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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들이 이마트 남원점에 모여 인근 시장에서 사온 냉이를 다듬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새 친구를 사귀는 이도 적지 않다고 했다. /남원=최보윤 기자
"겨울엔 따숩고 여름엔 시원허니, 밥만 먹으면 요리 나와. 새 친구도 많이 생겼지. 이 친구랑 나랑 네 살 차이, 저짝이랑 나랑 스물둘인가 서인가? 내가 왕언니지, 잉. 근디 우리 다 친구랑게."
전라북도 남원시 왕정동에 사는 장업수 할머니(83)는 매일 아침 집을 나서 집 앞에 있는 대형마트에 '출근 도장'을 찍는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다. 장씨 할머니는 남원 토박이로 17년 전 남원시에 이마트가 들어설 때부터 이곳을 거의 매일 드나들었다. "옛날엔 나도 잘 나갔고, 하하, 남원도 잘 나갔지. 근디 점점 젊은 친구들이 떠나고, 나도 나이 먹고, 남원도 나처럼 쭈글탱이가 됐당게. 하하."
'춘향의 도시' 남원은 1981년 시로 승격됐다. 전라북도에서도 전주, 이리 등의 뒤를 잇는 '전도유망'한 도시였다. 17년 전만 해도 인구 14만을 자랑했다. 이마트로만 봐도 148개 점포 중 7번째로 들어선 도시이니 그때만 해도 남원은 '장사 좀 되는' 도시였다. 하지만 젊은 층이 일할 만한 기업이나 기반 시설이 거의 들어서지 않자 어느새 2013년 기준 인구 8만6500의 소도시로 변해 버렸다. 65세 이상 연령층은 1만9000여명으로 전체 22%를 차지하며 초고령사회(65세 이상 연령층이 총인구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사회)의 대표적인 표본으로 꼽힌다.
이는 남원만의 현상은 아니다. 최근 통계청 조사 결과 2010년 기준 전국 시군구 248곳 가운데 27%가 초고령 사회로 집계됐다. 2020년이면 부산 강원 등 대도시도 초고령 사회가 될 전망이다. 초고령 사회로 접어들 때 '어르신'께 가장 필요한 것은 무얼까. 사회는 어떤 모습으로 바뀔까. 신년 맞이에 분주했던 지난 12월 31일 전라북도 남원을 찾아 미래 초고령 사회의 모습을 미리 엿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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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를 찾아 헤매는 노인들전라북도 남원시 조산동에 사는 김수녹(73) 할머니는 매일 휴대용 의자를 들고 집에서 나선다. 의자를 펴고 앉는 곳이 모두 그의 휴식 공간이 된다. 남원의 명물인 '5일장'이 열리는 4일과 9일이면 더 바쁘다. 용남시장과 공설시장을 돌아다니며 수다 꽃을 피운다. 장터 5분 거리인 마트에 들르는 것도 김 할머니의 '정규 코스'다. "내 시방 일흔셋 먹었는디, 친구들 만나면 힘든 걸 몰러. 집에 있으믄 심심헝께 잠이나 자고 뒷방 늙은이 취급 아녀. 일할 데도 없잖여. 나는 이리 팔팔한데 말이지. 돌아다니다 식량 떨어지면 라면도 사다 먹고, 옷도 이쁜거 들어오면 이렇게 사서 입고."
남원에서 산 지 60년이 됐다는 이순희(82) 할머니는 혼자된다는 게 가장 견디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동네 주민센터가 있지만 그보다는 마을 장터 등지를 찾는다. "젊은 친구들이 그리워. 노인보고 노인이라며 자꾸 한 곳에 모는 것도 싫지. 그럼. 밖에 나오면 젊은이들이 '어머니, 어머니' 그러는데 정말 듣기 좋아. 허리가 아픈디 물건도 들어주고 얘기도 들어주고…. 혼자였으면 팍 늙었을 거야. 누가 우리 같은 할머니랑 말벗 돼 주려고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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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위해 직원이 짐을 대신 들어주고 있다.
남원에서 어르신에게 가장 인기인 곳은 보건소와 장터가 꼽혔다. 장터 근방 마트도 인기였다. 사랑방 역할이었다. 대형 노인복지관은 생긴 지 1년 남짓이라 '오래된' 마트를 찾는 어르신이 적지 않다고 했다. 이곳은 50세 이상 고객층이 전체의 절반 이상으로 다른 마트 평균(30%)을 훨씬 웃돈다. 65세 이상도 전체 30%에 달한다. 갈 데도 없고 일터도 없는 노인들이 죄다 아침 9시 전부터 마트 앞에 모인다. 유통법 조례에 따라 10시에 문을 열어야 하는데도 어르신들을 위해 영업 전 미리 문만 열어 놓는다.
인근 시장에서 멸치나 콩나물 같은 걸 사서 삼삼오오 다듬는 사람들, 아예 드러누워 자는 사람들, 도시락을 싸다 나눠 먹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마땅히 놀러 갈 데도 없으니 종일 마트를 돌아다니며 직원들 안부를 묻고 다니는 이도 여럿이다. 동네 장터 가듯, 계산대에서 직원을 불러 '소주 두 병, 북어포 하나'라며 물건을 주문하는가 하면 잔돈을 깎아 달라고 우기는 경우도 있다.
◇두유·가루 세제, 인기품목도 다르다
고령층이 늘다 보니 선호 제품도 달라졌다. 신세대가 선호하는 액상 세제보다는 '하이타이'로 지칭되는 가루 세제가 인기고, 고령층 1인 가구가 많아 간편 가정식(가볍게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음식) 매출이 3~4년 사이 60%가 늘었다. 다른 점포는 25% 수준이다. 주전부리용 사탕도 큰 인기다. 건강도 생각하고 오래 보관해서 먹을 수 있는 팩 두유의 매출도 다른 점포의 배 이상이다. 마트 안에 직접 구워 파는 빵가게가 있는데도 그 앞에 마련된 기린, 삼립 같은 양산 빵 매출이 훨씬 높다. 귀에 익고 전통적인 물건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젊어 보이게 하는 염색약이나 볼륨 샴푸도 인기다. 어르신을 위해 솜사탕이나 팝콘을 무료로 제공하기도 하고 일대일 응대 서비스도 시작했다. TV 리모컨이 고장 났거나 수도꼭지가 잘 안 잠기는 것 같은 소소한 일도 직원들이 직접 '출동'해 고쳐준다. 이마트 남원점 김신호 지원파트장은 "직원들 모두 어르신 모시는 게 몸에 배어 있다 보니 신입 사원들도 절로 따라 하게 된다"고 말했다.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 일본의 경우 '백금(白金)세대'라 불리는 은퇴 후 고령자들이 소비시장의 가장 큰 열쇠를 지닌 이들로 주목받고 있다. 고령 여성의 체형을 고려해 만든 '마담토모코'가 큰 인기를 끄는가 하면 휠체어를 탄 채로 편의점에 진입할 수 있도록 상품 진열대를 낮추기도 한다. 어르신들을 위해 도시 외곽마을을 돌며 물건을 파는 '이동식 편의점'도 생겼다.
고령층의 소비를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취업난 해소에 도움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기개발연구원 김군수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발표한 '중·고령층 소비 둔화의 원인과 대책' 보고서에서 "중고령층 소비가 최소 3.05%(약 7조원) 증가하면 GDP가 1% 추가로 성장할 수 있다"며 "취업자는 7만1600명 늘어나며 고용률은 연간 0.18%p 증가하게 될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