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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0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이사 55,10-11
복 음 : 마태 6,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많은 회사에서 직원 교육을 합니다.
저 역시도 코로나 팬데믹 전에는 많은 회사에서 특강 부탁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저는 돈을 굴리는 법도 모르고, 회사 구조도 잘 모릅니다.
따라서 제가 하는 강의가 과연 도움이 될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회사에서 인성 교육을 해 달라고 했고, 자기 회사에 꼭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금융, 회계, 인사, 마케팅, 가격 책정 등의 인지적 기량 훈련을 받은 회사가 있고,
주도력, 자제력, 결의 등의 품성 기량 훈련을 받은 회사가 있습니다.
이 두 회사 중에서 어느 회사의 교육 효과가 더 컸을까요?
이 교육은 똑같이 5일 정도에 걸쳐서 이루어졌는데,
그 후 2년에 걸쳐 회사 수익이 평균 30% 증가한 회사가 있었습니다.
업무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인지적 기량 훈련을 받은 회사가 아니라,
품성 기량 훈련을 받은 회사였습니다.
품성 기량 훈련을 통해 훨씬 많은 창의적 아이디어를 창출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신제품을 선포였다고 합니다.
또한 어떤 어려움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문제의 해결을 향해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세상 것을 통해서만 이 세상 안에서 더 잘 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랑이지만,
이 사랑을 예수님께서 강조하셨고, 실제로 이 사랑에 집중하며 사는 사람이
더 행복하게 또 현명하게 지금을 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하느님 나라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삶에서도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큰 사랑으로, 하느님의 계획에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인간이 하느님과 맺어야 하는 단순하면서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서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 나옵니다.
바로 다른 사람을 먼저 용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하느님의 용서를 받으려면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했습니다.
모욕받았음에도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이 자존심도 상하고,
상대방이 나를 우습게 볼 것 같은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지금을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고 굳게 믿기에 그분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용서라는 사랑 실천이 지금 삶을 더 충실하게 살 수 있는 기틀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더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행복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재의 수요일'에,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통해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숨어계신 아버지 하느님 앞에 의로움을 드러내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사순절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말씀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곧 기도를 통한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마태 6,7)고 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기도는 아버지께 대한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무엇보다도 '아빠, 아버지' 면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빠, 아버지'를 향하는 벌어지는 일입니다.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로서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곧 인간인 저희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지위에 들어 올리십니다.
아버지의 아들인 당신의 반열에 들게 하십니다.
곧 우리를 하느님 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2)라는
시편 작가의 노래를 실현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특전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통하여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이 엄청난 영예를 선사 받음으로써,
동시에 자녀로서의 삶이 소명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아들로서의 삶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는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됩니다.
그 일은 다름 아닌 아버지께서 생명의 빵으로 선사하신
당신 아드님 그리스도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일이신 '용서'하는 일을 저희도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시련이나 '유혹'이나 '악'에서도
자신이 스스로 구원자가 되려 하지 않고 아버지께 의탁하여,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벗어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신 아버지께 신뢰를 두며,
그것을 제거해 달라거나 없애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아버지’를 향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은
오로지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들의 길’을 가는 일입니다.
주님!
길이신 주님을 찬미하며, 아빠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아빠, 아버지!
무엇을 청해야 할지를 알게 하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
진정 바라야 할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알아야 할 바를 알게 하시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나, 무슨 일에서나, 아버지를 향하게 하소서. 아멘
기도할 때에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9절)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아들을 믿는 이들의 특권이며,
믿음의 어머니인 교회에서 우리가 받고 그분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며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우리에게 아버지라 불리기를 원하신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9절)
이는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로 더욱 거룩해지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우리 안에서 나날이 거룩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10절)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먼저 우리 안에 서고 하느님께서 다스리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이 나라의 시민들은 이미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그 안에 사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삶의 모습에 따라 나와 함께 있을 수도 있고 잃어버릴 수도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10절)
이는 우리의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하며,
당신의 뜻이라는 힘과 그 뜻을 실행하는 능력을 주십사 청하는 것이다.
그분의 뜻은 그분께서 자녀로 삼으신 이들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11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청한다.
이것은 구원의 양식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가
죄로써 그리스도와 떨어지는 일이 없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양식으로 주님의 신성에 참여한다.
이 양식은 딱 하루에 충분한 만큼 주어진다.
이 양식은 내일을 위한, 영원을 위한 양식을 뜻하며 물질로 바뀌지 않는 양식이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12절)
우리는 죄의 용서를 청한다.
그러나 용서받기 위한 조건은 다른 사람을 먼저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이 청원은
우리가 우리에게 용서를 청하는 이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전제한다.
우리에게 용서를 청하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께 용서를 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용서받았으므로, 용서에는 하느님과의 확고한 계약이 담겨있다.
용서는 잘못한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것이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13절)
우리는 이미 저지른 죄의 용서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새로운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주십사고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탄에게 이끌려 가도록 두지 마십사고 청하는 것이다.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13절).
이 기도는 앞의 모든 청원과 기도를 간결하게 요약하는 기도이다.
이 기도를 하면 더 청할 것이 없다.
악에 대해 하느님께 보호를 청하고 그것을 받게 되면
세상에서 하느님을 보호자로 둔 셈이니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주님의 기도를 잘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기도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누군가가 기도해 준다고 하면 마음의 위로를 받습니다.
본인은 기도에 소홀히 하면서도 남에게는 기도해 준다고 말하고
또 기도해 달라고 청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기왕 기도할 바에야 효과 있는 기도, 올바른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저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6,7-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청하기도 전에 알고 계신다니
청하는 바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의 본질적 요소는 많이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
기도란 사랑의 행위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더 많이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잘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함으로써 사랑 자체인 하느님과 잘 통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이 묵주기도, 9일 기도, 15기도, 33일 봉헌기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 등등
성인 성녀들이 즐겨 봉헌하였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 따르는 삶의 쇄신과 실천 없이 목표한 바를 채우기에 급급해하면서
꼭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나의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봉헌하는 일이요,
그분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루이 에블린은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열심히 공덕을 쌓고, 많은 것을 청하지만
실제로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구원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기를 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먼저, 더 많이, 더 깊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한상봉).
그러므로 구하기도 전에 우리의 뱃속까지 환히 꿰뚫어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기도가 들어주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이사야서 말씀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49,15).
들어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14,14).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6-7).
나보다 나를 더 환히 아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채워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 않고
더 좋은 것을 당신께서 주시고자 하는 때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심을 믿습니다.
그때를 인내로 기다립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보다 정성껏 바치면서 우리 기도의 부족함을 수정하고 보완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근동 이방 국가 사람들이 바치던
장황하고 요란스러운 기도의 문제점에 대해 정확히 지적하시며,
오늘 우리가 드리고 있는 기도 생활에 대한 성찰에로 초대하십니다.
그들이 바치던 기도는 엄청 요란스럽고 장황했습니다.
너무나 길고 정신 사나워 견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어찌 보면 우리 전통 안의 무속 신앙과 꼭 빼닮았습니다.
기도 주관자는 우선 자신의 청을 들어줄 이 신, 저 신, 있는 대로 신들을 불러냅니다.
신들이 협조하지 않으면 길길이 뛰고 구르고 소리를 지르며, 협박합니다.
기도란 것이 자연스럽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져야 마땅한데,
그들 기도의 분위기는 음산하고 기괴했습니다. 부자연스럽고 끔찍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신들과의 한바탕 전쟁과도 같았습니다.
그런 해괴망칙한 기도는 자연스럽게 유다인들의 기도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런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건네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기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가 아니며
신들을 협박하고 강요하는 행위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기도의 모델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의 기도 한 구절 한 구절을 짚어가며 묵상해 보니 참으로 균형 잡힌 기도요,
우리 기도 생활의 이정표가 되는 바람직한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바치면서 내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랍니다.
내 나라를 청하지 말고 아버지의 나라를 청하랍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바치면서 자신을 자랑하거나 내세우지 말 것이며,
자신의 한계나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며,
전지전능하신 아버지께 자신의 필요를 있는 그대로 청하랍니다.
매일 매일 일용한 양식도 청하지만,
우리 힘으로 불가능한 용서의 힘과 유혹을 극복할 힘을 청하랍니다.
매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치는 주님의 기도를
보다 정성껏 바치면서 우리 기도의 부족함을 수정하고 보완해 나가는
사순시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란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뜻입니다.
댈러스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J F K'로 기억되는 케네디 대통령입니다.
제가 있던 뉴욕의 허브 공항 이름도 ’J F K' 공항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곳 댈러스에서 1963년 11월 22일 리무진에 타고있던 중
리 하비 오스월드에게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47세의 나이였습니다. 저는 1963년에 태어나서 가브리엘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의 업적과 인생은 잘 모르지만, 그가 남긴 취임 연설은 기억납니다.
영어 교재에 있었습니다.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조국이 당신을 위해서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요구하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시오.)”
예수님께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라고 하셨던 것처럼
발상의 전환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비와 눈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 신앙인들이 남겨야 할 것은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저는 ‘자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와 눈이 생명을 살리듯이, 우리는 가진 것을 나누면서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합니다.
선을 베푸는 집안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낯선 손님을 따뜻하게 환대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사악을 주셨습니다.
시렙다의 과부는 엘리야에게 구운 빵을 대접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렙다 과부를 가뭄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선을 베푼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 기도를 ‘주님의 기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예루살렘의 올리브산에는 ‘주님의 기도’ 경당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각 나라의 언어로 기록된 ‘주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물론 한국어로 기록된 주님의 기도도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몇 가지 청원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빛나기를 청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기를 청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청합니다.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청합니다.
우리가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말고, 악에서 구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분쟁과 갈등을 푸는 열쇠입니다.
용서는 화해와 일치로 향하는 내비게이션입니다.
용서는 평화와 사랑으로 넘어가는 다리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정말 아름다운 청원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거울을 보는 것처럼, 기도를 열심히 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더욱 많은 사랑을 주실 것입니다.
가장 완벽하고 모범적인 주님의 기도
박상대 마르코 신부
사순시기에 수행해야 할 가장 필요한 덕목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라고 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의 산상설교에 담겨있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다.
祈禱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기도는 하느님의 이름을 두고 은총과 축복을 비는 일이다.
기도는 소리를 내는 대화형의 염경기도와 소리 없이 마음속으로 드리는 묵도형기도로 대별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대로 기도는 어떤 모양으로든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에
기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기도하기를 꺼려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영혼이) 숨쉬기를 싫어한다는 뜻은 아니다.
기도에 특별한 장소와 시간이 있어야 할 것 같고,
기도가 왠지 어렵게 느껴지며, 기도에 대한 文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는 오로지 기도로서만 학습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도가 하느님께 대한 감사, 찬미, 참회, 청원을 그 내용으로 함은 기본적인 원칙이다.
그러나 기도는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도, 특별한 장소나 시간을 필요로 하지도,
장황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기도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을 청하려고 하기 때문에 내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도는 무엇을 이루어 내는 힘이 아니다.
만약 기도를 통하여 무엇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다짐하면
그 기도는 呪術이나 呪文이 돼버린다.
기도는 ‘힘’이 아니라 ‘자세’이다.
기도는 어떤 조건이나 상태를 말한다.
즉 기도는 하느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준비하는 ‘조건’이며 ‘상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무엇을 청원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신다.(8절)
그렇다고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기도의 본질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全知하신 하느님께서 자녀들의 필요함을 다 알고 계심은 당연한 일이다.
하느님께서 이미 알고 계신 것과 우리가 청하는 기도는 엄연히 구별된다.
알고 계신다고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무엇을 청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께서 이미 알고 계신 그것을 행하실 수 있도록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시는 ‘주님의 기도’(9-13절)이다.
루카도 비교적 짧은 형태의 이 기도(11,2-5)를 전해준다.
기도의 본질적인 내용은 구약성서적이며, 동시에 유대교적 전통기도의 내용과 흡사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예수님의 일회적이고 혁신적인 새로움이 가미되어 있다.
이는 가장 완벽하고 모범적인 기도로서 모든 기도의 심화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주님의 기조’는 우선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일곱 가지 청원을 담고 있다.
전반부의 세 가지 청원은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에 관한 것으로서
하느님에 대한 청원이다.
후반부의 네 가지 청원은
‘우리의 일용할 양식’, ‘우리 잘못의 용서’, ‘우리의 유혹’, ‘우리의 악’에 관한 것으로서
인간과 삶에 대한 청원이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의 청원에 의해
이 땅에 하느님의 영광(이름)과 통치(나라)와 섭리(뜻)가 계시 되었음을
선포하는 감사와 찬양기도이며,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육체적 구원(양식)과 영혼의 구원(용서)을 도모하여,
모든 인간을 유혹과 악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
종말론적 구원을 주시려는 예수님의 다짐 기도인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당신의 기도를 우리에게 물려주신다.
그럼으로써 ‘주님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기도를 바치신 예수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주님의 기도는 인간이 하느님께 청함에 있어서
어떻게 청해야 하는 기술과 질서뿐 아니라
무엇을 청해야 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나아가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
삶이 하느님 앞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처음 3가지 청원(이름, 나라, 뜻)은 이 땅 위에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을 말한다.(묵시 11,17)
이어지는 두 번째 청원(일용할 양식, 용서, 유혹과 악으로부터의 구원)은
오늘뿐 아니라 내일과 미래를 지향한다.
양식은 육체와 영혼의 합일체인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며,
이 인간은 타인을 용서해야만 용서받을 수 있는 자로서
마지막 심판에서 최종적인 구원을 바라게 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은 참으로 목말라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빌어야 하는
악의 유혹으로부터의 보호를 비는 청원이다.
인간은 살아있는 한 어느 누구도 악의 세력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기다리는 그분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그 여정을 동반할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된 인간의 기도’인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는 이렇게 바쳐야 한다.
“내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만일 나의 관심과 취미가 세상 것들에만 있다면,
나는 ‘하늘에 계신’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나의 믿음이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어려움에 대한 여유를 갖고 있지 않다면
나는 ‘우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매일의 삶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는 관계를 증명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버지’라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하느님께 대한 존경과 영광과 신뢰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나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나의 마음 안에 우리 집에 우리 학교에 우리 성당에 우리나라에
그리고 전 세계에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마지 못 해 한다면,
나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나의 삶에서 아버지의 뜻을 마지못해 따르거나 화를 내며 한다면,
나는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나 자신을 내어놓을 진정한 준비가 되지 않는다면,
나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매일의 양식을 얻기 위한 정직한 노력을 하지 않은 채,
가족과 친구, 이웃의 분명한 요구를 무시한 채,
나는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계속해서 원한을 품거나 비방한다면,
나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유혹받을 상황에 고의적으로 남아있다면,
나는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하느님의 말씀과 기도라는 무기를 가지고 영적 세계에서 싸울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나는 ‘악에서 구하소서’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나 자신의 영광을 먼저 찾는다면, 나는 ‘영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여기 내 삶 안에 계신 하느님보다
매일 발생하는 일들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면,
나는 ‘영원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정직하게 ‘어떠한 값도 치르겠습니다. 이것이 저의 기도입니다.’하고 말하지 않는한,
나는 ‘아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서 바오로 수녀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이사 55,10-11)
오늘 1독서의 말씀입니다.
어느 것 하나 헛되이 돌아옴 없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께
우리는 기도합니다.
우리의 입으로 드리는 기도 또한 그렇게 빠뜨림 없이 듣고 계실 그분께
희망을 두고 믿으며 청합니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출처 :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