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책을 일단 아무거나 새로 펴기만 하고 끝까지 못 읽는 나날을 겪었습니다. 읽다 지겨워서 다른책 보고 다른책 보고.
이러다가는 책 한권 제대로 못읽겠다 싶어서 예전에 읽다 만 책들을 마무리했습니다.
사실 하상욱 시인의 '시로'까지 포함하면 세권이지만 이건 좀 감상을 쓰기엔(..) 하상욱 시인의 시를 처음 봤을 때 충격은 여전한데 폼은 여전하지 않더군요.
나쁘진 않았습니다.
1. 개발 없는 개발
분명 이 책을 살 땐 증기기관차가 표지에 있었는데 인터넷에 도는 표지는 이게 대부분이네요 거참(..)
이 책은 인터넷 썰처럼 결과만 표현하면 단 6쪽으로 요약되는 내용을, 집요하리만큼 자료를 찾고 입증하기 위해 350쪽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만큼 내용에 대한 신뢰성은 상승할테죠. 이 책은 단순하게 '일제는 조선을 수탈했다' 나 '일제는 조선을 근대화 시켰다'라는 기존의 학설들을 비판적으로 보고, 일제가 조선에게 어떠한 개발을 했는지, 그 개발은 효과가 어느 정도였는지, 그리고 그 개발이 조선인에게 돌아갔는지, 마지막으로 그 개발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하나하나 자료를 파헤쳐가며, '일제는 조선을 개발하긴 하였으나 이는 일본을 위한 개발이었고, 그마저도 대한민국은 일본이 버리고 간 유산도 거의 사용 못하고 단절되었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 근거들도 다 제시하죠.
물론 이 근거들이 전부 믿을만한가, 라면 의구심은 있지만 그건 이 자료들이 근거가 없다 가 아니라, 일제의 조사 부실로 남은 공백이나 실제와의 차이를 보정하는 과정에서 좀 달라지지 않는가로, 내용의 견실함에는 영향을 주지 않을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자(사실 책 표지 찾다가 읽은 리뷰)는 말합니다. 이 책은 계량적, 수치적인 부분에 치중했으며, 식근론에서 주장하는 '개발' 경험, 테크노크라트의 생성 같은 정성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다고요.
하지만 정작 이 책을 보면, 당시 조선인 중 기술자로 불릴만한 인물이 일본인에 비해 한없이 낮은 비율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기술자들마저도 사비로 유학을 보내는 비중이 절대적일 정도로 일본이 도운 것은 없음을, 그 기술자들도 일본인에 비해 정말 낮은 대우와 낮은 직급을 받았음을, 광복 후 실업률이 최대 90% 이상까지 나오는 분야가 생길 정도로 제대로 돌아가는 근대적 사업이 적었음을, 그 정성적 부분에 큰 영향을 주는 '정량적'인 자료를 전부 보여주며 일제의 도움이 상당히 부족함,오히려 방해함을 보여줬습니다.
다만 나중에 찾아보니 식근론에서 주장하는 건 이런 방해하고 상관 없는거 같네요(..) 허수아비 공격인가!
아무튼 이 책도 일제의 도로 같은 인프라는 부정하지 않습니다만, 대다수가 알듯이 625가 거의 끝장 낸것도 맞죠(..)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이 어떤 상황으로 휘둘렸는지 알고 싶다면 일독을 권합니다.
여담으로 저는 이 책을 대학시절 사고 9년(..)만에 완독했는데요, 당시 읽진 않았지만 조선 근대사 교육이라 이 책을 추천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 읽고나니 어쩌면 교수님께서 이 유명한 책에 본인의 글이 인용되었단 것을 뿌듯하게 여기시고 자랑하고자 하신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드네요. 전 상당히 높은 확률이라 봅니다.(..)
2. 엄마와 나
사실 이 책을 언제 샀는지는 기억이 안납니다.
동생은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를 좋아하니 이런 책을 샀을리는 없고 분명 제가 샀을 법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산 기억이 없더라고요. 가장 유력한건 여느 때와 같이 중고서점에 가서 헬렐레 하며 책 고르던 중 예전 "엄마, 사랑해요" 같은 고생담을 엮은 책이 아닌가 해서 별 생각 없이 산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튼 이 책을 산 과거의 저한테 고맙게 생각합니다. 정말 좋은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1999년 11월 중순부터 12월 중순까지 약 한달간, 당시 어머니학교의 야간 국어 선생님으로 일하던 필자가 쓴 일기를 모아 엮은 책으로 쪽수가 250쪽을 넘습니다(!)
말그대로 일기로, 어쩌면 공모 전에 어느정도 수정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대체로는 꾸밈 없이 자신과 어머니, 어머니학교에서 배우시는 어머니들의 얘기와 스스로가 겪는 갈등, 고뇌를 전부 드러냈습니다. 특히 어머니께서 겪어 온 괴로운 인생사를 적어나가는데, 읽는 이도 답답하고 안타까울 정도로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려고, 아이들을 키우려고 노력하시고 늘 활동하시는 어머니의 모습도 감동적이죠.
주변의 어머니들도 한 사연 합니다. 이 시기 50대 어머니들은 대체로 한국전쟁까지 겪으신 세대이며, 어머니학교가 기초적인 과목, 그러니까 한글, 수학, 한자 등을 가르치는 곳인 만큼 제대로 못 배우신 분들이 오셨기에 인생의 굴곡이 깊게 패이셨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첫차를 타고 작업장에 가서 일 바짝 몇시간 하신 뒤, 아침 먹고 다시 청소 일을 하러 가셔서 바짝 일 하시고, 쉴 곳이 없어 어머니학교로 가서 늦게나마 가볍게 저녁 먹고 2시간 정도 쪽잠을 잔 뒤 8시부터 있는 한글 교육을 받고 11시쯤 되어서 막차 타고 집에 가시는, 그럼에도 교실에서 가장 익살스럽고 푸근한 김순영 어머니부터 해서, 연세는 50대인데도 배움에 한이 맺혀 어머니학교 이후 나중엔 방통대까지 배우겠다고 벼르는 신을분 어머니, 30대인데도 글을 못써 막내 아들에게 부모님 글도 못써보내고 숙제를 못갖고 왔다고 얼버무리라 말해야했던 박영옥 어머니 등, 이 책은 주변 이야기를 하나하나 세세하게 적어가며 따스한 시선을 유지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스스로의 트라우마도 어느정도 해소하는, 한 인간의 성장기이기도 할테고요. 이 분이 괴로워하며 쓰는 일기는 간혹 제가 일기를 쓰며 자책할 때 사용하는 문체와 비슷해서 조금 놀라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 책에서 신선함을 느낀 것은, 어느새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도 하나하나 나올 때가 있어 이십년이 지난 지금 와서는 무슨 단어인지 모를 때도 있었다는 겁니다. 당장 추천사에 쓰인 "슬기"도 배우긴 배우되 요즘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이며, 시영딸(수양딸 사투리)/버버리(벙어리 방언)/꼬래비(꼴찌 사투리)처럼 이젠 잘 쓰일 일도 없는 낱말들은 이 책에서 대화를 더 생동감 있게 하면서 동시에 당시 어르신들이 사용하던 말들도 알 수 있게 하죠. 심지어 잿물 만드는거 나왔을 때는 아니 잿물이 이렇게 만드는거였다고? 했습니다. 세를 내고 그 집에 하숙을 '치는 건' 또 어떻구요. 하숙을 친다고 표현하다니... 당시 하숙이 어떤 식인지 알아보는 것도 꽤 재밌는 포인트였습니다.
책에서 김순영 할머니는 필자인 박기범 선생에게 말합니다. "선생님, 어디 가도 나 잊지 마요."라고.
그 순간 저도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저도 제가 만나온 누군가가 절 기억해줬으면 하니까요.
적어도 이 책이 남아있다면, 김순영 할머니는 계속 기억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머릿말에 보면 작가님이 그 시절 어머니들을 다시 보고 싶다 하는데, 저도 보고 싶은데 오죽할까요.
가슴이 따뜻해지는 책을 원한다면 전 이 책 정말 추천합니다.
이상 감상이었습니다.
책 한권 읽는데 걸리는 시간... 평균 10년.. 굉장히 곤란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