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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2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제1독서 : 1사무 8,4-7.10-22ㄱ
복 음 : 마르 2,1-12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신혼부부가 집들이로, 신랑이 결혼 전에 열심히 활동했던
본당 청년회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사실 이 초대는 아내가 먼저 제안한 것입니다.
젊은 시절 열심히 활동했던 남편의 친구들을 초대하면 남편이 좋아하리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남편이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마음이 집들이하면서 좋지 않아졌습니다.
남편이 특별히 청년회 안의 여성들과 유난히 친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질투인가?’라는 마음도 들었지만, 남편이 해도 해도 너무한 것 같았습니다.
자기는 부엌에서 나오지 못할 정도로 바쁜데
도와주기는커녕 한 번도 들여다보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남편 친구들이 도와준다고 들어왔지만,
남편은 자기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손님들이 모두 간 후, 이 부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내가 먼저 “여자 친구들 오니까 너무 좋아하더라.”라며 빈정대듯 말했고,
이 말에 “네가 초대하라며?”라며 대꾸합니다. 남편의 말이 틀리지 않았지요.
그러나 너무 서운했고 화가 나는 등 부정적 감정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문제일까요? 아내는 처음에 가졌던 좋은 마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의 호의를 대수로이 생각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둘 다 사랑 자체에 집중해야 했던 것입니다.
자기 뜻을 따르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그 자리에 사랑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사랑을 말씀하셨고, 이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굳은 믿음을 통해서 완전해집니다.
우리 인간의 불안전한 사랑을 넘어 주님의 완전한 사랑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지붕을 벗겨서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풍 병자와 함께 한 사람들과 병자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병자가 낫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행동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율법 학자 몇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에,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중풍 병자의 치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당신 신성을 보여주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11)
주님께서는 사랑이 있는 곳에 당신 사랑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다가가야 합니다.
더군다나 중풍 병자를 내려보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시는 모습을 보면, 우리의 사랑으로도
충분히 이웃을 도와줄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떤가요?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말합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유다인은 예로부터 죄의 용서를
하느님의 고유 권한으로 여겼습니다(탈출 37,4;이사 43,25;44,22).
그런데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오직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더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마르 2,11-12)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치유 받은 이들입니다.
이미 용서받은 이들이요,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제거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인 까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치유 받았다고 해서, ‘들것’을 버리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더 이상 ‘들것’에 매여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상처’도 그럴 것입니다.
치유 받았다고 해서, ‘상처’를 굳이 제거하고 없앨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
렇다고 더 이상 매여 있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기꺼이 ‘들것’을 들고 다녀야 합니다.
‘상처’도 그럴 것입니다.
이제는 오히려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 들고 집으로 가야 합니다.
마치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들것’ 위에 인류를 태워 아버지께로 들고 가셨듯이 말입니다.
십자가라는 ‘들것’ 위에서 ‘상처’을 받으시고
바로 그 ‘상처’로 보혈의 피를 흘리시고 우리를 화해시키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들것’입니다.
그 ‘들것’ 위에는 ‘상처’가 새겨져 있습니다.
‘구원’의 표지입니다. ‘사랑’의 표지, ‘용서’의 표지입니다.
그러니 진정, ‘상처’에서 흐르는 용서의 피를 마실 때라야,
우리는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것을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됩니다.
용서야말로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11)
주님!
들것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가게 하소서.
들것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당신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듯,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대림 때입니다. 저는 주로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글을 읽으면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글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대림시기에는 ‘대림성가’를 들으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대림시기에 성탄성가를 듣는 것은 수고하지 않고 열매를 얻으려는 마음과 같습니다.
대림시기에 성탄성가를 듣는 것은 출산의 고통 없이 아이를 낳는 것과 같습니다.
대림시기에 성탄성가를 부르는 것은 상업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성탄의 기쁨은 성탄시기에 찬양해도 좋습니다.
대림시기에는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며 경건하게 대림성가를 듣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글을 읽은 후에 대림시기 동안 ‘대림성가’를 들으면서 지냈습니다.
주위 분들에게도 저의 마음을 누었습니다.
대림성가를 들으면 마음이 경건해지고, 차분해졌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듣고 대림성가를 주로 들었던 분들도 같은 느낌이었다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대림시기는 주님의 오심을 깨어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2000년 전에 우리에게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앞으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억하고, 기다리지 않는 이들에게 성탄은
1년에 한 번씩 다가오는 축제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임금’을 세워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임금이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을 외적의 침입을 막아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임금이 있으면 이스라엘에 질서와 평화가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임금이 있으면 갈등과 분쟁을 해결 해 줄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임금이 있으면 벌어질 일들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다스릴 임금의 권한이오.
그는 여러분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자기 병거와 말다루는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오. 천인대장이나 오십인 대장으로 삼기도 하고,
그의 밭을 갈고 수확하게 할 것이며, 무기와 병거의 장비를 만들게도 할 것이오.
그는 여러분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 제조사와 요리사와 제빵 기술자로 삼을 것이오.
그는 여러분의 가장 좋은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밭을 빼앗아 자기 신하들에게 주고,
여러분의 곡식과 포도밭에서도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 내시들과 신하들에게 줄 것이오.
그제야 여러분은 스스로 뽑은 임금 때문에 울부짖겠지만,
그때에 주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오.”
사무엘은 임금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세주가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임금은 큰 권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할 수 있다고 충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임금을 세워달라고 하였고,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임금을 얻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또 다른 임금의 모습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권한이 있지만 권한을 내세우지 않고 백성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의 모습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주고, 묶인 이를 풀어주고, 갇힌 이에게 자유를 주고,
아픈 이를 치유해 주고, 굶주린 이를 배부르게 하는 임금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기꺼이 섬기는 임금입니다.
참새도 집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머무를 곳도 제대로 없는 임금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하는 임금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건강함보다 아픔을 택하는 임금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하는 임금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 임금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임금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새로운 임금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신앙은 선택입니다.
세상의 임금이 가지는 권한과 권력을 추구할 것인지,
하느님의 아들이 보여주신 겸손과 십자가 를 추구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명의이십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몸에 향수를 뿌리고 얼굴화장을 하여도 근본적인 몸과 얼굴은 변하지 않습니다.
새 옷을 갈아입고 치장해도 그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겉모양이 달리 보일 뿐입니다.
마음은 그대로 두고 요란을 떨면 떨수록 본래의 모습은 찾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를 당신 앞에 내려놓은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2,5).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외적인 중풍 병을 고치려고 왔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원인을 치료시켜 주심으로 사람의 근본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평범한 의사는 상처를 다스리고 명의는 뿌리를 다스린다고 했는데 바로 우리의 주님이 명의이십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뿌리에 생명을 더하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또한 중풍 병자를 데려온 이웃 사람의 믿음을 귀하게 보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겉은 멀쩡한데 속이 뒤틀린 사람이 있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고,
탓을 남에게 돌리며 투덜대기 좋아하는 사람,
정말 치유를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처지를 다 꿰뚫고 계시니
그분 앞에 서슴없이 나의 모든 것을 열어드려야 하겠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 하지 않는 영혼은 중풍 병에 걸렸거나 손발이 부자유스럽게 된 사람과 같아서,
손과 발에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듣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만약에 이런 영혼들이 그 커다란 비참을 깨닫지 못하고,
따라서 스스로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롯의 아내가 고개를 돌리다가 소금 기둥이 된 것처럼
자기한테서 머리를 돌린 탓으로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 것”(영혼의 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중풍 환자, 즉 영적인 감각을 상실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접하고도 아무런 깨달음을 갖지 못하고
은총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장애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읽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거나
또 설령 읽었어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상태가 중풍 환자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기도 안에서 치유 받기를 희망합니다.
이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생각합니다.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의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자 지붕을 벗겨내는 열성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마르2,4).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위해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할 수 있는 마음을 담고 있는가?
또한 나를 위해 그렇게 해 줄 이웃이 있는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이웃사촌이라 하지만 요즘 세상은 서로를 너무 모르고 지내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웃을 향한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길 청하면,
주님이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실 것입니다.
겉모양도 중요하지만, 속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사람들이 중풍 환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넘어야 할 두 가지 장벽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군중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가니까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목적과 소신으로 가야 합니다.
나의 인생은 남이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요,
군중에 떠밀려 가듯이 가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자기 인생의 선장입니다.
두 번째의 장벽은 지붕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를 들것에 매달아 내려보냈습니다.
막히면 뚫고 걷어내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기적을 낳습니다.
그 믿음이 내 믿음이든 다른 사람의 믿음이든 믿음을 갖고 하는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들 것에 누워 있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고,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혹 누워 있다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호의와 친절을 겸비한 따뜻한 이웃이 필요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중증 중풍으로 인해 사람들에 의해 들것에 실려
예수님께로 온 환자를 바라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숨 쉬는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갓난아기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화장실 가는 것, 옷 갈아입는 것, 씻는 것,
밥숟가락 드는 것조차 스스로 할 수 없으니,
그 삶이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이렇게 맨날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들었지만, 그것조차도 불가능했습니다.
살다 보면 때로 우리 역시 중풍 병자 같은 처지에 놓이기도 합니다.
깊은 수렁 속에서 한번 빠져나오기 위해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도무지 빠져나올 도리가 없습니다.
생각은 간절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연민과 자비로 충만하신
하느님의 따뜻한 손길입니다.
더불어 호의와 친절을 겸비한 따뜻한 이웃,
내 이 비참한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줄 동료들입니다.
천만다행으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 병자에게는
바로 그런 이웃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치유자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은 네 사람은
중풍 병자를 들것에 실어 그분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거처에 도착해 보니,
또 하나의 높은 벽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사도들로부터 대기 번호표를 받았는데, 500번이었습니다.
순번을 지키다가는 사흘을 기다려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고민고민 끝에 그들은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짜내고 즉시 실천에 옮깁니다.
지붕 위로 올라가 지붕을 뚫는 것이었습니다.
이쯤 해서 아래로 한번 내려가 볼까요?
아래 거실에서는 예수님께서 치유 활동에 전념하고 계셨습니다.
갑자기 지붕 위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지붕이 열리더니
나뭇가지며, 잡동사니들이 우르르 떨어졌습니다.
잠시 후에 밧줄에 매단 환자가 내려왔습니다.
“자, 천천히. 조심조심! 수평을 맞추고,
지금 너무 왼쪽으로 기울었으니, 오른쪽으로. 오케이!”
이윽고 예수님 바로 앞으로 내려온 중풍 병자!
너무나 특별한 광경에 많이 당황하셨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지극정성을 크게 평가하십니다.
중풍 병자 입장에서는 또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모습에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쉼 없이 흘렸을 것입니다.
나를 들것에 싣고 그 먼 길을 뛰어온 공동체 구성원들의 모습,
나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모습에,
반드시 치유되어 백배 천배로 갚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일이지만, 세월이 흐르고 흐른 어느 날,
우리도 오늘 중풍 병자처럼 하늘만 쳐다보고 누워 있게 될 것입니다.
들것에 눕혀 어디론가 실려 갈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들것이나 침대, 휠체어에 의지하고 계신
어르신들, 선배들, 부모님들, 환자들을 지극정성으로 대해야겠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잘 돌봐드려야겠습니다.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겠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신 사람의 아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어느 집에서 가르치시는 동안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2절)
그때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와서
그분 앞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군중 때문에 데려갈 수가 없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에 젖어있으면,
우리가 달콤한 기도에 빠져 주님과 달콤한 속삭임을 나누는 동안에도
세상의 잡념들이 군중처럼 몰려와 영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갈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집의 지붕 위로 올라가야 한다. 즉 말씀을 향하여 가야 한다.
예수님은 중풍 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5절) 하신다.
주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고쳐주셨다.
하느님 외에 아무도 죄를 용서해 줄 수 없다(7절).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고쳐주셨으니,
참으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 말씀이심이 분명하다.
그분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분이시다.
율법 학자들에게는 이러한 말이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그들 신앙의 본질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의 발언이었다.
이러한 죄는 레위 24,16에서 돌로 쳐서 죽이는 죄에 해당하였다.
그래서 율법 학자들은 분개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7절) 하고 중얼거렸다.
그들은 하느님 밖에 아무도 죄를 용서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분이 그러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 것을 모른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9-11절) 하시자
중풍 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요를 가지고 걸어 나갔다.
이 중풍 병자는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를 받았다기보다 친구들을 통하여 기적을 체험하였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이웃의 도움을 통하여 갖게 된 예도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이러한 기적을 체험할 수 있게 지붕을 벗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병과 죄의 관념적 유대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께서 나병환자에게 외적인 깨끗함뿐 아니라
내적인 깨끗함을 베풀어 주신 후 며칠이 지나 다시 가파르나움으로 오셨다.
가파르나움의 집이라 함은 시몬 베드로의 집을 말한다.(마르 1,29)
아마도 예수께서 갈릴래아 지방의 복음 선포를 위해
시몬의 집을 거점으로 삼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예수께서 시몬의 집에 다시 오셨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졌고,
삽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문 앞까지 가득 찼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다.
마침 중풍병자 하나를 네 사람이 들고 왔으나 들어갈 수 없음을 알고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벗겨내고 구멍을 내어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병자를 내려보냈다.
생각할수록 기막힌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더욱 더 기막힌 것은 그렇게 내려보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께서 병을 고쳐 주시는 대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5절)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집약하여 보도하는 책으로 착각하면 큰일이다.
기적은 분명 놀라운 일이고 늘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매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는 기적이 대수가 아니다.
마귀들린 자, 나병환자, 오늘의 중풍병자 등
어떤 모양의 물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은
예수께 있어서 그리 큰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일들을 도구로 더 큰 일을 생각하고 계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는 믿음과 용서이다.
기적을 베푸는 자는 예수님이시나 그 기적을 유발시키는 힘은
기적을 베푸는 자에 대한 믿음이다.
중풍병자를 들것에 들고 지붕까지 벗기면서 예수께 내려보낸 네 사람은
적어도 믿음에 있어서는 같은 마음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병자를 고쳐 주실 수 있고,
또 고쳐 주실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왔으며,
들것에 실려있는 병자도 같은 믿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이 뜻밖에도 ‘죄의 용서’를 만나게 된 것이다.
罪 때문에 病이 온다는 생각은 이미 구약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사실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생각이다.
오늘날 누가 아프거나 병에 걸렸는데 병원에 가지 않고 고해소를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대의 우리는 질병의 원인을 도덕적인 잘못에서 찾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의 사람들은 달랐다.
굳이 죄 때문에 병이 드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병의 원인을 죄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구약의 율법이 온갖 악성 피부병을 ‘不淨’하게 본 것은 사실이다.(레위 13-14장)
레위기가 깨끗하지 못한 것을 죄라고 단정하지는 않았지만,
不淨함을 죄의 맥락에서 보았던 것이다. 욥기를 보아도 그렇다.
욥이 악마의 시험으로 죽을 피부병에 걸려서 갖은 고통을 받다가
결국은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지 않는가?(욥 9,2.12.20)
예수께서도 38년이나 앓아 누워 있었던 중풍병자를 고쳐 주시고는
“자, 지금은 네 병이 말끔히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더욱 흉한 일이 너에게 생길지도 모른다.”(요한 5,14)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렇게 볼 때 죄와 병은 결과론적은 아니라 할지라도
관념론적으로 한데 묶여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예수께서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
먼저 ‘죄의 사함’을 베푸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함께 그 장면을 지켜본 율법학자들의 머릿속에
예수의 발언이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땅 위에서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바로 죄 사함의 권한을 가지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라기보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병자의 행동에 의해 증명된다.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는 병자의 행동은 병이 다 나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10절)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율법학자들은 예수께 이러한 권한이 있다는 것을 한편으로는 의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중풍병자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데는 관심이 없고,
중풍이 사라지고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는 기적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우리도 속으로 죄를 용서받기 위해 고백성사를 배령 하기보다
불편한 몸이 좀 나아지기를 바라거나
어려운 경제적 형편이 좀 나아지기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는가?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이승화 시몬 신부
사람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래서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많은 경험을 해야 됩니다.
자신이 쌓은 경험을 통해서
미래에 제대로된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왕이란 하느님의 일을 대신하는 자이지만
동시에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자입니다.
왕이 없어 본 사람은 왕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하느님의 일꾼으로 바라보기만 합니다.
그러나 실제 그들이 만날 수 있는 왕은
자신들 위에 군림하는 자일뿐입니다.
권력은 교만으로 이어지고
시시각각 찾아오는 유혹은 군림하는 자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왕을 허락한 이유도
바로 이런 경험을 통해 하느님을 선택하도록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환상에 빠져서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못하게 됩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사울과 같은 체험도 하게 하고
다윗과 솔로몬과 같은 왕도 체험하게 하여
올바른 길을 알려주십니다.
상황에 따라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오늘 예수님을 보고도 그런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했기에
죄를 용서할 수 없다며 공격을 합니다.
그러나 병자를 데려온 이들은 치유를 받은 경험이 있었기에
예수님께로 병자를 이끌어 옵니다.
이를 보며 우리도 돌아봐야 합니다.
나는 어떤 경험을 통해 하느님을 선택하고 있을까?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은 어떤 경험을 말해주고 있을까?
이러한 질문을 던지면서 자신을 깨닫고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