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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기에 앞서
이 RPG 로그도, 참여형 연대기도, 소설도 아닌 이상한 혼종은 몇 개월 전까지 제가 소설로 연재하던 '소비에트의 확장주의적 행보'(그 자체로는 또 샤츠슈나이더님의 RPG 소확행의 외전이었던)의 리메이크 버전입니다. 즉 RPG 소확행의 외전의 리메이크인 셈이고(...), 이는 제 개인적인 사정과 여러 이유가 겹쳐 도저히 소설을 완결 낼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짐에 따라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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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6월 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다수파, 즉 볼셰비키당의 정신적, 사상적 지도자이자, 여러 정당과 정치단체의 대표 중에서도 가장 임시정부에 비판적인 볼셰비키당 중앙위원 [블라디미르 레닌]은 핀란드로 요양을 떠났습니다. 레닌은 페트로그라드에서 기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네이볼라에 머물게 되었으며, 볼셰비키당에 '모험주의를 조심하라'라고 신신당부하였기에 상황이 악화하리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레닌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2월 혁명으로 세워진 러시아 임시정부와 사회주의 정당 간의 관계는 계속해서 악화하였습니다. [빅토르 체르노프], [이라클리 체레틀리] 등 각료로 입각한 좌익 인사들은 원하는 사회주의 개혁을 제대로 시행할 권한이 없었고, 우크라이나 자치권 부여를 입헌민주당이 반대하며 자유주의 정당인 입헌민주당과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혁명당, 멘셰비키당과의 관계는 깨지기 직전이었습니다. 본디 사회혁명당 출신이지만 사실상 자유주의자가 되어 군부 장관으로 군권을 쥔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대전쟁'을 끝내기는커녕 무리한 공세를 군에 명령했다가 전황을 악화시켰고, 지난 50년 동안 러시아를 괴롭히던 테러주의, 최대주의 아나키스트 혁명가들은 임시정부를 가장 적대하는 레닌의 볼셰비키당을 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레닌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6월 내내 부글부글 끓고 있던 페트로그라드의 하층민들은 참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페트로그라드에서는 극좌 사상과 반정부주의에 경도된 병사와 노동자들의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자본주의 국가가 해체되어야 한다고 믿는 좌파공산주의자이자 볼셰비키 당원 [니콜라이 부하린]의 의견을 절충해 받아들여 '자본주의 국가는 노동자-농민-병사 평의회, 즉 소비에트로 권력을 이양해야 한다'라고 믿던 레닌은 깜짝 놀랐습니다. 러시아 각지에는 소비에트가 존재했지만, 볼셰비키당과 같이 당장 임시정부를 몰아내야 한다고 믿던 과격파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물론 각지의 소비에트에서 과반을 점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직까지 각지의 소비에트의 권력을 잡고 있던 이들은 같은 좌익이지만 볼셰비키당의 강경한 위치에 대항해 온건파의 위치를 잡은 다른 사회주의 정당들이었습니다. 인민주의 전통을 계승한 농민의 정당인 사회혁명당, 본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내 다수의 지지를 받았고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기계론을 지지하는 멘셰비키(소수파) 등은 임시정부 타도를 외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러시아에서는 자본주의 체제,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 산업경제가 성숙해야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 '토지의 사회화를 통해 농민을 위한 체제를 건설하는 건 현행 체제로도 가능하다' 등의 신중론을 펼쳤죠. 물론 임시정부와 이들과의 관계는 악화일로였고, 이러한 주도적 사회주의 세력 내에서도 볼셰비키당의 '즉각적인 임시정부 타도'에 동의하는 인사들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레닌은 페트로그라드로 한달음에 달려와 군중들에게 평화롭게 해산하라고 직접 설득하며 7월 18일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가 시위를 취소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총리직이 리보프 공에게서 케렌스키로 넘어가는 상황에서도, 7월 19일 레닌과 볼셰비키당 중앙위원인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볼셰비키당의 기관지 프라우다의 본사는 압수수색을 당했으며, 여러 극좌 인사들이 체포되거나 구금되었습니다. 레닌의 부인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또한 구금되었고, 7월 22일 레닌과 지노비예프는 마침내 페트로그라드를 떠나는 열차에 올라탔습니다.
레닌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무장봉기에 일일이 반대하며 레닌의 주장에 반박하기만 했던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와는 달리 볼셰비키당의 평당원을 비롯한 여러 인사는 무장봉기를 긍정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상황을 바꿀 힘 또한 있었습니다. 7월 22일, 레닌이 탑승한 열차가 철도를 내달리는 사이 역사가 변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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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생의 예카테리노다르 출신의 <표트르 표트로비치 표트로프(Пётр Пётрович Пётро́в)>는 사회혁명당이 아닌 볼셰비키당에 가담한 몇 안 되는 남러시아 빈농 출신의 당원이었습니다. 볼셰비키당이 공중분해의 위기를 맞고, 반 임시정부 시위의 열기가 잦아든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표트르는 자신과 같은 평당원들이 도피한 은신처를 찾았습니다. 술을 마시며 '아무래도 봉기가 실패한 것 같다'라고 노동자들이 신세 한탄을 하는 사이, 표트르는 이럴 것이면 차라리 맞서 싸우는 게 낫겠다며 이를 갈았습니다. 때마침, 20대의 젊은 나이인데다 좌파공산주의자로써 급진주의자 그 자체였기에 지금까지 체포를 무릅쓰고 돌아다닐 깡이 있었던 니콜라이 부하린이 7월 22일 이른 새벽 표트르의 아지트에 도착했습니다. 표트르의 주먹에 맞아 이승을 하직할 뻔한 위기를 겨우 피한 부하린은 놀라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 놀라운 소식은 바로 폴란드 귀족 출신 장교이자 볼셰비키에 사상적으로 공감하는 '동반자' 중 한 명인 1889년생의 <이반 디오니지오비츠 스워지니치니(Iwan Dionizjowicz Słódżoniciny)> 중령이 병사들을 규합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래부터 능변가였던 스워지니치니는 소비에트의 병사들은 물론이고 케렌스키가 7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불러들였던 병력 일부까지 설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극좌 사상(주로 아나키즘 혹은 최대주의)에 감화된 병사들을 이끌고 스워지니치니가 페트로그라드 곳곳을 점거하려는 작전을 세우는 사이, 표트르는 자신이 친구삼았던 평당원들을 동원했습니다. 부하린의 주장대로, 볼셰비키당의 지도부를 재구성하기 위해 감옥소를 습격해 당의 여러 중진을 구출하고, 어딘가에서 도피 중인 것으로 알려진 카메네프, 트로츠키 등의 인사들을 데려와 보호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었습니다.
한편, 프랑스 출신의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자 프라우다의 주요 기고자 중 한 명이었던 1878년생의 원로 볼셰비키 <마흐텔루 '마르텔' 파우코이(Martellus 'Мартел' Faucouit)>는 볼셰비키당을 와해시키려는 술책에 이를 갈고 가짜뉴스를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본래 작성하던 선전물은 쓰레기통에 넣은 채, 파우코이는 노동자들과 함께 7월 22일 새벽 인쇄소 하나를 점거했습니다.
때마침, 케렌스키 공세가 얼마나 처참히 실패했는지에 대해 자세한 소식이 페트로그라드로 전달되고 있었고, 임시정부는 이를 '패배와 때맞춰 정권을 장악하려 한 친독 간첩 볼셰비키당'이라는 공안사건으로 조작하려 시도 중이었습니다. 파우코이는 '이에는 이'라며 고심하다, 군부 실력자이자 반동주의자인 [라브르 코르닐로프]의 이름을 떠올렸습니다.
인쇄소에서는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작성한 것으로 위장된 수많은 논조의 삐라가 만들어졌습니다. '코르닐로프가 키릴 대공을 옹립하고 차르정을 되살리려 한다', '코르닐로프가 나폴레옹처럼 군사독재 정부를 세우려 한다', '케렌스키는 독일에 영토를 할양해 평화를 사려고 한다', '케렌스키가 패배를 명목으로 군부를 숙청하려 한다', 이 모든 삐라들은 한 가지의 주장으로 끝났습니다. '오직 러시아의 노동자-농민-병사들로 구성된 소비에트만이 매국 임시정부를 비판하고 대전쟁을 무배상-무병합으로 끝낼 것이다'
이 삐라들의 대다수는 아무도 믿지 않는 거짓말이 되었지만, 코르닐로프는 '영토 할양을 통한 평화'가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해 병사들을 대거 동원해 겨울궁전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고스란히 함정에 빠졌습니다. 코르닐로프와 그의 친위병력이 탑승한 열차는 페트로그라드의 주요 기관을 점거하려던 '스워지니치니 부대'와 페트로그라드 중앙역에서 그대로 대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스워지니치니의 병력은 페트로그라드 곳곳에 적기를 올렸고, 표트르는 부하린과 함께 감옥소를 장악하고 마찬가지로 적기를 올렸습니다. 트로츠키, 카메네프 등의 당 간부들이 감옥소에 임시 지휘소를 차리는 사이, 페트로그라드에서 들리는 포성과 곳곳에 올라오는 적기를 통해 상황을 파악한 크론시타트 항의 수병들은 순양함 아브로라호를 장악하고 페트로그라드로 향했습니다.
아브로라호가 공포를 발사하는 사이, 7월 22일 저녁 '스워지니치니 부대'는 마지막 공세에 합류하는 데 성공한 전 멘셰비키 당원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오브셴코]와 함께 겨울궁전으로 돌입했습니다. 상호 간의 사상자는 한 명도 없는 상황에서 겨울궁전과 긴급회의를 주재하려던 임시정부 내각은 통째로 스워지니치니 부대에 체포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단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1917년 2월에도 부패한 장교들을 즉결처분해 군에서 방출될 뻔했던 스워지니치니는 무자비했습니다. 그는 임시정부에 참가했던 사회주의 동지들은 건드리지 않았지만, 대중적 인기가 아직은 있었던 케렌스키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습니다. 안토노프오브셴코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워지니치니는 사살 명령을 내렸습니다.
케렌스키는 체포에 저항하는 과정 중 '사고로' 총격을 당해 사망하였습니다. 코르닐로프는 역무원의 파업으로 기차에서 내리지도 못한 채 우왕좌왕 하던 중, 자신을 정확히 노린 저격수의 총탄에 사망했습니다. 스워지니치니는 이 결정을 '지도부가 부재한 상황에서 혁명적 결정을 내렸어야만 한다'라고 이후에 변호하였으나, 그러한 그의 사고방식은 훗날 그의 발목을 잡을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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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셰비키당은 폭력적 정권 장악을 옹호하던 레닌도, 국가기관의 완전 해체를 주장하던 부하린도, 부르주아 계급의식의 말살을 주장하던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도, 멘셰비키와의 화해를 추구하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성공한 정권 장악에 경악했습니다. 특히, 아직 볼셰비키당이 각지의 소비에트에서 단독 과반을 점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곳곳의 소비에트에서는 케렌스키 중심의 개각안 소식보다 볼셰비키당의 수도 장악 소식이 더 큰 화제가 되었고, 체르노프의 지도력에 의문을 품었던 사회혁명당 원로 [마르크 나탄손]과 [마리야 스피리도노바], 폭력혁명에 찬동하던 여러 아나키스트, 레닌의 사상과 유사한 사고방식을 지녔던 사회혁명당 내 최대주의 분파, 반전주의를 주장하던 멘셰비키 국제파 지도자인 [율리우스 마르토프] 등은 임시정부를 지지하거나 볼셰비키당을 비판하기보다는 잠깐 상황을 지켜보거나 도리어 협력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특히 1903년부터 오래도록 레닌과 갈등하던 마르토프와 멘셰비키 내 좌파인 멘셰비키 국제파가 볼셰비키와 손을 잡기로 한 일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이는 마르토프가 '중간 당원들이 일으킨 혁명'의 소식을 듣고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903년 당시, 레닌은 당원이 '당 강령을 인정하고 물질적 수단을 지원하며 당 조직 중 한 곳에 개인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당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규정하였고, 마르토프는 당원이 '당 강령을 인정하고 물질적 수단을 지원하며 당 조직 중 한 곳의 지도를 받으며 정기적인 개인적 도움으로 당을 지지하는 사람'이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마르토프에게 이번 7월 혁명의 용사들은 '소수파'들이 주장하며 레닌의 원안을 부결시켰던 1903년 제2차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대회를 떠올리게 만들기 충분했습니다.
이는 러시아 각지의 소비에트에서 소수의 볼셰비키가 나탄손과 스피리도노바가 주도하는 사회혁명당내 좌파와 최대주의자들, [유리 라린]을 비롯해 볼셰비키와 협력하기로 결정한 멘셰비키 일부, 아나키스트 세력 등과 손잡고 [통일전선(Единый фронт)]을 결성해 정권을 장악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레닌이 구상한 바가 아니었습니다. 레닌은 자신이 1인 독재자가 되는 체제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볼셰비키당의 당수가 아녔으며 그를 지도자로 규정하는 조항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상가이자 정신적 지도자였으며 혁명의 열정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체제의 오류를 다른 사람의 무능에서 찾는데 집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평당원들이 주도해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게 레닌이 세울법했던 일당제와 철저한 중앙집권 및 위계질서로 대표되는 정권의 가능성은 이미 사라지고, 극좌의 레닌에서부터 중도좌익의 체르노프조차도 가능성으로만 생각하던 통일전선을 통한 '동질적 사회주의 정부(Однородное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ое правительство)'의 설립 가능성이 생겨났습니다. 볼셰비키당이 100% 주도하지 못하는 정권 장악이 자신의 지시 없이 발생하자, 레닌은 이 상황을 칭찬하면서도 비판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그는 무장봉기에 반대하던 볼셰비키당의 지도부에 대해 무한한 권위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더욱더 급진적인 부하린, 그리고 레닌과는 '당장 임시정부를 타도하자' 외에는 사상적으로 통하는 점이 거의 없었던 트로츠키, 그리고 레닌 본인도 아직 후보로 고려치 않던 여러 인사뿐이었지요. 바로 이 무장봉기에 참가하였던 인사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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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대로 '연대기 버전'을 올립니다. 정작 소설 1편은커녕 RPG 소확행 1편을 적어놓은 형태가 되었지만, 소설은 대략 '사건이 일어났다.' 수준이었지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다'를 적지 못했던지라, 이렇게라도 적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내용이 좀 짧은 것의 경우, 본래 사진이나 그림도 같이 넣으려다가 실패(...)해서가 첫 번째 이유고, 두 번째는 이 '연대기'가 실험적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렇게 쓰는 건 되게 오랜만인지라..
첫댓글 어... 같은게 두개나 반복되는데요?
아니 다음카페가 또...
+수정했습니다.
그런데 끊긴 부분부터 이어가실 줄 알았더니 처음부터 하시려곤... 대단하시네요.
재밌네요 ㅋㅋㅋ... 어디가 달라질지를 유심히 봐야겠습니다 ㅋㅋㅋ 20화 이후 정도면 이후의 이야기... 가 나오겠죠? 아마?
초반부도 아마 다를(혹은 다르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리부트군요...ㄷㄷ
+ 이름이 바뀌어서 난 없나보다 했습니다...ㅎ
사실 이 RP 진행할 때는 초기 소련사나 좌파 사상의 역사, 각종 인물들의 약사 등에 대해 지식이 일천했어서 지금 로그를 보면 상당히 부끄러운 지점이 많습니다. ㅋㅋ
그나저나 표트르 표트로비치 표트로프…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안드레예프와 듀오를 구성하게 하면 되겠군요(?) 마치 고골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름 ㄷㄷ
저도 책하나에 의존중입니다 ㅋㅋ
@렌지파일 온갖 극단주의의 역사에 정통한 서비스 교수님…
@E.E.샤츠슈나이더 이 책을 비롯해 레닌의 일생에는 진짜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레닌이 다녔던 김나지움의 교장 표도르 케렌스키는 '그' 케렌스키의 아버지였다던지... 레닌의 동생 드미트리 울리아노프가 1917년에 파니 카플란(.......)과 불륜을 저질렀다던지..(앞이 안 보이던 카플란을 의사에게 소개해 치료받을 수 있게 해준게 드미트리입니다. 그 카플란은 1년 후.....)
다르게 보면 당시 러시아의 '엘리트'와 '혁명가' 집단이 얼마나 작고 좁았는지를 알 수 있기도 하죠..
성이 세개 이상인 놈(사실임)
성이 세개 이상... 그건 아나스타샤 남편 타마히코도 마찬가집니다 ㅋㅋㅋㅋㅋㅋ
그러고보니 최신우도 성이 세개네.
ㅋㅋㅋㅋㅋ
내용이 어렵진 않으신가요? 이 포맷에서는 복잡한 배경에 대해 설명하기가 쉬운데, 정작 포맷이 무색하게 자꾸 설명할때 빼먹는 안좋은 습관이 있어서 고쳐가며 반영하려 노력중입니다
@렌지파일 rp도 그렇고 이런 rp 기반 작품도 그렇고 잘 모르기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맛에 읽어서 괜찮습니다... 내용이 객관적으로 쉽냐 어렵냐라면 잘 모르겠네요... 아예 제3자의 입장이라면 어려울지도요.
@통장 대체적으로 소설보다는이해가 쉬운 편이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ㅋㄱ
@렌지파일 소설보다는 (끄덕)
@통장 소설보다 수정도 쉬우니 이해가 안되거나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있으면 알려주세요(표트르 이름은 수정하지 않겠습니다(?))
@렌지파일 간니발: 확장주의의 맹장 역할
체호프: 안쓰일듯 하다 쿠바에서 쓰임(?)
가이어: 흑화 후 쿠데타 혹은 반란 준비하다 죽을 예정으로 보임(?)
성씨에 따른 운명으로 볼 때 이놈은 독자적인 노농병진안을 주장하겠네요 아님말고(..)
@통장 ???: 혹시 체호프의 총이라고 들어봤나? 일단 총을 꺼냈으면 한 발은 쏴야 한다는 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