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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26일 연중 제21주간 목요일
제1독서 : 1테살 3,7-13
복 음 : 마태 24,42-5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2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43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4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45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46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8 그러나 만일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49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50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51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인데도,
즉 당연히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에도 죽음이 마치 커다란 불행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죽음을 왜 두려워할까요?
사람들에게 어떤 죽음을 원하는지를 물어보면,
사랑하는 가족에게 둘러 쌓여 기도 받으며 죽는 것을 원합니다.
그에 반해 가장 피하고 싶은 죽음은 ‘고독사’라고 하더군요.
죽었음에도 아무도 찾지 않아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 되는 것을 제일 피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결국 외로움에 대한 공포가 아닐까요?
우울증 환자 중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요.
외로움의 공포가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외로움과 죽음을 뛰어넘어 다른 것을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외로움과 죽음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우리의 성인·성녀들이 직접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공포가 아닌 희망으로 보셨습니다.
죽음을 통해서만 주님과 더 가까이에서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깨어 있으면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깨어서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해주셨습니다.
언제 주인이 올지 모르니 항상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깨어 있으면 될까요?
아무런 생각 없이 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깨어만 있으면 괜찮은 것일까요?
주인이 늦게 올 것으로 생각하면서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서
집을 비워놓고 있는 것도 깨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깨어 준비한다는 것은 주인이 원하는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면서 단지 깨어만 있다고
할 일 다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예상치 못한 날에 주인이 돌아와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을 주제로 논문을 썼고, 이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앎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논문을 싼 사람이 행복하다면 앎을 뛰어넘어 실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절망하고 좌절하는 일들이 참 많은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 맞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깨어 준비하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을 통해 커다란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44)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가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다.
현실을
직시하는 삶이
바로
준비하는 삶이다.
그래서
준비하는 삶은
삶의
기본에서 출발한다.
삶의 기본은
정직과 감사이다.
감사의 마음으로
주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준비하는 삶은
우리의 생활을
진심으로 반성한다.
복음은
우리의 생활을
반성으로
새롭게 한다.
어디로
가는지를
알게 한다.
준비는
하느님을 향한
충실한 사랑이다.
아름다운 준비가
아름다운 마무리이다.
우리자신을
보게 되는 준비이다.
준비
그 자체가 은총이다.
우리자신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맞아들이는 준비이다.
이것이
삶의 기쁨이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는
결국
우리를 위한 준비이다.
준비는
겸손이며 선택이다.
이와 같이
계절도 준비하며
바뀌고 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Consuetudo est altera natura.)’라는 라틴어 격언이 있습니다.
신학교 라틴어 시간에 배웠는데 4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납니다.
‘우리말에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컴퓨터는 3가지 작업을 통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키보드나 마우스를 통해서 입력(질문)합니다. CPU(중앙처리 장치)에서 계산(답)합니다.
모니터를 통해서 답을 찾습니다. 컴퓨터는 우리가 질문한 것에 대해서 답하기 마련입니다.
질문이 틀리면 올바른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제가 함께 했던 ‘복음화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사랑하면 사랑 할 일이 생깁니다.
기뻐하면 기뻐 할 일이 생깁니다.
원망하면 원망 할 일이 생깁니다.
미워하면 미워 할 일이 생깁니다.
불평하면 불평할 일이 생깁니다.’
좋은 습관을 가진 사람은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아서 늘 생기가 있습니다.
능력, 재능, 업적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좋은 습관은 누구나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경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 가지 습관’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원칙이 있는 사람, 소중한 것을 먼저 하는 사람,
끝을 생각하고 시작하는 사람, 더 큰 결실을 추구하는 사람,
먼저 이해하고 이해시키는 사람, 모두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사람입니다.
고등학교 때입니다. 친구들과 호기심에 담배를 배웠습니다.
그때는 어른이 되면 당연히 담배를 피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곧 어른이 되니 미리 배워보자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버스에서도, 비행기에서도 담배를 피울 수 있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매점을 운영했는데 매점의 주 수입원도 담배였습니다.
쉬는 시간에는 강의실 앞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습니다.
15년간 담배를 피우던 1995년입니다.
본당 청년이 은단을 주면서 담배를 끊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사순시기였기에 저는 사순시기 동안은 금연하기로 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사순시기가 끝났어도 계속 금연할 수 있었습니다.
26년이 지난 지금도 금연하고 있습니다.
담배를 끊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청년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25년 전인 1996년 저는 미국에 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주교님께서 미국에 가서 교포사목을 하고, 공부도 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저는 학원에 다니면서 영어도 배우면서 미국에 갈 준비를 했으면 좋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송별회를 이유로 매일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나중에 주교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셨고, 미국에 가는 것도 취소하셨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10시 이전에 술자리를 마쳤습니다. 일찍 들어오니 일찍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새벽이 있는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저에게 좋은 습관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리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준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단순히 잠들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의식이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좋은 습관을 가진 사람은 늘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런 습관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항상 기도하는 사람, 언제나 기뻐하는 사람, 늘 감사하는 사람”은 좋은 습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늘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를 맡겨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재난과 환난 속에서도 여러분의 일로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 때문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과의 만남의 날을 준비시켜 주십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예수님은 길을 떠났던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태도를 비유로 우리에게 삶의 자세를 일깨워 주십니다.
종은 언제든 주인이 오면 맞이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점이지요.
"생각하지도 않는,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
이러한 무지는 한편으로는 사람을 불편하게 합니다.
늘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하고, 번번이 헛탕을 치더라도
만약의 때를 대비해서 늘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하니까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기와 탄력을 유지하게 해 줍니다.
물리적으로 지금 당장은 부재하시지만, 언제라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에
마치 곁에 있는 듯, 해야 할 바를 미루지 않게 되니까요.
언제일지 모르니 언제나 최적의 준비 상태를 갖추고 살다 보면
삶에 질서와 균형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마태 24,45)
예수님은 주인이 현존하건 부재하건 그분을 향해 집중하고 있는 종을
충실하고 슬기롭다고 칭찬하십니다.
그 종은 마음 안에서 주인에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습니다.
그에게 보내는 예수님의 "행복하여라."라는 축복과 찬사는 미래형이기 이전에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런 종의 삶에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조화로이 공존합니다.
그의 마음, 영혼, 말, 행동이 주인이신 분께 정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을 향한 사도 바오로의 칭찬이 이어집니다.
"우리는 ... 여러분의 일로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다고 하니"(1테살 3,7-8)
자신이 온갖 노력과 애정을 쏟아 그리스도를 전해 주었던 신자들이
믿음으로 굳건히 서서 주님 안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이 사도를 뛸 듯이 행복하게 합니다.
이제는 신자들 덕분에 사도가 격려를 받게 됩니다.
사실 말씀의 봉사자로서 이만한 보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님께서 ... 재림하실 때,
여러분이 ...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1테살 3,13)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 더욱 분발하여 사람의 아들이 오실 때
흠 없고 거룩한 모습으로 하느님을 얼굴을 마주 뵙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들이 복음 속 비유처럼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나설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부르심을 받아 주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일상은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리는
'무지의 시간'이면서 동시에, 깨어서 주님의 현존을 발견하는 '준비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말씀과 성체, 사람과 사건, 관계와 자연을 통해 이 세상을 꽉 채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깨어 준비하고 기다리는 이만이 그런 주님을 감지하고 알아차려,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분과의 뜨거훈 해후는 먼 훗날의 일이기 이전에
지금 여기서 우리를 전율시키는 터치이고 접촉이며 일치입니다.
"행복하여라, 착하고 슬기로운 종!"
우리가 삶의 어느 자리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건
각자의 마음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불을 끄지 않고 주님을 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주님께서 우리를 맞이하시며 행복에 겨워 날아갈 듯 기뻐 뛰실 겁니다.
우리도 그분과 함께 기뻐할 것이고요.
그리고, 기쁨은 부족하나마 지금 여기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살려 애쓰는
우리가 미리 앞당겨 누리는 구원의 표징입니다.
이 기쁨은 누구도 빼앗지 못할 것이니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사랑은 다목적 댐처럼: 기쁨의 발전기를 수시로 점검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깨어있으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배운 것을 신자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상대에게 양식이 되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어있음’이란 내가 하는 것이 사랑인지 살피라는 뜻입니다.
내가 하는 사랑이 참사랑이라면 지금 어떤 느낌일까요? 기쁠 것입니다.
사랑하면 항상 기쁩니다. 하느님께서 기쁨 자체이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만약 사랑을 실천하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면 분명 다른 기쁨을 찾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는 사랑이 아님을 증명할 것입니다.
다목적 댐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사람은 댐처럼 아래로 사랑을 전해주는 기쁨을 느낍니다.
이 과정에서 전기가 생성됩니다. 그것처럼 그냥 사랑을 내어주는 것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만약 전기를 생산하지 못한다면 내려 보낸 물을 받는 것들에게서
자신의 기쁨을 뽑아내려 할 것입니다. 이것은 고장 난 댐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벌어집니다.
최광현 작가의 『가족의 두 얼굴』에 나오는 사례들입니다.
진혁 씨는 상담을 하며 자신은 30년 동안 한 번도 자신의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진혁 씨의 아버지는 돈이 없어 공부하지 못했지만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자수성가한 분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공부에 대한 한이 있었습니다.
행정고시에 합격하는 것이 꿈이었고, 주위에서도 공부만 했었다면
분명 합격했을 것이란 말을 합니다.
진혁 씨는 셋째였는데, 아버지는 진혁 씨를 임신했을 때 왕관을 받는 태몽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진혁 씨가 자신의 꿈을 이루어줄 아들로 여겼습니다.
물론 다른 형제들보다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진혁 씨도 아버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지만, 번번이 떨어졌습니다.
고시 공부에 지친 진혁 씨는 회사에 취직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다시 시도하라고 윽박지릅니다.
진혁 씨는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게 만든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또 그 꿈을 이뤄주지 못한 죄책감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그저 맛있는 물고기에 불과합니다.
지금 깨어나지 못한다면 하느님 앞에 가서 자신은 셋째를 가장 사랑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이런 사례도 있습니다.
연화 씨는 가족의 무게를 항상 등에 업고 다니며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4남매의 장녀로서 술과 도박, 친구들을 너무 좋아해
언제나 집 밖으로 나도는 무능한 아버지와
그런 남편을 뒷바라지하다 건강을 잃어버린 어머니 때문에
연화 씨는 가장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연화 씨의 고생은 교육대학을 나와 선생님이 되고 결혼한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동생들이 뚜렷한 직장을 잡지 못해 수입이 변변찮았기 때문입니다.
남편 눈치를 보면서 부모의 치료비를 대며 친정을 돌보느라
30대 중반이 되었어도 자기를 위한 옷 한 벌을 제대로 산 적이 없습니다.
며칠 전 아버지가 “이젠 너도 좀 쉬어야 하지 않겠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하지만 연화 씨는 말합니다.
“그런데, 선생님. 이젠 제 자신을 멈출 수 없어요.
제가 없으면 친정 식구들이 다 무너지지 않을까 너무나 불안해지는걸요.”
연화 씨는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것 자체로 기쁨의 보상이 있습니다.
연화씨는 아버지와 어머니, 혹은 형제들의 인정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가 보상으로 주어져야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거래입니다. 인정받기 위해 투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 중 단 한 명도 구원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십자가 사랑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더 큰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랑만으로 보상이 있습니다. 힘들면 사랑도 멈추어야합니다.
대학에서 만난 두 남녀는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와 자취생활을 하는 남자는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을 남자에게 주기도 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남자의 자취방에 가서 빨래와 청소를 해주며 사랑하는 남자에게 많은 것을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여자가 먼저 취직이 되었습니다.
남자는 취업이 되지 않자 대학원에 진학하여 사회진출을 위한 숨 고르기를 하였습니다.
여자는 남자가 대학원에 다니는 동안 학비를 대고 헌신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남자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하였습니다.
여자는 이제 고생스러운 시간이 끝나고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여자는 남자로부터 그만 헤어지자는 충격적인 통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남자가 다른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왜 여자를 떠나려 했었던 것일까요? 여자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빚을 아주 많이 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빚을 떠안고 결혼해서 평생을 갚아나가야 할 부담감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냥 나쁜 놈이 되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무작정 잘해준 것은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떠나가게 하고 싶다면 한없이 잘해주어라.”라는 말도 있듯,
잘해주면서도 상대가 어떤 마음을 갖는지도 고려해야 합니다.
내가 더 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저 사랑하는 데서 충분한 행복이 오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랑을 하면서 ‘내 사랑이 사랑이 맞나?’를 끊임없이 살펴야 합니다.
가짜 사랑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 기준은 이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만으로 기쁜가?”입니다.
사랑을 내어주는 것만으로 전기가 생성되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만약 사랑하는데 우울하다, 그래서 다른 보상을 원한다, 하는 것은 본성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지 않으면 내가 고통스러워서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는 본성입니다.
누가 보답을 바라고 두 발로 걷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냥 그것으로 기뻐야 하는데, 오늘 복음처럼 먹고 마시고 때리는 등의
또 다른 기쁨을 찾는다면 그것이 깨어있지 않은 삶입니다.
양식을 내어주는 것만으로 기쁠 때,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데 힘들다면, 그래서 다른 보상을 찾는다면 당장 멈추십시오.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기쁨이 생성되도록 고장 난 발전기를 고쳐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기쁘고 행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다목적 댐과 같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