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논쟁을 통해서 저는 김용만 선생님께서 중국 사료를 바라보는 시각이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중국 사료의 기록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네. 저도 그 부분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단순히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수준을 넘어서 자의적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고구려가 북위에게 사신을 보낸 것이지, 그것이 조공사는 아닙니다. 기록에 조공사라고 나온다고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양국관계는 대등관계이지, 조공책봉관계가 아닙니다.
뒤끝이라 봐야 할지도 모르고, 좀 치졸한 짓이 될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선생님의 저 말씀이 사실이 아니라는 분명한 사례라도 좀 보여드려야겠습니다.
유연(柔然)의 가한 욱구려곡율(郁久閭斛律)이 사자를 보내 말 3천 필을 풍발에게 바치며 풍발의 딸인 낙랑(樂浪)공주를 아내로 맞이할수 있도록 요구하였는데, 풍발은 여러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그것을 논의하도록 하였다.
柔然可汗斛律遣使獻馬三千匹於跋,求娶跋女樂浪公主。跋命群臣議之。 《자치통감》116권 안제 의희 7년(411년)
유연의 용사 곡률이 사신을 보내 풍발의 딸인 낙랑공주를 구하며 말 3천필을 바쳤으니 풍발은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그것을 논의하도록 하였다.
蝚蠕勇斛律遣使求跋女偽樂浪公主,獻馬三千匹,跋命其群下議之。 《진서》 재기 25권 풍발
갑신일, 유연이 사신을 파견하여 건강에 이르렀다.
甲申,柔然遣使詣建康。《자치통감》124권 문제 원가 19년(442년)
임술일, 오락후국이 사신을 파견하여 위에 갔다.
壬戌,烏洛侯國遣使如魏。《자치통감》124권 문제 원가 20년(443년)
저는 중국의 기록이라는 것이 그렇게 서툴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기록이라는 것은 단순한 외교 사절을 조공사라 기록할 만큼 허황되지 않습니다. 물론 애매하다거나 모호한 경우가 없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처럼 책봉명을 받고 국휘까지 스스로 청하는 관계를 두고 애매하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고구려가 북위에 대해서 책봉체제 하에 들어간 것이 과연 고구려의 국력이 미약해서일까요? 선생님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고구려의 국력이나 실질적인 관계는 분명 달랐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겉으로 명백하게 보이는 조공책봉관계를 부정한다거나, 확실하게 보이는 조공 기사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솔직히, 저는 선생님께서 국휘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에서 국휘문제도 그렇습니다. 국휘 관련 자료는 사료상으로 오직 그때 하나 뿐입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논자들은 고구려가 북위 황실의 글자를 피하기 위해 국휘를 알려달라고 한 것이니, 고구려가 조공하려고 한 것이라고 보지만, 그렇다면 왜 고구려가 북위와 무려 30여년간 국교를 단절했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까지 말씀드리게 되는 것이 참 죄송합니다만, 이건 정말 치졸한 변명입니다.
고구려가 국휘를 신청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저는 고구려가 국휘를 신청했다고 해서 뼛속까지 북위의 개가 되겠다고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북위에 결코 못지않을 국력을 가졌고 오랜 역사와 자부심을 가진 나라였으니까요. 이것은 외교적인 수식, 겉으로 보여주는 명분일 뿐입니다.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았으며 국휘까지 신청했습니다. 그 뒤로 계속 조공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록들을 해석한 결과가 왜 “고구려가 조공하려고 한 것”이 되면 안 됩니까?
그 뒤로 30여 년간 조공을 보낸 기록이 없으면 국교를 단절한 것이 됩니까?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뭐 일본서기 같은 곳에 기록이 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기록이 없다면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439년에서 462년 동안 기록이 없는 것이 국교를 단절했다는 의미라는 근거는 뭘까요? 아니, 설사 단절했다손 쳐도 그게 대체 무슨 상관입니까? 단절하기 전에도 책봉을 받고 조공 열심히 보냈으며, 단절이 끝난 뒤(462년)에도 조공을 열심히 보냈습니다. 그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그건 그 단절 기간의 사건일 뿐입니다. 국교 단절이라는 사건 때문에 그 앞의 책봉이 없는 사실이 됩니까?
이건 정말 음모론의 수준입니다 선생님.
솔직히 이렇게까지 말씀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선생님의 주장이 가진 놀라운 독선과 아집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왜 제가 이번에 쓴 글에 민감하게 반응하셨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덕분에 저는 선생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잘 알았습니다.
이 카페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고 좋은 추억도 많았습니다만, 앞으로 제가 여기에 다시 찾아올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알게 된 여러분들께는 분란을 일으켜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럼 앞으로도 건필하십시오.
첫댓글 토론을 하면서 상호간이 사료해석을 놓고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앞으로 찾아올 일이 없겠다느니...소설이고 음모론이며 독선과 아집이라며 논쟁에서 벗어난 말을 한 분이 누구입니까. 상대방을 독선이라고 매도한 분이 본인 의견이 수용되지 않자 탈퇴하겠다니, 만약 본인 카페였다면 상대방을 강퇴시켰을 분이군요. 그동안 좋은 연재글을 올려주셨던 분의 다른 모습을 보게된 점에 대하여 저역시 매우 화가 나는군요. 이제껏 카페가 10년을 유지하면서 수많은 격렬한 논쟁이 있어왔지만 감정이 상한다고, 자신의 의견과 다르다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야스페르츠님 선택이 너무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내용에 대해서도 몇마디 하지면, 조공이나 책봉이라는 사실 자체가 아예 없었다고 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실이 어떤 의미를 갖느냐를 해석하자는 것입니다. 조공과 책봉이라는 사실이 고구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말하지 않고 단순히 조공을 보내고 책봉을 받았다고 한다면 고구려는 북위의 상하위계질서에 편입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는 군사대치사건, 예실불사건, 거란문제 등을 보았을 때에 본래 의미의 책봉관계로 설정할 수 없음은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따라서 조공과 책봉의 실질적 의미를 해석해야 하고 따라서 단순히 책봉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스페르츠님은 역사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한자번역에서 그치고 있다고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글루 환까의 어글리한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환빠를 깐다고 하지만 남들과 몇 마디 말을 섞고는 "저 놈이 어떤 성향인지 알겠다. 말 안해도 알겠다"하며 대화 자체를 거부하거나 하더라도 이죽거리면서 뒷담화를 까지요. 그래서 본인도 되도록이면 이글루 환까들과는 말을 섞지 않습니다.
저는 야스페르츠 님을 그렇게 나쁘게 보지는 않습니다만 그 분이 이번 토론 이후 이글루스에서 뒷말을 하는 모습은 별로 좋아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상대방에 대한 주장을 잘 들어보려고 해야 하는데 무조건 약간 핀트에 어긋난단 이유로 이 카페에서 발을 떼는 모습은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이글루스에 계신 분들이 거의 그렇더군요. 나중에는 인신공격과 신상털이도 서슴치 않는 모습을 보이더군요.
다른 것은 몰라도 이글루스 환까의 폐단은 생각보다 심각해보입니다.
야스페르츠님, "선생님의 주장이 가진 놀라운 독선과 아집을 참을 수가 없었"다고 했는데, 조금 다르게 볼 여지가 있습니다.
어느 학문 분야든 마찬가지인데, 일단 전문가의 수준에 올라서면 자기 나름대로 학문의 대상을 해석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을 가지게 되고, 그런 관점을 바꾸어야만 하는 절실한 필요가 발생하지 않는 한 그냥 그 상태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그 동안 세운 체계와 앞으로 세워 나가려고 하는 체계가 바로 그 관점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문가에게 있어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관점을 가지고 그 학문의 대상에 대한 체계를 세워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독선과 아집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학문의 길이라는 것이 유일한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을 가지고 전문가를 비난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것은 '틀림'(아집과 독선)이 아니라 '다름'(나름대로의 관점)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논리의 일관성이 무너지는 경우, 즉, internal consistency가 성립되지 못하는 경우에는 '틀림'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 주에 중요한 행사(연중 가장 대목인...)가 있어 한 주간 거의 접속을 하지 못했는데, 논쟁이 좀 있었군요. 뒤늦게 몇 자 달기도 겸연쩍은 일이니 한 말씀만 드리자면...
모단님 지적처럼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대상을 봅니다. 상대의 관점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에, 특히 상대 관점 자체에 대단한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지적하고 서로 이야기를 하면 됩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오해한 면이 있음을 깨달을 수도 있고 혹은 상대를 설득할 수도 있습니다.(물론 양자가 모두 '이성적' 이라는 전제 하에!) 그런 일련의 과정을 충분히 거친 뒤에 대화를 통해 자신의 논리가 무너졌음에도 기존 논리를 계속 고수하려는 자라
는 판단이 서면 그 때 대화를 그만두고 더 이상의 논의를 하지 않아도 늦지 않습니다. 제가 토론된 글들을 보기에는 야스페르츠님이 김용만 선생님과 그 정도로 충분히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매우 의문스럽습니다. 상대의 글을 내가 이해할 수 없어 반론을 제기했다면 상대가 그 반론을 재반론하여 기존의 주장을 되끌어안을 수 있는 지 보는 과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데, 야스페르츠님은 <정답> 을 사전에 정해 놓고 그것에 어긋나는 것과는 더 대화할 수 없다는 식의 논리를 펴시는 양 보여 다소 의아합니다.
조공관계와 대등관계에 대해 서로가 갖고 있는 개념정의는 동일한가, 동일하다면 각자의 기준에 따라 현상을 평가하는 논리들 중 누구의 것이 더 타당한가를 따져서 판단을 하면 될 뿐이 아닌가 합니다. 토론을 보는 제3자는 각 논자가 제시하는 논리적 근거를 좇아 야스페르츠님의 주장에 손을 들 수도 있을 것이고 김용만 선생님의 주장에 손을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중간에 '대화 중지' 를 선언하시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토론이 불가능할 정도의 어떤 일이 있었던 것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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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감입니다.
일단 토론을 떠나서, 야스페르츠님께 한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저는 소위 환빠/환까 문제에서 환까들이 환빠의 외곬적인 측면을 공격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환까측에게서도 같은 측면을 보아왔는데, 이번 야스페르츠님의 자세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미주가효님의 지적처럼, 본인이 생각하는 사고의 틀이 정답이라고 가정한 채 타인의 사고를 재단하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님이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저는 님의 사고가 중국측 기록의 조공-책봉의례에 얽매인 참 답답한 사고라고 한 마디로 재단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 글에서 제가 그렇게 한 마디로 비하해서 이야기하던가요?
카페를 떠나든 어찌하든 본인의 마음이지만, 제가 보기에 님께서는 토론의 자세부터 바꾸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조공-책봉이라는 문제에 대해 중국측에서 규정한 그 의례에 얽매여서 해석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 별도로 짤막하게 댓글을 써보겠습니다. 고구려를 비롯한 한국의 역대 국가들은 거의 대부분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조공-책봉체제의 틀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다분히 있습니다. 그런데 조공-책봉관계라는 것은 초원 유목국가와의 관계나, 동남아 버마(현 미얀마) 등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중국측의 규정과 대단히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 야스페르츠님은 유연이 북연에 사절을 보낸 것도 조공체제의 단면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오히려 저 기록은 유연측 입장에서 해석하면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북연
과 친밀관계를 맺으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일종의 결혼동맹을 요청한 것인 셈인데, 이런 문제를 두고 유연이 북연에 조공을 바쳤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한다면 오히려 심각하게 잘못된 해석이라는 겁니다(더구나 유목민들은 정주민인 중국인들과 세계관이 매우 달랐기 때문에 중국식의 조공체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을 공산이 큼). 예컨대 이와 비슷한 양상이 후대 명-동서몽골(타타르, 오이라트)에서도 나타나는데, 명은 일본 정도를 제외하고는 주변국가들에 대해 일괄적으로 조공무역을 취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몽골은 오히려 명나라에 더 많은 물품을 요구하는데, 이런 몽골의 태도가 명에 대해 조공국이라는 인식을 스스로 갖고 있기 때
문이라고 볼 여지는 없습니다. 그저 몽골인들에게 명나라는 속된 말로 '삥뜯을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더구나 동남아의 버마나 유럽국가들과의 관계에서도 중국은 조공이라고 기록하지만, 정작 당사국들은 전혀 조공으로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이런데다 한국사 내에서도 제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고려시대의 국제관계 등등 시대에 따라 살펴보면 조공-책봉체제는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사실 장문의 글을 써야 하지만, 요즘 시간이 허락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댓글로 남겨봅니다.
환까의 어글리한 모습..정답이네요. 천랑성주님이 핀트를 제대로 잡으셨네요. 이글루스의 환까들은 공신력있는 정도의 주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에 걸맞는 자세나 인격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거든요. 그냥 심심풀이로 역사를 공부하는 정도가 아닌 외길로 연구하시는 학자분에게 환빠들을 평가하는 잣대를 기준으로 접근하는것이 기본자세를 가지고 있는지 의심이 됩니다. 비주류학자들까지 싸잡아서 환빠로 접근하는 점마들 사고방식은 정말 밥맛 떨어집니다.
저건 환까의 어글리한 모습 정도가 아니라, 그 인간이 그토록 비판하던 풍Q나 환국신민들이 따로 없더군요. 자기랑 다른 의견을 틀린 의견, 다른 사람을 악당 미친 사람으로 몰아가는 모양새가 딱 그 짝입니다. 싸우면 닮는다더니(...) 특히 풍Q가 잘 저지르는 커뮤니티에서 패배하고 자기 블로그에서 정신 승리한답시고 자기 이글루에 자기 유리한 글만 싸지른 글들을 보니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역겹기 짝이 없더군요. 어찌 사람 정신이 저렇게 편협하고 독선적인지 모르겠네요. 정말 하는 짓이 환빠들을 쏙 빼닮았네요-_-
신농님, 댓글 수 조정해주시든지 아니면 별도의 답글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