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고다이바.
이 전설의 여인을 잘 아실 것입니다.
11세기 영국 코벤트리에 머시아 백작 레오프릭이 아름다운 아내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아내의 이름이 고다이바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코번트리 시민들이 내는 무거운 세금을 매우 안타까이 여겼고
남편에게 세금을 줄여달라고 끈질기게 간청을 하지요.
이에 화가 난 백작은 얼토당토 않은 방식으로 성질을 냅니다.
"만약 당신이 알몸으로 말을 타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저잣거리를 지나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소."
백작은 단지 불가능성을 그런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고다이바는 놀랍게도
백주 대낮에 다리 이외의 온몸을 머리카락으로 감싼 채
저잣거리를 말을 타고 당당하게 달려갑니다.
시민들을 위해 옷가지쯤 벗는 게 무에 그리 대수겠습니까?
그것은 정말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요.
외려 자랑스러운 일이겠지요.
결국 레오프릭은 세금을 줄이고 또 부인의 신념에 찬 그 박애정신을 기려
그곳에 수도원을 세워 기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신으로 저잣거리를 달릴 용기는 나에게 없지만
달려가는 여인에게 박수를 칠 용기는 넘쳐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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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하나의 이야기가
요즘의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질 않내요.
<스펙터클 사회>라는 자본주의 비판서인데요.
이 책 속에는 프랑스식 반어법이 가득합니다.
. 스펙타클은 현실사회의 비현실성의 심장이다.
. 스펙타클은 철학을 현실화하지 못한 채, 현실을 철학화한다.
. 욕망의 의식과 의식에 대한 욕망...
. 겉으로 드러난 분리는 통일되어 있는 반면 겉으로 드러난 통일은 분리되어 있다.
. 혁명이론은 이제 모든 혁명 이데올로기의 적이다.
. 이 사회의 진실성은 이 사회의 부정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 (스펙타클의 비판이론은) 스타일의 부정이 아니라 부정의 스타일이다.
. 오직 문화의 부정만이 문화의 의미를 보존할 수 있다.
기 드보르는 시대의 모든 것이 스펙타클적 표상적 세계 내지 이미지들로 매개된 악몽의 부속품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프롤레타리아 해방이라는 기치 아래 승리를 거둔 볼쉐비즘을 비판하는 내용을 주된 포인트로 잡고 있지요.
혁명의 직업화, 관료화로 인하여 노동계급의 대표가 오히려 노동계급과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그의 주장이 오늘의 나 그리고 우리를 되비추는 것을 느낍니다.
과학이나 예술도 파편화된 도구일 뿐이라는 그는 프랑스 68혁명은 사회적 금기를 깨뜨리는 데서 더 나아가 국가와 문화, 과학, 예술 더 나아가 혁명의 이데올로기까지 거부하지요. 그리고 일갈합니다.
"전도된 진리의 물질적 토대로부터의 해방 - 이것이야말로 우리시대의 자기해방을 구성하는 것이다."
왜 그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는 자살할 수밖에 없었는지, 지금의 제게는 매우 절박한 명제로 다가옵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한 이 책,
프롤레타리아계급이 혁명의 동력을 상실하게 된 사회경제적 조건에 대한 냉철한 진단.
불합리한 세상에 대한 그의 분노
저는 대체로 매우 공감합니다만, 어쩔 수 없이 다른 질문으로 나아가게 되고 맙니다.
물질적 토대를 뿌리째 뒤집어서 성취할 해방이란 얼마나 인간적일까?
철부지의 '이유 없는 반항' 그 이상일 수 있을까?
999 가지 비판의 결과가 고작 한 가지 대안? 그것도 추상적이고 포괄적이서 실체를 알아볼 수조차 없는.
사회개혁 내지 진보를 앞세우는 너무 성마른 급진적 세계관의 한계에 대해서
한 번은 돌아봐야 할 것이라는, 꼭 돌아봤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을 지울 수가 없네요.
1994년 자살한 기 드보르.
저서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자신의 이념을 영상화한 영화를 만들기도 했던 그는
왜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스스로 퇴장해야만 했을까를 곰곰 생각합니다.
"자신의 작품이 이미 하나의 고전이 되었다는 고통스러운 깨달음" 때문이라고 말한 이도 있었습니다.
이 말이야말로 참으로 가혹하고 잔인한 자본주의적 색안경적 진단이 아닌가 싶었어요.
자신이 그토록 거부하였던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결국 자신도 소비되는 이미지의 화신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가 조금만 겸손하였다면, 조금만 남과 내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인간 보편의 한계를 인정할 수 있었다면,
그는 구태여 스스로를 퇴장시키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란 미련이 자꾸 꿈틀댑니다.
생명은 생명 자체로 존귀하니까요.
내가 존귀한 것처럼
저편의 그도 분명 존귀할 것입니다.
오늘 내가 아픈만큼
저편의 그도 아플 것입니다.
내 아픔이 당신의 환희로 건너가는 일은 없습니다.
당신의 환희가 내 아픔으로 건너오는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기실 희망과 기쁨으로 이어지긴 힘들어도
아픔과 슬픔으로 연대합니다.
우린 모두가 아픔의 자식이고
슬픔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입니다.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합니다.
누구보다 나를 기망하는 가장 난해한 적은
바로 나라는 것을 새삼 되새깁니다.
첫댓글
내가 존귀한 것처럼
저편의 그도 분명 존귀할 것입니다.
오늘 내가 아픈만큼
저편의 그도 아플 것입니다.
내 아픔이 당신의 환희로 건너가는 일은 없습니다.
당신의 환희가 내 아픔으로 건너오는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기실 희망과 기쁨으로 이어지긴 힘들어도
아픔과 슬픔으로 연대합니다.
우린 모두가 아픔의 자식이고
슬픔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입니다.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합니다.
누구보다 나를 기망하는 가장 난해한 적은
바로 나라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