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난은 루브르의 그림을 가짜라고 하지는 않았다. 단 '모나리자'가 두 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517년 프랑수아 1세의 궁정에 있던 다 빈치를 아라곤 추기경이 방문했을 때 다 빈치는 그의 작품 몇 점을 보여주었다.
그 그림들은 <성 요한의 그림>, <성모 마리아와 성 안의 그림>, 그리고 메디치 가의 고 줄리아노(?엇 드디어 누군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의 주문으로 그린 <피렌체 어느 부인의 초상화>였다.
여기서 전기 작가 발렌티노는 줄리아노가 다 빈치에게 주문한 이 <피렌체 어느 귀부인의 초상화>야말로 루브르의 <모나리자>가 아닌지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전기 작가 라이트는 이러한 기록을 기초로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웠다.
"다 빈치는 <모나리자>를 두장 그렸다. 두번째 <모나리자>가 루브르 소장품이고 다른 한 장의 <모나리자>(이게 최초 그림)가 버난 판이다."
화가가 좋아하는 테마를 몇 장 그리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다, 다 빈치도 <수태고지>나 <동굴의 성모>를 두 장씩 그렸다.
그렇다면 <모나리자>가 두 장 있지 말라는 법도 없다. 라이트의 가설을 따라 보면 1502년~1503년 다 빈치는 델 조콘다로부터 그의 아름다운 부인의 초상화를 주문받았다.
주문을 받기 전인 1500년 3월 다 빈치는 한 때 베네치아에 거주하며 거기서 보급되기 시작한 리넨의 캔버스 사용법을 배워 피렌체로 돌아오자마자 그 기법을 시험해 볼 생각을 했다. 라이트에 의하면 이 기법으로 그려진 <모나리자>제 1호는 현재 버난 가가 소유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버난이 귀국할 때 작성한 짐 목록에 <여승,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작룸>이라 적혀있는 것도, 마리 앙투아네트 주변에서 이 그림이 진짜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1507년 말 완성된 그 그림의 의뢰주 델 조콘다는 그림을 스튜워드 거리의 저택 벽에 장식했다.
그 동안 다빈치는 밀라노로 옮겨 이후 5년간 거기서 활동한다.
그 기간 동안 페렌체에서는 메디치 가가 추방당하고 그 거리도 수도사 사보나롤라의 손에 들어갔다. 그러나 1512년 메디치가의 복권과 함께 다 빈치도 피렌체로 돌아왔다.
새로운 통치자 가문의 줄리아노 데 메디치(맞나?-_-;;;)는 카발 거리의 메디치 가 가까운 곳에 사는 미모의 귀부인에게 반해 수 개월 후 다 빈치에게 이 새로운 애인(사실 리자 델 조콘다였다!)의 초상화를 주문했는데 이것이 루브르의 그림이다.
그림이 미완성으로 끝났다는 오해도 이렇게 보면 설명이 가능하다. 우연히 아틀리에를 방문한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 이전에 보았던 그림을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고 오해한 것이다. 다 빈치는 그림이 느리기로 유명했다.
게다가 첫번째는 캔버스를 사용하고 두번째는 패널을 사용했다. 장난끼 심한 다 빈치가 1513년 같은 인물에 대한 두 장의 초상화를 의뢰받았을 때 이전과 같은 포즈로 그리려했던 것도 납득이 간다. 루브르의 <모나리자> 그 수수께끼에 가득 찬 미소는 사실 이런 사정에서 비롯하는 것은 아닌지...
다른 추측도 있는데 줄리아노가 첫번째 그림에 반해 자신에게도 똑같은 그림을 하나 그려달라고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여튼 두 장의 <모나리자>는 흡사하긴 하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특히 두번째는 바사리가 말한 젊은 여성과는 전혀 다른 표정을 보이고 있다.
아마도 남편 조콘다와 헤어져 줄리아노 대공의 애인이 되기까지 리자 부인은 많은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그 표정에는 차가움이 배어있고 눈썹도 늘어지고 얼굴은 살쪘고 턱도 이중 턱이었다.
두 번째 <모나리자>는 1515년에야 거의 완성되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 해 줄리아노는 프랑스의 새로운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즉위 축하를 위해 프랑스를 방문해서 거기서 17세의 아름다운 필리베르와 결혼하고 말았다. 신부를 데리고 돌아오는 궁전 벽에 애인의 초상화를 걸어두기 뭣하자 줄리아노는 다 빈치에게 당분간 아틀리에에 그 초상화를 맡아달라고 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줄리아노는 1516년 세상을 떠나고 다음해 다 빈치는 두 번재 <모나리자>를 들고 프랑스로 가서 프랑수아 1세의 빈객으로 자리를 잡는다. 여기서 그는 1519년 세상을 떠나는데 <모나리자>는 그냥 국왕 수집품에 포함되고 만다.
고 줄리아노의 아내 필리베르는 프랑수아 1세의 친척이므로 그 그림을 국왕에게 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 그림이 국왕 수집품 목록에 기재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지 모른다.
이상이 '모나리자 두 장설'을 주장하는 작가 라이트의 논리로 물론 반론도 있다.
그리고 마치 후세의 논쟁을 즐기기라도 하듯 그녀는 지금도 액자 속에서 영원의 미소를 머금고 있다.
...재밌으셨나요??^^ 음... 다음에는 뭘 올릴까 하다가 예수의 생존설과 메로빙거 왕조, 시온 수도회가 얽힌 좀 복잡하고 자세한 이야기를 올릴까 하는데...생각해 보니 스캐너가 없군요-_-;;;마리 드 브랑슈폴 후작부인의 묘비에 새겨진 문구를 꼭 올려야되는데 말이죠;;
첫댓글 예수... KTV 였나, 거기에서 '익스트림 미스테리'라는 외국 다큐멘터리를 방송하는데 한달 전쯤에 예수의 유년기에 대한 내용이 나왔었죠. 그런데 생존설이라... 무척이나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