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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5일 연중 제26주일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제1독서 : 아모 6,1ㄱㄴ.4-7
제2독서 : 1티모 6,11ㄱㄷ-16
복 음 : 루카 16,19-31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침에 뉴스를 보면 나쁜 소식을 많이 보게 됩니다.
세상에 좋은 소식은 전혀 없고 나쁜 소식만 있는 것 같습니다.
계속 보다 보면 침울해지고 화도 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속상하게 하는 뉴스가 주 뉴스로 발표되고,
반면에 좋은 소식은 몇 개 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나쁜 뉴스를 다 마치고서야 잠깐 나올 뿐입니다.
세상에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많아서일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극적인 소식에 눈길을 더 두는 우리이기에, 흔하지 않은 나쁜 일이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적은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이 너무 많기에 맨 뒷자리 그리고 흔한 일이기에
아주 적은 숫자의 좋은 뉴스를 발표하는 것이 아닐까요?
조금만 관심을 두면 우리를 환하게 미소 짓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기의 웃음에서, 사람들의 착한 사랑의 실천에서, 공공장소에서 보이는 배려의 모습에서
우리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짓습니다.
여기에 비 오다가 갑자기 맑아진 하늘에도 큰 기쁨을 얻습니다.
새벽에 벌떡 일어나 개운한 마음으로 새 아침을 맞는 것도 큰 기쁨입니다.
좋은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뉴스거리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온 세상에 나쁜 뉴스로 가득하다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께서도 인정하신 보시니 참 좋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세상에서 좋은 말과 행동으로 더 좋은 세상이 되는데 힘을 보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만을 생각하는 욕심과 이기심 속에서 좋은 세상을 함께 만들지 못합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말씀을 보게 됩니다.
부자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즐기며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에 반해 라자로는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 없어서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었지요.
이 둘이 모두 죽어 하늘 나라에 가서는 입장이 180도 바뀌게 됩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 옆에서 위로받고, 부자는 불길 속에서 고초를 받습니다.
왜 이렇게 입장이 바뀌었을까요? 부자가 악인이고, 라자로는 선인이기 때문일까요?
부자가 자기 형제를 생각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라자로가 했던 선한 행동은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부자가 보였던 자기만 잘 사는 삶이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누리는 것에만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1티모 6,14)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만큼 주님 말씀에 맞춰서 좋은 세상 만들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큰 영광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영성
-중심, 기도, 회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어제 형제와 주고 받은 대화시 저의 재치있는 대답에 만족했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대답이었습니다.
“여기 수도원 개들은 참 순하네요!”
“사랑을 많이 받아서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람은 물론 생명 있는 모두가
사랑받을수록 본연의 자연스럽고 사랑스런 제모습으로 살 수 있습니다.
강의 후 질문하겠다는 분에게 한 답변입니다.
답변할 상황도 아니었고, 직감적으로 질문을 위한 질문이란 예감이 들어
즉시 답하고 형제도 흔쾌히 받아드렸습니다.
“답은 강의록과 기도문에 있습니다. 잘 읽고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새벽, 잠 깨어 방안의 전등불을 켰을 때 방 안이 밝고 따뜻해 참 좋았습니다.
날씨가 약간 쌀쌀해져 방에 불을 넣었기 때문입니다. 새삼 마음의 방을 생각했습니다.
예전 겨울철 피정을 안내했을 때 피정집 방이 밝고 따뜻했을 때 공통적으로 누구나 좋아했습니다.
방은 따뜻하고 창도 빛이 잘 들어와 밝아야 하듯 마음의 방도 그래야 함을 오늘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과연 여러분 마음의 방은 밝고 따뜻한지요?
과연 마음의 방은 마음의 창문을 통해 은총의 빛이 잘 들어오고 있으며,
마음의 방은 주님의 사랑으로 따뜻한지요?
이래서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영성”이 절실합니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갈 때
각자의 마음의 방은 그리스도의 빛이 환히 밝힐 것이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의 방을 따뜻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토요일은 모처럼 참 분주한 날이었습니다.
오전에는 서울대교구 하늘땅물벗 20명 형제자매들의 하루 피정 중 오전 강의가 있었고,
오후에는 청담동 성당 ‘기쁨의 모후’ 레지오 팀 8명을 위한 피정 강의와 더불어 고백성사가 있었습니다.
강의 주제는 “베네딕도회 영성-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영성-”, 이었고,
강의 전후로는 제 자작 ‘행복 기도문’과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기도문을 함께 낭송했습니다.
특히 강조한 것이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영성’이었습니다.
참으로 베네딕도회 영성은 유행을 타지 않는 믿는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영성임을 강조했습니다.
오늘은 ‘제108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이며
교황님의 ‘이주민과 난민과 함께 미래 건설하기’란 주제의 담화문 내용도 참 깊고 좋았습니다.
교황님의 넓고 깊은 시야는 그대로 하느님의 시야를 반영한다 싶었습니다.
감동적인 기도문을 나눕니다.
“주님, 저희를 희망의 전달자가 되게 하시어,
어둠이 있는 곳에 주님의 광채가 빛나고,
절망이 있는 곳에 미래에 대한 확신이 다시 싹트게 하소서.
주님, 저희를 주님 정의의 도구가 되게 하시어.
배척이 있는 곳에 형제애가 꽃피고,
탐욕이 있는 곳에 나눔의 정신이 자라나게 하소서.
주님, 저희를 이주민과 난민과 함께
또한 변방에 사는 모든 이와 함께
하느님 나라의 건설자가 되게 하소서.
주님, 저희가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깨닫게 하소서.”
얼마전 카자흐스탄 사도적 방문을 마치고 귀국 중
비행기에서의 관례적인 기내 회견 내용에서 이민에 대한 교황님의 답변이 신선했습니다.
“오늘날 유럽 이곳은 인류의 가장 큰 묘지입니다.
서방이 사람들을 필요로 할 때 환영하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인구통계학적으로 겨울을 생각하면 우리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특히 스페인과 이탈리아에는 빈 마을이 많습니다.
그곳에는 소수의 노인들만 있고 그 외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서구는 이민자를 환영하고, 동반하고, 촉진하고, 통합해야 한다는
원칙과 이민자를 포함하는 정책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치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따지고 보면 서구는 이주민의 나라입니다.”
남의 나라 문제가 아니라 당장 우리나라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 영성이
얼마나 절박한 보편적, 세계적 영성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런 깊고 넓은 시야를, 하느님의 시야를 지녀야 할 작금의 위기의 시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첫째, 삶의 중심의 회복이요, 그리스도 중심을 확고히 하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에 자리에 또아리 틀고 있는 온갖 우상들을 과감히 퇴치하고
그리스도 중심,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심 자리에 위치한 탐욕이 문제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은 돈이나 재물의 우상이 아닌 하느님이, 그리스도가 자리 잡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가 참 좋은 가르침입니다.
부자는 완전히 탕욕의 노예가 되어있습니다.
사람이라 하지만 사람이 아닌, 재물에 중독되어 자기 속에 갇힌 자기 감옥의 수인, 폐인, 괴물입니다.
하느님 중심이 아예 없기에 온통 관심사는 재물이요 자족의 삶에
문 옆의 라자로 이웃과는 완전히 무관한 삶입니다.
둘 사이에는 너무 큰 구렁이 있어 건널 수 없었다 하니
그 보이지 않는 단절의 골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깨닫습니다.
하늘 향한 문도 닫혔고, 이웃 간의 문도 완전히 닫힌 고립단절의 삶, 바로 이것이 지옥입니다.
문제는 부자가 이런 현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재물의 부에 중독되면, 하느님 중심을 잃어버리면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
마음이 양심이 썩을 수 있는지, 오늘 제1독서 아모스서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어찌 사람이 이럴 수 있겠는가 하겠지만 오늘날도 이런 부자들 어디엔가 있을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이들, 마음 놓고 사는 자들!
그들은 상아 침상 위에 자리 잡고,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양 떼에서 고른 어린양을 잡아먹고, 우리에서 가려낸 송아지를 잡아 먹는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고, 최고급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공동체가, 나라가 망하든 전혀 무관한, 공동체 의식이나
사회의식, 역사의식이 전무한 괴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하느님 중심을 잃고 탐욕에 노예 되면 십중팔구 불치의 괴물이 됩니다.
둘째, 기도가 답입니다.
끊임없는, 간절하고 항구한 한결같은 기도로 하느님 중심을 회복하고 견고히 해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소통이, 생명과 사랑의 소통이 기도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관계를 날로 깊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부자나 아모스서의 부자는 기도가 없습니다.
찬미와 감사의 기도도 완전 실종입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과 완전 단절입니다.
만나지 않으면 사람 관계도 절로 멀어지듯
하느님도 예수님도 기도를 통해 만나지 않으면 절로 멀어져 완전히 무관한 남남이 됩니다.
믿음과 기도는 함께 갑니다. 믿음도 훈련이요 기도도 훈련입니다.
도대체 영성생활에 훈련 아닌 것이 없습니다.
참으로 영적 삶을 추구하기를 권하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 됩니다.
기도의 사람은 바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이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 바로 기도의 힘, 믿음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평생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해야 하는 주님의 전사입니다.
기도의 전사, 믿음의 전사입니다. 결코 분투의 노력과 훈련이 없는 값싼 은총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기도 드릴 분인 하느님의 모습이 바오로 사도의 기도를 통해 잘 드러납니다.
“제 때에 그 일을 이루실 분은, 복되시며 한 분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이신 분,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영예와 영원한 권능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그리하여 제가 호흡에 맞춰 늘 바치길 권하는 화살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다음 삼위일체 하느님을 숨 쉬며 바치는 기도 영성 훈련에 전념하시기 바랍니다.
“오소서, 주 하느님!”,
“오소서, 주 예수님!”.
“오소서, 주 성령님!” 하고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신망애信望愛가, 당신의 진선미眞善美가 되게 하소서.”
셋째,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입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가,
제1독서 아모스서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오늘 우리의 회개입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지구 재난의 시대에 더욱 필요한 것이 생태적 회개입니다.
과연 우리 주변에 함께 나눠야 할 나자로는 없습니까?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끊임없이 하느님께 돌아가 만나야 하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인생 허무와 탐욕의 무지에 대한 답도 회개뿐입니다.
회개를 통한 순수와 열정, 겸손과 온유, 자비와 지혜의 선물입니다.
감사와 기쁨, 평화와 희망도 회개의 선물입니다.
제1독서 아모스서 후반부 말씀도 회개를 촉구하며 복음의 후반부 말씀도 경청과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니,
비스듬히 누운 자들의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의 말씀과 계명을 경청하고 회개하는 일이
구원에 화급한 일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영성을 굳건히 해주시고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한국에서 동창 신부님들이 와서 며칠 지냈습니다.
야구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서 표를 샀습니다.
요즘은 핸드폰으로 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당일 날 비가 와서 경기가 취소되었고, 다음날 2경기가 연속으로 진행된다고 했습니다.
다음 날 경기장에 가서 표를 보여주니 문제가 있다고 티켓 판매 직원에게 가보라고 했습니다.
티켓 판매 직원에게 문의를 하니 자리를 알아보겠다고 했습니다.
30분은 기다렸는데 전산에 문제가 있는지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직원은 저쪽 벽에서 기다리라고 하는데, 그때까지는 참고 있었는데 감정이 상했습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물었더니 답이 없었습니다.
정 그러면 환불 해달라고 했더니 5분만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5분이 지나니 직원이 표를 핸드폰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다시 입장하려하니 이번에는 좌석이 이미 지정되었다고 했습니다.
함께 티켓 판매 직원에게 가자고 하니 자기는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합니다.
동창들에게 면목도 없고, 다시 티켓 판매 직원에게 가서 이번에는 입구까지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직원은 저와 함께 입구로 갔고, 드디어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1시간이 지났습니다.
저와 비슷한 문제로 판매 직원에게 온 사람들은 쉽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말을 잘 못해서 무시한 것 같기도 했습니다.
동양인이라서 무시한 것 같기도 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벽 쪽에서 기다리라고 하는 것도 저를 무시한 것 같았습니다.
다행히 직원은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하였고,
나중에는 함께 입구까지 가 주었기에 오해는 풀렸습니다.
전산에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창 신부님들은 그래도 미국에서 몇 년 살았기에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었다며 저를 응원해주었습니다.
오늘은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이방인으로 타국에서 사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난민이 되어서 사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첫째는 언어의 소통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직업을 구하기도 어렵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부담이 됩니다.
둘째는 차별입니다.
차별은 인격적인 차별도 있고, 경제적인 차별도 있습니다.
셋째는 자녀의 교육입니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주민과 난민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이주민과 난민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면 좋겠습니다.
생각하면 성서는 이주민과 난민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난민은 아담과 하와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인류의 시작이 바로 난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잘 지낼 수 있도록 지켜 주셨습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가뭄을 피해서 풍요로운 땅인 이집트로 가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난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긴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을 끌려갔습니다.
낯선 땅에서 유배생활을 하였습니다. 난민이 아닌 포로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뜻을 지키지 않았음을 뉘우쳤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도 이집트로 피난 가서 살았습니다.
헤로데가 2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저의 집안도 신앙 때문에 박해를 피해서
서울에서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낙원에서 쫓아냈지만 잘 지켜 주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버렸던 형제들을 용서하였고, 이집트에서 가족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고통 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페르시아 왕은 유배지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레스 왕을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가장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한 이들에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주민과 난민 그리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가진 것을 나눈다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될 것입니다.
저도 미국 땅에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모두가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가진 것을 나눌 수만 있었다면, 헐벗고 가난한 라자로에게 자비를 베풀 수만 있었다면
아브라함의 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나눌 수만 있다면 부자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만 있다면 라자로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연중 26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이번 주일 말씀 전례의 주제도 재물의 사용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가진 자들의 흥청거림과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곧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요한 집안이 망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을 위한 싸움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라고 권고합니다.
곧 티모테오에게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의로움과 ~ 사랑'을 추구하며,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까지 흠 없이 계명을 지키기'를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로, 극단적인 두 인물의 대조된 모습을 통해
재물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우리를 하느님의 말씀에로 초대합니다.
이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있었다.” (루카 16,20)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의 이름은 제시하지 않으나,
거지는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이’라는 뜻의 ‘라자로’라고 그 이름을 밝힘으로써
하느님이 그를 인정하고 도우신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반면에 부자가 가련한 라자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라자로 사이에 골짜기를 파놓고 분리된 삶을 살았음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이승에서 파놓고 건너가지 않은 그 분리의 골짜기는
저승에서도 그가 건너갈 수 없는 분리의 골짜기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형제들과 사이에 높은 문턱을 쌓아놓고 살게 되면,
저승에다 건널 수 없는 구렁을 파놓는 꼴이 될 것입니다.
사실 이 부자는 특별한 악행을 저지른 것이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단지 소유한 자신의 재물을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면서도
타인을 위해 쓰는 데는 인색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대문 앞에 누워있는
가난한 라자로를 무시하고 그에게 무관심했을 뿐입니다.
마치 제1독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가진 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이 비유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할 바를 다한 것이 아니라,
선행과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죄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는 부유함(부자)=멸망, 가난함(빈자)=구원이라는 등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심판받은 것은 그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하지 않은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어야 하고, 마시되 자신의 혀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재물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되 소유 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자비를 입었으니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죽어서 아브라함에게 한 말인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6,24)라는 간청은
‘제가 자비를 베풀게 해주십시오.’라는 간청으로 바뀌어야 할 일입니다.
세계적인 거부 석유 왕 록펠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돈을 벌기보다 쓰기가 열 배는 어렵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음의 눈을 뜨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대문 앞에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로 누워있어도 못 본 척한 것처럼,
내 곁에 형제가 상처투성이로 누워있어도 못 보는 것은 우리 마음의 눈이 감겨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아니, 탐욕과 인색에 눈이 가려져 버린 까닭일 것입니다.
자신의 호사스러움과 즐거움에 눈이 가려져 버린 까닭일 것입니다.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한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니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형제들 사이에, 또 가난한 이들과의 사이에,
냉대와 무시와 무관심의 골짜기를 파놓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것은 곧 저승에서의 골짜기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저승에서 처지가 뒤바뀐 부자는 자기 형제들에게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청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루카 16,29)
이승에서 자비를 베풀어야 저승에서 자비를 입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심판 후에는 그 기회가 마감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사실 부자는 이승에 살고 있는 자신의 형제들의 회개를 위해서
라자로를 보내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승에서는 이미 하느님의 말씀이있으니, 그 말씀을 들어야 하며,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일으키는 것은 기적적인 사건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일’에 있음을 밝혀주십니다.
사실 당신을 믿지 못함은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혹은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듣고도 받아들이지를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혹은 신비를 체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완고한 까닭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복되다.”(루카 11,28)
<오늘의 말 · 샘 기도>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20)
주님!
마음의 눈을 열어 타인의 처지를 볼 줄 알게 하소서.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고, 자신의 혀만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게 하소서.
재물을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않게 하시고, 탐욕에 빠지지 않고 인색하지 않게 하소서.
악을 저지르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시고,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연중 제26주일 :다해
지난주일 우리는 재물의 사용법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다.
그 재물이 사람들 사이에 형제애의 다리를 놓아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는 데 사용하지 못한다면
자기 파멸과 하느님과 형제들을 해치는 도구가 되어버린다고 하셨다.
재물이 사치와 허영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때,
사회는 갈라지고, 사회적 불안을 초래하고, 온갖 형태의 도덕적 무질서를 조장하며,
가난한 이들을 소외시키고, 사회가 커다란 어려움에 부닥치게 될 것이다.
재물이 올바로 사용되지 않고 공평하게 분배되지 못할 때
그것은 참으로 사회적 재난을 초래할 수 있다.
복음: 루카 16,19-31: 부자와 라자로
오늘은 그 위험성이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임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 재물이 사람들에게 궁핍한 다른 형제들 앞에서
그 마음을 얼마나 메마르게 할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재물이 오직 개인의 만족과 성취의 수단이 되어버릴 때,
찾아드는 모든 파멸적 모습을 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재물은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게 마음을 굳게 닫게 한다.
오늘 복음의 두 주인공은 더 이상의 부조화를 볼 수 없을 정도이다.
부자는 풍요한 의식주의 여유를 가지고 있었으나,
가난한 라자로는 부자들이 식사 후에 손을 씻는 빵부스러기로도 배를 채울 수 없었으며,
돌아다니는 개까지 그에게 달려들어 상처를 핥아 다시 헤집어 놓음으로써 고통을 배가시켰다.
그 부자는 정말 자기 집 문간에 드러누웠던 그 거지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을까?
팔자가 그렇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죽음의 순간에 갑자기 처지가 바뀐다.
라자로는 영원한 행복을 뜻하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배고프지 않은 식탁에 자리 잡게 되고,
그 부자는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겪게 된다.
그리고 생애 동안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던 라자로의 도움을 구한다.
그러면서 생전과 같이 누구에게나 명령을 하며 살았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에서도 아브라함에게조차 명령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24절).
하여간에 오늘 복음의 비유는 전통적인 상징적 개념을 이용해서
하느님의 정의가 어떻게 인생의 불의와 불공평을
다시금 공정하게 짜 맞추어 주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사에 개입하시는 것 같지 않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그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거지를 라자로라고 부르시는 것도 의미가 있다.
라자로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하느님이 도와주신다(El'azàr)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여간에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한 대답은 이 정의에 입각한 재균형에 관한 것이다.
“얘야, 너는 살아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25절).
그러나 하느님께서 모든 균형을 이루어주실 것으로 생각하여 무기력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세상의 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형제적 사랑과 재화를 나누어 쓸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부자는 자기의 불행을 근본적으로 깨닫고 아브라함에게 라자로를 보내어
자기 형제들만이라도 그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달라고 청한다(28절).
그 형제들이 생활을 바꾸면 그 고통스러운 곳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음을 들어 그것도 거절하고 있다.
사실 형제적 사랑이나 재화를 서로 나눌 수 있도록 변화되는 데는
거창한 징표나 기회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저 단순히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넉넉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저승에서 사자(使者)가 온다고 하여도 믿지 않을 것이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인 라자로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의 마음이 굳어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이려고 하였다(요한 11,46-53; 12,10-11 참조).
자기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사물을, 이웃을 바라보려고 하여야 한다.
이 부자는 어찌 가난한 이의 외침에 자기 마음의 문을 닫았을까? 그것은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7)는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의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을 닫은 것은
재물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다 소유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가 소유한 모든 재물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그 사물들 속에 자신을 잃어버려 더는 하나의 인격체이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마음의 문을 열 능력이 없는 사람은
바로 그 향락을 즐기는 부자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재물을 잘 사용함으로써 위험성에 떨어지는 일이 없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라자로 - 하느님 밖에는 아무에게도 기댈 것이 없는 사람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용이라서 따로 상황 설명은 필요 없겠지요.
이 비유 이야기를 들으면서 극이 펼쳐지는 상황 전개와 결말에 대해
여러분들의 반응이 어떤지 솔직히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 부자가 고통을 받고있는 것이 고소합니까? 깨소금 맛입니까?
아니면, 왜 부자가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부자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세올(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했던 악인이 저주받는 지하세계)에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라는 항변이 저절로 나옵니까?
예수님께서 이 비유 이야기를 들려주신 깊은 뜻이 무엇일까요?
왜 제자들과 일반 군중들이 아닌 바리사이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셨을까요?
부자와 바리사이들이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이 대목을 놓고 묵상하면서 제게 떠오르는 것은 특권과 한계라는 단어입니다.
특권층이 지닌 한계랄까요?
기서 제가 한계라는 말을 쓰는 것은 열려 있지 않고 닫혀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부자는 자주색 옷과 아마포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자주색 옷은 자홍색 겉옷을 말하는데 예로부터
로마 시대의 황제와 일가 귀족들만 입을 수 있는 특권을 상징하지요.
일반적으로 특권을 지니면 자기에게 안주하는 한계를 지닙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만 보고 남을 보지 못합니다.
부와 특권을 지니면 자기 세계 안에 갇혀서
밖의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는 특성이 있습니다.
부나 특권 자체가 나쁜 것일 수가 없지요. 구약 성경에서도 부는 하느님의 축복이었습니다.
몇 년 전이었나요? 광고 때문에 한때 ‘부자 되세요.’가 유행어가 되었었지요.
부자 되라고 축복을 빌어주는 말이 나쁠 것이 없는데, 이 부라는 것이 참 묘한 특성을 지녀요.
대개 부를 지니면 부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지 몰라도, 담장을 치고 그 울타리 안에 갇히게 됩니다.
부자들의 집을 보세요. 담벼락이 얼마나 높은가!
하느님께서 부를 축복으로 주실 때는 그 부를 이웃과 더불어 나누어 쓰라고 주신 것인데,
일단 그것을 지니게 되면 자기만을 위해 쓰고 싶어집니다.
비유에서 부자의 문제는 라자로를 눈여겨보지 않은 것입니다.
마치 소 닭 보듯이 부자는 라자로에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보아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왜냐하면, 자기 세계 안에 갇혀있었기 때문이지요.
자기 밖의 세계를 보지 못했어요. 아니, 자기 식탁에 차려진 진수성찬만 보았지,
그 식탁 아래에서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라자로와 그가 겪는 밑바닥 삶을 보지 않았어요.
시선이 자기에게만 머물러 있으니까 남이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에 대해 무관심하면 하느님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충족되어 있으면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게 되기 마련이지요.
한편 라자로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라자로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도움받을 길이 없다’라는 뜻이고,
히브리어 이름으로 쓰면 ‘엘사자르 또는 엘리제르’가 되는데 ‘하느님께서 도우신다.’라는 뜻이 됩니다.
아무에게도 도움받을 길이 없으면 하느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게 되지요.
라자로는 ‘하느님 밖에는 아무에게도 기댈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영어 표현도 이런 영향을 받았지요.
우리말로 ‘아무도 모른다’가 영어로는 ‘God only knows.’가 되잖아요.
철저하게 가난함을 체험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하느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신뢰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부자는 죽은 뒤에야 세상은 자기 홀로 행복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아브라함에게 통사정을 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후회할 때는 이미 너무 늦은 것이 우리 삶임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씀드리지만, 부자가 지닌 문제는 자기 안에 갇혀서 나누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도 행복도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실상 나누지 않으면 진정한 행복일 수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지니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소유 그 안에 갇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늘 열려 있어야 합니다. 시선을 밖에 두어야 합니다.
너무 우리, 우리 것, 우리 수도회, 우리 교회 하면 거기에 매이고 갇히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것에 신뢰를 두지 않고 주님께 신뢰를 두어야 합니다.
주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행복하여라.
가난한 이웃을 잊지 말자.
염철호 요한 신부
다윗과 솔로몬 임금 이후 이스라엘은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로 갈라집니다.
열왕기는 남 왕국 역사를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북 왕국 이스라엘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지만
고고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보면 북 왕국이 남 왕국에 비해
훨씬 부유하고 강대한 나라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엘리야, 엘리사, 아모스, 호세아 등 초기의 많은 예언자가
북 왕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것을 보면
북 왕국은 종교적으로도 남 왕국 못지않은 나라였음이 분명합니다.
오늘 1독서의 아모스 예언자도 북 왕국에서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아모스가 활동 당시 북 왕국을 다스리던 임금은 예로보암 2세였습니다.(아모 1,1)
예로보암 2세 때 북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의 쇠퇴로 인해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큰 부흥기를 맞게 됩니다.
하지만 빈부 격차가 점점 심해지고, 우상숭배 등으로 인해
하느님을 잊고 사는 분위기가 강해지는 등 종교적으로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에 아모스 예언자는 하느님께로 돌아서지 않으면 결국 패망하리라고 예언하는데,
북 이스라엘은 실제 기원전 721/2년에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합니다.
성경은 북 왕국의 멸망이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다고 설명합니다.(2열왕 17,7-23)
오늘 복음은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비유에 앞서 약은 집사 비유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것은 재물을 잘 이용해
세상에서 친구를 사귀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밝힙니다.(루카 16,9-12)
곧 재물을 가진 이들은 언제나 재물을 자기 것이라 여기지 말고, 가난한 이웃과 나눔으로써
후일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자신을 맞아들이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등장하는 부자는 재물을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다 결국 영원한 생명에서 제외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이야기를 전해 주면서 당시 바리사이들이 재물을 사랑하여
북 왕국 이스라엘이 범하던 오류를 그대로 범하고 있음을 비판합니다.(16,13-15)
오늘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사랑하는 제자 티모테오에게 아버지로서 따뜻한 권고를 전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언제나 영원한 생명을 위해 훌륭히 싸우기 위해 종말에 이르기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증인들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현대 사회 안에서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자신이 믿는 바를 실천해 옮김으로써
자신이 옳은 것을, 믿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재물을 멀리해야 한다는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은 언제나 걸림돌이 됩니다.
하지만 독서와 복음 말씀은 재물이란 자신의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히며
세상의 재물을 사랑하는 이는 결코 하느님을 올바로 섬길 수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재물은 반드시 필요 합니다. 기왕이면 많을수록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재물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살다 보면 하느님도, 이웃도 모두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결코 행복하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이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