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롱초롱 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 192
ㅡ 해방전후사 15 ㅡ
(가장 현실적이었던 이상주의자 여운형 2)
********************
해방전후사 시리즈가 15편 째 이어지니 조금 헷갈립니다.
사실 해방전후사는 1945년부터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 약 3년여에 걸쳐 일어난 사건들을 정리하려는 것입니다.
해방직후 3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너무나 많은 일들이 벌어져 순서대로 쓰기가 애매합니다. 중복된 시간에 벌어진 사건들도 있고, 시작은 빨라었도 진행은 더뎌 순서가 앞 뒤로 바뀌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시리즈도 시간적 배열하고 순서가 조금 다르거나 중복된 부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던 해방직후 3년은 우리나라에 너무나 중요했던 시기였습니다. 지금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현재 정치상황 또한 당시 정치세력들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진 것으로 봐야합니다
서울대 박태균교수는 '버치문서와 해방정국'이란 책에서 친일 잔재, 이념 논쟁, 가짜뉴스 등 구태가 만연하고 주류 기득권세력이 지금껏 전횡해 온 건 모두 다 미군정기 정치에서 기원한다며 미군정기간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해방 후 한국사회는 독립운동을 한 진영과 친일세력 간 대립 구도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신탁통치안으로 왜곡한 가짜뉴스는 이 구도를 좌우 간 대립구도로 만들었다. 한국 식민지화와 일본 불의한 전쟁에 협력했던 사람들은 반탁운동을 하는 애국적우익으로 꾸며졌다. 삼상회의 결정을 찬성한 세력은 소련 속국이 되기를 원하는 매국좌파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왜곡된 구도 속에서 반독립 세력은 처벌을 받기는커녕 우익으로서 한반도 남쪽에서 주류 기득권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 버치문서와 해방정국- p.282
전문가가 아닌 눈으로 봐도 해방직후 미군정기간은 위 박태균 교수 말이 정답입니다.
지금도 이승만 문제로 서로 극과극으로 갈려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상영중인 '건국전쟁'이란 이승만 다큐영화가 그 본보기 이고요.
이승만을 추앙하는 세력들은 아직도 빨갱이 타령은 여전하고요.
그래도 행방전후 당시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려고 목숨걸고 노력했던 인물이 있었으니 '몽양 여운형'입니다.
1945년 8월 18일 여운형에 대한 첫 번째 테러 발생 이후 여운형은 끊임없이 크고 작은 테러에 시달렸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테러의 강도는 더욱 강해졌고, 1947년 3월에는 결국 계동에 있는 그의 집이 폭파되기에 이릅니다
이후에도 여운형은 1947년 5월 혜화동 로터리 근처에서 총격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달 뒤 여운형은 결국 12번째 테러를 피하지 못하고 암살당합니다.
여운형은 당시 정치인들에게서도 보기힘든 좌우를 아우를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여운형은 생긴 그대로 몸과 마음이 기개가 넘쳐었고 호방했습니다. 이념이나 생각이 달라도 누구하고나 말이 통할만큼 개방적이었으며 합리적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였지만 일본인들로 부터 존경까지 받았습니다. 그래서 일제가 패망하고 항복하기 직전 여운형에게 자신들의 안전을 맡긴 것입니다.
여운형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주도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내 시리즈 순서가 조금 애매하게 '건준편'이나 '건국동맹편'에서 이 일들을 주도한 여운형에 대해서 상당부분 다루다 보니 중복도 되고 있습니다.
여운형 당시 정치적 행적에 대해서는 앞 편에서 다루었습니다.
당시도 그랬지만 지금도 극우보수단체는 여운형을 친일부역자로 몰아 가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운형은 친일 논란이 있었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여운형 친일문제와 그 인간적 면모를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
여운형이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총독부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을 근거로 여운형을 친일파, 혹은 일제에 부역한 여타 자치론자들과 동일선상에 두자는 주장이 있다.
여운형이 일본인들에게 능숙한 처세술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나, 일제에 가담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일본 총독부의 숱한 노력에도 포섭되지 않았다는 주변인들 증언이 다수 있다.
'친일진상규명위'에서도 여운형 친일행위를 조사했었다. 친일 진상 규명위위원장은 "여운형 친일 자료는 단 1건이 있었지만,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 동맹(농민 동맹과 건국 동맹)을 만들어 활동을 했고, 이를 11명 위원들이 논의해 (보고서에 명단을 넣지 않는) 결론을 내렸다."고 입장을 밝혔다. 참고로 친일진상규명위는 우익계열 학자들과 심지어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해방직후 미군정 고문으로 위촉된 '한국민주당' 인사들이 1945년 9월 12일, 미군이 한반도 입성하자마자 "여운형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친일파이며 총독부로부터 2천만엔 금전수수를 했다."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미군정에 냈다.
이에 좌우합작 한반도 단일정부를 목표로 삼고 여운형이 그 중심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미군정 버치중위가 "일본에 건너가 前 조선총독부고관들을 심문해서 여운형 친일혐의를 수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사령관 존 하지에게 제안했다. 이에 하지는 "일리 있는 말이다. 나는 그(여운형)의 약점을 잡고 싶다." 면서 찰스 오리오단 미군정 외무부 소속 소령을 일본으로 조사단을 보내 과거 총독부 고관출신 인사들을 찾아가 "여운형이 친일파냐?" 여부에 대해 조사를 했다. 그 결과 1947년 3월, 미군정 보고서 결과에는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찰스 오리오단에 의한 일본에서 시행한 여운형 친일관계에 대한 조사결과는 '아니오'였습니다. 한 조각 증거도 없었습니다. 오리오단이 인터뷰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의문이 나온 점에 대해 놀라워했습니다. 그들은 그(여운형)를 한국 애국자 중 가장 뛰어난 사람 중 한 명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ㅡ 로빈슨(미군정 대령)ㅡ
또한 로빈슨은 여운형을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미 국무성은 여운형을 당시 해방 이후 조선에서 인기있고 유능한 지도자로 봤다. 그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중략)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그는 최대한 공산주의를 이용했을 뿐이며, 그는 민중정치기구 결성을 도왔지만, 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는 공산주의 이론을 신봉하지 않았고, 소련편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한국편이었다.">
ㅡ 리처드 로빈슨, 미군정 관리로 근무 ㅡ
청장년기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한 활동가였지만 이승만만큼 극단적인 반일주의자는 아니며, 보다 현실적·건설적인 일조(일본과 조선)제휴를 모색하고 있었다. 기골 있는 정치인으로 일조 쌍방에서 인기가 있어 장래가 촉망되고 있었지만 연합군정기에 암살되었다.
ㅡ 일본어 위키백과ㅡ
이외에도 여운형 친일파설을 주장하는 단체들 사료들은 진위성이 불분명한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대표적으로 '한국논단' 경우가 있다. 이쪽은 아예 지어내는 소리를 남발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들은 해명할 가치조차 없어 생략한다.
여운형을 친일파로 몰아가고 있는 세력은 대부분 이승만을 추앙하는 극우계열이다.
사실 기나긴 일제강점기동안 국내활동을 많이 한 독립투사들 대부분은 일제말기에 가서는 친일을 했다. 게다가 여운형은 사람가리지 않고 호방하게 아무나 만나곤 했음으로 친일행적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운형은 앞서 말했듯이 친일행적이 확실하게 드러난 것이 거의 없다.
여운형이 주도한 '신한청년당' 시절 여운형의 밑에 있던
'이광수'나 '장덕수'만 해도 일제는 이들을 최대한 이용해 친일행적이 엄청나게 남아있다. 여운형 밑에 일했던 이들이 이 정도로 친일 행적을 남겼는데, 신한청년당 당수였던 여운형이라면 이광수, 장덕수하고는 비교조차도 안 될 정도 규모로 엄청나게 이용했을 것이고 친일했다면 행적도 훨씬 더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관련 친일행적이 전혀없다.
여운형 친일문제는 조금 논란은 있고 그의 성격상 오해받을 일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독립투사들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은 독립에 대한 지조를 지켰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여운형 가장 큰 약점이자 장점이라 할 수있는 인간적 면모를 살펴보자.
여운형 1편에서도 언급했지만
여운형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기골이 장대하여 풍채가 우람한 데다가 운동을 좋아한 근육질이어서 요즘 한류스타 못지않은 풍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신식여성들에게 인기있었던 '만국부인 잡지'에서도 여운형의 수염(카이저 수염)이 호남아의 조건으로 선정될 정도로 여운형 수염은 유명했다.
여운형은 옷차림에도 매우 신경을 썼는데,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고위급 외교관들이 옷을 맞춘다는 양장점에서 옷을 빼입었다.
패션센스도 뛰어나서 어느 곳 이든지(그곳이 일본이라도) 길을 지나가면 사람들 시선을 사로 잡았다고 한다. 생긴만큼 연예인 기질이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여운형은 대화하는 태도에서도 기본적으로 상대방 대화를 경청하는 자세가 갖춰져 있고, 타인입장에 서서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능력을 지녀서 심지어 그를 욕하던 사람들도 그와 대화하고 나면 "내가 왜 그를 욕하고 다녔을까?" 하는 후회를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대표적인 사례가 강원용 목사). 이와 관련하여 그와 목욕을 함께한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한 '강원용목사'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비록 몽양의 노선은 내가 따를 수 없는 다른 길이었지만 인간적으로는 그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우선 그는 로맨틱한 사람이었고, 한 인물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신언서판(身言書判)에서 모두 뛰어난 남자였다. 나는 그의 외모에도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나 하나만은 아니었던지 그는 정치인으로는 예외적으로 광고 모델로도 가끔 등장했다. 어처구니없지만,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렇게 잘생긴 사람도 썩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의 죽음이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던 만큼, 내가 떠올린 생각도 그런 것이었다. 하도 잘생긴 사람이라 언젠가 한번 그와 얘기를 나누다 어디 못생긴 데가 없나 하고 그의 얼굴을 곰곰이 뜯어본 적이 있는데, 자세히 살펴봐도 역시 흠잡을 데 없는 수려한 용모였다. 그의 외모에 대한 나의 열등감이었는지, 나는 결국 작은 흠을 찾아내었는데 그것은 약간 들어 간 콧구멍 이었다.">
우가키 총독의 사위 야노는 이러한 여운형에게 아주 반해버려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몽양 여운형 선생과 꼭 결혼했을 것이다. 어떤 수단을 써서든지 여운형 선생과 결혼할 텐데 불행하게도 남자로 태어났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참모는 그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여운형은 한국 정치인 중 타인이 따르지 못할 정치인으로서의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그는 누구보다 잘생겼다. 둘째로, 그는 뛰어난 웅변가다. 셋째로, 그는 강한 감화력과 설득력을 가진 사람이다.">
이런 여운형이다 보니 여성문제가 꽤 복잡했다. 이 문제는 1편에서 다루었으니 그냥 넘어간다.
여운형의 개방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가 스포츠인데, YMCA 야구단 활동에서부터 시작하여 나이를 먹어서도 스포츠를 매우 좋아했고 다방면의 운동 경기에 능하였으며, 스포츠를 적극 장려하는 연설을 하였고 기고문을 냈다.
이처럼 여운형은 현대 한국인의 눈으로 봐도 정치인으로서 파격적일 정도로 개방적이고 호방해서 당시 청소년들 우상이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여운형만큼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도 없다.
진취적인 민족운동가였다고 찬양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기회주의자였다고 폄하하는 쪽도 있다. 그런가 하면 그 정체성이 모호해 실속없는 팔방미인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도 독립운동가로서 평가는 좋은 편이다. 특히 일제강점기 시대에 체육 활성화에 힘쓰는 등 국내에서 대중적으로 활동했다는 점이 부각되며 그의 자유분방한 모습에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여운형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부분은 좌우합작운동 등 해방직후 활동이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측에서는 그의 좌우합작을 통한 민족통일 노력을 아주 높게 평가한다.
비록 현실적으로 실현되지는 못 했지만 그는 분단과 전쟁을 피하기 위해 남북을 아우르는 좌우합작을 통한 정부수립을 해방직전후 부터 추진했다.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측에서는 여운형 좌우합작이 좌익에게 이용당한 것이며 그가 추진하던대로 통일 정부가 수립되었더라도 결국 소련과 김일성 의도에 따라
공산화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것은 그들 논리일뿐이다.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설사 여운형이 김일성 의도에 놀아났다 하더라도 미국이 그걸 가만히 보고 있었겠는가?
앞 편에서 언급했듯이 미국이 앞 장 서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 단일정부를 추진했었다.
미국이 한반도를 공산화하기 위해
그랬겠는가?
여운형 좌우합작 단일정부가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소련과 김일성 의도에 따라 공산화 되었을 것이라 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그들만의 논리이다.
여운형에 대해서는 우파 강원용 목사가 여운형을
첫째로 자유주의자, 둘째로 민족주의자,
셋째로 사회주의자로
평가한 적이 있는데 스스로 이것이 가장 정확한 평가라고 볼 수 있다.
이어어 해방전후사 16편, 김성수와 한민당편이 이어집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첫댓글 올바른 역사 공부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