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11. 연중 제19주간 수요일(마태 18,15-20)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이라는 말씀은,
“네가 보기에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으로 해석됩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한 개인과 개인 사이의 사적인 잘못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교회가 나서야 할(17절) 공적인 죄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에,
‘너에게’ 라는 말은 삭제를 하든지, 아니면 다르게 번역해야 합니다.
(그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짓는 상황이 아니라,
‘하느님께’ 죄를 짓고 있다고 내가 판단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7,1).
그렇기 때문에 형제의 죄를 판단할 때에는 정말로 신중하게 판단해야 하고,
우선 먼저 ‘나 자신’의 죄부터 성찰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그를 타일러라.” 라는 말씀은 “그를 심판하여라.”가 아니라,
“그가 심판받지 않도록 그를 도와주어라.”입니다.
(사랑으로 회개를 권고하라는 뜻입니다.)
‘단둘이’ 만나라는 말씀은 그 형제가 공개적으로 모욕당하거나 망신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라는 뜻인데, 이 말씀도 ‘사랑으로’ 권고하라는 가르침에 포함됩니다.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라는 말씀은,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막는 일은,
또 그 형제를 회개로 인도하는 일은,
‘형제애를 실천하는 일’(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죄는 ‘영혼의 병’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권고하는 일은,
아픈 형제가 건강을 되찾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 유다를 ‘단둘이 만나서’ 타이르셨을까?”
복음서에 기록은 없지만, 그렇게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즉 유다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할 때부터
예수님께서는 그를 타일러서 바로잡으려고 애를 쓰셨을 것입니다.
복음서에 그런 기록이 없는 것은,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 사이에 있었던 일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갈라티아서를 보면, 베드로 사도가 ‘단죄 받을 일’을 했을 때(갈라 2,11),
바오로 사도는 ‘모든 사람 앞에서’ 베드로 사도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갈라 2,14).
왜 바오로 사도는 그렇게 하기 전에 먼저 ‘단둘이 만나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교회의 최고 지도자라는 베드로 사도의 위치 때문에,
또 그 일과 관련된 사람들이 ‘다수’였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만 잘못한 것이 아니라 바르나바 사도도 잘못했고,
두 사도 외에도, 같은 행동을 한 사람들이 더 있었습니다(갈라 2,13).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 일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갈라티아서에는 베드로 사도 개인을 비판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갈라 2,14),
사실은 교회 공동체가 공적으로 함께 반성해야 할 교리 문제를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6-18).”
개인의 힘으로 안 된다면 공동체가 나서야 하는데,
몇 사람이 가서 권고하든지 교회 전체가 나서서 권고하든지 간에
‘잃은 형제를 되찾기 위한 일’이라는 원칙을 잊으면 안 됩니다.
여기서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라는 말씀은,
“신자 자격을 정지시켜라.” 라는 뜻입니다.
(‘파문’하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신자 자격이 정지된 상태는 곧 ‘조당 상태’이고,
그 상태에서는 ‘성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조당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회개해야 하고, 교회에서 정한 절차를 따라야 합니다.)
파문이나 조당은 영구 추방이 아닙니다.
회개하라고 일시적으로 성사에 참여할 자격을 제한하는 것뿐입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늘의 권한보다 땅의 권한이 위에 있다는 가르침이 아니라,
땅에서 행사하는 권한은 하느님 뜻에 합당해야 하고,
하느님 뜻을 실현하는 방법이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마태 18,14).
파문이든지 조당이든지, 또는 다른 어떤 조치를 취하든지 간에, 그 모든 일은
‘하나도 잃지 않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입니다(마태 12,20).
진심으로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아무리 죄가 크더라도, 회개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온 공동체가 그렇게 노력해도 ‘스스로 회개하기를 끝까지 거부하고’,
구원받기를 포기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도 공동체는 그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이 말씀을 ‘잃은 형제를 되찾는 일’에 적용하면,
‘마음을 모아’ 라는 말씀은, 사람들끼리 마음을 모으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또는 하나도 잃지 않기를 바라시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마음’에 ‘우리의 마음’을 일치시키라는 가르침으로,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노력하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