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김정순
참으로 오랜만에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보니 코발트빛 하늘이 눈과
가슴으로 쏟아져 내려와 내 마음도 파랗게 물이 든다. 가을의 전령으로
다가오는 선홍빛 단풍잎이 어찌 그리 고운지, 손끝으로 가을을 만지고
싶어 까치발을 띄어본다.
기억저편 추억의 조각들을 모아 보니 안개처럼 떠오르는, 철없던 유
년시절이 생각나 쿡 쿡 웃음이 절로 나온다.
학교를 파한 단짝친구와 나는, 능금이 빨갛게 익어 가는 과수원 길을
걸으며 아카시아 담 장 사이로 보이는 알이 굵고 먹음직한 사과가 한
눈에 들어와 군침을 삼키고는 했었다.
점심으로 먹은 옥수수 빵을 게 눈 감추듯이 먹고 나니, 소화가 다되
어 몹시 배가 고팠던 탓일까? 허기에 지쳐서 훔쳐먹은 빵은 유죄일까
무죄일까? 고민 고민하던 끝에 내린 것은, 한번만 들어가서 큼직한 것
을 두 개만 따서 친구와 나눠 먹으리라 마음먹고 행동으로 옮겨보았다.
그러나 아카시아 나무가시덤불이 우거져있고, 또한 주인이 나타날까, 점
점 두려워 감히 접근도 못하고, 아쉬움을 남기며 돌아섰었다. 마치 한
폭의 정물화를 바라보듯이...그곳을 벗어나야만 했다.
우리는 마을로 접어들어 우물가를 찾아 두레박을 던져 손을 저어 물
을 올리면, 온통 흔들려 쏟아지고 바닥에 조금 남은 물을 쭈욱 들이키
고 나면 급한 허기는 면했었다.
고개를 들어 창공을 바라보면, 하늘에 떠있는 구름의 모습이, 하얗
게 익힌 떡가루의 포슬포슬한 백설기로 변하여 내 앞에 떨어졌으면 하
는 간절함으로 우리는 그렇게 허기진 배를 달래고는 하였다.
먹고사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그때는 너나없이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음식쓰레기가 지천으로 버려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
다.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해서라도 조금 더 아끼고 절약하는 습관을 길
러야 하지 않는가.
그 날도 어김없이 우리는 그곳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초가집과 기와집으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시골마을을 지나 산골짜기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우뚝 솟아있는 흰색의 연통과 현대적 감각으로
건축 되어있는 건물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시켰다.
회색 빛 큰 건물로 들어서면 육중한 쇠문이 열리고 그곳에는 어른 신
체의 키 높이와 어른의 폭 넓이의 침대가 놓여있었는데, 그곳은 우리의
놀이터였다.
친구와 나는 나란히 침대에 누워본다. 배고픔도 잊어버리고 철로 된
바닥으로 되어 있어 등줄기의 땀도 식혀주니, 기분이 너무 좋아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었다.
살며시 눈을 감고 상상의 날개를 펴본다. 하얀 연통 속의 연기처럼
나의 소망과 희망이 넘실넘실 춤을 추며 올라간다. 나도 자라면 이렇게
멋진 집을 짓고 살아야지,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친구와 나는 한참을
그렇게 누워있으며 미래를 상상했었다. 철없던 시절, 삶과 죽음이 무엇
인지도 모르고 우리는 그대로 그렇게 누워 있었다.
이윽고 무거운 침묵을 깨고 스위치 보 턴 누르는 소리가 찰칵하고 들
려온다. 깜짝 놀라 일어나니 친구오빠가 어느새 들어와 보 턴을 꾹 누
르고 있었다.
그곳은 친구아버지가 관리하시고, 신축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전기가
작동되지 않는 “화장터”였었다.
참으로 어리석고 위험한 장난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때가 몹시
그리워진다.
그 후 정상적인 화장터의 가동으로, 그 친구를 보는 것 마져도 무서
워서 만나지 않고, 학교에서도 만나면 혹시라도 나를 또 데리고 갈까
두렵기도 하여, 그 친구를 멀리한 나의 옹졸한 소견에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러한 척박한 환경에서도 무서움을 견디
며 살고있는 친구에게 위로의 말과 용기를 전해 주지도 못하고... 이렇
게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다행히 친구의 식구는 많았었지만, 밤과 낮에
도 화장터를 지키며, 그곳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
을까?
가끔 충주댐을 가노라면, 그 근처를 지나친다. 하얀 연통 위에서 잿빛
연기가 보이면, 우리의 삶 또한 하나의 연소과정임을 깨닫게 한다. 죽음
은 결코 삶의 소멸이 아닌, 삶의 질에 대한 언명(말없는 설명)으로서 정
화되고 승화된 삶의 완전 연소인 것이다.
또한 우리의 삶은, 어떤 이는 온갖 고통과 번뇌로 그을음과 연기를
내뿜으며 삶을 불완전 연소시키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이는 남을 배려하
고 봉사하는 마음이 평화로운 삶으로 이어져 완전연소 하기도 한다.
바람 잔 숲에 새들이 날고 고요한 호수 위에 물고기들이 뛰어 노는
것처럼 고통과 번뇌의 불길이 꺼짐으로 우리의 순수한 본래의 생명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상념에 젖고있노라니, 내 귓가에는 죽은 이를 떠나보내야 할 아쉬움
으로 가족들의 슬픈 울부짖음이 들려오는 듯 하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 이였구나. 새삼 삶이 참으로 고
맙고 감사함을 느껴보고는 했었다. 우리 모두가 생존을 위하여 바둥거
리며 살고 있지만, 가끔은 죽음을 생각해보니, 더욱 삶이 소중하다는 것
을 가슴깊이 느껴본다.
인간은 누구나 한줌의 재와 흙으로 돌아가리라!
우리가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 달리는 것이라고 하지만, 삶을 위하
여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이 아닐까? 그러므로 아름다운 삶은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치 앞도 모르는 생이라지만, 그 한치의 삶은 보석보다 더 귀한, 나
의 진정한 삶일 것이다 이 맑고 드높은 가을 하늘에게 전하고싶다. 이
렇게 아름답고 고귀한 삶을 나에게 준 것을 진정으로 감사하다고...
2002년 13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