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가 없으신 하느님을 믿습니다(추계제. 9월 20일))
“야훼의 손이 짧아서 못할 일이 있겠느냐? Is there a limit to my power?(민수 11:23)” 이는 모세가 60만 대군을 한 달간 고기를 주시겠다는데 대한 모세의 의구심에 대한 야훼의 답변입니다. 모세 홀로 백성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지지 않게 장로 70명과 나누어져 모세 혼자 애쓰지 않게 하시는 야훼이십니다.(민수 11:17). 그래서 모세에게 주었던 영을 70장로들에게도 주시겠다는 하느님이십니다. 교회의 리더로, 부제로, 사제로, 주교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하느님은 모세에게 70장로들에게 영을 주신 것처럼 하느님께서 준비된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실 것입니다. 모두에게 영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모세는 알았지만 여호수아는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이 왕으로 오시니 땅이 흔들리는구나(시편 99:1).” 하느님이 왕으로 오시면 땅의 우선순위가 바뀌어 하느님의 통치방식으로 재배치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삶의 방식으로 우리의 삶이 재배치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거룩하신 분을 기리는 방법은 그분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시편 99:5). 우리의 잘못에 벌하시면서도 용서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시편 99:8).
“나에게 예배드리러 오라. Come worship me.”는 말씀인 “나를 찾아라.”에 대하여 제가 올립니다. “저는 주님께 갈 것입니다. I will come, Lord.”라며 “주님, 당신을 뵙고자 합니다.”고 간절히 외칩니다(시편 27:8). “제 구원자이시니 제게 얼굴을 숨기지 마시옵소서(시편 27:9).”
“나는 심었고 너는 물을 주었지만 하느님은 자라게 하시는 분이십니다(1고린 3:6).” 심는것도 물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라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자라지 못하면 아무 쓸데가 없어지니까요.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일하는 일꾼이고 하느님의 밭이고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We are God’s partner, God’s field, God’s building(1고린 3:9).” 하느님은 기초를 이미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기반입니다(1고린 3:11).
예수님의 양식은 특별식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요한 4:34). My food is to obey the will of the one who sent me and to finish the work he gave me to do.” 하느님이 주신 일을 완성하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입니다. 하느님의 주신 일을 하면 배가 불러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소홀히 하면 뭔가 허기진 적이 많잖습니까?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것의 예수님의 양식이 우리의 양식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들이 향하는 중심이자 근원이시며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자로 거두는 사람이고 조수의 흐름이자 썰물입니다(여호수아 아브라함 헤셀).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자의식을 내려놓고 하느님께 두 손 들고 항복하여 하느님께 복종하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생명을 상징하는 것은 최고는 물입니다. “성전 정면은 동쪽을 향해 나 있었는데, 그 성전 동쪽 문턱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 물은 제단 남쪽으로 해서 성전 오른쪽 벽에서 뻗은 선을 타고 흘러 내려갔다.(에제 47:1).”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인하여 다달이 새 과일이 나와서 열매가 끊어지는 일이 없다. 그 열매는 양식이 되고 그 잎은 약이 된다(에제 47:12).” 성전에서 나오는 물로 인해 성전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집트나 멕시코나 구낭이나 몰타의 피라미드는 외형이고 그 안에 샘물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결국 샘물이 핵심이고 겉모습은 피라미드라는 건축물입니다. 샘물을 보존하려는 외형을 가진 것입니다.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이행하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예수님처럼 살고자 하는데 자신의 준비가 덜 되어 제대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못한다면 이것처럼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피상적인 믿음올 가지고 사는데 지쳤기에 이제는 진실한 하느님의 일꾼으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믿음이 적은 상태에서의 고결한 환대가 나올 수 없음을 압니다. 그래서 믿음을 단단히 하여 고결한 환대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고 싶은 것입니다. 깊은 관대함과 매력적인 친밀함을 지닌 믿음을 기반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고자 원합니다. 너무 쉽게 사람들을 차별하고 분리하는데 익숙하여 협박과 배제가 능사인 사회의 일원으로 불쾌할 정도로 자기연민에 빠져 있는 점에 대해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게 됩니다.
중세의 신비주의자인 노르위치의 줄이안은 신성한 주님과의 만남을 추구하면서 하느님의 고난을 세배로 달라고 간구 기도를 바쳤습니다. 하느님의 힘이 한계가 있지 않음을 믿는다면 오늘 노르위치의 줄리안처럼 신비가로 고난의 양식을 먹으며 고난 중에 감사찬미를 바치고자 원합니다. 주님을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