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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송 시편 68(67),8-9 참조
하느님, 당신 백성에 앞장서 나아가실 제, 그들 가운데 사시며 길을 열어 주실 제, 땅은 흔들리고 하늘은 물이 되어 쏟아졌나이다. 알렐루야.
본기도
하느님,
사람을 구원하시고 처음보다 더 영광스럽게 하시니
자비로이 이루신 놀라운 일을 기억하시고
세례로 새로 난 저희에게 영원한 은총과 복을 내려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하느님께서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3,13-25
13 바오로 일행은 파포스에서 배를 타고 팜필리아의 페르게로 가고,
요한은 그들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14 그들은 페르게에서 더 나아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
15 율법과 예언서 봉독이 끝나자 회당장들이 그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형제들이여, 백성을 격려할 말씀이 있으면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6 그러자 바오로가 일어나 조용히 하라고 손짓한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을 선택하시고,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살이할 때에 그들을 큰 백성으로 키워 주셨으며,
권능의 팔로 그들을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18 그리고 약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의 소행을 참아 주시고,
19 가나안 땅에서 일곱 민족을 멸하시어
그 땅을 그들의 상속 재산으로 주셨는데,
20 그때까지 약 사백오십 년이 걸렸습니다.
그 뒤에 사무엘 예언자 때까지 판관들을 세워 주시고,
21 그다음에 그들이 임금을 요구하자,
하느님께서는 벤야민 지파 사람으로서 키스의 아들인 사울을
그들에게 사십 년 동안 임금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22 그러고 나서 그를 물리치시고
그들에게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 하고
증언해 주셨습니다.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24 이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25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시편 89(88),2-3.21-22.25와 27(◎ 2ㄱ 참조)
◎ 주님, 당신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 제가 아뢰나이다. “주님은 자애를 영원히 세우시고, 진실을 하늘에 굳히셨나이다.” ◎
○ 나는 나의 종 다윗을 찾아내어,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노라. 내 손이 그를 붙잡아 주고, 내 팔도 그를 굳세게 하리라. ◎
○ 내 진실 내 자애가 그와 함께 있으니, 내 이름으로 그의 뿔이 높이 들리리라. 그는 나를 부르리라. “당신은 저의 아버지, 저의 하느님, 제 구원의 바위.” ◎
복음 환호송묵시 1,5 참조
◎ 알렐루야.
○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 죄를 씻어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16-20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17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8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19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 기도
주님,
이 제물과 함께 바치는 저희 기도를 받아들이시고
저희 마음을 새롭게 하시어
저희를 구원하신 이 큰 사랑의 성사에
언제나 맞갖은 삶으로 응답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마태 28,20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부활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찾아 주시니
구원을 이루는 이 양식의 힘으로
파스카 신비의 은혜를 저희 안에 가득 채워 주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요한의뜨락에서 퍼온 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순간마다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표현은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서 계시된 하느님의 이름(“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을 다스려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처럼 풍랑 치는 바다를 잠재우실 때도(마태 14,27 참조), 당신을 믿도록 백성을 설득하실 때나(요한 8,24.28 참조) 최고 의회에서 심문받으실 때도(루카 22,70 참조), 언제나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시며 ‘아버지와 하나’이신 당신의 신원을 깊이 의식하셨습니다.
죽음이 가까웠음을 아신 주님께서 시편 말씀을 들어(41[40],10 참조) 유다의 배반을 미리 알려 주신 것은, 제자들에게 배신당하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당신에게서 ‘힘없는 하느님’이 아닌 “나는 있는 나”이신 전능하신 하느님을 올바로 바라보도록 사랑하는 제자들을 미리 준비시키신 일이었습니다.
몸을 굽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이 그분께 수치와 굴욕이 아니었던 것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깊은 자의식에서 온전한 자유와 사랑으로 하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죄로 벌거벗은 원조에게 가죽옷으로 수치심을 가려 주신 아버지의 그날처럼, 주님께서는 오해와 무지와 배반으로 때 묻은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심으로써 인간을 향한 성부의 사랑과 구원 의지를 온전히 보여 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원 경륜의 정점에서 사명을 완수하고서도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라며 종보다도 더 낮은 이로서 겸손을 보여 주었습니다(제1독서 참조). 주인의 발을 받쳐 들어 더러움은 씻어 내고 상처에는 기름을 발라 주는 종의 마음으로 가족과 이웃을 섬기며 겸손하게 살아간다면, 우리도 반드시 주님처럼, 나를 세상에 파견하신 ‘아버지와 하나’가 될 것입니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사도’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사람들 가운데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몸소 체험하고 또 그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고 파견된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 특별한 호칭을 부여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본디 ‘파견된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무엇이든 어떤 사명을 받고 그것을 수행하도록 파견된 사람은 모두 사도가 됩니다. 이런 의미의 단어가 특별히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인으로 파견된 사람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14장 14절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도 ‘사도’로 불리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사에 참석하는 모든 그리스도인 또한 사도로 파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사의 마지막에 선포되는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말의 본래 의미가 ‘자, 이제 파견입니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를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고, 또 주님의 몸과 피를 함께 받아 모셨으니, 이제 세상에 나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향하여 복음의 증인으로 파견되는 우리에게 오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한편으로는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증언할 것이 무엇인지를 잊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또다시 하느님의 사도로 파견되는 오늘, 우리의 사명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보내신 분의 말씀을 전하는 일임을 기억합시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사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는 것입니다.(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셔야 할 때가 온 것을 아시고는 당신 제자들과 사랑의 만찬을 나누십니다. 만찬이 끝나고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시던 가운데에 체포되시고, 다음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십니다. 제자들과 함께하는 이 마지막 시간에 당신의 큰 사랑을 더욱 극진히 보여 주시고, 그 사랑을 실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맨발에 샌들을 신었습니다. 흙길을 다녀야만 하였던 당시 사람들은 외출하고 돌아오거나, 다른 집에 초대받아 가면 가장 먼저 종이 와서 더러워진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그 일은 오직 종들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며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깨끗하게 하실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사랑의 완성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 그러나 늘 그렇듯 이 아름다운 말씀을 삶에서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2014년 8월 16일 오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꽃동네 희망의 집에서 장애인들과 만나셨습니다. 당시 행사를 기획하다 보니 정작 아이들과의 만남에 쓸 수 있는 시간은 아이 한 명당 60초가량이었습니다. 그 시간에 맞추어 연습을 하고 철저히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행사 당일 교황께서는 일정에 얽매이지 않으시고,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시고, 그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제가 행사를 준비하면서 시간에 사람을 맞추었다면, 교황께서는 오로지 가장 낮은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셨다는 것을 늦게야 깨달았습니다.(서철 바오로 신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유다 사회는 예수님을 주인은커녕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유다 사회가 메시아를 믿지 않은 것도 아니고, 메시아에 대하여 모르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문제는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자렛 촌놈 예수는 아니다.’라는 완고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당신의 운명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그 운명이라는 것이 어이없게도 제자의 배신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고자 길을 나선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을 팔아넘긴다는 기막힌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구원은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대개 우리는 이원론적 신앙관에 익숙합니다. 선한 것은 악한 것과 결코 섞일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면서, 제 눈에 싫은 것을 악하다며 어깃장을 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눈에 악하고 더럽고 모자란 것을 통하여 오늘도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어설픈 정의감과 설익은 지식으로, 약하고 부족하며 때로는 죄스럽고 비참한 사람들의 주님을, 그리고 그 주님을 믿고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함부로 단죄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그 단죄가 오늘 또다시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바로 그 제자의 민낯입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자 자기의 생각이나 뜻을 버려야만 합니다. 나의 생각이 섞이면 나를 보낸 이의 뜻이 흐려집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다.”라고 하십니다. 또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라고도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온전히 드러내고자 그분께서 어떤 말씀과 행동을 하시려고 하는지 주의 깊게 듣고 관찰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증언해야 할 이들 가운데 당신을 배신할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분명 그때나 지금이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고 하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이들은 말씀을 증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고 그런 자리를 꿰차고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를 증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발꿈치를 치켜들며 대든 사람이 누구라고 밝히지 않으십니다. 교회는 그런 사람이 있더라도 무너지지 않을 것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이끄는 힘은 사람이 아니라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개인만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교회는 세상에 파견된 그리스도의 선물입니다. 선물 포장지가 조금 상했다고 그 안에 든 선물까지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이따금 신뢰할 수 없지만 성령을 믿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부족한 인간들이 모인 교회를 그리스도를 드러내 보이는 곳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믿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내 삶의 문제를 함께 고민해 주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뻐하며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삶으로 보여 줄 때, 이들에 대한 신뢰로부터 믿음은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마다, 그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당신을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신 것은, 믿음이 확실한 증거가 아닌 권위 있는 증언과 지혜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식과 다릅니다. 인간의 지식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 내려는 바벨의 탑을 쌓아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교만의 길로 들어서게 합니다.
실제로 인류는 과학 기술의 진보와 인본주의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신 없는 유토피아를 꿈꾸며 살아왔지만, 인류가 여전히 겪고 있는 폭력과 전쟁, 불의와 모순은 사라지지 않고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전도 여행 중에 들른 안티오키아에서, 회당에 모인 이들에게 구약 성경에서부터 시작된 하느님 구원의 대서사시를 감동적으로 들려줍니다. 예수님의 출현과 그분의 구원 업적이, 이스라엘 백성이 겪어 온 구원에 대한 갈망을 채워 주는 궁극적인 완성임을 설득력 있게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미 믿음을 통해 성장한 이들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언제나 교회 안에서 성장하고, 교회를 통해서 표현되며, 교회와 더불어 실천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