을 썼지 그 외의 것은 아예 생각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세상, 그리고 출세입니다. 세상에 너무 빠져 있었던 관계로 그만 자기 영혼의 문제는 볼 수 없었던 것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천부장 이상은 거의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천부장에게 바울을 인도받은 유대 총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바울에게 호감을 보냅니다. 자주 만나기도 하고 호의를 베풀어 구류하지 않고 주택연금 정도로 자유를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다른 것에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대로 바울로부터 무엇을 바란 것입니다. 돈 입니다. 바울이 거액의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냈다는 정보를 입수한 까닭입니다. 그의 아내는 그리스도에 관심이 많은 유대 여자이었건만 그의 관심은 오직 세상과 돈입니다. 그의 이름은 벨릭스입니다. 그는 무려 2년 동안 바울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의 후임자로 베스도 총독이 부임합니다. 역시 그도 같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성공해야, 높은 사람이 되어야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는 세상에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겠냐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꼭 맞는 말도 아닙니다. 그렇게 되려면 세상에 올인해야 하는데 믿는 자는 그렇게 살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출세는 오직 하나님의 권한에 두는 것이 좋으니까요. 성경엔 세상 적으로도 아주 높이 된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요셉과 다니엘 같은 인물입니다. 특히 다니엘은 피지배국의 사람으로 이방 땅에서 5대에 걸쳐 총리대신을 역임합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유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신 이유를 알기 때문입니다. 곧 페르시아의 궁전에서 남아 유대백성들이 귀환을 돌보야 하는 것으로 그의 사명입니다.
성공도 의미가 있고, 실패도 뜻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사명의 바운더리 안에서 재해석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공과 출세는 오직 하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지는 꽃, 시드는 풀과 같은 그런 것들에 시각을 맞출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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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본 것의 증인
분명 바울은 그를 죽이고자 외쳤던 무리들의 마음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를 알기 전의 모습이 무리들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한핏줄을 나눈 형제들이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바울의 행적을 보면) 바울은 언제나 유대인 회당에 먼저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수많은 핍박을 받고, 지금 예루살렘에서 환난을 당하지만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의 열정(로마서 11장)이 결코 식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열심히 얼마나 큰 죄인지를 다메섹 도상에서 깨닫게 된 바울처럼 우리도 우리의 열심으로 아무것도 이룰수도 주장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열심으로 이끌고 갑니다. 바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려는 열심입니다. 우리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자랑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자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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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자신이 기독교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된 이유에 대해 유대인들에게 설명하었습니다.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Ac 22:15) 기독교인들을 잡으로 다메섹에 가던 어느날 그는 눈이 멀었었고 그의 눈을 뜨게 한 한 사람이 그에게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고 말하였습니다.
바로 조금 전까지 그는 기독교를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그것을 전하는 증인이 되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것이 그에게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에서 기도할 때 주님은 그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Ac 22:21) 바울은 그렇게 증인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전하는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는 너무 다르고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가는 것이 싫으면 그냥 그 길을 가지 않으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냥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본 것에 대한 충실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매우 충실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먼 나라에까지 다니면서 그것을 전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증언하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었으나 그가 증언하는 일은 절대진리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로마의 성채에 갇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전하는 그것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에 가장 충실하였습니다.
그는 그가 가진 어떤 정체성보다 증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2.나면서부터 로마시민
바울은 천부장과 대화를 하면서 자신이 로마시민권자임을 밝혔습니다.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Ac 22:28)
그는 나면서부터로마시민권자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시민권자라는 사실을 선교를 하면서도 적절히 사용하곤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로마시민권자라는 것을 사용하여 채찍질을 면하였습니다.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Ac 22:25) 바울이 로마시민권자라는 사실을 뒤늦게 안 천부장은 걱정을 합니다. “
가만 있어도 더 많이 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로마시민권자라는 사실을 헌신짝처럼 걷어찬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이 나면서부터 얻었던 로마시민권자라는 신분에 대해서는 헌신짝처럼 버리더니만 예수님을 전하는 증인의 신분에 대해서는 죽도록 힘들었지만 끝까지 붙잡는 것을 보았습니다. 편안히 금수저의 길을 갈 수 있었으나 오직 진리를 위해 힘들고 고달픈 증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증인이 되어 전해야 하는 진리가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겉보기에는 로마시민권자로 편하게 사는 것이 더 좋아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꺼이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삶을 선택하였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증인으로서의 삶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당연히 귀하고 복된 삶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가는 길이 다 그러합니다. 편한 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편한 길보다 지금 가고 있는 신앙인의 길이 복되고 영광스러운 길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지금 혹시 세상의 어떤 편하고 화려한 길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지금 가고 있는 신앙인의 길을 갈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바울처럼 자발적이고 행복한 마음으로 가고 있습니다. 만약 바울에게 다시 선택의 길이 주어진다 하여도 당연히 바울은 여전히 증인의 길을 갈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시 선택을 하라할지라도 우리도 여전히 믿음의 길(증인의 길)을 갈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은 세상의 어떤 화려한 길보다 더 찬란한 영광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는 믿음의 길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깊이 인식하고 기쁨과 행복함으로 가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던 자들에게 겸손과 사랑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반대와 박해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행22:22)
세상은 살인자의 인권도 보호하고, 동성애자들도 포용해야 한다면서, 왜 유독 복음의 사람들은 살려 둘 자가 아니라고 할까요? 도대체 무슨 악을 행하였습니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삼상26:18)
그러나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무슨 악을 행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우리 안에 아버지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요17:14)
그래서 그 진리의 말씀으로 인해 우리가 아버지께 속하고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그들은 가인이라 자기들보다 의로운 우리를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요일3:12)
그들은 어둠을 사랑하기 때문에 빛을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3:19~21)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을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지셨고, 우리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1:10)
참으로 지금도 우리를 사망에서, 넘어짐에서, 슬픔에서 건지실 줄 믿습니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시1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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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길을 가는 이유>
오늘 말씀은 바울이 로마 영내에 갇히면서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가고 있는 길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큰 소란을 보고 예루살렘의 수비대 대장인 천부장이 그를 잡아 로마군의 성채 안으로 들였는데요. 천부장은 예루살렘의 치안과 평화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소동의 원인이 된 바울을 잡아 그 이유를 알고자 하였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대” (행 22:24)
로마군은 심문하기 위해 ‘채찍질’을 먼저 하려고 하였습니다. 아직 재판을 하기 전이고 죄목이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채찍질을 하는 이유는 그래야 그가 겁을 먹고 정직하게 자백하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인권이라는 것이 힘 있는 사람 위주였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 바울에게는 남겨진 카드가 하나 있었습니다.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행 22:25) 바울을 채찍질하기 위해 병사가 가죽 줄로 매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바울은 곁에 있는 백부장에게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라고 말하였습니다. 당시에 로마 시민은 경첩으로 이어진 두 쪽의 나무로 된 증명서가 발급되었습니다. 어쩌면 바울은 이것을 보여주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에 인권이 미약하였지만 힘 있는 사람에게는 인권이 있었습니다. 바로 로마시민입니다. ‘로마시민’이라는 것은 로마에 살고 있는 시민과 같은 권리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의 권력은 원로원과 시민에게 있다고 할 정도로 로마 시민의 권한은 막대하였습니다.
로마제국은 그들의 권력기반이 되는 로마시민에게는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였습니다. 로마시민은 죄가 드러나지 않았을 때 채찍질을 할 수 없었습니다.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이라 하니” (행 22:26) 백부장은 크게 놀라 바로 천부장에게 바울이 로마시민임을 말합니다. 한바탕 소란이 벌어진 것입니다.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Ac 22:27–28) 천부장이 직접 와서 묻습니다. “네가 로마 시민이냐?” 바울이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천부장이 다시 물었습니다. “나는 돈을 들여 시민권을 얻었는데 당신은 어떻게 시민이 되었습니까?” 바울이 대답합니다. “나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었습니다” 로마 시민이 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출생부터 로마시민인 경우와 나중에 공을 세워 로마시민이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시민자라는 것은 대단한 명예였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남부러울 것이 전혀 없었는데 지금 로마의 성채에 갇힌 몸이 되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입니다. 그는 편한 인생을 위해 기독교인이 되고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수많은 고생과 고난을 의미합니다. 지금이라도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포기하면 됩니다. 아니 그것보다 그냥 조용한 기독교인으로 남기만 해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곧 증인으로 살기 위하여 아주 힘든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자기 자신도 증인으로서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해되지 않는 면이 많았을 것입니다. 성경에 바울의 가족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바울의 조카가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비밀스러운 계획을 세웠을 때 그 사실을 전해주면서 한 번 나옵니다. 그 외에는 부모도 누이도 안 나옵니다. 그래서 혹자는 바울이 기독교인이 된 것 때문에 집에서 재산을 물려받지 못하고 정식으로 내놓은 자식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바울은 분명히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주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사서 죽도록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가 복음을 전한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그 자신과 그 이웃과 하나님 나라에 얼마나 위대한 일이었는지를 압니다. 당시에 그가 어떻게 다르게 산들 이보다 더 위대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참으로 그가 가야 하는 가장 위대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길
바울이 로마시민으로서 편한 길을 가지 않고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서 힘든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가 가고 있는 그 길은 하늘나라의 시민이기 때문에 가는 길입니까, 아니면 세상나라 시민으로서 가는 일입니까? 많은 신앙인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을 봅니다. 오늘 우리가 가는 신앙인의 길이 세상에서 시간이 남거나, 부모 때문에 가거나, 어떤 분위기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오직 진리를 향한 진중한 길이어야 합니다. 최소한 진리를 향한 갈망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가는 신앙의 길은 여러 길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이 길이 최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다시 더 나은 어떤 길이 주어질지라도 우리는 이미 최고의 길을 가고 있기에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인하여 이미 최고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우리의 외적인 일은 최고가 아닐지 몰라도 믿음으로 인하여 이미 최고의 길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가야 할 최고의 믿음의 길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이 길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길이고 저 자신이 하나님께 가는 길이라는 것을 걸어오면서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후회되지 않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위대한 길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승리란 남보다 더 많이 갖고 더 잘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길을 잘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길을 잘 가면 됩니다. 믿음으로 거룩하게 말입니다.
바울이 증인으로 살아왔습니다. 로마시민권자이기도 했는데 로마의 성채에 매인 그는 로마시민으로서 편한 삶을 가지 않고 증인으로서 힘든 길을 간 것을 후회하고 있을까요? 힘들뿐만 아니라 이렇게 고난까지 받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십시오. 바울은 결코 그 길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아주 당당하게 여전히 증인의 길을 가는 것에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지금 가는 길이 다른 길을 가지 못해서가 아니라 다른 길을 갈 수 있어도 여전히 가고자 하는 길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길을 가는 이유. 바울은 로마시민이자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을 포기하거나 편히 가려고 하였으면 그렇게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로마시민으로서의 편한 것을 뒤로하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증인으로 사는 것을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산 것은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냥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것을 위해 힘을 다하여 살았습니다.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시민으로 사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영광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왜 기독교인으로 살고 있고, 예배당에 나와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입니다. 어쩌다 신앙인이 된 것처럼 살지 마십시오. 그럭저럭 신앙인처럼 살지 마십시오.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은 참으로 영광으로 가득한 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순교의 때가 아니어서 잘 보이지는 않아도 순교의 때가 되어도 우리는 여전히 지금의 자리에서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을 ‘신앙의 무게’라 표현하고 싶습니다. 혹 순교의 때에도 흔들림이 없도록 우리가 지금 이 자리를 지키는 무게가 그 모든 바람을 이길 수 있는 무게로 이 땅을 살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그 무게가 표시나지 않을 뿐 그 무게는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의 무게가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무게로 지금 예배하고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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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1절부터 21절까지는 바울이 유대인 앞에서 자신이 회심하게 된 것과 주님으로부터 이방인에 대한 복음전도자로서의 사명을 받은 것에 대해서 간증하였습니다. 이 간증은 지금까지 10여 년 동안 바울이 3차례 전도여행을 통해서 반복했던 것입니다. 이 간증을 통해서 수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회심을 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의 간증의 사실성입니다.
그가 회심하기 전에 스데반과 같이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자였음과 다멕섹 도상에서 큰 빛으로 인해 눈이 멀게 된 것은 당시 동행하던 여러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바울과 같이 빛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3일 동안 눈이 멀었다는 것에 대한 증인이기도 했습니다(행 9:7-9,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나중에 아나니아라는 자에게 주님이 나타나셔서 바울을 찾아가가로 말씀하셨고, 그는 바울이 머무는 곳에서 안수하여 그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아나니아는 율법에 따라 경건하였을 뿐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자였습니다(행 22:12,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즉 바울이 눈이 멀었다가 다시 눈을 뜬 사실은 같이 동행했던 자들과 더불어 유대인들에게 유력한 아나니아가 증인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파에 있어서 강력한 사실적 증거를 남겨놓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하신 것은 모두 역사적인 사실입니다(고전 15:4-6,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하나님께서 이처럼 복음에 대한 강력한 증거를 남겨두시고 또한 지금도 역사하시는 이유는 마지막 심판 날에 그 누구도 핑계를 대지 못하게 하려 하심입니다(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그렇다면 창세 이래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댈 수 있는 세대가 있을까요?
노아의 아버지 라멕이 살아있을 때에 아담부터 라멕까지 전 세대가 살아있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의 아버지 라멕은 아담과 직접 대화를 했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창조되었으며 무엇때문에 에덴에서 쫓겨났는지 말입니다. 그러므로 홍수 이전 세대는 하나님을 모른다고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 홍수 이후는 어떻습니까? 아담의 연대를 기준으로 하면 2006년에 노아가 죽었고, 아브라함은 2008년에 태어났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노아와 동 시대의 사람이었으며, 이삭과 야곱은 노아의 장남 셈과 동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바벨탑 사건 이후에 언어와 종족이 나뉘어 뿔뿔히 흩어져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잊혀졌다 할지라도 그들의 삶과 문화에는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는 것들이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고대 문명을 보면 성경의 기록을 연상시키는 내용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상형문자를 보면 창세기의 기록과 관련된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전 세계의 유적지에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피라미도 형태의 신전인데 이것은 바벨탑을 쌓았던 후손들의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저들은 해와 달 그리고 많은 자연을 대상으로 우상을 섬겼는데, 결국 저들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통해서 창조주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섬겼던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이 발달하였던 시대, 특히 소크라테스 이후에 철학 사상이 등장하던 때를 보면 이미 신적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BC 470- BC399)는 느헤미야와 동 시대의 인물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비록 하나님을 몰랐지만 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인간의 영혼이었습니다. 그는 이 영혼을 지혜로 보았는데,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곧 영혼을 잘 가꾸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시대와 나라는 달랐어도 인간에게는 영혼에 대한 관심과 신적인 존재에 대한 물음이 끊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시대에 누가 하나님을 모른다고 부정하겠습니까? 이미 식인종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미전도종족이라는 것은 다시 정의를 내려야합니다. 지금은 마지막 시대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마지막 시대의 추수기인 것입니다. 미전도종족이라는이름 아래 아직도 마지막 심판의 때가 많이 남았다고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는 오직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마 24:37-42, 37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걸음을 돌보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그 강한 손길과 부드러운 음성에 온전히 의지하는
오늘 하루의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내는 일에 주신
모든 달란트를 집중하는 거룩한 제자로 살아가도록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구원의 기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발걸음을 지켜주시고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신음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온전한 위로와 회복의 손길로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여호와를 참 뜻을 분별하며 기쁨으로 그
앞에 나아가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