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3월 5일 사순 제2주일
제1독서 : 창세 12,1-4ㄱ
제2독서 : 2티모 1,8ㄴ-10
복 음 : 마태 17,1-9
그 무렵
1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2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3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4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5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6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매주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구매합니다.
주로 신간을 먼저 보면서 관심 많은 분야의 책을 선택하곤 합니다.
그런데 ‘치매의 모든 것’이라는 책을 볼 수 있습니다.
휘프 바이선이라는 네덜란드 최고의 임상 심리학자가
자그마치 30년 동안 연구한 끝에 내놓은 치매 안내서와 같은 책은 책이었습니다.
이 책이 눈에 띄었던 이유는 2021년에 주님 곁으로 가신
제 아버지가 말년에 치매 환자였기 때문입니다.
평생 공부하셨던 아버지였지만 몇 차례의 큰 수술로 처음에는 섬망 증세가 오더니
결국 저도 잘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에 걸리셨습니다.
이제까지 제가 알던 아버지의 다른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매우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당시 저의 말과 행동이
오히려 아버지에게 큰 혼란을 주었겠구나 싶었습니다.
치매 환자를 대할 때 중요한 소통 규칙, 치매 환자에게 편안한 환경 만들어 주기,
치매 환자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과 할 수 있는 말 등등….
저 자신이 얼마나 이 부분에 무지했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저와 다름에 원망했고, 치매가 정말로 못된 병이라는 생각만 했었습니다.
치매 걸린 아버지가 저를 힘들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책을 읽어보니 저의 모름이 아버지를 더 힘들게 했었음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똑똑한 척하는 우리이지만 몰라도 너무 모르는 우리입니다.
상대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도 자기 기준에 맞춰서만 판단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 판단이 또 다른 아픔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생각하고 또 곰곰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얘졌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사람이 제일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그 모습이 큰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믿고 따랐던 예수님이 정말로 하느님이셨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고,
하느님 나라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게 했을 것입니다.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런 체험이 있었습니다.
피정하면서 계속 이 피정의 집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께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고, 그 행복 속에 계속 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들은 생각은 주님께서도 그것을 원하실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한곳에 머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마지막 말씀이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을 볼 때,
머무는 삶이 아닌 계속 움직이며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베드로도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들 말이 틀렸던 것입니다. 주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지요.
주님의 뜻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머무는 삶이 아닌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떠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교포사목으로 오시는 신부님들은 한국어는 물론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면 좋습니다.
언어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는 마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교포 사목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언어의 문제가 본질은 아닙니다.
복음적인 삶을 살려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사제를 모시기 위해서 한국까지 갔었던 신부님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몇 개 교구를 다니면서 사제들의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능력은 있지만 겸손한 사제를 찾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결국 한국에서 사제를 모시는 것은 포기하였고,
미국에서 사제를 양성하는 방법을 찾았다고 합니다.
잠시 머물다 왔기 때문에, 겉모습만 보았기 때문에
섬기는 사제, 겸손한 사제를 못 만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 자신을 돌아보면 저 역시도 섬김을 받는 삶에 더욱 익숙했습니다.
복음적인 삶, 겸손한 삶보다는 세상의 것들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소금처럼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녹이면서 맛을 내는 사제들이 많았다면,
사제를 모시러 갔던 신부님은 기뻐하며 돌아왔을 것 같습니다.
부르클린 교구의, 교구장님의 본당 사목 방문을 보았습니다.
본당에는 영어 미사, 스페인어 미사, 한국어 미사가 있었습니다.
주교님은 3개 공동체의 미사를 모두 집전하였습니다.
미사는 오전 9시, 10시 30분, 12시에 있었습니다.
영어와 스페인어는 주교님께서 잘하시기 때문에 주례를 하였지만
한국어 미사는 제가 주례를 하였습니다.
사목 방문하시는 주교님의 열정에 놀랐습니다.
한국에서는 보통 교중 미사만 주례를 하시는데, 주교님은 모든 주일미사를 함께 하였습니다.
주교님의 소탈함과 겸손함에 놀랐습니다. 미사 가방도 직접 들고 왔습니다.
제의도 본인이 직접 입었습니다. 한국어는 못하시니 제게 주례를 부탁하였습니다.
영어로 미사 경본을 준비하겠다고 했지만,
한국 공동체의 미사니 한국어로 하라고 배려해 주었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 미사에 함께 하셨지만,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처럼 주교님은 한국어 미사에 함께 하면서 소통하려고 하였습니다.
미사 후에 교우들과 사진도 같이 찍고, 몸이 아픈 사람에게 안수를 해 주었습니다.
격식과 절차를 넘어서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전한 곳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사제들에게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전한 곳은 주로 ‘본당’입니다.
봉사자들이 있고, 사제관도 있고,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큰 어려움 없이 사제로 지낼 수 있습니다.
둥지를 벗어나야 새는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본당 사목에서 보람을 느낄 수도 있지만 새로운 사목의 현장으로 떠나는 신부님들을 보았습니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사목하는 신부님, 아마존에서 사목하는 신부님,
아이티에서 사목하는 신부님을 보았습니다.
음식과 문화와 풍토가 다른 곳입니다.
열병 때문에 고생하기도 하고, 납치의 위험을 겪기도 하고, 외로움에 눈물 흘리기도 합니다.
비록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전하지는 않지만
신부님들은 그곳에서 가난한 이들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아픈 이들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전한 곳일지라도 섬기는 삶을 산다면, 겸손한 삶을 산다면
그곳이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평과 불만의 삶을 산다면 그 어떤 곳도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땅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장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섬김과 겸손의 문제입니다.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늘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과 함께 타볼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거룩하게 변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곳에서 천막을 3개 만들어서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께 드리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편하게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의 아들이 고난을 받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의 희생과 죽음이 있어야 빛이 나는 것입니다.
강을 버리는 물만이 바다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꽃을 버리는 나무만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섬김과 겸손의 삶을 산다면 지금 이곳이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땅입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는 우리가 사순시기에 가고 있는 ‘길’이 어떤 ‘길’이며,
어디로 가는 ‘길’인지를 밝혀줍니다.
제1독서에서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습니다.”(창세 12,4)
그 길은 비록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길이지만,
당신께서 미리 준비해 놓은 ‘주님께서 보여줄 땅’으로 가는 ‘길’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 ‘길’에 우리의 동참을 촉구합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 1,8)
그런데 사실 이 ‘길’은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길’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주셨습니다.”(2티모 9-10)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예수님에게서 환히 드러난 영광된 변모를 보여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 본래의 신적 초월성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가는 이 ‘사순의 길’이 어디로 향하여 가는 ‘길’인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마태 16,21-28)를 하신 다음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다가올 수난으로 닥쳐올 절망과 위기를 견디어 낼 수 있도록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을 미리 보여주시면서 준비시키십니다.
그러니 이 ‘수난의 길’은 동시에 생명과 부활의 빛나는 ‘길’임을 밝혀줍니다.
그러기에 내적 기쁨으로 차오르는 ‘은총의 길’이 됩니다.
<그리움이 길이 된다>는 박노해 님의 시가 떠 오릅니다.
"나는 기다리는 사람
그리움을 좋아한다
나는 그리움에 지치지 않는 사람
너에게 사무치는 걸 좋아한다
기다림이 지켜간다
그리움이 걸어간다
이 소란하고 쓸쓸한 지구에
그대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눈물 나는 내 사랑은
그리움이 가득하여
나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기다림이 걸어간다
그리움이 길이 된다“
그렇습니다.
기다림으로 ‘변모의 길’을 걸어갑니다.
‘길’이 되는 그리움으로 ‘부활의 길’, ‘영광의 길’을 갑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이 ‘길을 가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름 속에서 들려주신 가르침입니다.
곧 신약의 ‘쉐마’입니다.
‘들어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하느님께서는 직접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확인시켜주시면서,
그를 ‘따르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곧 그를 따라 ‘변모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곧 “그의 말을 들어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분과 함께 변모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말씀 아래 머물러 있는가?
그리고 들은 말씀으로 인하여 변모되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입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말씀이 내 안에서 성취되도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입니다.
변화의 힘이신 말씀께서 나를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말씀께 자신을 건네 드리는 일입니다.
곧 나 자신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집으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이 건물(초막)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게 됩니다.’(에페 21-22 참조).
그러면, 우리는 변모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한 대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2코린 3,18 참조)
오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진정 변모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내 아들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께서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손을 대시며”(마태 17,7)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7,7)
그리고 ‘의연히 변모의 길을 가라!’ 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주님!
말씀 아래에 머물게 하소서.
말씀께 제 자신을 건네 드리게 하소서.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제 자신을 허용하게 하소서.
말씀이 제 안에서 성취토록 승복하게 하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예수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났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주일이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그의 옷이 빛과 같이 눈부시다든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고, 구름이 그들을 덮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5절) 소리를 듣고,
제자들이 두려워서 땅에 엎드린다든가,
예수께서 그들을 어루만지시며 두려워 말고 일어나라고 하시는 장면이다.
이 영광스러운 모습은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으며,
여기서 모세와 엘리야까지도 그 나라의 구성원이 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포용하시며 완성하시는 분이시다.
하늘로부터 나오는 음성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모든 영광을 보여주시고도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함구하기를 명하신다(9절 참조). 왜 그랬을까?
그것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부활의 신비를 미리 보여주시는 것으로서, 부활체험을 통해서만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즉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 수난을 통해,
고통받는 종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한 다음에 얻게 되는 영광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제자들은 오직 파스카의 체험을 통해서만이 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마 당시에는 제자들도 알아듣기 어려웠을 것이고 지금의 우리에게도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이사 42,1 참조)이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5절) 하신다.
여기서 듣는다는 말은 신앙의 빛으로 그리스도를 겸손과 영광
그리고 죽기까지 당한 수난과 부활의 신비를 함께 지니고 계시는 분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분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듣는다는 말은 다시 체험하다, 다시 산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것으로 사순절의 의미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의 소명을 통해 같은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아브라함은 하늘로부터 오는 말씀을 들을 줄 알았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날 수 있었다.
우리도 아브라함의 모범을 따라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베드 3,13).
신앙만이 미래에 대한 열쇠를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에서 찬란히 빛났던 그 빛이
이제는 모든 이에게 불멸의 생명을 가져다주는 그분의 복음을 통하여 빛나고 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의 신비가,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살아있는
하느님 말씀의 빛으로 끊임없이 변화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내가 변화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함으로써 이루어 가야 한다.
나 자신이 변화하려고 하는 각고의 노력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을 기대할 수도 없고, 체험할 수도 없다.
우리 모두 그분의 말씀을 잘 들으며, 살아가며
주님의 부활 영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거룩한 변모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 제1독서로 창세기의 주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유프라테스강까지 이르는 땅을 너희 후손들에게 주신다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거역할 수 없이 순명 해야 하는 말씀을 듣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찾아 고향을 떠난 것입니까?
보다, 나은 정착지를 찾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떠난 것입니다.
그곳은 실제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두려움이 가득 찬 미지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신뢰, 하나를 움켜쥐고 낯선 땅을 향해 길을 떠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우리 ‘신앙인들의 성조’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은 바로 아버지에 대한 ‘예’라는 대답이었고
그것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에서 듣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이 철저한 ‘예’에 대한 하느님의 보증이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아니, 바로 우리 자신들에 이르기까지
이 ‘예’, 바로 순명은 하느님께 온전히 신뢰하며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희망하는 태도입니다.
순명은 바로 신뢰와 희망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이 태도에서 구원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삶의 자세인 순명은,
근본적으로 교회 공동체의 삶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공동체는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하여 순명으로부터 오는 자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들리시겠지만, 순명은 인간이 어디까지 자신을 버릴 수 있는가,
또는 자기의 뜻을 희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지에서 자유롭게 되고
보다 높은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에
자신을 맡길 때 더 큰 자유를 맛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자유는 교회 안에서 일하고 계신 성령에 대한
완전히 열린 마음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령 안에서의 분별, 영에게 열린 마음의 태도로 살아가면서
그분의 이끄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령의 이끄심을 알 수 있는가?
한마디로 기도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바로 하느님, 당신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브라함처럼 길을 떠나,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정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그 여정,
때로는 고난의 여정이 너무 아득하게 느껴지는 제자들에게
미리, 목적지,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잠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도 아래 그분이 목적하신 곳을 향해 가는 여정으로
삶을 이해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서를 통해
그 여정을 신앙의 언어로 노래했고, 고뇌하고 희망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성서를 읽으며 그것을 묵상하고 그 안에서 성령의 이끄심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 기쁨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고난이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고난을 겪어야 하는 제자들에게 미리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도 때로 그 여정이 힘들게 느껴질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거룩한 변모 사건을 상기하며 위로를 받읍시다.
우리가 삶에서 체험하는 은총이 바로 이 거룩한 변모 사건인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께서 해와 같이 빛나는 그 모습을
뵙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떤 은총을 체험합니다.
예컨대, 아픈 나의 손을 잡아준 수녀님의 얼굴에서 위로를 느꼈다면,
그 평화의 시간이 주님께서 우리의 삶의 순간을 스치는
거룩한 변모 사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알리는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높은 산에 올라가 있습니다.
높은 산은 구약성서에 하느님이 당신을 나타내는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 초기에 모세도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을 뵈옵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모세와 엘리야의 노선에서 예수님에 대해 이해하였다는 말입니다.
모세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깨닫고,
그 함께 계심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나타났던 예언자들의 대명사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세가 알려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다른 길로 들어섰을 때, 나타난 예언자들입니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잘못된 길을 버리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로 돌아오라고 부르짖는 이들입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는 것은
구약성서가 말하는 모세의 모습(탈출 34,29-30)입니다.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을 때, 그 얼굴이 환하게 빛났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모세를 통해 하느님과 함께 살기 위한 법이 주어졌듯이,
예수님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오늘 복음은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말씀이 들렸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메시아, 곧 구원자라고 말하기 위해 복음서들이 자주 사용한 표현입니다.
이 표현도 구약성서의 여러 문서(시편 2,7; 이사야 42,1; 신명 18,15)에서 가져와 합성한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메시아인데, 그 시대 유다인들이 기대하던,
영광스럽게 군림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메시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었고,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이 그분 안에 하시는 일을 보고 듣는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신 사실을 깨달은 후,
그 함께 계심을 살기 위한 지침으로 율법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세의 깨달음을 이어받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인간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새 율법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생명을
당신이 살아서 하느님이 살아계신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은 자비와 사랑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사랑하라는 계명 하나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내가 명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시오.”(15,17)
하느님의 생명을 살기 위해 주어진 단 하나의 법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예언자와 같은 분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고 제물을 봉헌하기에 정신을 빼앗겨,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어버렸을 때, 이스라엘 안에 나타나서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친 예언자들입니다.
율법과 제물 봉헌을 넘어서 하느님이 우리 생명의 원동력,
곧 아버지로 살아계시게 하는 삶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어기면서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아 혹은 제물 봉헌을 하지 못해,
율사와 사제들이 죄인이라 낙인찍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지키고 바쳐야 한다고 가르치던 유다교 지도자들의 눈에
예수님은 거짓 예언자였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과거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말하다가 목숨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초막 셋을 지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에게 각각 하나씩 드리고,
그곳에 함께 머물자고 제안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오면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예수님에 대한 인식은 모세와 엘리야를 안다고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같고, 또 예언자와 같은 분이지만,
그분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서 부활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계획이 좌절될 때도
하느님을 부르면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며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가르침에서 이해되는 분이지만,
‘내어주고 쏟으신’ 그분의 죽음까지 포함해서 알아들어야 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하신 기적에 놀란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자비와 사랑이라는 사실에 놀란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도 그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여
그분의 자녀 되어 살겠다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 실천이 비록 힘들고 십자가와 같이 고통스러워도,
예수님을 기억하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자기 한 사람을 위해 있는 듯이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런 착각에서 오만과 횡포와 미움이 발생합니다.
우리는 하느님도 벌주고 복수하신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벌주고 싶고, 복수하고 싶은 무리의 마음을 담아 우리가 상상하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계명을 주고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지키는지를 감시하신다고 우리는 상상합니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이 하는 일에 준해서 하느님을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의 자유행사를 불쾌하게 생각하신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지배자들이 사람들의 자유를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 준해서 하느님을 상상한 것입니다.
우리는 미워하고 횡포하지만, 하느님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각자 자유롭게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당신도 섬기는 사람으로 계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루카 22,27)
그 섬김의 결말이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우리도 사랑할 때, 사랑하는 사람을 섬깁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섬김을 실천할 때, 비록 그것이 고달프고 힘들어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차이는 기쁜 소식입니다.
하느님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예수님 안에
당신의 자비와 용서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였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는 나머지 이웃에게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우리도 이웃에게 기쁜 소식이 되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겨서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의 자녀가 가야 하는 길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