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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9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제1독서 : 호세 6,1-6
복 음 : 루카 18,9-14
그때에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일까?”
항상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래서 더 잘 살기 위해 늘 나 자신을 다그치곤 했습니다.
잠을 줄여서 열심히 기도하고, 또 시간을 쪼개 쓰면서
열심히 하느님을 알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도 부족해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정말로 열심히 산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나 스스로 그렇지 않음에 텅 빈 마음의 상태를 느낄 때가 참 많았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를 ‘영적 쾌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다그쳐서 영적인 것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이 물질적 쾌락을 따르려는 이유인 것처럼,
영적인 것에 대한 집착 역시 다른 어떤 것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영적 체험만 할 수 없습니다.
이때 오히려 영적 교만에 쌓이기 쉽게 됩니다.
성당 안에 머무르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집안일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면 어떨까요?
성당 사람들은 정말로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세상 안에 살면서 세상의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면 이는 영적 쾌락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기처럼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잘못되었다면서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영적 쾌락을 넘어 영적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삶의 모든 과정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해야 합니다.
일상 삶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세상에 실천하면서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식의 판단이 생기는 순간,
영적 교만이 자리를 잡은 것이고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바리사이와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십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의 공로와 미덕을 하느님께 자랑하고 다른 이들을 멸시하면서
이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말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영적 쾌락에 빠져 있으며, 이를 넘어 영적 교만의 상태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세리는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뉘우치면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의지합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상태,
이 순간에 비로소 모든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물질적인 쾌락에서만 벗어나면 그만이 아니었습니다.
영적 쾌락에서도 벗어날 수 있어야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사람만이 의롭게 되어 하느님 나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대조를 이루는 두 인물,
곧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여기는 죄인인 바리사이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기는 의인인 세리가 있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차이는 ‘보는 눈’에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의롭다고 보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보는 눈입니다.
곧 바리사이에게는 자신을 높이는 눈이 있고, 세리에게는 자신을 낮추는 눈이 있습니다.
둘째, 그들은 ‘타인을 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타인을 업신여기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타인을 중히 여기는 눈입니다.
곧 바리사이에게는 꼿꼿이 서서 하늘을 향하는 눈이 있고,
세리에게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눈이 있습니다.
곧 타인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고, 자신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습니다.
셋째, 그들은 눈이 ‘바라보는 곳’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향하여 있고, 세리의 눈은 하느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 자신하고 혼자 말로 기도 했습니다.(루카 18,11)
이 말의 원어를 직역하면, '자신을 향해 기도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8,11)라고 말하지만,
실은 긴 독백으로 하느님께 설교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곧 하느님이 자신의 가치 확인과 자화자찬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우러르기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을 앞세웁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있으며, 자신과 하느님의 거리를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루가 18,13),
그리고 그분 앞에서 자신이 진실로 누구인지를, 곧 죄인임을 깨닫고서,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그렇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맡깁니다.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느님 앞에 있기에, 자기를 비하하거나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자비가 필요함을 알고 그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되, 결코 자신을 하잖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중히 여기고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도 귀중하게 여기고 중시합니다.
그러기에 겸손은 자신을 낮추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우러르며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주님 앞에 서 있고, 주님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의 자비를 입고서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자비가 아니면 살 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필요한 것은 당신의 자비, 그 외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가슴을 치며 하느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루카 18,13)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주님!
제 눈이 당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제 자신을 보고, 당신 안에서 타인을 바라보게 하소서.
타인의 존귀함을 볼 줄을 알게 하시고, 제 자신의 가슴을 칠 줄을 알게 하소서.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진정 제게 필요한 것은 당신의 자비오니,
당신의 자비가 아니고서는 살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토록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이다.
바리사이는 하느님께 기도하러 간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가 하느님을 향하여 감사기도를 바친다고는 하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기도한 것이다.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한다는 핑계로
허영에 빠져 교만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면 단식이 그에게 무슨 득이 되며,
십일조를 바치면서 자랑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남을 비난하고 단죄한다면
그 십일조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바리사이는 계속 나는 다른 인간들과 다르다고 칭찬하기에 바쁘다.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며 찬양의 제물을 하느님께 바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숨어있는 사탄을 경계해야 한다.
바리사이에게 한 것처럼 다른 교만으로 우리를 취하게 할 것이다.
아마 아직도 자신의 행위로 우쭐거리게 하는 것도 있다.
세리는 감히 눈도 들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기죽은 태도가 보인다.
하느님의 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방종한 삶을 살아온
자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이 두려웠다.
우리는 그의 몸짓에서 자신의 악행을 책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리석은 바리사이는 뻔뻔스럽게 눈을 치켜뜨고 꼿꼿이 서서 제 자랑을 했지만,
세리는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긴다.
자기 죄를 고백하고 의사에게 자신의 병을 알리며 자비를 간청한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주님께서는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14절)
바리사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교만하게 자기 자랑을 했고, 세리는 겸손하게 자기 죄를 고백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바리사이의 자선보다 세리의 고백을 더 기꺼워하신 것이다.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돌아간 것은 그가 겸손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이웃과 비교하여서는 안 된다.
우리가 보고 또 비교하며 따라야 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내가 남들만큼 선한가?"가 아니라, "내가 하느님 앞에 선한가?"이다.
즉 우리들의 선행이나 신앙생활이나 그 기준, 척도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마 우리가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생과 비교할 때는
우리도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할 것이다.
이 사순절이 우리에게 큰 은총의 기간이 될 수 있도록 이런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댈러스 성당으로 왔을 때 뉴욕에서 신부님들이 같이 왔습니다.
먼 여정 동행해 준 신부님들이 고마웠습니다.
신부님들은 사제관의 시설들도 점검해 주었습니다.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사제관의 컴퓨터를 치우고, 저의 노트북으로 다시 설치해 주었습니다.
엉클어져 있던 선을 정리해 주었습니다.
속도가 느려서 불편했던 인터넷을 빠른 속도로 업그레이드 해 주었습니다.
회사에 전화를 하니 새로운 장치를 배달해 주었습니다.
저는 냄새에 둔감한데 신부님 한 분이 가스 냄새가 난다고 점검해 보라고 했습니다.
점검하니 가스가 조금 새고 있었습니다. 다행이 고칠 수 있었습니다.
텔레비전도 잘 나올 수 있도록 연결해 주었습니다.
청결을 위해서 화장실에 비데를 설치하면 좋겠다고 해서 그것도 설치하였습니다.
열쇠로 열던 문도 번호 키로 바꾸었습니다.
요즘 번호 키는 원격으로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신부님들의 도움으로 댈러스에 온 지 3일 만에 제가 바라는 것들이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신부님들이 저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저와 함께 지낸 시간들이 많기 때문에, 제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결혼한 부부가 잘 지낼 수 있는 5가지 방법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다투고 싸운 날일지라도 한 침대에서 잠을 자면 좋다고 합니다.
그날의 피로는 그날에 풀자는 말이 있듯이
논쟁과 다툼이 있었을지라도 풀고 잠자리에 들면 좋다고 합니다.
기념일을 잘 챙겨 주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정성이 담긴 선물을 준비한다면 배우자는 감동할 것입니다.
결혼 25주년을 기념하면서 함께 피정을 가는 부부를 보았습니다.
선물은 오늘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따뜻하게 보내는 기분 좋은 말도 선물이 됩니다.
부부가 같은 취미를 가지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책을 읽는 것도, 등산을 하는 것도, 골프를 치는 것도,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부부가 함께하면 더 많은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습니다.
느낌을 표현하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부부라고 할지라도 서로가 바쁘게 지내다 보면 무심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허리가 아픈데 다리를 주물러주면 큰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대화도 좋지만, 감정과 마음을 표현하는 대화는
부부의 관계를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해 주면 좋다고 합니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오랜 불화로 결국 헤어지는 노부부가 마지막으로 식사를 하면서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닭의 날개를 주었습니다.
할머니는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헤어지는 마당에도 내가 싫어하는 낡 날개를 주네요.”
사실 할머니는 닭의 가슴살을 좋아했지만,
할아버지가 좋아할 것 같아서 싫어하는 날개를 먹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도 날개를 좋아하지만, 할머니가 날개를 좋아할 것 같아서
싫어하는 가슴살을 먹었다고 합니다.
행복한 부부생활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바리사이파의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세리의 기도입니다.
바리사이파는 기도할 때, 자신이 무엇을 하였는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단식하였고, 봉사하였고, 십일조를 충실하게 바쳤고, 율법을 잘 지켰고,
죄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고 하느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만 살아도 그다지 나쁜 것 같지 않습니다. 사실 그렇게 살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리의 기도입니다.
세리는 자신이 무엇을 하였는지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잘하였는지,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는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판단하시는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나의 행위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기도를 더 높게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잘 들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을 봅니다.
묵묵히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시몬을 봅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던 피와 땀을 닦아 드리던 베로니카를 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주님 저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했던 죄인을 봅니다.
신앙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의 삶을 통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입니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입니다.”
겸손한 죄인
반영억 라파엘 신부
성직자가 좋아하는 신자는 우거지 신자이고 싫어하는 신자는 원불교 신자랍니다.
우거지는 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적인 신자를 말합니다.
원불교는 원망하고, 불평불만하고, 교만한 신자랍니다.
기왕이면 우거지 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올바른 사람이다.’ ‘나는 아무개 보다 더 낫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해롭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산다고 하면서 자기만족에 빠져 남을 판단하거나 비난하게 된다면
알맹이를 곁과 속이 다른 이중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온갖 선을 행하고 신앙의 규정을 철저히 지켰더라도
하느님의 눈에 들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없고 오로지 냉혹한 비판과 비난만 있는 사람이 더 무서운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가슴을 치는 세리와
“저는 세리와 같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하고
자랑하는 바리사이를 비유로 들었습니다.
누가 하느님께 의롭게 인정받은 사람인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집니다.
생각해 보세요. 기도하면서 남을 험담하고 자기 자랑만 하고 있으니,
하느님과 어떻게 가까워지겠습니까?
자기만 옳은 줄 믿는 것은, 무지에서 나오는 잘못이고 허물이며
남을 업신여기는 것은 교만에서 오는 죄입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의인이다, 불의한 사람이다, 판단하지만 하느님은 속마음을 보십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느님의 눈에 들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의인처럼 살아도 내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겸손한 죄인보다 못합니다.
루카 복음에 보면 베드로는 밤새 고기잡이에 실패하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후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주님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깊은 곳에, 그물을 치라는 한 말씀을 받아들인 후
주님을 모시기에 너무도 부족한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고기가 보이지 않고 주님만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루카5,8).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은총으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자신의 속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죄로 얼룩진 과거의 삶이 보이지 않고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신 미래의 삶이 보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소명이 나를 재촉합니다.
나의 허물이 나의 발목을 잡을 수 없고 오로지 주님만이 나의 모두이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장애물이 밖에 있으면 쉽게 피해 다닙니다.
그러나 장애물이 자기 안에 있으면 그 장애물을 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맙니다.
밖에 있는 큰 장애물보다 안에 있는 장애물이 더 무섭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장애를 거두어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장애를 없애 주시고 나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에 응답함에 주저함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행여 자기만 옳다는 과오나 남을 무시하는 죄는 짓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는 은총의 사순절이 되길 기원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김 메리 그레이스 수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바리사이는 스스로를 의롭다고 자신하고 있다. 그리고 세리를 업신여기고 있다.
스스로 만족하며 '이 정도면 잘 살고 있다' 라고 생각하며
자신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을 향해 우월감을 드러내는 것은
부정적인 측면의 "자기만족의 삶"이 아닐까..?
바리사이처럼 눈에 보이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춰 율법을 다 지켰으면 의롭다고 여기는 것..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이나 사랑에는 무관심한 것..
눈에 보이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지키기가 더 쉬울 수도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울 수 있다.
나와 예수님만이 알고 있기에 더 어렵기도 하고 그렇기에 더 소중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 늘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지금 나의 삶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며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식으로 따라갈 수 있도록 매 순간 깨어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삶의 방식은 자신을 낮추시는 삶이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낮아지는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 함을 알고 있다.
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힘과 용기가 턱없이 부족하기에
주님께서 채워주시기를 간절히 청해본다.
출처 :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복음묵상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내면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 앞에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반으로 나눠졌습니다.
속 시원한 사이다 같은 거침없는 언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부드러운 시선,
세리 죄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파격적인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나 해도 해도 너무 지나칠 정도로 앞서가는 예수님의 모습에
전통주의자들, 보수주의자들, 율법주의자들, 바리사이들은 심기가 무척 불편해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다 귀에 거슬렸습니다.
예수님 시대 세리와 창녀, 죄인들은 하느님을 등지고 살아가던 사람들은
하느님과 가장 멀리 떨어져 살던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
인간도 아닌 인간, 상종하지 말아야 할 족속들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온 세리가
기둥 뒤에 숨어서 기도하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사실 세리나 창녀들은 하느님과 율법을 떠나서 살았기에
교회 공동체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눈에 띌까봐 창피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두려워서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다들 예수님 가까이 다가온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잘 먹혀들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딱딱하고 고리타분하던
당시 사제들의 설교와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장황하고 지루하기만 하던
당대 율법학자들의 강의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따뜻하고 감미로웠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들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있던 군중들은 깊은 감동으로 큰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기쁨과 희망의 에너지였습니다.
당연히 수 많은 사람들을 회개와 새 생활로 안내했습니다.
그분의 말씀으로 인해 자신들의 눈앞에서 구원이 이루어지고
일시적으로나마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 것을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이런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가면서
마침내 하느님과 담을 쌓고 지내던
세리와 창녀, 죄인들에게까지 전해졌던 것입니다.
당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하류 인생들이
줄지어 당신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본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생각합니다.
저 같았으면 엄청 두려웠을 것입니다.
다들 한 가닥씩 하던 사람들입니다. 얼굴도 험악 합니다.
굵은 팔뚝 여기저기에는 문신들이 가득합니다. 입만 열면 갖은 욕설이 난무합니다.
저 같았으면 서둘러 자리를 끝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처럼 겉만 보지 않으시고 그들의 내면을 바라보십니다.
그들의 상처투성이뿐인 과거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 보십니다.
나름 한번 새 출발 해보겠다고,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보겠다고
발버둥 쳤던 지난날을 바라보십니다.
그간 세상 사람들로부터 갖은 멸시와 따가운 눈초리를 바라보십니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들을 눈여겨보십니다.
그러고 나서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정말이지 깜짝 놀라 기절초풍할 정도입니다.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반갑게 인사하시고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십니다.
그들과 함께 회식을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과 온전히 하나 되신 것, 그들의 친구가 되신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완전 무장해제 시킨 예수님께서 드디어 한 말씀 던지시는데,
그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세리와 죄인들 더 감동시킵니다.
저 같았으면 이랬을 것입니다. “자네들 이제 그런 짓 그만하고 새 출발 해야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무라지도 않습니다. 몰아붙이지도 않습니다.
그저 당신의 솔직한 마음을 열어 보이십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자, 이제
김찬선 레오나르도신부
“자, 주님께 돌아가자.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오늘 호세아서는 “자”로 시작하는데
오늘 저는 이 “자”라는 말이 왠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자”라는 말은 “자, 이제 조용히 하고 ---합시다.”처럼
지금까지 하던 것을 멈추거나 떠들고 있던 것을 멈추고
“자”라고 하는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고 그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 “돌아가자.”와 “알도록 힘쓰자.”입니다.
주님께 돌아가자는 것과 주님을 알려고 힘쓰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 주님께 돌아가자.”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주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는 것인데,
누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하면 나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주님 앞에 줄곧 있었다거나 지금은 주님 앞에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다시 “자, 진정 주님께 돌아가자.”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 있는다고 있지만 제가 참으로 주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비유로 드신 바리사이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하느님 앞에 서 있고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온전히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 올바로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 있는 것 같지만 세리와 자신을 비교하고 있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랑은 다른 인간들 앞에서나 하는 것입니다.
누가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그는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곧 세리 앞에 있는 것이며,
하느님 앞에 있다하더라도 자랑할 수 있는 인간 정도로 하느님을 생각한 겁니다.
진정 그리고 오롯이 하느님 앞에 있다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할 수 없고,
자기의 의로움을 보고 자랑할 수 없고 자기 죄 외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진정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오늘 복음의 세리이고,
“자, 돌아가자.”라고 하는 것도 이제 진정 하느님 앞에 세리처럼 서자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자, 주님을 알도록 애쓰자.”라는 말을 보겠습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주님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뇌물을 좋아하고,
우리의 마음보다 십일조를 좋아하고,
겸손한 마음보다 희생 제물과 번제물을 더 좋아하는 분으로 안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몰라도 너무도 모르는 것이고,
잘못 알고 있어도 너무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결핍이 있는 인간처럼 알고 있고,
그 결핍을 채우려고 욕심을 부리는 인간처럼 하느님을 알고 있으며,
그 결핍을 인간을 통해서 채우려는 존재쯤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호세아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it is love that I desire, not sacrifice,
and knowledge of God rather than burnt offerings.”
자, 우리도 이제 확실히 압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겸손과 사랑임을.
세리의 기도 – 처절한 자기 인식과 통한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이 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비유’는
루카 복음에만 기록된 특수사료이다.
그런데 比喩, 또는 例話라고 보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 직설적이고 노골적이다.
예수께서 가르침을 비유로 말씀하실 때, 그것이 사람과 관련될 경우,
통산, ‘어떤 사람, 어떤 부자, 어떤 재판관, 어떤 과부, 어떤 여인, 한 아버지’ 등의
不特定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선택하신다.
그러나 오늘 비유의 주인공은 당시 유대 사회의 특정 인물,
즉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그 자리에서 듣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라는 점이 특이하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는 세리의 기도하는 태도와
스스로 옳다고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하는 태도를 비교함으로써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을 노골적으로 질책하고 있다.
세상에는 의인으로 자처하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죄인으로 자처하는 의인도 있다.
그러나 누가 죄인이고 누가 의인인지 그 판단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신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그 판단을 하느님께 맡겼다.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14a절)
아울러 스스로도 자신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14b절)
하느님의 판단 기준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마치 창세기의 카인과 아벨의 제사를 보는 듯 하다.(창세 4,3-5)
농부인 카인이 땅에서 난 곡식을, 목자였던 아벨이 양떼 가운데 맏배의 기름기를
각각 예물로 드렸건만, 왜 하느님의 처사는 불공평한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이 대목의 성서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야훼께서는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셨다.”(창세 4,5)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이라는 성서구절이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야훼께서는 사람이 바치는 예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바치는 사람도 함께 받으신다는 점이다.
어제, 오늘 복음에서 오히려 세리를 의인으로 인정한 하느님의 처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는 오늘 비유 속의 바리사이파 사람이 했던 것처럼
머리를 빳빳이 들고 장황하게 늘어놓는 자기소개나 자기 과시도 아니며, 자랑도 아니다.
기도는 비유 속의 세리처럼 멀찍이 서서 고개를 숙이고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는 自己認識이며,
그래서 처절한 痛恨이며, 그래서 자비를 구함이다.
기도를 들어 주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인간 삶의 결과만을 보시지 않으신다.
비록 그 삶의 결과가 부패와 부정 속에 허덕이고 있다하더라도 그 마음과 생각을 꿰뚫어 보신다.
세리는 자신이 하는 일 때문에, 이미 의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로부터 갖은 업신여김을 받았다.
스스로 겸손하다고 말하기는 쉬워도 업신여김을 참아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오늘 독서의 마지막 선언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려 줍니다.
복음에서도 비슷한 메시지를 발견하는데,
바리사이와 세리의 대조적 모습을 통해서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기도하려고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이 둘의 대비를 본질적으로 드러내는 요소는
그들의 기도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였습니다.
우리말로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라고
옮긴 그리스 말 문장을 그대로 옮기면
“바리사이는 서서 자기 자신을 향하여(‘프로스 헤아우톤’) 이렇게 기도하였다.”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에이스 톤 우라논’)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기도합니다.
바리사이의 기도가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면
세리의 기도는 ‘하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향하여 그분의 현존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참된 기도이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느라 하느님 없이 진행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결국 하느님의 최종 판단은 세리가 ‘의롭다’는 것으로 선언됩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하느님 없이 자기 행위만 과시한 바리사이의 기도는 그 응답을 받지 못하였지만,
하느님을 향하여 온전히 그분을 만나고 그분과 소통한 세리는
‘의롭게 됨’이라는 기도의 결과를 얻은 것입니다.
나의 삶과 성장에만 관심을 두는 태도는,
그것이 아무리 도덕적이고 품위 있는 생활이라 하더라도,
그저 신앙으로 포장된 경건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구태의연한 경건주의를 넘어서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소통으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통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진정한 기도가 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