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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야스페르츠님의 글을 읽다가,
‘중국은 중국, 고구려는 오랑캐’ 라는 문장을 보고 너무 놀라서, 간략한 댓글을 달았는데,
여기에 또 말이 붙고 붙어서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인터넷에 쓴 글이라서,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글을 썼더니, 소설이네, 심리학자냐 라는 말까지
나온 것을 보고, 화도 났지만, 글을 읽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글을 덧붙이는 것을 보니, 그냥 둘 수는 없겠다 싶습니다.
나는 야스페르츠님이 중국이란 가공의 괴물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이 문제에 대한 댓글을 달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비판을 하니, 돌아온 것이 ‘고구려가 제국이라는 전제를 깔아 놓고 모든 사료를 재단하느냐’는 반발이었습니다. 이것은 너무 어처구니없는 말이어서, 좀 기분이 상했습니다.
하지만 차분히 글을 써보지요.
1. 우선 야스페르츠님이 자신있게 북연이 고구려에 속국이 아니라고 한 원래 문장을 보겠습니다.
이 문장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高麗王璉遣使勞之曰:“龍城王馮君,愛適野次,士馬勞乎?”弘慚怒,稱制讓之. 高麗處之平郭,尋徙北豐. 弘素侮高麗,政刑賞罰,猶如其國. 高麗乃奪其侍人,取其太子王仁爲質. 弘怨高麗,遣使來上表求迎,上遣使者王白駒等迎之,並令高麗資遣. 高麗王不欲使弘南來,遣將孫漱ㆍ高仇等殺弘於北豐,並其子孫十餘人,諡弘曰昭成皇帝. - 자치통감
이 문장에서 야스페르츠님이 강조한 것은 칭제양지, 풍홍의 시호가 소성황제라는 것입니다.
‘稱制讓之’는 풍홍이 고구려에서 자신에 대한 너무 야박하기 때문에,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우면서도 분노해서 “법도를 들먹이여 고구려에게 화를 내었다.” 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야스페르츠님은 이를 풍홍이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스스로가 상전이라고 생각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고 했습니다.
( 칭제라는 뜻은 “제서(制書)라고 일컫는 것. 제서는 천자의 조칙으로 태황태후, 황태자의 명령도 제라고 했음. 또는 제서를 사칭하는 경우를 말함.”이며, 이에 대한 용례는 : 임금이 어리고 약하여 국가의 사무를 듣고 처리하지 못하므로 태후가 임금의 명령을 칭하며 군국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결재하며 다스렸다. ; 王幼弱 不能聽決機務 太后稱制 凡軍國大小事 (네이버 사전 참고) )
칭제양지만으로, 풍홍이 고구려보다 스스로를 상전이라고 생각한 것일까요? 여기서 법도는 국제적 관례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풍홍 스스로가 황제를 내세울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관례상 이렇게 야박하게 대우할 수 없다고 화를 낸 것이라고 보아야지, 풍홍이 자신을 고구려왕보다 상전이 황제임을 내세워 고구려를 꾸짖었다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단어의 해석은 분명 선입견에 의해 좌우될 소지가 많습니다. 그래서 전후 상황을 따져서 합리적 추론을 통해 그 의미를 해석해야 합니다. 야스페르츠님은 스스로 내린 결론에 맞추기 위해 칭제라는 단어만으로 북연왕이 고구려보다 상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볼수가 없습니다.
(지배선, [중세 중국사 연구], 411쪽에서는 ‘(풍홍이 고구려왕이) 제를 칭한다 하여, 이를 나무랐다.’ 고 해석합니다. 이런 해석도 있지만, 나는 이 해석에는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
또한 “풍홍이 고구려에 와서 깽판을 치는데도 불구하고, 장수왕이 그를 쉽사리 제거하지 못했다”고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결론에 따른 소설입니다. 아츠페르츠님의 내게 한 말을 그대로 한다면, “제거하지 못했던 것이다.”로 해야 함에도, “했다.”로 단정하고 있습니다.
장수태왕의 입장에서 그를 쉽사리 제거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용하기 위해 놔둔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풍홍이 불만을 토로했다고 해서, 그에 대한 대접을 더 잘해준 것이 아니었고, 계속해서 박대를 했습니다. 이를 쉽게 제거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나, 고구려가 그를 이용하기 위해 내두었다고 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해석의 문제입니다. 전후상황에 대한 충분한 기록이 없는 고대사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해석해놓고, 그와 다른 해석은 소설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諡弘曰昭成皇帝 에 대한 아츠페르츠님의 해석은 정말 무리가 따릅니다.
“게다가 장수왕은 풍홍을 살해한 뒤에도 그에게 시호를 올려 예우해주었다. 그 시호라는 것이 무려 소성황제(昭成皇帝)... 황제다. 과연 이런 풍홍의 행적들이 속국, 그것도 멸망한 뒤 망명한 속국의 왕이 할 수 있는 것들일까? 누가 보아도 풍홍은 고구려의 상전으로 행세했고 고구려 역시 은근히 조롱하기는 했을지언정 그것을 대놓고 무시하지는 못했다.”
풍홍에 대한 시호를 올려 준 것은 장수태왕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삼국사기』는 『자치통감』에서 위의 문장을 인용해 오면서, 유독 7자만 빼버렸습니다. 그것은 장수왕이 풍홍의 시호를 준 것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호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자면, 꽤 긴데, 고구려에서 諡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장수왕이 죽은 후, 북위가 강(康)이라고 준 것이 가장 빠르며,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임금에 대한 시호 내용이 없습니다.
시호법이 아직 고구려에 정착되지도 않았는데, 소성황제라는 것을 고구려가 풍홍에게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소성황제는 송나라가 주었거나, 또는 풍홍의 부하들이 올린 자칭한 시호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입니다.
後二年 為句麗所殺 偽諡昭成皇帝 自馮跋太平元年嵗在乙酉 至弘滅亡之嵗丙子 二十八載 - 별본십육국춘추
이 기록에서는 풍홍에게 고구려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거짓 시호를 소성황제라고 한다고 하여, 풍홍의 부하들이 올린 자칭한 시호라는 해석에 무게를 두게 합니다.
무엇보다 고구려에서 풍홍에게 시호를 내려 주었다면, 그것을 중국측 기록에서 과연 기록했을까요? 시호는 주는 것은 자신들이 타국에게 내려주는 것은 있어도, 중국측 기록에서 중국범위에 포함시킨 북위의 임금이 고구려에서 받은 시호를 그대로 기록했을지 의문입니다.
또한 설령 고구려에서 풍홍에게 시호를 준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고구려보다 상전이란 의미로 해석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고구려의 태왕 역시 황제와 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석이 다를 수 있는 것들을 일방적으로 해석해놓고, 북연이 명분상으로 고구려보다 상전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선입견의 결과라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아츠페르츠님의 글을 동북공정에 참여한 중국인의 글인 것으로 일시 착각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해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당시 양국의 국력을 비교하고, 당시 정황에 맞게 해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북연은 고구려에게 어떤 속국인가?
현재까지 고구려가 북연을 속국으로 인정했다고 하는 핵심적인 근거는
아츠페르츠 님이 말한 것처럼 “종족의 禮을 베풀었다. 且敘宗族입니다.
서영수 선생님도 이 문장을 놓고, 고구려가 종주국, 북연에 제후국이라고 보셨던 것이고, 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구려는 북연에 대해 제후국이라고 인식한 것에 대해서 이것 이외에 직접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는 북연 멸망 때, 고구려가 군대를 파견한 것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것 외에 방증 사료로 풍발의 동생 풍비가 고구려에 414년까지 인질처럼 머물렀다는 것(본래 북연 건국 전에 망명, 북연 건국 이후까지 머뭄) 정도가 앞서 이야기되었습니다.
또한 풍발이 아닌, 모용운이 왕이 되고, 그가 본래 고씨 성이라고 밝힌 것은 고구려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후연귀족들의 나름의 고육책이라고 보는 정도가 있습니다.
이것 외에 방증사료는 409년 고운이 이반과 도인이란 자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풍발(고운을 죽인 배후로 지목되고 있지만)이 고운의 시신으로 동궁으로 옮기고, 시호를 혜의황제라고 하는 등, 고운에 대한 예를 갖춥니다. 그것은 고운이 고구려 출신이기 때문에, 쉽게 무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풍발은 국호를 바꾸지도 않고, 외교 정책도 바꾸지 않습니다. 게다가 풍발 일족이 고구려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즉 고구려와 고운시절 북위와의 관계가 풍발의 등장으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 뿐입니다. 이 정도로 북연을 고구려의 속국으로 보느냐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속국의 개념에 대한 이해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가 있다고 봅니다. 종서지간의 해석은 분명하지만, 그 이후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르게 해석할 소지는 충분합니다. 야스페르츠님은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고 보는 등, 내정간섭을 하는 강력한 종속체제를 염두에 두고, 북연은 고구려의 속국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북연은 고구려의 속국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의례상 문제로 보아서, 북연을 고구려의 속국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속국의 문제는 국력의 문제, 시기상의 문제로 그 영향력의 행사 강도가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멸망시기에 대한 문제는 야스페르츠님과 나의 해석이 너무 다르니 다시 언급해보겠습니다.
3. 북연의 멸망시 고구려의 태도에 대해
야스페르츠님은 고구려가 속국인 북연이 북위에게 멸망하고 있는데, 북위에게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다고 해석했습니다. 이 부분이 사료를 맹목적으로 해석하는 부분인데,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구려와 북연과의 관계는 북연의 입장을 그렇게 옹호하더니, 북위와의 관계에서는 전혀 고구려의 입장을 염두에 두지 않는군요.
436년 북위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낸 것은 물론 북위가 북연을 도와주지 말라고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어떻게 행동을 했지요. 북연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북위의 군대를 격파했다고도 생각됩니다.(고필과 아청 열전의 기록을 통해 볼 때, 고필이 술에 취해 고구려군을 추격하지 못했다거나, 술에 취하지도 않은 총사령관인 아청이 무기력하게 고구려군의 행동을 지켜본 것을 통해 볼 때, 북위군이 고구려 2만 군대에게 패배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는 지배선 선생의 주장)
북위가 고구려에 관작을 제수했다는 것은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관작을 제수 받은 국가가 군대를 파견해 격돌했다는 것은, 관작 제수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고구려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아쉽기는 하지만, 고구려의 입장에서 북위는 단지 적국에 해당되었을 뿐입니다.
북연이 멸망시키려고 할 때, 왜 북위는 고구려에게 그 사실을 알렸던 까닭도, 고구려가 강성했기 때문에 보낸 것입니다. 또한 북연 역시 의지할 국가가 고구려뿐이기 때문에, 435년 11월 북연은 尙書 양이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한 것입니다.
조선사의 경우, 삼포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지는 않지요. 조선의 경우 멸망의 위기에 처한 임진왜란 때 명에게 원병을 청합니다. 명과 조선의 관계, 고구려와 북연의 관계는 서로 비교해 볼만 합니다. 명나라가 조선을 구할 때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를 취했나요? 전혀 아니었습니다. 마치 못해 조선에서 싸워달라고 요청하니까, 억지로 개입했던 것입니다. 반대로 고구려는 북연의 임금과 백성까지 다 데려옵니다. 명나라 보다 더 강력하게 대응을 합니다. 고구려가 북연을 대하는 태도는 명나라가 조선을 대하는 태도보다 훨씬 적극적이었습니다. 고구려에게 북연은 북위에게 그냥 양보할 대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고구려는 북위와 30년간 적대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생겼을 때는 공격도 합니다. 고구려가 북위의 관계를 조공책봉기록만으로 볼 수 없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야스페르츠님이 생각하는 아주 강력한 속국의 개념을 정해놓고, 북연은 고구려의 속국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북연이 고구려의 속국이기는커녕, 북연이 중국의 권위를 가졌기에 고구려보다 상국이었다는 주장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야스페르츠님에게 반론을 제기하게 된 것은 중국은 중국이고, 고구려는 이민족이기 때문에, 고구려가 중국의 권위를 무시할 수 없었다고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 나머지는 다음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나의 댓글에 대한 반론 자체가 너무 이상하게 나왔습니다.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에 대한 일반론에서 사료상에 나온 조공 책봉관계를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야스페르츠의 주장에 대한 반박에 대해 나의 댓글이 이어졌던 것입니다.
남아있는 사료를 어찌 해석하느냐는 문제가 고대사에서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이미 중국은 중국이고, 고구려는 이민족이라는 해석을 하는 분의 해석에는 이미 선입견이 반영되어 있던 것입니다.
지금 남아있는 사료가 누가 남겼고, 어떤 입장에서 남겼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고구려는 조공 책봉을 받은 국가이니, 무슨 제국이냐는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역사를 그 시대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의지를 포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대사에서는 정황증거가 대단히 중요하기도 합니다. 실제 사실을 더 깊이 알 수 있는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황을 제대로 구성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사료가 아니라, 여러 사료들을 보아가며 제대로 구성을 해야 합니다. 조공 책봉 기사만이 아니라, 고구려가 저들과 전쟁을 벌인 기록, 금석문 등도 꼼꼼하게 살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를 무시하고, 임의로 사료를 해석하면 역사를 잘못 이해할 소지가 더 커질 것입니다.
괜히 말이 길어졌습니다. 쓰다 보니 너무 길게 나갔군요. 어차피 고구려와 북연 관계 등은 곧 나올 저의 책에서 다시 자세히 언급할 것이고, 그때 사람들의 평가를 받게 되겠지요. 이만 합니다.
첫댓글 제가 쓸데없이 말을 붙여서 되려 두분간에 오해만 더 중첩시킨 느낌입니다. 지금 올리신 글을 보니 제가 김용만 선생님 생각을 오독한 부분이 있음을 알겠군요. 죄송합니다. 어쩌면 야스페르츠님 글에도 그런 오독을 해서 이상한 말을 덧붙인게 없진 않다 말할 순 없겠습니다. 다만 아래에 같은 시간대에 야스페르츠님이 올리셨던 일반 사신과 조공사신의 구분 예시는 고구려 사례에서는 어떻게 봐야할지 아는 것이 없어 여쭤봅니다.
조공이라는 표현이 중요한가요. 양국의 위상에 비추어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정기적 외교교류에서 선물을 지참한 사신단을 위나라가 조공사신이라고 생각하면 조공사신단이 되는것 아닙니까. 만약 고구려 스스로의 기록이 남아 있어 북위에서 선물을 지참한 사신단이 방문을 했다면 무엇이라 기록했을까요. 후에 고구려가 고수전쟁의 전리품을 왜에 선물로 보내는데 일본서기는 그것을 공물을 바침이라고 기록합니다. 결국 기록을 남긴 물건을 받는 국가의 입맛대로라는게 아니겠습니까. 한편 '바치는 양이 늘어나고 보답받는 양도 늘었다'고 했는데 결국은 양국의 교류 이야기입니다.
고구려와 북연의 관계에 있어 누가 상전이라고 보든 상관없이, '속국' 관계가 성립하느냐의 여부는 '속국'에 대한 정의와 그런 정의를 뒷받침하는 타당한 논리를 가진 주장인지에 달려 있기 때문에, '누구'의 주장이 타당한지가 아니라 '각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탄탄한 논리가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툼이 일어날 여지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지요.
어쨋든, 김용만 선생의 주장 중의 일부에 관련해서 두 가지 정도 생각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관작을 제수 받은 국가가 군대를 파견해 격돌했다는 것은, 관작 제수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는데, 문무왕의 신라가 당나라와 전쟁을 벌인 것을
두고도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신라는 당과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도 조공을 한 적이 있다고 기억을 합니다.
둘째, "풍발의 동생 풍비가 고구려에 414년까지 인질처럼 머물렀다는 것"을 북연이 고구려의 속국이라는 방증으로 보는 데, 백제의 왕자(심지어 뱃속의 아기까지)가 일본에 인질로 머무른 기록이 있으며 백제의 위기 상황에서 일본이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지의 문제입니다.
국가 사이의 관계를 항상 도식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유사 사건들을 서로 별개의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중요한 사례를 지적했군요. 이런 사례들이 다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황증거를 더 자세히 살피고, 어떤 관점에서 해석해야 하는냐가 중요합니다. 신라의 경우는 당나라에 처음 협조하다가, 당이 신라에 삼키려고 하자, 화전양면책을 구사하면서 전쟁을 하는 경우인데, 고구려와 북위와의 관계와 비교할 때 처한 상황이 달랐습니다. 백제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백제는 도리어 고대 왜국의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북연이 고구려 정치에 영향을 미친 것과는 다름니다. 이와 반대되는 경우도 물론 많습니다. 따라서 역사를 도식화시키거나, 일부 사료만으로 전체를 해석해서는 안되고, 전체적인 상황을 깊이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중국 측 사료는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판적으로 접근하든 글자 그대로 접근하든 누가 더 합리적이고 개연성이 높으냐에 달려있지 않을까요? 일례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하는 국내 주류 사학계의 이론은 야스페르츠님 말대로면 소설일 뿐일 겁니다.
푸념입니다만 중국 측의 관념속에서 형성된 조공`책봉관이 우리나라 고대사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생각이 다시금 듭니다^^; 선생님 글 잘보고 갑니다. 최근에 백제의 450년 풍야부의 대송파견을 관심있게 보고 있던지라 더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5세기 중반의 북연 및 북연출신 인물들의 활동은 국제정세 파악에 빼놓아서는 안될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