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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3일 사순 제3주일
제1독서 : 탈출 20,1-17
제2독서 : 1코린 1,22-25
복 음 : 요한 2,13-25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23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2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25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난달 학생 복사단 회식이 있었습니다.
고3이 되는 학생들이 복사를 졸업하고 마지막으로 후배 복사들과 식사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날의 메뉴는 자장면과 짬뽕이었지요. 그런데 한 친구가 너무 조심스럽게 먹는 것입니다.
보통 아이들은 급하게 먹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아이에게 “왜 이렇게 조심스럽게 먹어?”라고 물으니,
“흰색 티셔츠를 입었거든요.”라고 답합니다. 저는 아이에게
“어머니가 빨래해 주시잖아.
더러워지면 빨래하면 되니까, 음식이 흰색 티셔츠에 조금 묻으면 어때?”라고 하니,
아이는 곧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보기 싫잖아요.”
묵상 중에 이 아이의 말이 계속 생각났습니다.
음식 묻으면 빨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음식 묻은 옷을 입고서 돌아다닐 자기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이 보기 싫다는 것이지요. 이 말에 우리 마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깨끗해집니다.
그러나 죄를 더 짓지 않으려는 노력보다, ‘나중에 고해성사 보면 되지.’라는
안일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을 만나곤 합니다.
이 죄를 짓는 내 모습이 과연 예쁠까요? 아닙니다.
분명히 보기 싫은 모습이고 그래서 죄를 짓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죄를 짓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한데,
너무 쉽게 죄에 무감각해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쓸데없는 것에만 집중하면서 정작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보면 너무 화가 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는 장면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휘두를 정도로 화가 나셨을까요?
이 성전 안에 하느님의 사랑보다는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난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죄를 씻기 위해 희생 제물을 봉헌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양과 소, 비둘기 등이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 봉헌물을 판매하면서 누군가는 자기 탐욕을 채우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가난한 사람은 그 돈을 낼 수가 없어서 죄스러운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오히려 죄인으로 고개를 들 수 없는 상황이
과연 예수님 보시기에 좋았을까요?
이런 탐욕과 이기심이 난무하는 곳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과 나눔을 통해서만
주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사순 제3주일입니다.
3월의 첫 주일입니다.
이제 봄이 오려나봅니다.
우리 영혼의 봄도 피어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멀지 않아 부활로 피어오를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광야를 지나면서 살아가야 할 계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제2독서는 십자가가 하느님의 힘과 지혜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지어지는 새 성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를 잘 드러내줍니다.
“하느님,
저희 마음이 주님의 계명을 따르게 하시고,
저희가 십자가의 지혜로 죄에서 해방되어
주님 사랑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첫 번째로 하신 일이 바로 성전을 정화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습니다.
또 환전상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습니다.(요한 2,15)
거룩한 성전이 형식적 예배와 인간의 탐욕으로 부패 되고,
장사꾼들의 소굴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셨다' 함은
곧 당신께서 처벌하시고 심판하시는 권한을 가지셨음을 나타내줍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성전 정화를 통해서 당신 자신이 누구신지를 계시해 주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당신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주겠소.”(요한 2,18) 하고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증명해 보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새 성전'을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새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먼저 당신의 몸이 허물어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이제, 성전의 숨겨진 신령한 의미가 드러나는 때가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하느님 현존의 가시적 상징이었던 성전을 파기하고
온전한 '새 성전'이 드러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이 세워질 참된 성전, '새 성전'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건물로써 신축될 ‘성전’이 아니라,
제2독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세워질 '새 성전',
곧 부활로 세워지는 참 성전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에는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제 새로 탄생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이렇게 일깨워 줍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그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1코린 3,16-17)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새가 나무에 둥지를 틀듯, 우리 안에 끝이 보이지 않는
신비한 동굴을 파고들어 와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는 존재요, 그분의 소유요, 그분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은 집을 어찌할 수 있으되, 결코 집이 주인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주인이 집을 소유한 것이지, 결코 집이 주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을 기꺼이 주님의 소유로 내어드려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1코린 6,20),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을 타인을 위해 내어놓을 때, 비로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몸은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는 교회요,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은혜로운 사순시기에, '헌 성전'을 허물고 '새 성전'을 지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 말씀의 끈으로 만드신 '채찍'을 달게 받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의 편리와 이기를 채우기 위한 가축들과 돈을 쏟아 버리고,
그릇된 마음의 '탁자'들을 뒤엎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요한 2,16)
주님!
성령의 채찍을 휘두르소서.
아버지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삼키게 하소서.
당신이 세우신 성전의 뜰이 장사치와 도둑들의 소굴이 아닌,
사랑의 열매를 나누는 나눔터가 되게 하소서.
저의 영혼이 당신의 사랑을 경배하는 예배와 기도의 집이 되게 하소서.
제 안에 계시는 당신을 경배하는 일, 그 아름다운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의 독서와 복음의 가장 중요한 말씀은 계약과 정화를 통한 해방과 자유이다.
계약을 통하여 받은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과 자유를 주기 위한 것이었고,
그를 위해 인간이 행하여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십계명은 자유의 표현이며, 종살이를 벗어났다는 보증이다.
이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정신적인 해방과 정화를 끊임없이 요청하신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은 진정한 해방을 자유를 위한 것이다. 그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다.
습관이나 율법주의 혹은 순전히 의미를 잃어버린 외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다.
성전 정화의 의미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지 못하고
성전을 더럽히는 잘못을 바로잡아 주시는 것이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16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전이 하느님께서 머물러 계시는 거룩한 곳이며,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거룩한 곳으로,
그 안에서 구원의 은총을 체험하며, 하느님 안에 진정한 자유를 느껴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타성적이고 습관적인 것으로 변해버린 그 가치관을 바꾸어 놓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과의 결정적 만남의 장소인 성전의 예식 기능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 옛 예식과 당신 자신을 교체해 놓으신다.
예수님의 이 격렬한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징표를 요구하는(18절) 유다인들에게
당신 자신이 새로운 성전임을 말씀하신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19-21절).
이는 징표를 요구하는 유다인들에게 당신의 몸을,
즉 사람들이 수난의 비극을 통해 짓밟은 당신을 하느님의 권능으로써
사흘 후에 부활시킬 당신의 몸을 징표로 제시하신다.
그 징표는 당신 자신과 연결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분 자신과 동일시되는 징표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하고 적개심만 드러내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하느님과의 절대적인 관계를 표현하시기 위해
먼저 “내 아버지의 집”(16절)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들이 성실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분이 메시아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나중에 가서야, 부활을 체험한 후에 깨달았다(22절).
여기서 이 성전 정화가 십자가와 수난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즉 그리스도는 사람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하느님의 권능을 통해 부활하시어 하느님의 성전이 되신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라는 것과 같이
예수께서는 육화의 신비를 통해 이미 성전이 되셨다.
이 성전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느님의 현존 자체를 실현한다.
이것은 구약성서의 꿈인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새로운 성전을 통해서 영원히 실현되었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은, 우리도 그 성전으로 들어가
하느님의 현존 신비로 우리의 삶을 감싸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그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항상 우리 자신의 정화가 필요하다.
이제 하느님의 계명과 십자가, 성전의 정화에 대한 것을 어떻게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것은 모두 우리의 진정한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의 표시는 계명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4,15; 15,14).
만일 우리의 신앙이 성전 앞에만 머물러 있고 고통과 영광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희생 제물을 바쳐야 하는 지성소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착각 속에 빠져 있는 신앙이다.
지난 주일의 복음에서도 나타났듯이
그리스도의 영광이 수난과 죽음이라는 커다란 고통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 같이
우리가 진정으로 해방되고 끊임없이 정화되어 그리스도라는 성전에 머물러 살기 위해서는,
구원을 차지하려면 주님께서 내려주신 계명을 잘 지키면서
나 자신이라고 하는 이 십자가를 잘 지고 감으로써 지성소로 들어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나 자신이 또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성전이 되고
모든 것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삶이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하여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Failure is a part of life.
If you don’t fail, you don’t learn. If you don’t learn,
you will never change.
(실패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만일 당신이 실패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배울 수 없습니다.
당신이 배울 수 없다면 당신은 결코 바뀔 수 없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제 삶에도 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실패와 좌절은 제 삶의 새로운 변곡점이 되곤 했습니다.
33년 전에 저는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처음 본당으로 가서 보좌신부로 지내는 중에 ‘유행성 출혈열’에 걸렸습니다.
중환자실에 있었고, 당시 교구장이셨던 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병원엘 찾아왔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병원에서 입원하고, 퇴원할 때까지 잠시도 제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이 있었기에 저는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저는 하느님의 크신 은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덤’으로 주어진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늘 감사합니다. 그러기에 늘 새롭습니다.
30년 전에 주교님께서는 제게 미국에서 사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준비를 하면서 영어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그래야 했습니다.
저는 매일 송별식을 한다고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입니다. 주교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제가 술을 가까이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교님께서는 미국으로 가는 것을 취소하였습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제가 술을 가까이한다는 것을 주교님께 전한 사람에 대해서 원망의 마음도 생겼습니다.
돌아보면 주교님의 따끔한 질책이 제게는 좋은 약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뒤로 술에 대한 절제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술자리가 있어도 10시 전에는 사제관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새로운 습관이 생겼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산보하고, 책을 읽으니 하루가 즐거웠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변화 시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내가 습관을 하나 가지면, 그 습관이 나를 변화 시켜주는 것을 알았습니다.
25년 전에 주교님께서는 제게 적성성당으로 갈 수 있는지 저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저는 주교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제 손을 꼭 잡고 본당신부로 잘 지내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적성성당은 땅은 넓었지만, 교우들의 수는 적었습니다.
평일미사에 나오는 교우는 10명 미만이었습니다.
주일 미사에 나오는 교우도 100명 미만이었습니다.
당연히 주일헌금도 적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3년을 지냈습니다.
33년에 3년이니 그리 긴 시간은 아닙니다. 저는 그곳에서 행복했습니다.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고, 농산물 직거래도 하였고,
서울에서 오는 학생들의 농촌봉사 활동도 받았습니다.
차가 없어서 성당에 못 나오는 분들을 위해서 차량 봉사단을 만들었습니다.
4대의 봉고차가 교우들의 집으로 가서 모셔왔습니다.
여름에는 전 신자들과 함께 바닷가로 여름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처음에는 서울에 큰 본당에 있는 동창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공기 좋은 곳에서 자연과 함께 지내는 것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당시에 저는 혈압도 있었는데 적성성당에 있으면서 모두 좋아졌습니다.
저의 건강을 위해서 배려해 주신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정화’를 하십니다.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건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마음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신앙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바로 주님께서 머무시는 감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켜야 합니다.
사순시기는 바로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은혜로운 회개의 때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만든 한 주간을 감사하며
또 새로운 한 주간을 살아갈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성전 정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드리기 위해서
건축한 외적인 건물을 생각하고 또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하고 말합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곧 성전입니다.
더욱이 성체성사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2,19-21).
당신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흘 안에 세우겠다.’는 말씀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묵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도성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묵시21,22-23).하고 말합니다.
성전이란 특정 건물만도, 내세에서 영적으로 성별 된 장소만도 아닙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거룩한 곳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이신 주님을 제대로 모셔야 하고
그 주님을 모신 내가 거룩함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준비된 마음으로
기도의 집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습니다”(요한2,14-15).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서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셨을까요?
이스라엘 성인 남성들은 해마다 성전세로 유다 돈, 반세켈을 내야 했으므로
이방인 지역에서 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돈을 환전해 주는 일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희생제물용 짐승을 팔고 돈으로 바꾸어 주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들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부담을 주었습니다.
잇속에 눈이 어두워 상인들과 제사장이 결탁하여 이윤을 챙기는 부정과 비리가 생겼고
이권 다툼의 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경배의 본질적인 의미가 왜곡된 모습에 경고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그들 마음 안에 하느님은 없고,
물질과 개인적인 이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가득 차 있으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실 우리가 성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물질적인 이익을 계산하고 있잖습니까?
개인적인 이득을 추구하며 이웃을 돌려놓기도 하고, 마음으로 미워하며 시기 질투하고
‘너 어디 잘되나 보자’ 하고 괘씸하게 생각도 하고…
남의 허물에는‘너 정말 그럴 수 있나? 하면서,
자기의 허물에 대해선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합리화합니다.
이런 마음이 장사꾼의 소굴이죠. 주님께서는 이런 속마음을 아시고 엎어 버리시는 겁니다.
그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성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성전의 기능은 주님께 드리는 희생 제물보다 주님의 사랑과 생명을 전달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걷어내고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입니다.
우리의 곳간은 천상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알곡으로 만들지 않는 한 곳간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따라서 알곡이 되기 위한 수고와 땀은 우리의 몫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우리의 할 일은 알곡을 만드는 일입니다.
영혼의 정화를 통해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화장을 하고 옷을 잘 입어 겉모습을 잘 꾸미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성전, 영혼의 상태를 잘 보고 가꿀 줄 알아야 합니다.
혹 마음의 성전에 흠이 간 것이 있으면 그 흠을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고치는 방법 아시죠? 예, 맞아요. 고해성사입니다.
성사를 자주 보고 새 삶을 시작하시길 바라며 보속을 꼭 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집에 물이 새거나 낡아서 파손된 곳이 있다면 놀랄만한 열성으로 빨리 복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거처하신다면
우리 마음이 그처럼 고귀한 손님께 부당한 거처가 되지 않도록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신다면 청소하고 집안 정돈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요?
고해성사를 통한 영혼의 정화는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영혼에
존귀하신 그분을 합당하게 모실 수 있도록
더러운 곳을 깨끗이 하고 파손된 부분을 복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그 안에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결정됩니다.
초라한 마구간이 빛난 것은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웅장하지도 값진 예술품 하나 없어도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에 갖가지 값진 예술품으로 장식을 해 놓아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결코 성전은 아닙니다. 우리 성당이 참으로 아름다운 성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2,1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당신의 앞날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당신의 몸을 십자가상 제물로 바치시고 부활하심으로
짐승을 잡아 바치는 구약의 제사를 새롭게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미사 안에서 성체를 축성하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형식적인 제사와 의식만을 강조하는 예배는 사라지고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구원을 체험하는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영성체를 통해서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게 되고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우리의 몸은 분명 성전입니다.
혹시라도 우리의 마음이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증오, 적개심, 탐욕으로 차 있다면,
악습에 젖어 있다면,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교회 건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예수님의 성전 정화 작업을 묵상합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남의 말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에둘러 표현하지 않으시고 단도직입적으로,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상거래는 하느님의 집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원래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 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이 상인들과 결탁하여 뒷돈을 챙기면서,
성전에서의 상거래를 허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은 급격히 훼손되고 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사제들과 사제 가문의 귀족들은
성전 경내에서 이루어지던 매매에서 큰 이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대사제는 유다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의 의장으로서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나름 확고한 위치와 권력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최고 의회는 사제 가문의 가족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일반 귀족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니,
당대 나름 잘 나가던 사람들의 집합소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당시 물 좋은 장소, 막대한 목돈이 오고 가던 장소였던
성전에서의 상거래와 뒷돈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놓을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잔뜩 돈독이 올라있던 그들이 최상의 수입원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깡그리 무시하고 모독하는 예수님의 모습에 부들부들 온몸을 떨었으며,
바득바득 이를 갈았을 것입니다.
마침내 더 이상 예수님을 그냥 둘 수 없다고 작정하고 없앨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도 타락하고 부패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상거래가 아니라
새로운 영적 예배와 찬미가가 흘러넘치는 기도의 집으로 복원시키셨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서 성전 정화 작업을 계속되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 성전이 상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시장바닥 같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홀대받고, 음흉한 사람들의 주머니만 가득 채워주는
훼손된 교회의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에 바라시는 바가 무엇일까 묵상해 봅니다.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성전을 정화시켜야 할까 고민해봅니다.
우리끼리 만의 폐쇄적인 교회가 아니라 춥고 고달픈 세상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린 교회가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전 정화 작업이 아닐까요?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좌지우지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자발적인 참여와 구성원 상호 간에 적극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성전 정화 작업이 아닐까요?
상상을 초월하는 건립기금으로 건립되는 성전이 아니라
방황하는 양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겸손하고 예의바른 사목자의
희생과 헌신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성전을 건설하는 것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요?
우리 시대 사회적 약자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도 크게 환영받고
아무런 차별도 느끼지 않는 환대의 교회,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따뜻이 보듬어 줄 수 있는 치유의 공동체,
나만 혹은 우리 가족이나 우리 본당만 생각하지 않고 더 큰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교회 건설이 시급하지 않을까요?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고 그분을 만나는 곳입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 그의 집으로 간다는 것은 그만큼 친밀하다는 뜻이며,
서로 긴밀히 나누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고르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집’은 무엇보다도 안전하고 조용하며 개인적인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조용하고 안전하게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여야 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이를 방해하는,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을 보십니다.
이것들은 ‘제사’를 드리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었고,
제사는 하느님과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절대적인 자리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이르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사실 예루살렘 성전의 문제는 각종 동물과 장사꾼들로
지저분해지고 혼잡해진 외적 환경에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심각하였던 것은 구원을 사고파는 ‘내적 타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루살렘 성전에 오신 것처럼,
파스카를 준비하는 우리 자신의 성전(마음)에도 오십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을 보신다면 과연 예수님께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요?
우리 안에 자리 잡고있는 타락과 위선과 죄를 보시겠지만 그다지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구원을 사고파는 우리 자신,
구원으로 장사하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이러한 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순명한다면,
그분께서는 당신의 부활로 우리를 다시 세워 주실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박 마리 안젤로 수녀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요한2,25)
내 속엔... 무엇이 있을까요??
위, 장 이런거 말고...
위선, 교만, 미움 등등등...
내 자신이 아는 건 그나마 덜 당황스러운데
나도 모르는 내 안의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 아시니...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걱정도 됩니다.
하지만 그분은 숨은 일도 보시는 분이시니...
그분이 제 속을 보시고 기쁠 것이 많이 들어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 친절, 온유...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들이 제안에 주렁주렁 달리길 바라며
제 속을 아시는 그분께서 시름시름 힘이 없는 그 나무에
거름도 주시고, 물도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이참에 사랑을 키우려 노력해 봐야겠습니다.
출처 :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