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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신명기의 말씀 30,1-5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 “이 모든 말씀, 곧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축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내릴 때,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몰아내 버리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2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3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또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 버리신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4 너희가 하늘 끝까지 쫓겨났다 하더라도,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그곳에서 너희를 모아들이시고 그곳에서 너희를 데려오실 것이다.
5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이 차지하였던 땅으로 너희를 들어가게 하시어,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하고 조상들보다 더 잘되고 번성하게 해 주실 것이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 4,29―5,2
형제 여러분,
29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30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31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5,1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8,19ㄴ-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마태 18,19-20)
바로 '이 땅'이 우리가 이루어야 할 친교와 화해의 장소라는 말씀입니다.
먼 훗날이 아니라, 평화로운 새로운 새 땅에서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바로 지금, 서로 마음을 모으라는 호소입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 18,22)
이는 허물을 탓하지만 말라는 말씀이요, 동시에 무한히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용서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조건이나 단서를 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반드시 죄를 고백해야만, 혹은 용서를 청해야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때로는 완고하고 고집부리더라도, 혹은 계속해서 똑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더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도 남북의 형제들끼리 적대 논리로 서로를 적으로 강요당하며, 서로 죽이는 살인 연습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적이 아니라 형제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적대감과 대립을 몰아내야 할 일입니다.
편견과 거짓과 위선을 몰아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와 용서, 일치와 사랑이 필요할 때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특별히 '오늘'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한 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신명 30,2-3)
이는 축복과 저주는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지만, 동시에 인간에게도 달려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분단 극복과 화해와 일치의 실현에는 그동안의 우리의 불성실을 성찰하는 동시에, 바로 오늘 우리의 책무와 투신이 요청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새로운 생활 법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에페 4,29)
사실 우리들 사이의 분쟁의 상당한 것들은 잘못된 말이나, 욕, 비난, 중상모략, 거짓말로 시작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남과 북이 서로를 비방하고, 거짓 뉴스와 유언비어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를 멈추고, 오히려 서로를 격려하고 고무, 찬양해야 할 일입니다.
축복을 가져다주는 좋은 말, 기쁨과 칭송의 말을 해야 할 일입니다.
이어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에페 4,30)
이는 형제들에게 하는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과 온갖 악의'가 사실은 바로 그들 안에 있는 성령께 대한 모독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몸이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서로 욕하고 비방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형제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성체조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형제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을 예배드리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에페 4,32)
사실 용서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거저 받은 것을 마땅히 이웃에게 거주 주어야 할 일입니다.
특히 대립과 반목으로 오랫동안 쌓여온 남북의 적대를 용서로 바꾸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내가 ‘먼저 용서’하는 일입니다.
먼저 물꼬를 터야 함께 터지게 됩니다.
그러니 상대가 화해하기를 바라지 않아도 먼저 화해하려 해야 할 일입니다.
‘네가 먼저 하라’고 버팅기다가 영영 화해하지 못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어”(에페 5,1)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화해와 일치를 위해 바치는 향기로운 산 제물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죄와 죽음을 이겨내신 부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화해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부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 18,22)
주님!
일곱 번이 아니라 이제는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셨으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고,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게 하소서.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기도의 실패는 없고, 실패한 기도만 있을 뿐>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마태 18,19ㄴ)
헛수고 2.
어제 세례자 요한 탄생 축일 강론에서 저는 헛수고에 대한 나눔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도 저의 헛수고가 또 생각났습니다.
사실 제 인생에서 최대의 헛수고는 북한 사업일지도 모릅니다.
몇 년의 힘든 줄다리를 하여 가까스로 평양에 종합 복지관 ‘평화 봉사소’를 세우고,
그것을 통해 북한에 상주하며 인도적인 사업과 복음화 사업을 하려 했는데,
금강산에서 박왕자 씨가 피살된 후 북한이 아니라 우리 정부가 가는 것을 막아 아직도 가지 못하고 그 많은 돈이 투입된 복지관을 운영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세운 ‘평화 봉사소’가 개점휴업 상태인 것이 헛수고의 느낌을 제일 많이 들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헛수고의 느낌을 더 크게 느끼게 하고 좌절감까지 느끼게 하는 것은 남북 관계가 지금 이 모양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했는데도 남북의 망나니들 때문에, 특히 윤석열 정부 때문에, 그동안 이뤄놓은 많은 것이 다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 같아 정말로 속이 쓰리디쓰립니다.
기도의 헛수고.
기도한 것이 헛수고라는 느낌.
이것이 ‘평화 봉사소’ 헛수고보다 더 큰 헛수고 느낌입니다.
그래서 요즘도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한우리 기도를 바치고 있는데,
이 기도를 바치면서도 계속 바쳐야 하나? 언제까지 바쳐야 하나? 공염불이라는 말이 있는데 혹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공염불(空念佛)이라는 느낌, 이것 정말 고약한 느낌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둘이나 셋이 모여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고 하는데,
이 말씀에 대한 믿음을 송두리째 흔드는 느낌이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많은 기도가 사실 ‘아직은’ 공염불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기도하고 싶지 않고 포기하고 싶습니다.
이때 저를 붙잡아주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 네가 아직 간절하지 않구나!
- 포기할 때 진짜 실패하는 것이다!
- 악마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낫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기도를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남이 아픈 경우라면 몰라도 내가 아픈데도 포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기도의 실패는 없고 실패하는 기도가 있을 뿐입니다.
간절하지 않은 기도.
성급한 기도.
같이 하지 않는 기도.
사랑이 부족한 기도.
이런 것들이 실패케 하는 기도일 것입니다.
이것을 묵상하는 것으로 오늘 나눔을 끝내며, 그러니 또 그리고 더 기도하자고 초대합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다>
아버지 하느님의 큰마음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주시길 기도합니다.
허물을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에 앞서 내 삶의 여정에서 이웃과의 관계를 살펴보고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이웃과의 관계 형성도 어려운데 북한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은 얼마나 더 힘든 일인지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과 백 사람이 한마음이 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울까요?
이론적으로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결코 두 사람이 일치를 이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치의 전제 조건은 화해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다 좋은데 이것만은, 안돼!’하는 속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 한번 틀어지면 둘이 하나가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정성이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 입으로는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막상 얼굴을 마주하거나 목소리를 들으면 옛 생각에 울컥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피하고 싶어집니다.
마음이 불편하다면, 아직 진심으로 품어 용서하지 못한 것입니다.
신비한 것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겉과 속이 다른 배신자를 수박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 받아들이는 사람의 그릇이 중요합니다.
말하는 사람이나 행동하는 사람도 품위가 있어야 하지만 담는 그릇이 커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나를 치켜세운다고 해서 우쭐하지도 않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를 내지도 않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마태 18,19)
‘마음을 모아 청하면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머릿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용서하지 못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면 상대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에게 상처를 준 저 사람을 용서해 주십시오.
인간적으로는 힘이 들지만, 당신이 이미 용서하셨기에 용서합니다.
당신이 그를 사랑하시기에 저도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그러나 제가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 것이 있다면 먼저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1절~11절을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이 이 여자를 끌고 와서는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마음 안에는 ‘나는 의롭다.’, ‘나는 잘살고 있다.’ ‘나는 거룩하다.’ 뽐내고 으스대는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그러는 것입니다.
“스승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소리를 듣고 금방 대답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히시어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무엇을 쓰셨을까요?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너 자신을 알라!’ 하셨을 것입니다.
‘너도 하느님 앞에 죄인 아니냐?
잘 생각해 봐라. 네가 잘난 척하지만, 너도 별 수 없다.’
예수님께서 뜸을 들이시자, 사람들이 재촉합니다.
‘스승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씀 좀 하십시오.’
사람들이 줄곧 물어대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을 때 나이 많은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다 떠나갔습니다.
마침내 예수님 앞에는 죄 많은 여자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그러자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과거를 묻지 않고 자비와 용서를 허락하셨습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성경은 나이 많은 자들부터 떠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삶의 경륜이 많은 사람부터 떠나갔습니다.
말하자면 의롭다고 자처한 사람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세상에는 밝게 눈떠 있었지만, 하늘에는 눈이 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한 말씀에 눈이 뜨였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하시는 한 말씀에 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죄를 인정하고 자기 죄에다 죄를 더 보태지 않고 떠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눈뜨지 못했다면 돌을 집어 던졌을 것입니다.
죄에 죄를 더했을 겁니다.
마태복음 7장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자기가 잘못한 것은 보이지 않고 남이 잘못한 것은 아주 크게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눈뜬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눈뜬 사람은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눈 뜬 사람은 그 허물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내가 저 사람과 똑같은 잘못은 범하지 않았지만, 또 다른 잘못과 허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리처럼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이 죄 많은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하고 물었습니다.
일곱 번, 많죠. 한 번도 힘든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해도해도 끝이 없다. 용서는 선행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일생을 살아오면서 잘 산다고 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용서받고 살았느냐?
너 그거 아느냐?
너 그거 안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 못 할 것이 없지 않으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기에 앞서, 먼저 가까운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베푸는 것부터 시작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하신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고 ‘내가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신 말씀을 선포하시길 바랍니다.
나의 이웃에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짐하시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통일이라는 선물을 받을 준비가 되었는가?>
오늘은 남북통일 기원 미사입니다.
남북통일은 우리가 하는 것일까요?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선물의 가치를 아는 이에게 그 선물을 주십니다.
동서독의 통일되는 과정을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통일은 정말 선물과 같이 왔습니다.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치국 귄터 샤보프스키 의원이 동베를린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그는 동독인들이 해외여행을 위해 비자를 더 쉽게 신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새로운 여행 규정을 발표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샤보프시키는 일설에 의하면 전날 술을 많이 마셔서 새로운 규정의 세부 사항과 시기에 대해 충분히 설명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기자회견에서 한 언론인은 샤보프시키에게 새로운 규정이 언제 발효되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자기 발표문을 여기저기 뒤적이다가 다소 불확실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내가 아는 한, 지체 없이 즉시 발효됩니다."
이 발언은 틀렸으며 동독 정부를 포함해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해당 규정은 즉각 시행되지 않고 점진적으로 순차적으로 시행되도록 의도됐습니다.
샤보프스키의 성명은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수천 명의 동베를린 주민들은 베를린 장벽을 통과할 것을 요구하며 베를린 장벽으로 달려갔습니다.
갑작스럽고 대규모의 인구 유입에 대비하지 못한 국경수비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명확한 명령도 없이 늘어나는 군중에 직면한 그들은 결국 문을 열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개방되었고 이 물결은 더는 막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이후 몇 달 동안 협상과 외교적 노력이 강화되어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공식적으로 통일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나라도 이렇게 갑작스러운 선물처럼 통일의 물꼬가 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북한 주민들이 수없이 철책을 넘어온다면 우리는 기쁘게 맞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내가 왜 그 많은 통일 비용을 내야 하느냐며 통일을 반대합니다.
앞으로의 치안과 전체적으로 나라가 가난해질 것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미 결혼도 안 하고 자녀를 낳지 않아 소멸해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통일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되면 새롭게 국민들의 마음도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통일 비용이 많이 든다고 통일을 반대하는 이들은 장기적으로 북한과의 대립으로 우리가 소비해야 하는 군사비용이나 핵무기의 위협과 같은 감정적인 부분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도 관광적으로도 기대되는 이익도 엄청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건 북한을 이용하기 위한 것 아니냐, 우리가 북한이 불쌍해서 통일해주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관계는 쌍방의 고마움을 전제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존심을 비굴해지느니 죽는 것을 선택합니다.
로마에 끝까지 맞서다 나중에 집단으로 자살했던 마사다 항쟁을 생각해봅시다.
아니면 영화 ‘300’에서 자신은 관대하다는 페르시아 장군에게 목숨을 잃더라도 끝까지 저항한 몇 안 되는 스파르타 군인들을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북한에게 다가갈 때는 우리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갑작스러운 선물로 통일의 물꼬가 트일 때 서독인들처럼 기쁘게 동독 사람들을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만약 나의 배우자가 “너 나 아니었으면 거지로 살았을 거야?”라고 한다면 그래도 그 사람과 살겠습니까?
통일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이 통일이 우리에게 더 좋다는 전반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회가 오면 내분이 없이 바로 통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통일이라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도 마찬가지고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 것이 더 좋다는 믿음이 먼저 있어야 그 선물도 받을 수 있습니다.
분명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서독에서는 통일의 이점이 어려움보다 크다는 것이 전반적인 공감대였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몰려올 때 우리가 기뻐 뛸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통일의 준비가 된 것이고 이때 우리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비정상의 정상화를 배격합시다!>
우연히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북한 방문 장면 관련 뉴스를 보았습니다.
참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두 정상이 지나가는 길목마다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나와 환호성을 올리고 손을 흔들고...정말이지, 끔찍했습니다.
이 지구상에 아직도 저렇게 한 사람을 우상화시키고, 강제동원령을 내리고, 꼭두각시 쇼에 동참하지 않으면 엄청난 불이익이 뒤따르고, 운집한 군중은 영혼 없는 얼굴로 환호를 하고, 그런 모습에 독재자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오늘 하루 온종일 참담한 심정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우리 민족에게 이토록 가혹하신지? 하는 탄식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 남북한 동포들 사이에 만연해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남북 분단의 고착화를 너무나도 당연히 여기는 태도입니다.
평화 통일은 이제 완전히 물 건너간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입니다.
불과 이삼십년 전만 해도 학교에서는 학생들에 대한 체벌이나 구타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지금은 큰일 날 일이지만, 당시 선생님이 때리면 당연히 맞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찍소리 못하고 때리는 데로 맞았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지금은 그 누구도 용납 못하지만 군부 독재자 시절, 천상천하유아독존인 그의 한 마디면 모든 것이 가능했습니다.
체포영장도 없이 어딘 지로 모르는 장소로 끌려갔고, 변호사도 없이 별의별 형태의 고문을 당하고...그야말로 비정상의 정상화 시대를 살아온 것입니다.
남북 분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 너무 오랜 세월 분단되어 살아오다 보니, 이게 비정상인데, 정상처럼 착시 현상을 느끼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갈라서 있는 것이 편하니, 괜히 통일이나 왕래다 하다 보면 세상 복잡해지고, 그냥 이대로 쭉 갈라서서 가는 것이 더 낫다는 비정상적인 생각이 정상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남북한 동포들이 어떠한 희생과 노고를 다 치르더라도 반드시 일궈내야 할 과제요 숙명이 곧 통일입니다.
우리는 불가능하다고 아예 포기하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예측을 훨씬 능가합니다.
함께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노력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남북 사이의 관계가 화사한 봄날처럼 풀릴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굳게 가로막혀 있는 철조망도 순식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서로서로 부둥켜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각자 삶의 자리에서 지금까지 해오던 노력을 계속해나가야겠습니다.
매일 밤 9시 알람이 울리면 온 정신과 마음을 모아 한반도 평화와 남북통일을 위한 주모경 바치기를 계속해나가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서로’가 아니라 ‘내가 먼저’입니다>
1)
신자들 사이에 분쟁이 생긴 경우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가 했던 말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다른 사람과 문제가 있을 때, 어찌 성도들에게 가지 않고 이교도들에게 가서 심판을 받으려고
한다는 말입니까?"
(1코린 6,1)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형제들 사이에서 시비를 가려 줄 만큼 지혜로운 이가 하나도 없습니까?
그래서 형제가 형제에게, 그것도 불신자들 앞에서 재판을 겁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서로 고소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릇된 일입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왜 차라리 그냥 속아 주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도리어 스스로 불의를 저지르고 또 속입니다.
그것도 형제들을 말입니다."
(1코린 6,5-8)
여기서 ‘불신자들, 이교도들’을 ‘다른 나라’, 또는 ‘외세’로 바꾸면, 이 권고는 우리 민족의 문제에도 잘 적용이 됩니다.
‘어찌 이교도들에게 가느냐?’ 라는 말을, ‘어찌 무력으로 해결하려고만 하느냐?’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2)
“왜 차라리 불의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왜 차라리 그냥 속아 주지 않습니까?” 라는 말은 불의와 악을 방관하거나 방치하라는 뜻이 아니라, 형제애를(사랑을) 먼저 생각하라는 권고입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마태 5,38-39)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 5,43-44)
이 가르침에 대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개인 간의 사적인 문제에서 실천하는 것도 힘들지만, 국제 문제에서 실천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고, 특히 남북문제에서 실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사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자들입니다.
3)
남북문제의 해법은 “서로 용서하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화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긴 한데, ‘서로’ 라는 말에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남의 일’이라면 ‘서로’ 용서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일’에 대해서는 “서로 용서해야 한다.”가 아니라 “내가 먼저 용서한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남북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입니다.
성경에 있는 예수님 말씀에서 ‘서로’ 라는 말은 가르치는 입장에서 사용하신 표현일 뿐입니다.
뜻으로는 ‘네가 먼저’입니다.
그는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내가 먼저 그를 용서하는 것, 또 그는 나를 이해해 주지 않아도 내가 먼저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는 나와 화해하기를 바라지 않아도 내가 먼저 그와 화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만이 용서와 화해를 실현하는 방법입니다.
개인의 사적인 문제에서도 그렇고, 국가 간의 문제에서도 그렇고, 특히 남북문제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언제나 항상 ‘내가 먼저’입니다.
4)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에 대해, “우리가 이렇게 긴 세월 동안 간절하게 남북통일을 염원하면서 기도하고 있는데도 왜 통일이 되지 않는 것인가?” 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로 마음을 모으고 있는가?
전 국민이 정말로 한마음으로 평화를 원하고, 통일을 원하고, 화해를 원하는가?
사람들 가운데에는 전쟁을 원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평화통일이 아니라 무력통일을 주장하는 자들도 많지 않은가?'
그리고 사실 통일 자체에 관심이 없거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제대로 모으지 않고 있는데, 무슨 염치로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도 심각하게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려면, 그리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바란다면, 우선 먼저 예수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가장 먼저 할 일은 ‘우리의 회개’이고, ‘나의 회개’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남북의 평화공존과 통일의 길 - “기도하라, 사랑하라, 공부하라”>
“주님,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평화를 주소서”
‘2024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 주제로 연중 제2주일 본기도이기도 합니다.
곳곳에 만개해 있는 “화해”라는 꽃말의 개망초 야생화들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듯 합니다.
역시 기상하자마자 바치는 만세칠창중 하나입니다.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오늘은 6.25전쟁 제74주년이 되는 해로 제 나이 2세 때 일어난 전쟁이요, 남북은 여전히 분단에 경직상태입니다.
아니 어느 때보다도 전쟁 발발의 위기상황입니다.
불신과 증오의 골이 너무나 깊습니다.
전쟁은 공멸일 뿐 남북의 평화공존이 참으로 절박한 시절입니다.
남북의 통일보다는 남북의 평화가, 남북의 화해와 일치가 우선적임을 깨닫습니다.
한때는 남북의 동포가 공통으로 불렀던 ‘우리의 소원’ 노래가 생각납니다.
한번 조용히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겨레 살리는 통일, 이나라 찾는데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전쟁통일이 아니라 평화통일이요, 더디더라도 평화공존의 우선적 바탕 위에 통일의 그날까지, 서로의 신뢰가 회복될 때까지, 평화통일의 희망을 간직하고 끝없는 기도와 인내의 기다림, 그리고 노력이 참으로 절실한 때입니다.
무엇보다 가톨릭 교회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평화공존을 위한 지칠줄 모르는 항구한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담화문 일부를 소개합니다.
“전쟁은 악하고 부조리합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실제로 무력 충돌이 이어지는 가운데 대화와 협력으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은 멀어지고, 군사력을 이용한 안보만 강조됩니다.
대화가 단절된 한반도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남북대화가 시작된 지 이렇게 오랜 시간 소통이 단절된 적은 없다 합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갈등의 여파까지 냉전적 대결을 부추기는 형국인데, 이와같은 정세속에서 남북관계도 최악의 국면으로 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와 더불어 평화공존을 위해 힘껏 노력하는 일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성가71장)를 가톨릭 신자들의 기도로 일상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신자들은 오늘 말씀을 바탕한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바른길을 놔두고 지름길만 찾으면 오래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된다’는 다산의 말씀처럼, 바로 다음 주님의 바른길을 택해 정진하는 것입니다.
첫째, “기도하라!”
평생 주님 '기도의 전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민족의 일치와 화해와 평화공존은 하느님의 은총과 도움이 있어야 가능하기에 기도가 우선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진리도 이런 기도와 삶에서 나옵니다.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도 이런 한결같은 기도의 열매입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기도를 강조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날마다 하루하루 평생, 온 세계가 주님 안에서 교회 공동체가 일치하여 동시다발적으로 끊임없이 거행하는 미사은총이, 또 온힘과 온마음을 다해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남북의 평화공존을 위해 바치는 미사은총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는지요!
둘째, “사랑하라!”입니다.
평생 주님 '사랑의 전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마음은 말과 행위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사랑할 때 깨끗한 마음, 가난한 마음, 행복한 삶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겸손과 온유, 용서와 평화, 회개와 겸손 모두가 성령의 열매이자 사랑의 열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용서의 사랑에 지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사랑의 구체적 지침이 됩니다.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 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말씀이 아름다워 전문을 인용하다시피 했습니다.
말한마디 천량빚을 갚는다 했습니다.
삶은, 몸은 정직합니다.
온삶과 온몸을 통해 표현되는 사랑입니다.
만병통치약이 사랑이고, 만병의 근원이 사랑 결핍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 사랑 안에 살아가는 것이요,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셋째, “공부하라!”
말씀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평생 주님 '말씀의 전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공부하고 지킴으로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공부에서 올바른 기도도, 올바른 사랑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경청- 묵상-기도-관상-실천"에 이르는 렉시오 디비나 성독 수행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신명기에서 모세의 말씀도 이와 일치합니다.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진 상태에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흡사 남북분단 대치상태에 있는 우리 한민족에게 주시는 말씀 같습니다.
특히 가톨릭교회 형제자매들은 엄중하게 받아들여할 말씀입니다.
마음을, 정신을 다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공부하고 실천하며 명실공히 ‘말씀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본질적이요 중요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주님은 우리의 운명을 바꿔준다 하셨습니다.
남북의 화해와 일치보다, 남북의 평화공존보다 더 화급한 것이 총체적 난국에 처한 남남의 화해와 일치, 남남의 평화공존입니다.
이념상태의 극단적 대립을 보면 완전히 내전상태를 방불케 합니다.
극단의 대결과 대립, 분열과 갈등의 시대요, 참으로 남북에 앞서 남남의 화해와 일치, 통합과 평화가 화급한 상태입니다.
참으로 기도와 사랑과 말씀으로 무장한 주님의 기도의 전사, 사랑의 전사, 말씀의 전사로 살아야 할 우리 가톨릭교회 신자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민족의 화해와 일치로 이끌어 주시며 우리 모두 주님 평화의 전사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 흩어진 당신 백성, 한민족을 하나로 모으소서.”
(예레 31,10ㄷ참조)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먼저 화해하고, 용서하는 것>
60이 넘으면서 꼭 지켜야 할 삶의 태도 5가지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저도 어느덧 60이 넘어서인지 관심이 있었습니다.
강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젊어서는 식탁에 꽃병이 있는데, 나이가 들면서 식탁에 약병이 놓인다고 합니다.
어쩌면 인생은 꽃병과 약병 사이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점잖다.’라는 말은 젊지 않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 그만큼 말에 품격과 품위가 있다는 뜻입니다.
‘늙은이’라는 말은 늘 그렇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 쉽게 변하지 않고, 나이가 들면 포용한다는 뜻입니다.
점잖게 늙어가는, 늘 그렇게 변함없는 노년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5가지를 잘 지켜야 합니다.
첫째는 타인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사는 겁니다.
남의 눈치를 보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는 무엇이 나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지, 무엇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지를 생각하면서 사는 겁니다.
소신껏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하고,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삶은 노년의 시간을 기쁘게 합니다.
저는 신학생으로 지내면서, 사제로 살면서, 소신껏 지내기보다는 아무래도 눈치를 보았습니다.
둘째는 여행을 자주 다니는 겁니다.
60년대에 태어난 저는 해외여행을 많이 하지 못하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가능하면 가족이 함께 여행을 다니면 좋습니다.
여행은 삶에 활력을 주고, 여행은 새로운 견문을 넓혀주고, 여행은 인생을 풍요롭게 합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경제적인 이유로 참다 보면 여행의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여행은 가슴이 떨릴 때 가야지, 몸이 떨릴 때 가면 어렵습니다.
여행의 목록을 정해놓고 떠나는 삶은 노년의 시간을 기쁘게 합니다.
다행히 저는 성지순례를 다닐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셋째는 힘들고 어려울 때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33년 사제로 지내면서 동창 신부님들은 제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됩니다.
매달 서울에서 동창 신부님들이 만나는데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큰 아쉬움입니다.
뉴욕에서 팬데믹을 잘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동료 사제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 댈러스에서도 서울 교구 신부님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이 세상 떠나는 날 그 한 사람이 있어서 마음이 놓인다면 좋겠습니다.
넷째는 자기 계발입니다.
자전거는 페달을 밟아야 움직입니다.
페달을 멈추면 자전거는 쓰러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이웃을 위해, 나 자신을 위해 사용하면 좋습니다.
‘난 할 수 없어!’라는 말을 하기 보다는 ‘나도 할 수 있어’라는 말을 하면 좋습니다.
본당에는 성경 공부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부채춤을 배우는 모임이 있습니다.
사물놀이를 배우는 모임도 있습니다.
저도 팬데믹 때 배웠던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인생은 많이 소유한 것으로 존경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고, 이웃과 나눌 때 존경 받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건강관리입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합니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건강을 잃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스트레스는 면역력을 떨어트린다고 합니다.
늘 감사하며, 언제나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은 면역력이 강해집니다.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면 건강해집니다.
이해 받기보다 이해하는 사람이 건강해집니다.
적당한 운동과 규칙적인 식사는 건강에 큰 도움이 됩니다.
아름다운 노년을 위해서 이 다섯 가지를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방법도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이룰 수 있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먼저 화해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너그럽게 품어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이론이라도 결실을 맺기 어렵다고 이야기 합니다.
인간의 관계는 꼭 시비를 가려야만 해결되는 것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남과 북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비를 가리려고 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결을 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엉킨 실타래는 더욱 심하게 꼬이게 됩니다.
불가에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원망을 원망으로 갚으면 원망은 해결되지 않는다.
오직 참음으로써 원망은 해결되나니 이 가르침은 영원한 진리이다.
시비(是非)란 본시 그른 것만 취한다면 해결되지 않으며, 옳고 그른 것을 동시에 놓아버려야 끝이 난다."
宗敎란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한자라고 합니다.
Religion은 엉킨 실타래를 푸는 의미가 있는 영어라고 합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으로 세상사의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이 종교라면, 그리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그리하여 참된 구원의 문에 도달하려면, 꼭 是非를 가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普施와 容恕 그리고 사랑이만이 냉각된 남과 북의 문제를 풀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해야>
‘단지 15분’이라는 연극이 있다고 합니다.
이 연극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극 중 주인공은 몸이 이상해서 병원을 찾아갑니다.
여러 검사를 하고 나서 의사로부터 “당신은 15분 후에 죽습니다.”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게 됩니다.
우울한 마음으로 병원 문을 나서는데 전화가 울립니다.
재산상속을 해줄 테니 얼른 서명하러 오라는 할머니의 전화였습니다.
15분 후면 죽는다는데 유산 상속 소식에 기뻤을까요?
잠시 후에 오랫동안 구애를 했던 여자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당신의 청원을 받아들일 테니 얼른 자기 집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15분 후면 죽는다는데 결혼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곧바로 세계적 과학 학술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당신의 논문 게재가 확정되었으니, 게재료를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역시 15분 후면 죽는데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주인공은 15분 앞에서 세상의 모든 욕망이 의미 없음을 깨닫고 오열합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 하나였습니다.
‘남은 15분을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 유한한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이 시간 안에서 과연 중요한 것이 나의 욕망일까요?
그보다 삶에 충실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을 찾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사랑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삶을 통해 지금이 의미 있으며, 무엇보다도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나의 전부가 있는 것처럼 살았던 것이 아닐까요?
욕심을 버리고 사랑으로 채울 수 있는 나의 삶을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1950년 6월 25일의 전쟁을 시작으로 남북한은 지금까지도 민족 분단의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였던 나라가 둘로 갈라져 너무 오랫동안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과연 중요한 것일까요?
아직도 우리 민족 간에는 거리감이 무척 커 보입니다.
좌파, 우파, 빨갱이, 보수라는 말 등으로써 아군과 적군으로 나누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민족 간의 간격은 너무나 커 보입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사랑의 삶을 통한 일치인데도, 아군 적군 식의 편 나누기가 더 중요한 것처럼 여기는 사람도 너무나 많습니다.
사랑의 주님이시만 동시에 이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주님의 마음을 받아들여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는 주님 말씀을 따라, 마음을 모아 기도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즉, 남북한의 진정한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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