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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장 개역개정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창1:1~창2:3절까지 서른 번 넘게 하나님(엘로힘/God)이 나오다가 2장4절부터는 여호와 하나님(Lord God)의 등장과 함께 문체도 바뀝니다.
창1:1~2:3절까지가 하나님의 완벽한 창조의 파노라마를 시적으로 선포한 것이라면 2장4절부터는 완전 수 일곱 날로 말씀하신 창조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 관계 중심으로 일해 나가시는 발단과 과정 속에 연루된 장소와 사건을 스토리 텔링으로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아담(일반 명사)에게 정복과 다스림의 권세를 위임하신 분은 일반명사로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인간은 누구라도 이 일반 명사로서의 하나님을 각자 취향대로,생각대로, 거듭나지 않은 양심대로,믿고 싶은대로 섬기거나 믿지 않나 싶습니다.
혹은 공중의 악한 영들과 결탁한 종교 시스템 안에서 한 촌락이나 한 종족이나 민족적으로 만든 신을 하나님이라 여기며 섬김니다. 그러기에 일반 명사로서의 하나님은 어쩜 범신론주의자들의 온상이라 할 수도 합니다.
오래전에 대한민국 민족의 종교 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분이 세계적인 기독교가 대한민국 민족의 종교 신인 하나님 이름을 도용했다는 이유로 법적 투쟁을 하였으나 패소했습니다.
법정 판결문이 말하길 하나님이란 이름은 모든 인류들이 부를 수 있는 일반 명사이기에 기독교도 얼마든지 하나님 이름을 사용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름 크리스천이라고 여기는 자일수록 깊이 새겨볼 역사적인 판례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일반명사)은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게된 여호와 하나님이신지,아닌지 죽기 전에 반드시 깨달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거의 육천번 가량 나오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이는 삼천번 미만으로 나오신 하나님보다 두 배나 더 많은 셈입니다.왜 그럴까요?
본디 여호와(야훼)란 이름은 하나님과 달리 고유명사입니다. 영어의 Be 동사와 동일한 히브리어 "하야(있다)"에 전능자의 손을 뜻하는 숫자값 열을 지닌 요오드를 맨 앞에 붙혀서 쓴 이름입니다.
그리고 야훼,여호와(나는 나다.나는 ...이다)라고 불렀지만 이스라엘은 그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않으려다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역사가 남겨준 이름이 아도나이(Lord God)입니다
우린 성경을 통해 이스라엘의 범죄 양상과 심각함을 아는만큼 그들을 쉽사리 무시하며 정죄해버리지만 진실로 유대인 그리스도 안에 거주하게 되면 그러한 범죄보다는 그 이면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그것은 그들이 얼마나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섬겼는가?를 알게 되면 이스라엘의 경건한 선지자들과 의인들 앞에 숙연해집니다.
에스겔서엔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는 말씀이 약 56회 나옵니다.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걸고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사 언약 백성으로 삼으셨음에도 그 긍휼과 은혜를 헛되이 받자 그들을 심판하시면서 들려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를 절대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뜻과 욕망과 의지를 키우며 존재의 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리고 존재의 물이 고이지 않는 웅덩이를 판 유다를 왜 심판하셨는지 그 목적을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곧 먼지와 티끌일뿐인 "Nothing" 인 것이 존재의 흉내를 내며, 존재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사람과 물질과 그외 것들을 의지하면 혹독한 심판을 통해서라도 자기 백성이 편히 숨쉬며 살도록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터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다면 창세기 2:4절 이후의 성경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게 무엇일까를 집중적으로 찾아 보게 됩니다.
하여,이후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대 의존적인 존재가 나라는 걸 남의 살과 뼈가 아닌 내 살과 뼈에 새기게 됩니다. 이게 창세기 2장에서 발견된 여호와 하나님 복음입니다.
오랜 후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묵상해보면 우리가 얼마나 원천적 절대 가난한 자들인지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는 말씀으로 적나라하게 규명해주십니다. 이 가난을 가장 큰 복으로 받는 자가 산상팔복안에 거하는 자입니다.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코로 숨쉬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도록 코에다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매순간마다 생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만은 우린 그렇지 못합니다. 또한 그렇게 살기엔 해야 할 일들,생각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때문에 스스로 존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절대 의존적 신앙인으로 살 수 있는 온전한 믿음을 구합니다.
4일전 한국의 벗으로부터 다급한 문자를 받았습니다. 남편이 심정지되었으나 감사하게도 즉시 심폐 소생술 끝에 생명은 건졌지만 인공 호흡기 부착한 상태이니 기도해달라는 문자였습니다.
남편이 판사직을 은퇴한 후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차려 일하다 그랬다는데 이 친구 또한 삼년전부터 항암 방사선 치료를 80회 넘게 받은 상태이니 정말 고통스런 소식이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되 범신론적으로 믿는지라 어찌하면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알수 있을까? 끙끙거릴 때가 한 두번이 아니였습니다, 따라서 그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주심으로서 이미 인애와 정직과 공의를 베푸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기 원하던 터에 듣게 된 소식입니다.
두 딸은 출가하고 자폐증 아들을 대학까지 보내어 사회인으로 세우기까지 엄청 수고한 친구로 자기는 아들보다 하루라도 더 살다 죽어야 된다고 말하곤 합니다.
날마다 기도의 동역자와 함께 기도하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찌 일하시나 기대하며 살펴 보는 중입니다.
입원 첫 날은 소변까지 안나와 투석관을 삽입했으나 그 다음 날 소변이 나왔다 합니다. 어제 낮엔 인공 호흡 반,스스로 호흡 반이라는 소식이 와서 호흡기를 떼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호흡기를 뗐다는 문자를 받아 보았습니다.
이젠 한 고비를 넘겨 의식이 명료해졌는데 심정지로 폐에 고인 물을 다 빼야 그 다음 수순으로 관상동맥 1개를 뚫는 시술을 할 수 있다 합니다. 폐에 고인 물이 잘 빠질 것과 시술 전문의에게 지혜와 민첩함을 주사 이미 있는 실력을 잘 발휘하게 해달라는 기도 문자를 보내주었습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께서 택한 자의 인생에 친히 개입하사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창세기 1장에 나오신 하나님께선 전 우주적인 하나님으로 광범위하게 포괄적으로 일하시지만 창세기 2장의 여호와 하나님께선 친히 빚으신 단 한 사람과의 언약 관계 중심으로 엮여가는 창조 이야기를 들려 주십니다.
이것은 비단 그 아담 한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 당신의 택한 백성들과도 각각 관계 중심으로 창조의 새 지평을 여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재차 각인시켜 주시는 셈입니다.
당신께서 빚으신 그 사람(하 아담)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는데 이는 그를 제사장겸 선지자의 신분을 주신 것입니다. 창1장 26절의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당신 대신 정복/다스릴 수 있는 왕의 대리권을 주시기 위해 아담(일반 명사)을 만드신 목적과 좀 다르지 않습니까?
여기서 '경작하며'의 히브리어는 '아바드(섬기다)'이고 '지키게'는 '샤마르'입니다. 아바드는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예배하다'로 번역했는데 제사장들에게 이 말을 씁니다. 그리고 '샤마르(지키다)'는 레위인들의 임무로 성막의 모든 기구들을 맡아 지키는 것을 뜻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히:아냐흐->안식하다)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2:15
위의 말씀의 수순을 보면 제사장과 선지자의 업무를 표현한 '경작하며','지키게 하시고'라는 동사보다 먼저 나온 말씀이 '두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두어'는 히브리어 '아냐흐'로 '안식하다'입니다. 이로 보건대 제사장과 선지자 업무의 절대적 에너지는 안식으로부터 공급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에스겔서엔 제사장은 땀을 흘리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땀은 영적으로 제사장과 선지자가 인간적인 열심과 노력의 땀을 흘리지 말고 안식을 누리며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1~3)"라는일곱째 날의 말씀과 필히 연관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창세기 2장3절이 끝나고 4절에서 느닷없이 여호와 하나님으로 시작하자 그 3절과 4절 사이에 여러 논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진실로 성경은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시지 않으면 끝내 의혹과 회의만 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모세와 선지서와 시편을 두고 나를 말씀함이라고 인쳐주셨다는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어려운 말씀일수록 보고 또 보고 보기를 수없이 반복하다 드디여 예수님께서 얼굴을 보여주시면 의외로 쉬워집니다.
안보여주시면 보여 주실 때까지 뇌관과 심령이 그 말씀속에 점점 깊이 빠져버립니다. 묵상 진도가 처지거나 말거나 주 안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럴 때마다 비유와 스토리 텔링으로 돌돌돌 말아서 숨어 계신 그리스도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미 알고 있는 기존 지식과 머리 회전과 성급히 알고픈 마음이 죽어지기를 수없이 반복합니다.
킹제임스 영어로 창2:15절을 읽으면 참으로 감동입니다.
"And the Lord God took the man,and put into the garden of Eden <to dress> it and to keep it. 창2:15
경작하며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바드(섬기다)를 <to dress>로 번역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지시대로 만들었던 값비싸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대제사장 옷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혹은 세마포 흰 옷을 떠올립니다. 옷은 신분을 말하기에 이로써 하아담을 장차 대제사장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표상이라 말함에 담대해집니다.(창세기2장7절에 나온 사람의 원어가하아담)
모든 성도로서의 하아담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입니다. 성도의 정체성이 그러합니다. 성도가 자신의 이지러진 자화상에 갇혀 살면 안됩니다. 반드시 그리스도로 옷입은 자로서,즉 그리스도의 정체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그리스도도 아닌 먼지와 티끌일뿐인 "Nothing"이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품으면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절대 의존적인 자로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됩니다. 항상 나란 자화상 없음만이 항상 그리스도의 정체성 있음으로 살게 만듭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마 약속하신 흰 옷을 입은 예배자로 살아가려면 내 안에 편만히 자리잡고 있는 세상 세력과 가치관과 비진리의 생각들을 이겨내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아담을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로 창조해 주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창1장에는 나오지 않았던 에덴 동산이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등장하면서 첫 아담이 등장한다는게 매우 신비롭습니다.
더구나 여호와께서 온 몸으로 감지할 수 있는 영역으로서의 최적으로 안식할 수 있는 에덴 동산에서 살게 하셨다는게 은혜 위의 은혜입니다.
오늘날의 낙원은 강도임에도 예수님을 믿게 된 나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 마음의 밭에 심기워진 낙원을 원수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며 낙원을 굳게 지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상태를 유지할 때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과 기쁨을 향유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주와 함께 에덴 동산을 거니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께서는 자신의 사명,곧 대제사장 직분에 충성하셨습니다. 그 충성은 항상 아버지 안에 거하시며 생명의 꼴, 곧 아버지의 말씀으로 우리를 섬기신 것과 우리를 대속하시려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를 몽땅 주신 섬김이십니다.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렇게까지 두려워 떨던 당신을 아들의 피로 믿게 하심으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 아버지는 창조주시요, 열방의 통치자이시니 이런 아버지를 구체적으로 알아 갈 수 있도록 아버지의 유일하신 아들 그리스도로 살게 하옵소서.
그리스도만이 아버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