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자치구 혁신교육지구활동을 함께하는 교사분과장 선생님이, 근무하시는 학교에 초대를 해주셔서 다녀왔다. (나는 마을분과장으로, 학부모 분과장인 또 다른 선생님과 함께) 코로나 시기 활동을 하며 대면하여 얼굴을 볼 수 없어 아쉬웠는데 선뜻 먼저 초대해주셔서 감사하다. 특별한 이슈가 없었지만 만나서 식사도 하고 개인적인 담소도 나누며 아름다운 교정을 천천히 거닐어보는 힐링의 시간을 가졌다.
낮은 언덕에 있는 성심여고(여중도 함께 있음) 교정은 여기가 고등학교인가 싶을 정도로 너무나 아름답다. 학교 안에 있는 2년만에 문이 열린 성당도 너무나 아름다웠고 오랫동안 자란 나무들이 이룬 오솔길은 계속 머물고 싶은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식사 후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단에서 거의 30년을 지내온 선생님이 살아온 이야기,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 고등학교 아이들 이야기, 마을분과장인 나와 학부모분과장 선생님의 같은 나이 고1 자녀 이야기 등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선생님은 고등학교에 오면 중학교때와 다르게 어떤 문제에 대해 좀 더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는 눈이 열려야 하는데 점점 그게 어려워지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신다. A도 알고 B도 알지만 A와 B를 연결하는 통찰력을 요하는 문제는 해결이 어렵다는 거다. 부모들이 너무 이것저것 다 대신해주다 보니 정해진 길을 따라 정해진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만 익숙한 것 같다는 게 선생님의 설명이다.
돌아오는 길에 곰곰,
배움과 지식을 먹는 것에 비유한다면 우리 아이들은 점점 정제된 지식만을 접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조금은 거칠고 날것이라도 천천히 소화 시키면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되는 것인데 말이다. 아이의 인생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 날것의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운 세상이긴 하지만 말이다. 비정제된 지식과 경험을 쌓을 시간을 허락하기 쉽지 않다.
그러면서 지난 주에 있었던 단편적인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지난 금요일 나는 간단한 외과적 수술(시술?)을 해야 해서 아침부터 병원 갈 준비를 하느라 아침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초3 막내녀석도 꼼지락꼼지락 분주하게 왔다갔다 바쁘다. 가만보니 짧은 당일 입퇴원이라 밥은 안준다는 통화를 들었는지 아침으로 저 먹으라고 내놓은 과일과 쑥개떡, 그리고 냉동된 밥까지 해동해서 도시락을 싸고 있다.
얼마나 마음이 예쁜가? 그런데 그 순간엔 그런 생각은 하나도 하지 못하고 막내녀석이 등교를 빨리 해야 나도 병원을 가겠다는 급한 마음만 가득했다.
그런 맘에 다그친 말이,
“야! 빨리 준비 안하고 뭐해? 엄마 도시락은 왜 싸? 너 학교갈 준비나 해!”
뻔하게 아이가 싸고 있던 도시락을 보면서도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차차, 아이는 돌아서서 서러운 눈물을 흘린다.
이미 늦었지만,
“미안, 엄마 00이 덕분에 점심 잘 먹을 거 같아. 고마워.”
곧 사과는 했지만 나도 별 다르지 않구나 싶었다. 아이의 다양한 생각과 경험을 이렇게 재단하고 있었겠구나.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이 자라나고 있었는데 그것보다 학교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배웠을 것 아닌가? 그것 뿐이겠는가, 아이가 아픈 것 보다 학원 가는 걸 더 중요하다고 나도 모르게 가르쳤을지도 모른다. 자금 옆의 친구보다 불안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쳤을지도 모른다.
정해진 답이 있는 길이 아니더라도 인생에 진짜 중요한게 무엇인지 경험하며 인생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인가? 아이의 인생이 잘 되길 바라는 부모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욕심이 너무 과한가.
육아는 정말 어렵다.
첫댓글 고생 많으셨어요 선생님. 시술은 잘 마치셨어요? 비정제된 지식과 경험이라는 말이 참 와 닿아요. 어른들의 시선으로 재단된 것만을 전달하려 한 건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되고요. 멋진 통찰 감사합니다. ^^
초3이 어깨 너머 들은 내용으로 엄마 도시락을 싸다니... 마음 씀이 예사롭지 않아요. 샘 막내 덕에 행복한 노후를 보내실 듯요. 이런 날은 정말 오래오래 기억해두고 잘 새겨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