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3장
으스름한 밤안개 속에 천문봉의 정상 쪽을 향해서 움직이는 수백 명의 흑의인들이 있었다. 이미 지리를 알고 있는지 그들의 움직임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들이 멈추어 선 곳, 용주석주경이라 불리는 거대한 바위 기둥이 있는 곳으로 새벽 나절에 최대지가 살피고 갔던 바로 그 장소였다.
최대지였는가 흑의 복면인중 한 명이 용주석주경 사이에 나있는 조그만 통로를 가리키자 옆에 있던 인물이 손을 들어 진입을 지시하고 있었다.
거의 일 다경 정도를 걸어서 흑의 복면인 일행이 도착한 곳 사방 칠십 여장 크기의 조그마한 분지였다.
중간 중간에 바위들이 솟아있는 곳으로 북서쪽을 제외한 모든 면이 가로 막혀있다.
절벽에 의해서 거의 모든 것들이 차단된 때문인지 검은 암흑만이 존재하는 분지 내에는 뭔지 모를 이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들의 시야에 서너 개의 동굴과 그 주위를 오락가락하고 있는 인형들이 희미하게 잡혀왔다.
"드디어 잡았다 놈들!"
다비천검 정철인가 복면을 한 인물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져나왔다. 이윽고 동굴 쪽을 노려보던 그의 입에서 사방을 울리는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죽여라.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전부 죽여라."
정철의 명령과 함께 수백의 검은 복면인들이 야조(夜鳥)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에서 한결같이 풍기는 것은 살기였고 동료에 대한 복수심이었다.
"누구냐? 적이다!"
동굴입구에서 서성이고 있던 인물들의 당혹스런 외침소리와 함께 동굴 속으로부터 수많은 혈의인이 각자의 병기를 들고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헉! 그들의 인원이 저렇게 많을 수가….'
정철이 나직한 신음소리를 내질렀다.
동굴 속으로부터 꾸역꾸역 몰려나오는 인물들, 그 수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놈들의 수요는 기껏해야 이십여 명 정도였다.
그런데 저 많은 무사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지만 되돌리기에는 늦어버렸다.
이미 여기저기에서 혼전이 벌어지며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칠십여 장의 분지에 혈풍이 몰아치고 피비린내가 흠씬 풍겨나왔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적의 수효에 기겁을 한 정철보다 더 놀라는 인물이 있었다.
천사맹 혈사대(血邪隊)의 대주인 혈인귀(血人鬼) 방대운(邦大運)이었다.
적이 누구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기습을 당했다.
애초에 혈사대가 이곳에 온 목적은 천무맹과 천마맹의 균형을 맞추어 장기전을 유도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여태껏 이곳 천문봉에 은신한 채 두 세력의 동태만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천무맹의 백의대나 흑사파 진영은 서로 주시만 하고 있을 뿐 전혀 움직임의 기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기습이라니, 누가 자신들의 위치를 파악하여 기습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은 적이 누구냐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누가 되었던지 간에 적이 쳐들어 왔고 물리쳐야 한다.
"전 혈사대원들은 실혼망혼진(失魂亡魂陣)을 펼쳐라!"
혼전의 와중에 방대운의 목소리가 분지 내에 울려퍼지고 흑의인들의 공격에 우왕좌왕하던 혈사대원들이 재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이인 일조씩 짝을 이루기 시작했다.
"움바라 디아무 바리사…."
사기(邪氣) 가득한 영창소리와 함께 이인 일조로 되어있던 수백의 인물들이 일제히 자신들의 손목을 그으며 허공에 피를 뿌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들 주변으로부터 뿌연 피안개가 생성되기 시작하더니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주변을 붉게 물들여갔다.
절벽을 뒤로하고 분지 절반정도에 반원을 그리고 있는 혈사대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영창이 흘러나오고 온 분지를 가득 메운 혈무(血霧)에서는 죽음의 살기가 흘러 넘쳤다.
"칠성오행진(七星五行陣)을 펼쳐라!"
정철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방법이 없었다. 자신들이 천마맹도로 위장하고 있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벌써 수십 명이 실혼망혼진에 갇혔는지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고 동료에게 검을 찔러 넣고 있었다.
실혼망혼진의 무서움이었다.
시전자의 피와 영창을 매개체로 이용해서 펼치는 환술(幻術). 진에 갇힌 자는 극도의 환각에 시달리게 되고 자신 앞에 있는 자들은 전부 적으로 간주하여 주살 하게 된다.
오십 년 전에 천마맹을 공포에 떨게 했던 무서운 진식이었다.
정철의 말이 떨어지자 그나마 정신이 남아있던 천무맹의 인물들이 아홉 명씩 한 조를 이루면서 검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먼저 일곱 명이 북두칠성 모양을 만들고 나머지 두 사람이 허리를 보강하면서 북두칠성의 중심에서부터 오행검진을 형성한다.
화산파 칠성검진(七星劒陣)의 공격성과 무당파 오행검진(五行劒陣)의 방어성을 절묘하게 조합한 천무맹의 독문검진, 공격과 방어의 조화를 중시하는 검진 중의 하나였다.
진식 대 진식, 정공과 환술의 대결이 펼쳐졌다.
그곳에서 보았을 때 남서쪽, 용주석주경이 있는 곳의 반대편에서 수백의 눈동자가 분지 안의 혈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천마맹의 혈마 소지악과 암사월 일행이었다.
그들의 눈에 비쳐지는 분지내의 상황은 실로 처참했다.
수십 개의 오행검진에 꼬리가 달려있는 모양을 한 칠성오행진이 붉은 혈무 속을 거칠게 휘젓고 다니며 적을 주살하고 있지만 그들 또한 무사하지를 못했다.
진이 무너지면 곧바로 동료끼리 검을 날리며 자멸하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천사맹의 상황도 천무맹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천사맹의 실혼망혼진도 양쪽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손목에 있는 동맥으로부터 피를 뿜어내던 인물이 쓰러지면 그 뒤에 있던 인물이 다시 손목을 베어서 피를 뿌려대며 진을 유지시키려 하고 있지만
거세게 부딪쳐오는 천무맹의 검진에 견디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극으로 치닫는 혈전을 지켜보던 천마맹 인물들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피를 원하는 것이다.
그동안 백산 일행의 공격으로 극도로 예민해있던 감각에 붉은 혈무와 인간의 피를 더하게 되니 자연 심장의 박동수가 빨라지고 눈에 핏발이 설 수밖에 없었다.
"사부님!"
그런 부하들의 심정을 느꼈음인지 암사월이 적을 치자고 하고 있었다. 더 이상 기다리다가는 부하들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극도의 살기를 밖으로 표출해야 만 정상적인 정신상태로 돌아올 수 있다.
벌써 죽거나 부상당한 양 세력의 무인들이 절반 이상이 되어보였다. 공격하고 있는 천무맹의 인물들도 자신들의 상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진을 이용해서 움직이고 있지만 물러설 때를 잊고 무작정 적을 향해 몰려가고 있었다.
"기다려라, 조금만 기다리다 저들이 거의 공멸할 때 그때 정리한다."
혈마 소지악, 그는 저 실혼망혼진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오십 년 전에 뼈저리게 당했던 경험이 있던 진이었기에 기다리라 하고 있는 것이다.
슉!
컥!
그 순간 분지의 어디선가 화살 하나가 앞에 있던 부하의 미간을 뚫고 소지악의 면상을 향해서 날아오고 있었다.
깜짝 놀란 소지악이 재빠르게 그 화살을 쳐내고 아래쪽을 내려다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또 다시 몇 번의 미약한 소리가 들리더니 부하들이 여기저기서 쓰러지고 있었다. 하나 같이 이마를 관통해버린 화살들. 부하들이 다시 동요하기 시작했다.
아래쪽의 혈전을 바라보고 있던 암사월과 소지악의 눈에 활을 들고 있는 인물이 천무맹의 후대가 있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천무맹 놈들도 이곳에 자신들이 은신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치 자신들은 왜 내려오지 않느냐는 듯 화살을 쏘아대는 것이었다.
누군가. 우리를 이곳으로 유인한 놈인가!'
소지악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자신들에게 활을 쏜 자를 쳐다보았다. 지금 천무맹 상황으로는 자신들을 불러들일 여력이 없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다 싶어서 부하들을 쳐다보며 뭔가 말하려는 순간 놈이 또 다시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이번에는 바위 뒤쪽으로 몸을 숨긴 녀석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으악! 악! 컥!"
소지악과 암사월이 있는 곳의 십여 장 밖에서 부하들이 죽어가며 지른 비명소리였다. 순식간에 십여 명의 부하들이 목이 잘리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잡아라!"
이미 붉어진 눈동자로 동요하던 천마맹 인물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동료를 해친 복면인을 쫓아 몸을 날렸다.
"멈춰라!"
소지악이 고함을 지르며 부하들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이미 분노해버린 그들은 통제가 불가능했다.
너무 긴장해 있었다.
천무맹과 강호를 양분하고 있던 오십 년간 전투한번 제대로 해보지 않았던 이들에게 사지가 절단되어 참혹하게 변해 있던 동료의 모습과,
독에 의해 시신조차 남기지 못한 동료들의 죽음은 감정의 균열을 가져왔고,
모든 신경이 곤두 서있는 상태에서 두 세력간의 피 흘리는 혈전을 지켜보며 이성의 끈이 조금씩 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화살 공격과 바로 앞까지 와서 저지른 동료들의 도륙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만들었고 자신도 모르게 동료를 살해한 놈을 쫓아가게 되었다.
극도의 긴장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모든 천마맹의 대원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천무맹과 천사맹이 벌이는 혼전에 끼여들었고 분지에서는 또 다른 살육의 축제가 벌어졌다.
적과 아군의 구분이 없었다. 칠십 장 정도 넓이밖에 안 되는 분지에 천여 명이 넘는 무림인들이 서로에게 검과 도를 휘둘러대고 있었다.
"석두! 저기 들어가는 입구 막아버려!"
무림삼천이 싸우는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던 백산이 석두에게 또 다른 지시를 내렸다.
천무맹의 인원들이 들어왔던 조그마한 통로 그곳을 막아버리면
분지 내에 있는 인물들이 도망을 치고자 한다면 조금 전 천마맹 인물들이 있었던 곳이고 지금은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이곳밖에 없다.
여자들과 갈태독을 제외한 전 인원이 이곳에서 육포를 씹어먹으며 유일한 통로를 막고 있었다.
"자네 뭐하나?"
활에 시위를 먹이고 있는 백산의 행동을 보며 서문천이 물었다. 구경만 해도 될 상황인데도 또 다시 활을 준비하는 백산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된 것이다.
"균형을 좀 맞춰 주려고."
'독한 놈!'
서문천이 생각하는 백산이란 놈은 지독히 독한 놈이란 것이었다.
세 개의 세력이 공평하게 싸우다 공멸(共滅)하라고 좀 강하다 싶은 놈들을 활로 쏘아서 먼저 저승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그의 화살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도 막을 수 없었는지 목에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인물들이 부지기수였다.
지금은 주로 천마맹의 인물들에게만 화살이 날아가고 있었다.
오십여 개의 화살이 다 떨어졌는지 허전해진 전통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던 백산이 죽어있는 천마맹 인물의 옷을 하나 벗겨 자신이 걸치고 있다.
"또 왜?"
"화살 찾아와야지. 다 돈인데."
무섭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있는 모습이 마치 악마의 미소 같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백산의 모습.
한 손에 도를 뽑아들고 달려드는 녀석들에게 가볍게 찔러 넣는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그가 해쳤다고 생각하기도 힘들만큼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서로의 목숨을 취하는 데만 모든 정신이 팔려있는 무림삼천의 인물들은, 죽어버린 시체의 몸에서 화살을 뽑고 있는 백산의 행동을 누구도 주시하지 못했다.
아니 아예 다른 사람의 행동에는 눈길을 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더 옳은 말이다.
그리고 화살을 찾아 움직이다 자신 옆에 있는 천마맹의 인물들을 날아오는 검을 향해서 가볍게 밀어 넣는 짓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봐, 괜찮아?"
바로 앞에 있는 황의인 한 명이 팔에 상처를 입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주춤주춤 물러나는 것을 보고 백산이 말을 걸었다.
"약간 스쳤을 뿐 괜찮네."
뒤로 고개를 돌리며 말하는 황의인을 향해서 흑의 복면인 한명이 기회를 잡았다는 표정으로 검을 찔러오고 있었다.
뒤에서 살기를 느낀 황의인이 자신의 도를 들어 막으려 했으나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왜?"
자신의 가슴에 검이 관통한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황의인이 백산을 쳐다보며 물었다. 가슴을 찔렀던 검보다 자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동료의 행동이 더 의아했던 것이다.
"궁금해하지 말고 그냥 죽어. 저놈도 같이 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죽어 가는 황의 대한의 팔 사이로 자신의 도를 흑의인의 목으로 찔러 넣으며 하는 말이었다.
그러기를 일 각여 화살을 다 찾았는지 다시 일행이 있는 부근으로 돌아왔다.
백산을 바라보고 있는 무욕 십대고수 네 명을 비롯한 남궁지우의 몸이 자신들도 모르게 부르르 떨렸다.
무섭도록 차가운 행동이었다. 저 혼전 속을 마치 산보 다니는 것처럼 움직이며 순식간에 수십 명의 인물들을 해치고 돌아온 것이다.
그러고도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살우야, 육포 좀 줄래?"
"허!"
'저 자들 중 이곳에서 살아 나갈자는 아무도 없겠군.'
석숭은 이미 예상했었고 서문천은 이제서야 깨달았다.
서문천의 생각과는 달리 살아나고자 애를 쓰는 이들도 있었다.
"최대지, 병력을 뒤로 돌려라. 후퇴한다!"
너무나 많은 희생이 나고 말았다. 자신의 실책이었다. 좀 더 신중하니 부하들을 투입했었어야 했다.
순간적인 분노에 앞 뒤 안 가리고 뛰어들었던 것이 실수였다. 단 한번의 실수가 거의 모든 부하들을 희생시키고 말았다.
일단 후퇴를 했다가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정철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황의인의 몸을 잘라가고 있었다. 서로 간에 옷을 바꿔 입은 듯이 천무맹은 검은 옷을 입고 있었고 천마맹은 황의를 입고 있었다.
그가 배운 무당의 검법은 유운검법(流雲劍法), 속가제자들에게만 전하는 검법이다.
삼재검법(三才劍法) 다음으로 보잘것없는 검법. 그것 하나 주고 생색은 얼마나 냈던가. 그러나 실망하지 않았다.
삼재검법과 유운검법을 합쳐서 유운삼재검법(流雲三才劍法)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검법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 오늘의 자리까지 올랐다.
"분타주님, 퇴로가 막혔습니다."
'허허! 결국은 여기서 뼈를 묻어야하는가.'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자신들이 들어온 곳을 제외하고 유일한 통로는 천마맹 인물들이 내려왔던 곳이다.
그 쪽 방향으로 빠지기 위해서는 천마맹의 정예를 뚫고 지나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나가기도 전에 전멸할 것이다.
"검진을 펼쳐라. 내가 앞장선다."
다비천검 정철이 모든 것을 걸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검진의 가장 앞으로 나서며 무차별하게 검을 휘둘러댔다.
모두가 죽어가고 있었다. 힘이 있는 자 힘이 없는 자, 상대의 심장을 찌르고 난 후 살아남았다며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을 때
문득 가슴 쪽에서 오는 통증에 아래를 쳐다보면 붉은 검이 고개를 내밀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빌어먹을 세상이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무너지듯 그대로 쓰러지고 그 위로 또 다른 피가 뿌려지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떻게든 살아보기 위해서 발버둥을 쳐보지만 허망한 몸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내 깨닫게 된다. 자신의 목을 관통하고 있는 검을 보았기 때문이다.
죽고 죽이는 전쟁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먼동이 터 옴과 동시에 사방에서 희뿌연 빛 무리가 용주석주경을 타고 들며 조금씩 절벽을 비추면서 분지에 뿌려지고 주변의 정경이 드러났다.
죽음의 산이 만들어져있었다.
칠십 장 정도 크기의 분지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시신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서로 농담을 하며 웃어주던 수많은 동료들이 같이 쓰러져있었다.
이건 전쟁이 아니다. 살육이고 도살이고 악몽일 뿐이다.
때로는 죽은 자보다 살아 남은 자들이 더 힘이 든 것인가. 지금 남아있는 자들의 심정이 그랬다.
다비천검 정철이 그랬고, 무면마룡 암사월이 그랬고, 혈인귀 방대운이 그랬다.
"나와라!"
정철의 메마른 고함소리가 메아리 되어 사방으로 울러퍼졌다. 밤새도록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지만 아직 힘이 남아있던가!
아니었다. 남아 있는 것은 힘이 아니라 분노의 찌꺼기였다. 분노의 감정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것이 마지막 힘이 되고 있었다.
"왜, 이제는 조금 마음이 쓰린가?"
놈들이었다. 천마맹인물들이 은신해있던 그곳에서 이십 여명의 인물들이 천천히 걸어 내려오고 있다.
"잔인한 놈! 전부 다 죽여서 만족하느냐? 이 많은 사람을 다 죽여서 속이 시원하냐고."
"취익! 뭔가 착각하고 있군. 저기 죽어있는 이들을 이곳으로 밀어 넣은 이가 당신들 아니었나?
내가 이곳에서 싸우라고 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아는데? 그리고 아직 다 죽은 것이 아니잖아. 너희들이 살아있으니 말이야. 너희들까지 죽어야 다 죽은 것이 된다고."
"이익!"
정철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이 분지 안으로 부하들을 밀어 넣은 사람은 자신이었다. 한 명이라도 더 죽이라 고함을 지른 사람은 놈이 아닌 바로 자신이었던 것이다.
결국 자신이 수하 사백을 모두 죽이고 말았다.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내 인생을 망친 놈의 얼굴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정철이 내 인생을 망친 놈이라 하고 있다. 스스로 인생을 망쳤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저들을 노리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자신의 야망을 이루어 줄 부하들의 목숨만 소중하고 아까운 것이다.
"크 하! 하! 하! 하!"
비통한 웃음소리와 함께 백산 일행을 노려보며 피로 점철된 정철의 검의 방향을 틀었다.
푹!
야망이 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정철의 몸이 서서히 대지위로 쓰러졌다.
속가제자에서 천무맹의 안휘분타주로, 출세가도를 달리던 한 야망자의 꿈이 차디찬 대지위로 스며들었다.
정철이 마지막 죽음의 길목에서 남긴 것은 분노의 감정이 가득 담겨있는 부릅뜬 눈이었다.
"너희들은?"
정철의 죽음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백산이 고개를 돌리며 남아있는 삼인을 향해 왜 자살을 하지 않고 그러고 있느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허! 완전히 당했군. 이 소지악이 너 같은 햇병아리에게 당하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구나. 갈태독은 오지 않았느냐?"
"너는 자결 안 하냐고 묻고 있잖아 새꺄! 왜 묻는 말에는 대답 안 하고 딴소리하는 거야."
"이런 육시랄 놈이."
백산의 말에 어이가 없었는지 혈마 소지악의 얼굴이 붉어졌다.
감히 자신이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무공은 좀 강해 보이지만 천장지옥마가 없는 이들은 별 게 아니라 여겼다.
무욕고수 네 명이 있다하더라도 철목승 이외에는 상대로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단지 갈태독이 있다고 하기에 조금 걱정을 했었는데 그가 없는 이들은 오합지졸일 뿐이다.
전쟁을 치르다 보면 부하들의 죽음은 언제나 있는 일이다. 그 때문에 자살을 한다면 이세상에 장수는 한 명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바보 같은 놈들이나 하는 짓이다. 세상에 출세를 원하는 무인들은 넘쳐난다. 그들을 데려다 또 키우면 부하가 되는 것이다.
기회는 다시 찾아오는 것이고 살아서 기다려야 한다. 소지악이 백 삼십 년을 살아오면서 터득한 인생철학이었다.
이십 명 정도 되어 보이지만 자신이 몸을 빼고자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적을 두고 도망가야 한다는 점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맹에 다른 부하들이 남아있고 재기의 기반은 있다. 여기서 개죽음 당할 필요가 절대 없는 것이다.
"너는 자살을 하게 될 거야. 부하들이 다 죽었는데 혼자만 살면 안 되지. 반드시 자살을 할 거야."
확신에 찬 얼굴을 한 백산이 자신의 도를 뽑아들고 혈마 소지악 앞으로 다가서고 그 뒤를 이어 소살우가 암사월 앞으로, 부상에서 회복한 찍새가 방대운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봐 늙은이 자살할 무기 없어?"
"너 같은 애송이에게 도가 필요할까?"
백산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소지악의 표정은 침착했다. 극고의 경지에 다다른 자에게서 나오는 안정감이었다.
벌써 삼십 년 전에 무기가 필요 없는 경지에 다다랐다.
아무거나 손에 잡으면 도이고 검이 된다. 날카롭고 무딘 것은 문제가 아니다. 다만 살이 잘리는 느낌이 좋지 않아서 맨손을 사용하지 않을 뿐이었다.
내공을 끌어올리는 소지악의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솟아나오고 주변에 흩어져있던 시체들이 밀려나가며 공터가 형성되었다.
어느새 주워들었는지 그의 손에는 나뭇가지 하나가 들려있었고 백산의 미간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내밀어진 채 붉을 도강을 뻗어내고 있었다.
'사월아, 준비해라.'
소지악이 암사월에게 전음을 날렸다. 백산을 죽임과 동시에 몸을 빼내려는 것이다.
'사부님!'
암사월이 안타까운 눈으로 소지악을 쳐다보았다. 그는 이미 이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부조차도 저자의 강함을 파악하지 못하고 우습게 생각하고 있질 않는가. 정녕 무서운 자였다. 천여 명을 몰살을 시켜놓고도 조그마한 동정심도 내비치지 않는다.
인간이 아니라 감정이 죽어버린 살성을 보고있는 것 같았다.
"나는 도(刀)를 쓸 거다. 무쇠로 만들어진 튼튼한 도(刀)를…."
백산이 달려나가며 소지악을 향해서 외쳤다. '천방지축팔방무.' 엉성한 보법이 펼쳐지며 그의 도가 소지악의 사방을 조여가며 붉은 혈광을 쏟아내었다.
캉! 카앙!
백산의 파상적인 공격을 소지악은 가만히 서서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내심으로 상당히 놀랐다.
비록 나뭇가지였지만 도강으로 감싸고 있기에 부딪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잘려나가게 된다.
그런데 놈의 도는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흠집하나 나지 않고 있었다.
상체만을 공격하던 백산이 그 자리에서 주저앉으며 하체를 향해 횡으로 쓸어가며 한바퀴 돌아버린다.
그의 도를 피하기 위해서 허공으로 솟아오른 소지악의 아랫도리를 향해 재빠르게 도를 찔러가고 있었다.
찌이익!
"허억!"
소지악의 입에서 다급한 신음성이 흘러나오고 허공에서 회전을 하며 뒤쪽으로 내려섰다.
찌르기라니… 도를 이용해서 찌르기를 시도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직면한 소지악의 눈에 놀람의 빛이 나타났다.
도는 베기를 위주로 하는 것인지 찌르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즉 도법에는 결코 찌르기라는 초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 저놈도 초식에 구애받지 않는 경지란 말인가?'
도를 가지고 찌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초식이 필요 없는 경지에 올랐다는 뜻이다.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음이다.
"네가 너를 너무 경시했군."
백산의 무위가 자신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일류 수준을 넘어선 고수라 생각했는지 뒤로 물러선 그의 몸에서 붉은 혈광이 어리면서 주변의 시체들이 터져나가고 있었다.
드디어 자신도 진실한 무공을 전개하려는 것이었다.
"혈영도천세(血影刀天勢)!"
소지악의 젊은 시절의 독문 무공이며 혈마란 별호를 만들어주었던 혈영도법(血影刀法), 도강을 동반한 엄청난 강기들이 백산을 향해서 덮쳐가고 있었다.
"혈극참!"
백산의 입에서도 낭랑한 외침과 함께 그의 도에서도 붉은 도강이 쏟아져나오며 소지악이 만들어 놓은 도강을 향해서 물밀 듯이 밀려가고 있었다.
피보다 더 붉은 두 개의 도강이 두 사람의 중앙에서 무섭게 얽혀들었다.
키이잉! 카카강!
나뭇가지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라고 믿을 수 없는 거북스러운 소리가 울려퍼지고 소지악이 선 상태 그대로 뒤쪽으로 죽 밀려났다.
'공세를 잡으면 끝날 때까지 밀고 가라.' 투귀 오구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백산은 약하다고 봐주는 것이 없다.
백산의 몸이 비호처럼 소지악의 뒤를 따르며 허공에 있는 상태에서 두 사람의 무기가 서로 부딪치기 시작했다.
챙! 챙! 차앙! 챙! 차앙!
두 사람의 몸과 도에서 뿜어져나온 강기들이 폭풍처럼 분지 안을 유영하며 춤을 추는 듯이 보였다.
소지악의 나뭇가지에서 일장 크기의 붉은 도강이 나와서 사방을 쓸어가고 이에 질세라 백산의 도에서도 도강의 폭풍이 흘러나와 그 뒤를 따랐다.
거의 일각 정도를 허공에서 부유하는 형태로 싸우던 백산이 갑자기 그 자리에 내려섬과 동시에 소지악을 향해서 일초의 도법을 시전했다.
이번에는 완전한 혈극참을 펼친 것이다.
백팔 개에 달하는 붉은 도강이 솟아나와 소지악이 서있는 곳의 모든 공간을 찢어발기며 거칠게 밀려들어갔다.
'저럴 수가!'
기겁을 한 소지악이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붉은 도강의 벽을 쌓았으나 선공을 잡힌 소지악으로서는 역부족이었다.
그의 앞쪽으로 길게 파여진 두 줄기의 흔적이 이번 격돌에서 그가 밀렸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자신이 밀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음인지 소지악의 얼굴이 경악스런 표정으로 변하며 패배의 흔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제 갓 약관을 넘어 보이는 놈에게 자신이 밀리다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이 생성된 도강이라니….
"그게 무슨 도법이냐?"
자신도 도(刀)를 다루는 무인이었고 평생 도와 함께 살아왔다. 그런데 저렇게 강한 도법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이거나 받아, 새꺄!"
얼이 빠져있는 소지악을 향해서 뇌까리며 백산이 자신의 도를 그냥 허공으로 던졌다.
언뜻 보기에는 그냥 돌팔매질을 하듯이 그렇게 던지는 것 같았으나 소지악의 눈에 보이는 도(刀)는 산악이었고 하늘이었다. 어도술로 보기에는 너무나 강한 위력이었던 것이다.
"어도술에다 도강기를 포함시켜서…."
그의 눈에도 선명하게 보였다.
날아오는 도에 솟아있는 이장 크기의 도강.
무공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찌 몸에서 떨어진 무기로부터 도강이 솟아나온단 말인가.
그러나 한가하게 구경할 시간이 없었다.
"혈영무극세(血影無極勢)!"
이초인 혈영도극세(血影刀極勢)만으로 안 되겠다 싶었는지 마지막 삼초인 혈영무극세를 펼쳤다.
'허억!'
소지악의 입에서 나온 헛바람소리였다. 자신의 손짓에 따라 주변에서 떠올라야 될 도검들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백산의 술수였다. 소지악과 허공에서 얽혀들었을 때 지금 자신들이 있는 십여 장 정도의 공간에 널브러져있던 모든 시신들과 무기를 가루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소지악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였고 자신의 주변에 아직도 죽은 시체와 그들의 무기들이 널려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다급해진 소지악이 자신의 유일한 무기인 나뭇가지를 이용해서 재빠르게 대응을 했으나 너무 늦었음이 금방 드러났다.
"크억!"
뒤로 물러나던 소지악이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소지악의 실책. 나뭇가지 등을 이용하여 폼잡는 것은 자신보다 한참 하수에게 시범을 보일 때나 쓰는 방법이다.
자신과 비슷하거나 우위에 있는 자와 싸우면서 진도(眞刀)에 대항하여 나뭇가지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미 패배한 것이나 진배없다.
아무리 병기가 필요 없는 수준에 도달해 있어도 병기가 주는 이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신검(神劍)이나 신도(神刀)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신검 신도가 하류무사를 고수와 대등한 수준으로 만들어주는 효과도 있지만 극강한 고수일수록 더 필요한 것이 훌륭한 병기인 것이다.
자신의 모든 힘을 수용할 수 있는 병기, 그런 병기가 있어야 대등한 실력의 고수와의 대결에서 우위에 설 수 있음이다.
분명한 소지악의 실책이었다.
또한번의 패배였다.
오십 년 전 한 가문의 도법에 패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십 년간을 노력했다.
이제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가문의 도법보다 더 강한 도법이 나타난 것이다.
두 사람의 대결을 보고 경악한 사람들은 또 있었다.
무욕고수 네 명과 남궁지우가 그들이었다. 전설의 구마(九魔), 그 중 혈마 소지악이 단 이 초만에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는 것을 보고 있었다.
자신들과 대등하거나 더 높은 무위를 가지고 있는 소지악이었고 그가 땅바닥에 무릎을 대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석 공자, 저 친구 원래 도를 썼나?"
허세가 좀 있는 친구이니까 폼으로 도를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알았지 백산이 도법을 사용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남궁지우가 석두를 향해서 물었다.
남궁지우뿐 아니라 석숭을 제외한 누구도 백산이 도법을 펼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심지어는 석두와 광견조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귀혼곡에서 한번 펼친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광견조와 석두가 기절해 있어서 보지를 못했던 것이다.
백산이 가지고 있는 열 두 개의 비도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백산의 사부가 팽무도였다는 것을 잊고 있었는지 모른다.
"사부가 도의 달인인데 도를 쓰지요. 그리고 지금은 도법만 사용해야 될 상황이고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도법만 써야될 상황이라니."
"사부의 복수이니까요."
석두도 백산이 도만을 사용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오십 년 전 사부들의 가문을 파멸시키게 한 백살마대의 음모, 그 음모의 주역 중의 한 명인 혈마 소지악 아니던가.
그를 처단하기 위해서 백산이 도만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부가 누구이기에…."
남궁지우의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백산의 말이 그의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내 사부가 백살대 대장이야, 네놈들이 백살마대로 만들었던 천하제일도 팽무도란 말이다."
"뭐라고? 또 팽가란 말이냐, 그것도 팽무도였고?"
온몸을 경직시키며 커다란 고함을 내지른 소지악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자신들이 괴멸시킨 백살마대의 대주가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놀람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유일한 패배를 주었던 가문의 도법이었고 그 당사자인 팽무도라 했기에 더욱 놀란 것이다.
그놈을 넘기 위해서 평생을 노력했는데 또 다시 놈의 도법에 의해서 패했다.
세상이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십 년 전에 도를 뽑았다가 팽무도에게 패했는데 그로부터 오십 년 후에 뽑은 도는 그놈의 제자에게 패했다. 영원히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그 영감이 직접 네놈을 죽여야 하는데 기력이 딸려서 말이다. 이제 그만 부하들 옆으로 가라."
말을 마침과 함께 백산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혈극망(血極忘)!"
모든 것을 잊기 위해 만든 도법, 자신에게 도를 던진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세상에 대한 분노도 모두 잊고자 했던
팽무도의 염원이 담긴 한천팽무도법의 삼초 혈극망이 죽음의 기운을 머금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허허허!"
더 이상 대항해봐야 자신만 초라해질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 어린 녀석은 자신보다 하수가 아니었다. 반항할 의지를 상실했는지 소지악이 자신 앞으로 다가오는 붉은 기운을 가만히 쳐다보며 허탈한 웃음을 토해냈다.
혈마 소지악.
상관마저도 배신하며 중원의 패자가 되고 싶어했던 인물,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를 잡고자 모든 노력을 다 했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가루로 무너져내렸다.
모두가 죽었다.
간밤에 이곳에 왔던 무림삼천의 모든 인원들이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모두 죽었고 무수한 시체만 남았다.
팽무도의 얼굴이라도 그리고 있는지 허공에 멈춰선 백산이 남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해요, 사부. 찾아오는 놈만 해결할 거요. 찾아다니면서 처리하지는 않을 거요. 왜냐면… 귀찮으니까 그렇지 뭐.'
조천영과 약속 때문이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장가도 가기 전에 벌써부터 쥐어 산다고 욕을 먹을 것 같기 때문인가 보다.
"누님 때문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허공에다 대고 삿대질을 한번 한 백산이 몸을 돌려 일행이 있는 곳으로 내려섰다.
꿈꾸고 있는 사람들.
백산의 무위에 꿈꾸는 자들이 무욕인들이라면 팽무도란 이름 석자에 놀란 사람은 남궁지우였다.
"그랬어, 그랬던 거야… 프 하하핫! 으 하하핫!"
기쁨에 찬 남궁지우의 웃음소리가 구화산에 울려퍼졌다.
친형과 의형이 같이 살고 있었고 그 두 사람의 무공을 익힌 제자들이 강호로 돌아왔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닐지라도 그분들의 제자들이 왔다 함은 그분들이 더 이상 숨어있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형님! 많이 외롭지는 않았겠구려.'
축축이 젖어있는 남궁지우의 눈길도 남쪽을 향했다.
남궁지우의 웃음소리도 듣지 못했는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있는 무욕인들은
자신들의 어깨를 툭 치며 휘적 휘적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백산을 따라서 마치 혼이 없는 강시처럼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생각은 하고 있었다. 이 괴물 같은 놈들의 행위에 다시는 놀라지 않을 것을 마음속 깊이 다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굴도 돌아온 일행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육포 값 좀 하시려우?"
일행의 떠나는 준비를 돕고 있는 무욕인들을 향해서 백산이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이간질시켜서 동패구사?"
서문천의 말에 빙그레 미소만 짓고 있었다.
아직 구화산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다비천검 정철과 혈마 소지악의 뒤를 받치기 위해서 나와있는 천무맹과 흑사파를 없애버려라 하고 있는 것이다.
"몇 놈은 살려주어도 상관없소."
거의 다 보내라는 소리였다.
"낙양에서 봅시다. 여기 육포."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잘보았습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즐독 ㄳ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