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8월 31일 폴란드가 독일을 침공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활약하 포돌스키라는 독일 선수가 있다. 그리고 좀 더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빼어난 활약을 펼친 미로슬라프 클로제라는 이름도 끄집어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둘 간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폴란드 출신이라는 것이다. 둘 다 폴란드에서 태어나 독일로 이주한 케이스인데 그 가운데 특히 포돌스키의 폴란드 사랑은 여간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독일 대표팀 선수였지만 사석에서는 폴란드 말을 썼고 폴란드를 정기적으로 방문했으며 독일과 폴란드가 경기라도 하게 되면 무척 비탄에 잠겼었다고 한다. 폴란드는 축구에 관한한 독일에 한이 많다. 공독증(恐獨症)이라 불러야 할 지 역대 전적 4무 11패를 기록하고 있으니까. (네덜란드도 비슷했는데 언젠가 유럽컵 대회에서 독일을 격파하여 한을 풀었다. 이때 네덜란드 인구 9백만 가운데 5백만 명이 집 밖으로 달려나와 광란의 파티를 즐겼다고 전한다)
이 포돌스키의 고향은 독일말로 글라이비츠라 불리우고 폴란드 말로는 글리비체라고 하는 도시다. 지금은 폴란드령이지만 2차 대전 전까지는 독일 땅이었다. 이 애매한 국경 지대 도시 글라이비츠는 “너는 유대 땅 가운데에 가장 작지 아니하리라.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는 예언의 땅 베들레햄과는 또 다른 의미로 ‘작지 않은’ 이름으로 남게 된다. 바로 이 도시에서 수천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제2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던져지게 되는 것이다.
1939년 여름. 독일의 히틀러는 전쟁을 불사하고 좀 더 많은 영토를 보유할 것을 결심하고 있었고 대상은 이웃 폴란드였다. 아직까지 독일군의 힘에 회의적이었던 독일군 장군들은 한때 히틀러를 제거할 생각까지도 품었지만 대놓고 총통의 계획에 맞서지는 못한 채 총통의 위세에 끌려가고 있었다.. 독일 언론은 연일 “폴란드인들이 벌이는 독일인들에 대한 인종차별”, “폴란드에서 핍박받는 독일인들”류의 보도 홍수를 냈고 각종 영화에서도 폴란드인의 탐욕과 독일인들의 비애를 절절하게 표현해 독일인들의 심사를 긁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히틀러는 결정적인 명분이 필요했다. 평화를 사랑하는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하는 것이 아니라 폴란드의 버르장머리없고 잔인한 공격에 과감히 맞서서 반격하는 시나리오가 요구됐다. 히틀러는 그의 심복 히믈러를 불렀다. 어떻게 해 보라. 히믈러는 계획을 수립한 후 리하르트 하이드리히, 즉 훗날 체코 총독으로서 체코인 게릴라의 손에 죽게 되는 그를 불렀다. 총통 각하의 명령이네. 즉시 수행하게.
하이드리히는 이 계획을 실행할 자로 한때 권투 선수로서 공산당원들과 거리에서 혈투를 벌일 때 단연 두각을 드러냈던 SS 장교 나우요크스를 뽑았다. 무뚝뚝한 인상의 이 독일 장교는 착착 일을 진행시켰다. “ 선전(宣戰)을 위해 폴란드의 공격을 증명할 수 있는 물적 증거가 필요하다".”는 것이 히믈러의 요구였다고 한다. 1939년 8월 31일 오후 8시 암호가 떨어졌다. 암호명은 색달랐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나우요크스와 그 동료들은 미리 준비한 폴란드 군복을 입고 글라이비츠의 방송국을 공격해 들어갔다. 그들은 기술자들을 포박한 후 미리 준비한 폴란드 어로 된 선전포고문을 읽었다. 그래도 증거가 부족했다. 전투의 흔적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에도 대안이 있었다
히믈러가 몸소 골라 준 두 명의 죄수가 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폴란드 군복으로 갈아입혀진 후 등 뒤에서 총을 맞았다. “습격 후 도망가는 폴란드인을 사살”로 포장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들은 졸지에 폴란드 군 인증샷으로 여생을 마쳤고 그들의 시신은 향후 수천만 명의 시신의 대열의 맨 앞에 서게 된다. 다음날 히틀러는 독일 전역과 전 세계에 폴란드의 “침략”에 맞서 독일군을 폴란드에 진격시킬 것이라고 포고한다. 그리고 다음날 9월 1일 이른바 기갑부대를 앞세운 ‘전격전’이 폴란드를 유린하고 2차 대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히틀러 기획, 각본 히믈러 연출 하이드리히 주연 나우요스크로 이어지는 라인업이 펼친 “폴란드군 글라이비츠 침략쇼”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런데 당시 나찌 언론 통제 기관은 각 언론사에 기묘한 지시를 내린다. 절대 “전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라는 거였다. 이는 독일군이 불법 침략의 희생자로서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폴란드에게 반격한다는 것을 위한 조작이었다. ‘전쟁’ 아닌 ‘정당한 대응’으로서 폴란드로 진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늘 아래 무서운 것 없어 보이던 나치들도 그렇게 명분을 챙기기 위해 노력했고 자신의 야욕을 선의로 포장하기 위해 애썼다. 명분이란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명분 수립의 가장 큰 이유는 실리를 얻기 위함이다.. 하지만 명분 싸움 하면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뒤지지 않을 우리 나라 사람들은 명분을 위해 실리를 포기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런 건 나찌로부터도 배우는 게 좋을 것이다.
글라이비츠 사건의 진상은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권투 선수 출신의 SS 장교이자 당시의 행동대장 나우요크스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사실을 토로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나마 그는 유일한 증언자였다. 당시 방송국을 습격했던 그의 동료들은 전쟁 중 남김없이 죽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