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스틸웰 전 주한미군 사령관이 "역사상 보기 드문 주권의 양도"라고 표현했던 순간을 반추할 수 있는 이승만의 언급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다른 나라에게 자신의 군대를 맡아 달라고 청하고 있는 가운데, 상대방의 국가원수가 아닌 맥아더 '귀하'에게 말하는 것처럼 보여 좀 찝찝하지만, '고명하고 훌륭한 군인'은 이승만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1950년 오늘 대한민국 군 작전권은 미국으로 넘어갔고 그로부터 61년 뒤의 오늘까지 대한민국 군 작전권은 미국의 소유다. 물론 평시작전권은 오래 전에 돌려 받긴 했지만.
1950년 7월 14일은 대한민국 누란의 위기였다. 만리장성같이 믿었던 미군 지상군도 죽미령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물러섰다. 심지어 인민군 15사단은 소백산맥 이화령을 넘어 문경까지 진출해 있었다. 솔직히 자존심이고 무엇이고 가릴 계제는 아니었다. 이승만의 심경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국군의 작전 지휘권은 미군에 넘어갔지만 미 8군 사령관 워커는 "제너럴 보이"들 (서른 두셋 나이로 한국군 참모총장을 하던 시절이었음)을 꽤 배려했다. 그 독립성을 존중하는 뜻에서 한국 육군 본부를 통해 명령을 내린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런 배려(?)를 깡그리 말아먹은 사건이 1951년 강원도 현리에서 벌어진다.
1951년 현리 전투에서 중국군을 맞이한 것은 한국군 3군단이었다. 그런데 중국군의 선봉 1개 중대가 야간 12시간 동안 강원도의 험한 산길 30킬로미터를 주파하여 후방의 오마치 고개를 점령한 순간 퇴로가 막혔다 여긴 국군 3군단은 완벽하게 무너져 내렸다. 장비 따위는 내팽개쳐 버리고 간부들은 계급장을 떼고 사단장 3명까지 "서 있어도 떠밀려 가는" 패잔병의 대열에 끼어 있었다. "군기 빠진 오합지졸들의 나 살기 경쟁"이라는 것이 미국 전사(戰史)의 표현. 그런데 그 군단장은 비행기를 타고 '작전회의 참석차' 그 참담한 현장을 떠나고 있었다. 그 이름은 유재흥.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가 유재흥에게 "당신의 군단은 어디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 유재흥은 세계 전쟁사에 길이 남을 대답을 한다. "모르겠습니다." 밴플리트로서는 "잘 몰르겠는데요." 하며 눈알을 돌리는 영구를 보는 느낌이었으리라.
이 사건 후 밴플리트는 한국군 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을 해체시켜 미군에 배속시키고 1군단 또한 육군본부를 통하지 않고 직접 통제할 것을 결정한다. 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독자적 영역마저도 스스로의 오류와 실수로 인해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부터 60년 쯤 흐른 뒤 왕년의 예비역 장성들이 "작전권 반환 반대"를 외치며 시위에 나선 적이 있었다. 60년 동안 분단 국가로 전쟁 대비에 만전을 기해 왔다는 나라의 전직 별들이 제 나라 군대의 작전권을 외국 군대가 가져야 한다고 목청을 돋우는 모습은 무언가 어색하고 볼썽이 곱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초기에 육군 7사단을 해체시키셨으며 덕천 전투에서 국군 2군단을 와해시키셨으며 현리 전투에서는 3군단을 궤멸시킴으로써 그나마 잔존하던 한국군의 독자적 영역마저 미군에게 헌납하게 만드신 "인민군 최고의 용장" 유재흥 장군도 끼어 계셨다. 2011년 7월 14일 그분은 아직 생존해 계시고, 조만간 전작권 문제가 대두되면 또 거리에 나서실지 모른다. 여기서 나같이 수양이 덜 된 사람은 한 마디의 감탄사를 뱉을 수 밖에 없다. NiMi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22.egloos.com%2Fpds%2F201107%2F19%2F96%2Fa0106196_4e250d0610823.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