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0월 30일 인현동 호프집 참사
시사 프로그램 조연출할 때 종종 청소년 탈선이나 방황하는 아이들 류의 아이템을 찍을 때 으레 가는 곳이 있었다. 노원구 중계역 근처, 화양동 근처, 수능 끝난 날 신촌 등등. 거기서 어정거리고 있다 보면 뭐가 걸려도 걸렸으니까. 인천으로 치면 중구 인현동이 그랬던 모양이다. 1999년 10월 30일은 인근 10여개 고등학교 축제가 열렸다고 했다. 어차피 축제를 해도 즐기는 성품이 아니었겠으나 워낙 공부하는 녀석들이 웬 축제?? 라는 인식이 투철하던 고등학교를 나온 터라 고등학교 축제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는데 인천의 고등학교 축제는 ‘어린’과 ‘젊음’의 형용사 사이에 있는 고등학생들을 어지간히 들뜨게 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그들의 해방구라 할 인천 중구 인현동으로 몰려들었다.
당연히 그때도 청소년들에게 술 파는 건 금지돼 있었지만 원래도 술을 거리낌없이 팔았던데다가 축제 대목을 노리고 있던 호프집 주인은 거리낌없이 기탄없이 아이들을 맞아들였고 호프집은 금새 고등학생들로 복작거렸다. 더 맹랑한 일은 원래 이 호프집은 영업을 할 수 없는 날이었다는 것이다. 청소년에 대한 술 판매로 단속에 걸려 영업 정지를 먹은 상태였다. 그러나 주인은 태연히 가게 문을 열었고 아이들을 끌어들인 뒤 문을 잠가 버리고 술잔을 돌리고 돈을 셌다.
그런데 지하실에 있던 노래방에서 사단이 났다.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10대들은 묘한 내기를 했다. 신나에 불이 잘 붙는지 라이터 기름에 불이 잘 붙는지 입씨름을 한 끝에 끔찍한 결과를 낳는 위험한 탐구 정신을 발휘한 것이다. 어느 쪽이든 불은 상상 외로 잘 붙었고 그 불은 눈깜짝할 새에 위층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건물 자체도 어처구니없을 만큼 화재에 취약했다. 지하 노래방 천정에는 스프링클러같은 것이 아예 달려 있지 않았고 화재경보기도 먹통이었다. 심지어 화재 전날 지하 노래방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공사에 방해가 된다며 소화분말액을 자동 분사하는 천정의 확산소화기 15대를 모두 제거한 것은 결정타였다.
1층은 식당, 2층은 호프집, 3층은 당구장이었는데 1층 사람들은 대부분 빠져나왔지만 2층과 3층은 급작스런 불길에 휘말렸다. 3층 사람들은 뛰어내리기라도 했는데 2층은 그렇지 못했다. 엄청난 인구밀도 속에 출입구는 1.2미터의 좁은 통로가 있었고 창문은 베니어판으로 막혀 있었다. 즉 출입구 통로가 막히면 호프집은 밀실이었다. 소방차가 득달같이 달려왔고 불은 30여분 만에 꺼졌지만 그 짧은 시간에 무려 57명의 목숨이 불길 속에서 사라졌다. 대부분이 10대 청소년들이었던 희생자들은 불쏘시개가 된 책상과 자재들 속에서 뒤엉킨 채 불에 타서 또는 숨이 막혀 죽어 갔다.
우리 사회의 고질병이 되다시피 한 안전불감증이 빚은 참사였다. 거기에 더하여 희생자 가족들은 이중의 아픔을 견뎌야 했다. “왜 그런 곳에 가서 죽었느냐”는 희생자들의 ‘탈선’에 대한 수군거림 또는 공공연한 험담이었다. 시는 보상 책임이 없다고 발을 뺐고 시교육청은 교장 회의를 소집하여 ‘학생 단속 강화’를 역설했다. “날나리들이 놀다가 죽었다.”는 낙인은 유족들의 시커먼 가슴을 칼끝으로 헤집어 놓았다.
그때 인천의 고등학생들이 나선다. 인천의 각 고등학교 학생 대표들은 죽어간 친구들에 대한 따가운 시선에 대해 반박하고 어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성명을 준비한다. 하지만 학교장과 교육청 당국 등의 ‘어른’들은 그들을 막아선다. 인천 교육감은 관내 82개 학교장들을 당장 소집하여 학생들의 집단 행동을 막으라고 윽박질렀고 학교장들은 학교로 돌아가 학생들을 불러 성명서 발표에 가담하지 말 것을 종용했던 것이다. 결국 성명서는 무산됐다. 하지만 그 발표하지 못한 성명서는 다시 읽어도 명문이고 지금 들어도 여운이 많은 내용이다.
“먼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학우들에게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보냅니다...... 물론 그들이 학생으로서 가지 말아야 할 장소에 출입한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어른들의 말씀대로 아직 저희에게는 술에 대한 가치관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학생들 앞에 말리는 사람 따로 파는 사람 따로인 상황이라면 학생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쪽으로 손을 뻗칠 것은 불 보듯한 일입니다.
청소년 보호법에는 만 18살 미만의 학생에게는 술과 담배 판매를 일체 금지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그러나 단속을 해야 하는 공무원들은 아니나다를까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되는 상황입니다. 인천시도 반성하기보다는 죽은 친구들이 문제가 많아서 그렇다는 말들만 하고 있습니다.
(중략)
저희들에게도 이번 사태를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저희 학생들과 청소년들을 무시하는 행정을 하신다면 제 2의 인현동 참사는 일어나고 말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 학생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기성 세대가 저지른 잘못을 자신들의 상호 이익을 위해 대충 절충하고 덮어가는 식으로 해결하는 것을 바라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희들에게 호프집에 출입하지 말라고 다그치시기 전에 저희 학생들이 모여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십시오. 깨끗하고 올바른 행정을 펴 주십시오. 저희 학생들도 어른들의 제재가 있기 전에 먼저 반성하고 잘못을 고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돈 주고 받고, 설마 뭔 일 나겠어 소화기 치우고, 영업 정지 맞고도 문 잠그고 영업하고, 오는 대로 술 팔고, 그걸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체 하고 그런 데는 날나리들 가는 곳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거기서 수십 명의 청소년이 죽어 나가도 그러게 왜 그런 데를 가? 혀를 차는 것 뿐이던 어른들이 이렇게 별 것도 아닌 성명서를 틀어막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기민하게 움직였다. 화재의 원인이었던 안전불감증에 대비하여 대체 그들은 무엇에 그렇게 ‘예민증’을 보였던 것일까. 1999년 10월 30일 인현동 호프집 참사를 한 번쯤 기억해 봤으면 좋겠다.
이 성명서를 그때 읽었더라면 나는 "청소년 탈선"의 모습을 굳이 잡아내려고 카메라를 들고 설치던 모습이 몹시도 부끄러웠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