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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5,34-42
그 무렵
34 최고 의회에서 어떤 사람이 일어났다.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교사로서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였다.
그는 사도들을 잠깐 밖으로 내보내라고 명령한 뒤,
35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저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잘 생각하십시오.
36 얼마 전에 테우다스가 나서서,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였을 때에 사백 명가량이나 되는 사람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끝장이 났습니다
37 그 뒤 호적 등록을 할 때에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서서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38 그래서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39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가말리엘의 말에 수긍하고,
40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41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42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6,1-15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요한복음에서는 기적 이야기를 '표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곧 오늘 이 이야기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 '표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어'(요한 6,11)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시면서, 바로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6,14)이심은 알아보지만, 여전히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오늘 복음에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모자람’과 ‘충만함’이라는 대조를 통해서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시험해보려고 필립보에게 물으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요한 6,5)
빵을 사야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곧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을 계산할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안드레아도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하지만, 역시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뿐만 아니라 그것이 ‘소용없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는 그것을 '아이'가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가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무력한 ‘아이’는 ‘예수님 자신’을 표상합니다.
사실 그것은 제자들이 본 모자란 것이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남은 ‘열 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 ‘열 두 제자’에서 보듯이 하느님 백성 모두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체성사의 '표징'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충만함’을,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얻습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감사와 찬양을 노래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나누어질 때 우리는 진정 충만해질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제 자신에 감사하고, 당신 사랑에 감사하고, 당신의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아니어도>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도 5,38ㄴ-39ㄴ)
오늘 가말리엘은 사도들의 일을 그냥 내버려 두자고 합니다.
하지 말라는 데도 베드로와 사도들은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복음을 선포하고, 많은 이들이 사도들을 따르자
이를 어떻게 할지 지도자들이 골머리를 앓는 상황에서 현명하고 존경받는 율법 학자 가말리엘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버려 둔다는 것은 어떻게 되건 상관하지 않겠다는 한편으로는 방치의 의미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포기의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에 자식을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자식을 사랑하고 존중함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사랑이 없거나 포기한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자식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라고 충고해도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내버려 두는 것이 사랑의 포기가 아닌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살짝 말을 바꿉니다.
내려놓으시라고.
이렇게 되면 자식을 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집착을 내려놓고,
나의 걱정을 내려놓고,
나의 요구를 내려놓고,
나의 고집을 내려놓고,
내 식(式) 대로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제 자식은 부모의 자식이 아닙니다.
자식의 인생은 자식이 살아가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하려고 붙잡고 있지 않은 겁니다.
Let them go.
그렇게 자식은 자식의 길을 가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현명한 인간의 길이라면 신앙의 길도 있습니다.
하느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나의 손에서 내려놓고 하느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하시게 하는 겁니다.
보잘것없는 나의 사랑과 능력으로 뭘 어떻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더 사랑하시고 더 능력이 있는 하느님께서 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보다 더 내 자식을 사랑하시는데 왜 내가 그렇게 걱정합니까?
하느님 자식인데 왜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왜 그렇게 내어놓지 못합니까?
하느님 사랑과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하느님의 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많은 일도 그렇습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붙잡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니어도 할 사람이 많을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인간적인 계산을 내려놓아라>
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보여 주신 표징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이 먹고도 남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먹고도 남았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이 이야기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먹고도 남았지만 결국은 때가 되면 또 배가 고플 것이고, 또 먹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기적을 베풀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필립보나 안드레아는 인간적인 계산에 밝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중의 배고픔에 대해 걱정하실 때 필립보는“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안드레아는“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생각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계산이 밝아 주님의 능력은 생각하지 않았고 그분께서 지니신 권능을 몰라보았습니다.
주님의 권능을 믿을 것 같으면 ‘제가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모두를 내놓으니, 나머지는 당신이 채워주십시오!’하면 됩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차고 넘치도록 베푸십니다.
예수님의 손 위에 모두를 내놓는 순간 ‘베풀면 베풀수록 베풀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하찮게 보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 감사를 드렸고 나누었습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가 이백데나리온 이상의 세상적인 가치에 골몰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또 다른 세상의 가치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은총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분으로부터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막에서 당신을 따르던 군중의 배고픔을 면하게 하셨듯이 성체 안에서 계속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십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선언하고 또한 부활을 선포합니다.”
(구엔 반 투안 주교)
빵의 기적은 미사 안에서 여전히 유효합니다.
똥은 쌓아놓으면 냄새가 나지만 뿌려지면 거름이 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탈랜트, 시간, 재능, 물질 등 모두가 뿌려지면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찮고 의미 없어 보이는 것일지라도 먼저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내놓으면 풍요로워집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물질적인 결과물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칭찬과 인정을 떠나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군중들을 피해 외로이 아버지 하느님 곁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있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늘 한적한 곳을 찾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계산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권능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잠언 16,3)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 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
(시편 37,5)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세례의 상징이라고?>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는 대그룹 장가 아들을 참교육하다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아버지까지 죽게 된 박새로이가 3년간의 감옥생활에서 아버지의 꿈을 이룰 15년 목표를 세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아버지의 꿈은 작은 가게 하나 갖는 것이었습니다.
박새로이는 장가 그룹을 파괴하고 자신에게 오히려 무릎 꿇게 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도 마음의 문을 열어서 동료들을 받아들이고 자기를 위해 헌신한 한 사람을 사랑하게까지 됩니다.
이 드라마는 복수의 이름으로 박새로이의 성장을 그리고 있습니다.
자아를 복종시키는 가장 완전한 방법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란 결론입니다.
그리고 그 불가능에 도전하게 만드는 힘은 누군가의 죽음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박새로이는 대기업을 무너뜨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면 이전의 객기만 있던 청소년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계속 무너지는 것만으로는 자존심만 강해질 뿐입니다.
자존심은 성장하며 자존감으로 바뀝니다.
우리 인생은 이 성장의 시험대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5천 명의 사람들이 먹지 못하고 배고파하는 것을 보시며 필립보를 시험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시험하는 것일까요?
“나는 하느님이다. 그런데 널 위해 죽을 거야. 그러면 넌 나와 함께 무엇을 할 수 있겠니?”
그러나 제자들은 시험에 통과하지 못합니다.
그들을 먹일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돌아가셨다고 믿어도 그럴까요?
그분은 우리에게 다 주신 분이십니다.
이것을 믿으면 이제 이러한 사람이 됩니다.
켈커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그곳에 큰 보육원을 짓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때 많은 기자가 물었습니다.
“보육원 건축기금은 얼마나 준비되어 있습니까?”
데레사 수녀님이 대답했습니다.
“지금 준비된 기금은 3실링뿐입니다.”
그러면서 테레사 수녀님은 책상 위에 실제로 동전 세 닢을 꺼내놓았습니다.
그러자 기자들은 웃었습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의 표정과 말은 진지했습니다.
“이 3실링과 나로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3실링이 하느님의 것이 될 때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녀는 3실링으로 고아원과 병원 등을 전 세계에 수백 개 지었습니다.
무언가를 이뤄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거기에서 벌어지는 나의 성장이 중요합니다.
그것 아니면 이기지 못할 자아와의 싸움이 중요합니다.
참 자유는 주님과 함께 꿈을 이뤄나가는 데서 얻어집니다.
얼마 전에 『더 높은 기도』 책 홍보 행사를 했습니다.
북콘서트라고도 하고 출판기념회라고도 합니다.
많은 분이 오셔서 그 짧은 시간에 1,300권의 책을 사 주셨습니다.
저는 행사의 모든 과정을 기획하고 홍보하고 주인공 역할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유튜브 생방송을 하는 중에 노래도 세 곡씩이나 했습니다.
그러면서 느꼈습니다.
‘많이 성장했구나!’
잘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 긴장도 했습니다.
아침에 고춧가루를 팍팍 넣고 끓여 먹은 라면 때문인지 속이 쓰려왔습니다.
‘내가 왜 이런 것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 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친구들 앞에서도 노래를 못 하던 저였습니다.
자아가 강했기에 실수하는 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봉사자분들과 함께 세 시간 동안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했습니다.
노래를 잘하지 못해도 그냥 했습니다.
이런 저의 모습은 어렸을 때는 상상도 못할 모습입니다.
그러며 주님과 함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겠다는 꿈이 저의 자아를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감이 ‘세례’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세례는 삶의 의미와 목적이 있음을 인정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 배고픈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꿈속에서 살 것인지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례의 결단이 있은 다음의 삶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어가는 삶으로 완전히 바뀝니다.
주님과 함께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십시오.
진짜 성공은 그 과정에서 내가 죽고 그리스도와 닮아가는 나의 성장과 자유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빵의 기적>』
1)
공관복음에 있는 ‘빵의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의 ‘자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계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신 분”이라는 계시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라는 말은 ‘빵의 기적’은 사람들이 청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계획하고 실행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공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군중의 배고픔을 걱정한 제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일으키신 기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을 모두 합해서 생각하면, ‘빵의 기적’은 “예수님은 목마름도 배고픔도 없는(묵시 22,1-2) 하느님 나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려 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잔치’로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이사 25,6)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술과 젖을 사라."
(이사 55,1)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마태 22,2)
‘빵의 기적’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체험한 일”입니다.
2)
‘빵의 기적’ 이야기를 대할 때, 어떤 아이가 내놓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9절) 너무 많이 시선을 빼앗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기적’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이고, 어떤 조건이나 제한 없이 순전히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으로 일으키시는 일입니다.
따라서 “어떤 아이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었다.”라는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그 빵과 물고기가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조건의 제약을 받아야 한다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빵과 물고기가 없었어도 예수님은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빵의 기적 이야기’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비록 예수님께서 기적의 재료로 사용하시긴 했지만, 기적의 본질적인 요소도 아니고, 이야기의 핵심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빵의 기적 이야기’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일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려고 하는 기적에, 또는 일으키신 기적에 ‘응답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그 빵과 물고기를 내놓은 어떤 아이의 마음과 태도는 훌륭한 것이고, 그 행동은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닢을 봉헌한 일과(마르 12,41-44) 같은 가치가 있습니다.
3)
요한복음에 있는 ‘빵의 기적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일”은 결코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 일은 뒤의 22절부터 아주 길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생명의 빵’에 관한 논쟁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면(추대하면) 예수님께서 날마다 배불리 먹여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 생각이 ‘나쁜 생각’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그런 기대를 하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늘에서 오신 분’께 ‘땅에 속한 것’을(요한 3,31) 청하려는 생각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치를 하려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라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누구에게나 배고픔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중요한 일이긴 한데, 그것은 하느님 나라로 가는 여행의 과정일 뿐이고, 그 자체가 신앙생활의 목적은 아닙니다.
배불리 먹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뒤의 27절에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라는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한 것은 자신들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실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는 일에 관심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는 정치인들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종교가) 세속의 정치를 직접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분별력의 지혜 - 자비와 지혜의 주님>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시편 27,1)
예수님은 하느님의 화신이며 현존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느님의 모습이 환히 드러납니다.
시편 성무일도 시 시 편136장 1-26절까지 매절 후렴마다 흥겹게 반복되는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라는 말마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비에서 자연스럽게 샘솟는 지혜요, 자비와 지혜는 함께 갑니다.
새삼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하느님 자비와 지혜의 화신인 파스카 예수님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 ‘분별력의 지혜’에서 주님의 지혜는 빛을 발합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분별력의 지혜를 모든 덕의 어머니라 칭하며 아빠스의 최고의 자질로 일컫고 있습니다.
아빠스뿐 아니라 공동체의 지도자는 물론 믿는 모든 이들에게 참 필수적 자질이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성규 64장에서는 베네딕도의 중용사상을 대표하는 분별력의 지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기의 명령에 있어서는 용의주도하고 깊이 생각할 것이며, 그 명령이 하느님께 관계되는 일이든 아니면 세속에 관계되는 일이든, 분별있고 절도있어야 할 것이니, ‘만일 내가 내 양의 무리를 심하게 몰아 지치게 하면 모두 하루에 죽어 버릴 것이다’ 하신 성조 야곱의 분별력을 생각할 것이다.
이 밖에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다른 증언들을 거울삼아, 모든 것을 절도있게 하여,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
(성규 64,17-19)
놀랍게도 1500년 전, 성 베네딕도의 분별력의 지혜에 관한 주옥같은 말씀입니다.
얼마나 디테일에 강한 중용의 지혜를 지닌 ‘분별력과 절도’의 장상이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바로 이런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 분이 분별력의 대가가 우리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의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을 통해, 성체성사가 얼마나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요 주님 자비와 지혜의 결정체인지 깨닫게 됩니다.
정말 성체성사의 은혜를 깊이 깨달아 갈수록 주님을 닮아 자비와 지혜의 인물이 될 것입니다.
오늘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복음의 빵의 기적 이야기 중 두 대목에서 주님의 분별력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바로 지나쳐버리기 쉬운 한 작은 아이의 봉헌입니다.
시몬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아가 시큰둥하게 말할 때, 분별력의 지혜로 빛나는 주도면밀한 우리 주님이 이를 놓칠리 없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태의 본질을 파악한 주님의 신속한 반응입니다.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말 그대로 오병이어의 기적이요, 작은 아이의 전적 봉헌을 기초로 하여 일어난 기적입니다.
작은 아이의 나눔과 섬김의 전적 봉헌에 감동하신 주님이요 군중들이었을 것이고, 이에 감동하여 저마다 먹을 것을 지닌 이들이 부끄러움을 느껴 가진 것을 모두 봉헌하여 나눴을 것이니 바로 이것이 기적의 본질입니다.
사실 복음의 작은 아이처럼 자기가 지닌 모든 것을 나눠 섬길 때 세상에 굶주리는 이들은 모두 사라지는 기적이 발생할 것입니다.
새삼 우리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가진 것을 모두 봉헌하는 아이의 나눔과 섬김의 정성된 자세로 미사에 참여해야 함을 배우고 깨닫습니다.
아마도 미사를 통해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최종 목표도 여기 나눔과 섬김에 있음을 봅니다.
또 하나 주님의 분별력의 지혜가 빛을 대하는 대목은 후반부에 나옵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에 놀란 군중은 “이분이 세상에 오시기로한 예언자다” 착각하고 억지로 모셔다가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 합니다.
광야에서 유혹했던 악마의 재차 침입이요, 이들의 속셈을 간파한 주님은 이들의 환호와 욕망에 유혹되어 영합하지 않고 단호히 이들을 떠나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갑니다.
주님의 분별력의 지혜가 절정의 빛을 발합니다.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 공을 이루었으면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는 노자의 지혜를 연상케 하는 대목입니다.
이런 분별력의 지혜는 제1독서 사도행전의 가말리엘에게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사도들의 용기있는 발언에 격분한 이들이 사도들을 죽이려 할 때, 바로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교사로서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가 분연히 일어나서 개입합니다.
참 어른의 진가는 이런 때 드러납니다.
말 그대로 명불허전(名不虛傳), 가말리엘은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함으로 이들의 혼란을 잠재운채 참 평화롭게 끝냅니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이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은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멋진 분별력의 지혜가 발휘된 처방의 조언인지요!
때로 확신이 서지 않을 때, 상황이 잘 파악되지 않을 때는 잠시 하느님께 맡기고 때를 기다리며 “1. 건드리지 말고, 2.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공동생활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아주 오래전 염추기경님이 여기서 피정할 때, “여기 있으니 건드리는 사람이 없어서 좋아, 그냥 내버려 두어 좋아...”하던 두 말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정직은 최고의 정책’이요, ‘정직은 가장 오랜 간다’는 말마디 역시 정직이 지혜임을 말해 줍니다.
다음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지혜의 본질을 알려 줍니다.
“근본이 서면 사람이 모이고, 말단을 추구하면 사람은 흩어진다.
사람을 모으면 세상을 얻는다.”
다산의 말씀이요, 근본을 세우는 것이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덕은 근본이고 재물은 말단이다.”
대학에 나오는 말마디로, 덕을 추구함이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분입니다.
하느님의 화신인 자비와 지혜의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자비하고 지혜로운 삶이요 날마다의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자비와 지혜의 사람으로,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 사람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시편 27,4)
아멘.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회의와 불안과 실망의 장막을 걷어버리고 감사하며 나아갑시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기적'을 이야기합니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요한 6,4)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신 기적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을 파스카와 연결시킵니다.
이로써 우리는 이 기적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빵의 양을 증가시켜 그곳에 있던 군중을 먹이신 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께서 당신 몸을 이 세상에 양식으로 내어주실 희생 제사로 승화되리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 6,9)
참으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파악입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라니 소량의 빵과 물고기로 군중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음은 자명하지요.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숫자와 데이터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어느 선까지는 상황을 파악하고 분별하는데 도움이 되지요.
문제는 이 현실적 데이터가 쉽사리 우리를 회의와 실망, 포기로 끌어가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숫자나 데이터에는 숨은 희망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빛을 잃고 지치고 절망합니다.
자신의 초라함과 우리의 한계와 해결해야 할 과제의 거대함에 짓눌려 지레 주저앉습니다.
필립보처럼, 안드레아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요한 11)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니다.
적은 양이지만 아버지 앞에 펼쳐놓을 양식이 있고, 또 그것을 내놓은 순박하고 용기있는 아이가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할 제자들과 군중이 있습니다.
감사할 일은 넘치고 또 넘칩니다.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요한 6,13)
군중은 "원하는 대로"(요한 6,11) 양식을 받아서 배불리 먹습니다.
그런데도 엄청난 양이 남았다고 하네요.
사실 사람은 본성상 잉여분을 챙기고 싶어 합니다.
내일의 양식을 기약할 수 없는 가난한 이들도 그렇지만, 부자들도 가진 것을 더 불리고 싶어하니까요.
'억지로라도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요한 6,15)
그런데 군중은 빵을 더 챙기지 않는 대신 빵을 많게 할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을 소유하려 듭니다.
그분이 임금이 되시면 더 이상 양식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나 봅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들에게 일어난 기적이 나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사도 5,41)
불신과 회의에 익숙했던 제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박해받을 수 있음을 영광으로 여기게 된 변화야말로 큰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잘것없는 소유에 실망하던 그들이 스스로 보잘것없이 작은 자가 되어 모욕 당하기를 기뻐하는 이로 변모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임금이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파스카의 밤을 통과한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화답송)
주님 때문에 겪는 수치와 모욕과 업신여김을 받아들이는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라 죽기를 영광으로 여기는 이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요.
사도들은 이제 예수님과 함께 '먹히기 위해' 세상에 자기를 내놓는 존재로 굳건히 서게 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매일 빵의 기적에 참여해 주님을 모시는 우리도 그 기적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파스카의 밤을 지나 부활하신 주님처럼, 부활의 증인으로 우뚝 선 사도들처럼 우리도 변화되기를 청합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누구도 막을 수 없으니, 회의와 불안과 실망의 장막을 걷어버리고 감사하며 나아갑시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교회의 존재 이유>
1991년 사제서품을 받고 33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것들은 대부분 지금은 없거나, 다른 것들로 바꾸었습니다.
자동차는 르망, 엑셀, 아반테, 코란도, 소나타로 바뀌었습니다.
미국에 오면서 소나타는 필요한 분에게 주고 지금은 댈러스 한인 성당에서 마련해준 산타페를 타고 있습니다.
서품식에 축성 받았던 성작은 교구청에서 근무하면서 복음화 학교에 기증했습니다.
컴퓨터는 데스크 탑을 쓰다가, 2000년부터는 노트북으로 바꾸었습니다.
가볍고, 휴대하기에 편하기 때문에 노트북을 선호합니다.
지금은 노트북 3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제관에 하나는 집무실에 하나는 여행 갈 때 사용합니다.
노트북은 제게는 참 고마운 친구입니다.
생각을 정리할 수 있고, 정보를 검색할 수 있고, 강론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핸드폰은 1995년부터 사용했습니다.
30년 동안 11개의 핸드폰을 사용했습니다.
책은 읽으면 원하는 사람에게 드리기도 하고, 대부분 놓고 왔습니다.
2번 이상 읽는 책은 성경 말고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33년 동안 제 곁에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혹시 무엇인지 궁금하신가요?
서품식에서 입었던 ‘서품제의’입니다.
지금은 빛이 많이 바랬지만, ‘서품제의’ 만큼은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이 세상을 떠날 때 입고 갈 것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없거나 바뀌었듯이 저의 외모도 많이 변하였습니다.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변모하면 좋겠지만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조금씩 익어가고 있습니다.
염색을 했던 머리카락은 팬데믹을 지나면서 하얀 머리카락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백발의 머리카락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2006년부터 안경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안경은 참 고마운 친구입니다.
흐릿하게 보이는 것들을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33년 전의 모습을 앨범에서 보면 새 사제의 모습입니다.
열정과 패기는 있지만 멈춰야 할 때를 몰랐던 젊음이 보입니다.
지금 핸드폰에 저장된 모습을 보면 열정과 패기는 줄었지만 가야 할 때와 멈춰야 할 때를 구분하는 원숙함이 느껴집니다.
거룩한 변모는 아니지만 이 시간까지 이끌어 주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33년 동안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혹시 무엇인지 궁금하신가요?
하느님께서 제게 숨을 불어 넣어주신 ‘마음’입니다.
때로는 유혹에 몹시 흔들리는 마음입니다.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려는 마음입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두려움 때문에 물속으로 빠져들었듯이, 두려움과 근심 때문에 지금의 기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늘 그렇듯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나의 허물과 잘못까지도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백성에게 존경 받던 가말리엘이라는 율법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면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막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면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막는 것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들은 하느님의 이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박해받는 것을 오히려 명예롭게 생각하고 기뻐하였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으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강력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질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모든 이들의 욕망이라는 기름에 불을 붙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욕망 때문에 전쟁과 폭력이 벌어지고, 그 욕망 때문에 더불어 살아가야 할 생명이 죽어가기도 합니다.
혹시 무엇인지 궁금하신가요?
저는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라고 생각합니다.
화려하고, 풍족하고, 원하는 것을 채울 수 있기에 영원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좁은 문’은 아닙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두개의 깃발’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나눔과 헌신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겸손과 인내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섬김과 상생입니다.
그 깃발 아래 있으면 보리떡 다섯 개로 5천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습니다.
사탄의 깃발 아래 있으면 모두가 먹고도 충분히 남을 보리떡이 있어도 10억 명은 굶주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깃발’아래 모이는 것입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공동체를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
1코린 12장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 개인적으로 주어지는 모든 은사는 우선 공동체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영적 체험을 했을 때, ‘공동체를 위해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가?’라는 질문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어떤 자매님께서 자신의 신앙 체험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아주 신비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고 공동체성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만나는 사람에게 모두 알리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공동체성보다는 자기를 알리려는 마음이 더 큰 것 같았습니다.
즉, 자신은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놀라운 일이고 신비로운 일이지만, 이렇게 개인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병이 낫고, 마귀를 쫓아내고, 하느님의 천사가 나타나는 것 등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이미 요나의 기적보다 더 큰 표징은 없다고 말씀하셨듯이, 우리 마음의 변화 이상 큰 표징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관점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만을 믿으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 교만에 빠지게 되고, 마귀의 유혹을 받는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모두 우리 공동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공동체를 깨뜨리는 말과 행동을 하고 있다면, 하느님 신비에 반대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의 기준을 따져야 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공동체성’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서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어떻습니까?
정말로 놀라운 기적이고 신비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이 기적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가 분명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런 움직임에 예수님의 반응은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그들이 당신이 보여주신 빵의 기적에서 의미하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공동체를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모두를 위해 내려질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늘 공동체를 강조하셨고, 공동체 안에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공동체보다는 나만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데 집중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오히려 마귀의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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