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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3일 연중 제14주일
제1독서 : 이사 66,10-14ㄷ
제2독서 : 갈라 6,14-18
복 음 : 루카 10,1-12.17-20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10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11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7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1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20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토마스 길로비치라는 심리학자가 한 가지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한 실험 참가자에게 오래전에 큰 인기를 가지고 있던
가수의 얼굴이 크게 들어가 있는 티셔츠를 입게 한 뒤,
다수의 다른 참가자들이 모여 있는 방 안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티셔츠 입은 참가자에게 다른 참가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지 예측해 보라고 했지요.
그는 사람들이 옛날 가수의 얼굴이 크게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자신을
이상하게 볼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그의 티셔츠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기억하고 있었던 사람은
실험자 중에 10%도 되지 않았습니다.
타인이 나에 대해 관심을 두고 바라볼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사람들은 내게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옷을 입었는지, 머리 스타일이 어떤지, 피부가 어떤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신경 쓰는 사람은 높이 잡아도 1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운 말과 행동을 했었어도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내게 그렇게 큰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지 다른 사람의 기준과 잣대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약한 ‘나’가 늘 문제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경 써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뿐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다 세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야지,
남들의 시선 때문에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 아닌,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
지금보다 훨씬 위험과 고난이 따르는 길입니다.
그런데 주의 사항이 조금 이상합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편안한 여행을 생각해서는 안 되고, 입고 먹는 것 모두 하느님께 맡기고
오로지 하느님 나라 전파에만 마음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는 것도
인사하느라 긴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교 사명을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른 것을 생각하고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 말씀을 철저하게 따랐던 제자들은 어떠했을까요?
집 떠나면 고생이라면서, 너무 힘들다고 불평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마귀들까지 복종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으며, 동시에 큰 기쁨을 갖게 됩니다.
남들의 시선, 세상의 관점에 신경 쓰고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큰 기쁨을 얻게 됩니다.
평화의 표징
류해욱 요셉 신부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게 됨을 깨닫게 하소서.
오늘 제1 독서와 제2 독서와 복음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평화입니다.
제1 독서에서는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라고 하며,
제2 독서에서는
“이 법칙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자비가 내리기를 빕니다.”이며,
복음은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하고 말하여라” 입니다.
평화라고 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까?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가 아닙니까?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떠오르는 분이
굉장히 평화를 사랑하고 거기 가까이 가 계신 분입니다.
모두 다 잘 아시다시피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과 평화의 상징이신 분이지요.
그분은 가난과 겸손의 삶을 살며 평화를 추구하신 분으로서,
제도화된 종교의 권력과는 가장 멀리 떨어져 살아가셨던 분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가장 그리스도를 닮았다고 여겨지며
가장 특별한 사랑을 받는 분으로 “제2의 그리스도”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분입니다.
그분이 행려자와 같이 남루한 모습으로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을 처음 알현하였을 때,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그에게 수도회 인준을 거부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꿈속에서 당시 교황청의 권위를 대표하던
라테라노 성전의 한쪽이 무너지고 있는데,
바로 그 거지 같은 가난한 모습의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어깨로 무너져가는 그 교회를 지탱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교황은 즉시 프란치스꼬를 부르고, 그의 수도회를 인준하였다고 전해지지요.
중세 진정한 영적인 모습으로의 교회의 참된 모습은 무너져가고 있었지만,
“가난과 겸손”의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가까이서 따르며
세상에서 소외되고 버려진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았던 성 프란치스코의 삶,
그의 평화의 삶은 교회 쇄신의 확고한 은사이며 표징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지금의 교황님이 새 교황님이 되셨을 때,
즉위명을 프란치스꼬로 했을 때, 바로 성 프란치스꼬의 “가난과 겸손”
그리고 평화와 일치의 마음으로, 의혹과 배척, 불신으로 점철된
위기 속의 교회를 쇄신하고자 하는 새로운 표징이 되리라 확신하며,
특히 세계의 평화와 일치를 이루는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시리라고 기대했습니다.
바로 예수회원인 그가 즉위명을 이냐시오가 아닌 프란치스코로 택한 것에는
단순히 ‘가난’이외에도 깊은 상징직인 의미가 담겨 있다고 봅니다.
바로 여기 “교회 일치”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수많은 수도회 전통 안에서
특별히 라이벌 관계로 인식되는 두 수도회는
교회 내에서 지성[머리]과 의지[가슴]를 각각 대표해 왔다고 볼 수 있지요.
예수회원인 그분이 프란치스코로 택한 것은
교회 안의 모든 분파적 전통을 넘어서 “평화와 일치”의 정신 안에서
새로운 통합과 교회 일치를 추구하는 지향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고 보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평화를 추구하다 보면, 참 반대가 많아요.
그분이 교회 안에 평화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무척 안쓰러워요.
그분은 무엇보다 예수회원입니다.
예수회원의 가장 큰 특징은 융통성입니다.
교황님은 전혀 형식과 격식의 관료적 틀에 갇혀있지 않았던 분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을 실제 삶 안에서 구현해 나가는데,
앞장서 나가고 있던 분으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분은 추기경으로 살면서도 대주교관저가 아니라 작은 아파트에서 살며
전용 자동차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출퇴근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복음적 삶과 평화의 구체적인 징표로 보여지기 때문에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이 시대의 진정한 평화와 일치를 이루는 역할을 하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올해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맞아,
‘하느님 자비가 가져오는 평화’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지난 4월 24일 로마 성 베드로 성당에서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 미사가 봉헌됐습니다.
무릎 통증으로 거동이 불편한 교황님은
이번 미사는 주례하지 않고 제대 앞에 앉아 참례했습니다.
미사는 교황청 새 복음화 촉진평의회 의장 리노 피시켈라 대주교가 주례했습니다.
그날 미사 강론은 교황님이 하셨습니다. 교황님은
“각자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용서를 경험한 순간과
우리를 용서하시는 그분의 자비가 가져다주는 기쁨과 평화를 기억하자”라고
전 세계 교우들에게 당부했습니다. 교황님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용서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기쁨”이라면서
“그 기쁜 기억으로 우리가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자비의 순간과 평화를 항상 기억하며 살아가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교황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세 번 말씀하신 것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교황님은
“예수님께서는 승리를 거둔 압도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 않는다”라고 말씀하면서
“그분은 땅을 뒤흔드는 기적을 행하지 않으시고,
자비의 마음과 따뜻한 표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가 이웃의 상처를 돌아보고
고통받는 이들의 몸과 마음을 보살피게 한다.”라고 하시며
“우리가 이웃의 상처를 돌보고 그 위에 자비의 향유를 붓는다면,
우리 마음속 어둠이 사라지고, 평화와 새 희망이 솟아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이어 교황님은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군중들과 함께 부활 삼종기도를 봉헌했습니다.
교황님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전쟁의 어두움 속에서
그리스도 부활을 맞이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면서
다시 한번 부활절 휴전을 요청했습니다.
대다수의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소속된 정교회는 이날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이했습니다.
교황님은 “오늘 정확히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벌어진 지 두 달이 됐다”라고 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장엄한 축제를 지내는 이 기간에
부활을 울리는 종소리 대신 무기의 폭발음이 들리는 상황이 슬프다”라고 한탄했습니다.
이어 전 세계 지도자들에게
“갈등의 증폭이 아니라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달라”라고 말씀하면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말씀을 따르면
전쟁도 멈출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말씀을 따르면 이 세상에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깊이 묵상하며 희망을 지닙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저는 아버지의 체질과 어머니의 성격을 닮았습니다.
아버지는 혈압이 높았고, 머리카락이 일직 하얗게 되었고, 치아가 좋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판단력이 좋았고, 결단력도 좋았습니다.
어머니는 혈압도 정상이고, 머리카락도 검었고, 치아가 좋았습니다.
어머니는 부드러웠고, 유순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체질과 아버지의 성격을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사제가 되면서 아버지의 판단력과 결단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의 건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의 체질을 닮아서 혈압도 높았고,
머리카락도 하얗게 되었고, 치아도 좋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성격을 닮아서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31년 사제생활을 하면서 아버지의 체질을 닮은 것도,
어머니의 성격을 닮은 것도 모두 감사 할 이라고 생각합니다.
혈압이 높기 때문에 건강에 유의했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가졌습니다. 매일 걷는 습관을 가졌습니다.
아직도 혈압은 높은 편이지만 건강에 큰 무리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일찍부터 염색을 했지만 코로나를 겪으면서 하얀 머리카락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염색하는 번거로움도 없고, 하얀 머리카락도 나름 좋았습니다.
치아도 치과에 자주 다니고, 신경을 썼기 때문에 아직도 큰 이상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체질을 바꿀 수 없다면 잘 관리하는 것도 삶의 지혜입니다.
어머니의 성격을 닮은 것이 본당 생활에 도움이 되는 때도 많았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가 다양하듯이
본당에서 지내면 다양한 은사를 지닌 분들이 있습니다.
결단력과 추진력으로 끌고 가는 것도 좋겠지만
부드러움과 유순함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좋았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십자가는 세상의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십자가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뜻하지 않는 사고로 장애를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있습니다.
원하는 것이 채워지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과의 만남도 있습니다.
나의 뜻과 나의 행동이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성공하고 싶은데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데 가난한 경우도 있습니다.
좋은 직장을 가지고 싶은데 실직한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의 십자가는 원하지 않는 고통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는 모두 십자가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지고 가신 십자가입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이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연민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고난의 잔을 기꺼이 마시려는 순명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건강보다 질병을 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은 것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에게 이러한 십자가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구원의 십자가였습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지혜의 십자가였습니다.
주변을 보면 구원의 십자가를 힘차게 지고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웃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십자가라는 시에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나에게도 십자가가 주어진다면
꽃처럼 드러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아래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이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평화를 빌어주고,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여라.”
양들이 이리 떼 가운데 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숨을 바쳐야 할지 모릅니다.
병자를 고쳐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 세상이 주는 기쁨, 세상이 주는 행복을 포기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 명예, 권력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올 때는 손을 움켜쥐고 나온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손을 편다고 합니다.
내가 움켜쥐려 했던 것들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하면서
내가 놓아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한 주간을 보냈으면 합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지상에서 천국의 삶
-꿈꾸라, 사랑하라, 선포하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 마음을 다스리게 하여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여라.”(콜로3,15.16)
성인답게 살고 있습니까? 지상에서 천국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런 성인답게 살고 싶은, 지상에서 천국의 삶을 살고 싶은
깨끗한 욕심, 청정욕은 얼마든 좋습니다. 하느님께서도 기뻐하십니다.
각자 고유의 참 나의 성인이 되라고, 지상에서 천국의 삶을 살라고 불림 받은 우리들입니다.
저는 요즘 이런 분들을 만났습니다. 먼저 우리 교황 프란치스코입니다.
어제 읽은 인터뷰 기사를 일부 인용합니다.
기자는 교황이란 명칭을 부르지 않고 그냥 프란치스라 불렀습니다.
-“프란치스, 당신은 보통 우리 시대의 세 가지 악을
자기도취narcissism, 허무감despondency, 염세주의pessimism로 묘사한다.
이들과 우리는 어떻게 싸울 수 있나?”
나는 빛나는 미소로 가득한 얼굴의 교황에게 물었다.
“실제로 이 셋과 싸우는 데 도움이 되는 게 하나 있으니 유머 감각이다.
나는 40년 이상을 날마다 해온 기도가
성 토마스 모어의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아름다운 기도이다.
‘오, 주님, 저에게 어느 것이든 잘 소화하게 해 주십시오.
저에게 유머 감각을 주십시오. 저에게 웃음을 일으킬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해 주십시오.’
유머 감각은 모든 것을 조망할 수 있게 배치하며,
우리에게 너무나 좋고, 비관하거나 비탄하는 정신에는 최고의 처방이다.”-
바쁘거나 힘들기로 하면 프란치스코 교황님보다 더한 분 없을 것이나,
제가 볼 때 지상에서 천국을 살고 계신 살아 있는 성인입니다.
어제부터 배 열매 봉지 싸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일하는 어머니들이 흡사 하늘에 별들을 다는 주님의 전사처럼 느껴져
예전에 느꼈던 생각이 떠올라 소감을 시로 적었습니다.
“하늘에 별들을 다는구나
사다리 부지런히 오르내리며
배나무 가지 배 열매들 마다
하얀 봉지를 쌀 때마다
하늘에 떠오르는 하얀 별들이다.
낮에도 환히 떠오른 하얀 별들
하늘에 별들을 다는 어머니들이다.
몸은 고단해도
얼굴은, 눈은 별처럼 빛나는
배 봉지를 싸는 ‘주님의 전사’인 어머니들이다.”
자매보다 빛나는 명칭인 ‘어머니’라 부릅니다.
배 봉지를 싸며 하늘에 하얀 별들을 다는 어머니들 역시
저는 과감하게, 주저함 없이 지상에서 천국을 사는 성녀들이라 부릅니다.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고, 지상에서 천국을 살라고 불림을 받고 있습니다.
죽어서 성인이 아니라, 죽어서 천국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살아서 성인으로,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그 방법을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꿈꾸라!”입니다.
꿈이, 희망이, 비전이 있어야 삽니다.
예언자나 성인들은 예외 없이 꿈의 사람, 희망의 사람,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희망 있는 곳이 천국이요, 희망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꿈이라 다 참 꿈이 아니며 희망이라 다 참 희망이 아니며 비전이라 다 참 비전이 아닙니다.
궁극의 꿈이나 희망은, 비전은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하느님이요 하늘나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서 끝부분으로 예루살렘의 구원이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우리 궁극의 꿈과 희망 비전을 상징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선사 되는 주님의 고마운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그와 함께 기뻐하고 그를 두고 즐거워 하여라.
너희가 그 위로의 품에서, 젖을 빨아 배부르리라.
너희가 그 영광스러운 가슴에서, 젖을 먹어 흡족 해 하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
너희 마음은 기뻐하고, 너희 뼈마디들은 새 풀처럼 싱싱해지리라.”
얼마나 고무적이고 위로와 힘이 되는지요!
이런 예루살렘의 꿈을, 희망을, 비전을 고스란히 앞당겨 체험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도대체 미사 전례가 아니라면 어디서 예루살렘 하느님 나라의 체험을 할 수 있겠는지요.
둘째, “사랑하라!”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 예루살렘입니다.
하늘나라 꿈의 실현이 바로 우리가 이 거룩한 미사 중 모시어 하나 되는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 역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첫째로 강조하셨습니다.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성규4,21)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안에서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라.”(성규4,72)
“그리스도보다 더 아무것도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성규72,11-12)
무엇보다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빛나는 성인으로 사신 분이
바로 오늘 제2독서 갈라티아서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된 바오로 역시 새 예루살렘 꿈의 실현입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여러분에게 평화와 자비가 내리기를 빕니다.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 되어 사는 우리들 역시 바오로처럼
하느님께 속한 새 창조물인 예루살렘입니다.
하늘나라 꿈의 실현인 새 예루살렘이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새 창조물이 되어 살 때 우리 삶의 자리가 하늘나라 예루살렘입니다.
잘 들여다보면 우리 역시 각자 나름대로 예수님의 낙인을 몸에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열렬히 하늘의 예루살렘,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 시간 생 창조물로 새롭게 태어나는 우리들 입니다.
셋째, “선포하라!”입니다.
“꿈꾸라”, 1/3일뿐이라 불완전합니다.
이에 더하여 “사랑하라!”실천하면 2/3가 되고,
마침내 “선포하라!”가 추가되면 3/3
완전한 하느님 나라, 예루살렘의 실현입니다.
지상에서 천국의 삶을 사는 성인들이 됩니다.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자 존재이유입니다.
꿈꾸고 사랑하는 관상만으로는 반쪽입니다.
안으로는 관상의 제자, 밖으로는 복음 선포의 사도로, 선교사로 사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에 충실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제자들을 파견하신 똑같은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각자 삶의 자리가 복음 선포의 장이 됩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 청할 것 없이
우리 하나하나 주님의 일꾼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병자들을 고쳐 주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우리의 현재 실상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복음입니다.
이렇게 최소한의 소유로 평화를 선사하며
이리떼 세상에서 자유롭게 ‘존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주님이자 스승이요 도반인 그리스도님과 함께 하는
충만한 삶인데 무엇이 아쉽고 두렵겠는지요.
다음 말씀이 우리에게는 결정적 구원의 말씀입니다.
용기백배하여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복음 선포의 삶을 살게 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예나 이제나 똑같이 살아 계신 주님이십니다.
옛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 되어 있는, 하느님께 속한 새 창조물입니다.
바로 하늘에 기록된 우리 이름을 새롭게 확인하는 이 거룩한 미사 시간입니다.
지상에서 천국의 삶을, 성인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다음 당부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1. 궁극의 꿈이자 희망인 하늘나라 예루살렘을 꿈꾸며 앞당겨 사십시오.
2. 새 예루살렘의 실현이 파스카의 그리스도 예수님을 한결같이, 열렬히 사랑하십시오.
3. 내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의 일꾼으로 살아가십시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시편34,9). 아멘.
일흔 두 제자의 파견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은 기쁨이라는 것이 고통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귀양살이 후에 예루살렘의 중흥에 대한
이사야 예언자의 기쁜 소식을 듣게 되고,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구원의 사명을 위해 파견하시지만 우선 기쁨보다는 고통을 예고하신다.
마치 “이리떼 가운데 있는 어린양”(3절)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선교사명을 마쳤을 때 기쁨의 환호성이 나오고,
예수께서는 흥분한 제자들을 진정시키신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20절).
아마 그 기쁨은 복음이 전하는 사람에게나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도
너무나 어렵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발과 낙담과 위기 그리고 회피와 실망의 감정이 일게 된다.
“그때에 주님께서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보내셨다.”(1절).
예수께서는 복음을 전하시기 위하여 열두제자를 파견하셨다고 모든 복음에서 전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열두제자들만이 아니라,
더 많은 협력자와 소실전달자들이 있어야 함을 보여주신다.
72라는 숫자는 전승에 의하면 세계에 흩어진
이방인들의 나라 숫자가 그만큼 된다고 한다(창세 10장 참조).
바로 구원의 보편성을 말하는 것이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2절).
추수는 하느님의 심판을 의미하고 있다(요엘 4,13 참조).
이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종말론적 사업에 당신의 제자들을 결합하시는 모습이다.
즉 주님뿐 아니라 제자들도 종말을 선포한다는 것이다.
이제 제자들은 스승과 같은 사명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도가 필요하다.
추수의 주인이신 하느님만이 그 복음 선포자들을 세워주실 수 있고
필요한 힘으로 무장시켜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선교라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3절).
그를 파견하신 분이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결과는 뻔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안전대책을 마련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철저히 그것을 거절하라고 하신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4절).
그런데 복음 선포의 여정을 걸으며 살아가는데
인간적 도구의 부족은 아무런 두려움을 주지 못한다.
그 복음 선포자들은 이미 가난을 근본적으로 선택하였고
모든 것을 그분께 의탁하기 때문에,
이리떼 가운데서 지켜주실 수 있는 그분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그 누구를 통해서 매일 양식도 마련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7절).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예로 들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보물(사도직)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7-10).
이러한 삶이 진정 다른 사람들에게 평화(shalôm)를 전해줄 수 있다.
이 평화는 하느님 나라의 표지이다.
즉 하느님 나라의 능력과 힘의 표지이며, 인류에게 주는 생명과 쇄신의 표지이다.
루카는 평화를 선교의 목표로 삼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리떼 가운데 어린양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전해야 하기에 평화의 건설자이다.
항상 평화를 기원해주며 순교자의 삶으로 그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제자들은 기쁨에 넘쳐 돌아와 그간의 활동을 스승님께 보고하고 있다.
제자들이 주님께 보고하는 것은 전교 활동의 성공에 대한 자만심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해 악령들까지도 쫓아내시며 보여주신 능력에 대한 기쁨의 표현이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하늘의 영광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신다.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17-20절).
성공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교만해질 수 있는 유혹이 될 수 있다.
사탄을 하늘에서 떨어뜨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시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참조: 이사 14,12; 묵시 12,8).
이렇게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은 오직 공동 이익(1코린 12,7)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그 기쁨은 하느님께 다시 영광을 돌리며
느끼는 더 큰 기쁨이기 때문에 이 기쁨 역시 전교의 영역에 드는 것이다.
교회의 근본적인 사명은 선교이다.
그래서 교회와 일치하고 있는 우리 모든 신앙인은 선교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다.
세례로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는 모두 이리떼 가운데 어린양으로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세를 언제나 견지할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