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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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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2. 돌궐어계 민족 3. 몽골어계 민족 4. 퉁구스어계 민족, 아이누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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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본고는 신화적 관점에서 알타이어계 민족의 民族族源神話를 검토해보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언어적 측면에서 동일 언어계통으로 묶이는 이들 민족이 신화적인 측면에서도 유사한 특성을 보이는지, 아니면 전혀 다른 특성을 보이는지 검토해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런데 알타이어계 민족의 종교적 기반은 샤만이즘이라는 점에서 이들 민족의 민족기원신화에는 샤만이즘의 종교적 특성이 공통적으로 반영되어 있을 것으로 본다. 이는 언어만큼이나 이들 민족에게 있어서는 불변의 정신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논의를 진행하기로 한다. 그리고 본고의 논의대상이 되는 신화자료는 민족의 기원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 또는 민족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한정한다. 그리고 중국의 북방지역을 한때 장악했던 유목민족인 흉노, 돌궐, 위구르(回鶻), 거란(遼), 여진(金), 몽고, 만주족(淸) 등의 민족 기원신화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하는데, 이는 이들 민족의 자료가 문헌에 비교적 확실하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에 따라서는 문헌이 아닌 구전으로 전승되고 있는 경우도 많으므로, 이들 구전자료도 포함하여 논하기로 한다.
한편 본고에서는 알타이어계 민족의 민족기원신화 외에 고아시아계로 분류하는 아이누를 덧붙여 살펴보기로 한다. 현재 아이누의 언어나 민족의 기원에 대해서 논란이 있지만 신화적인 측면에서는 알타이어계 민족, 특히 퉁구스어족의 민족과 유사한 측면이 많다는 점에서 전혀 이질적인 민족은 아닌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측의 기록에 의하면 3세기경부터 오늘날의 아이누의 선조로 추정되는 민족이 중국 대륙을 건너 쿠릴섬(사할린섬)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또한 아이누가 신봉하고 있는 종교가 샤만이즘이라는 점, 흑룡강 하류에 살았던 여러 고아시아계 민족과 문화적, 경제적 형태가 유사하다는 점 등으로 보아도 유사성이 많은 민족으로 생각된다. 최근 중국의 신화학자, 민족학자들이 흑룡강 주변에 거주했던 민족과 아이누를 비교 연구하려는 것 역시 바로 이런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된다.
2. 돌궐어계 민족
먼저 돌궐어계 민족(위구르, 카즈흐, 카르기스 등)의 기원신화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돌궐어계 민족의 기원신화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은 민족의 기원을 늑대와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소위 늑대토템을 근간으로 하여 민족의 기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늑대토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앞서 지적했듯, 돌궐계 부족의 하나인 烏孫과 관련되어 제시되고 있다.1) 즉 烏孫의 幼主를 늑대가 구한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늑대가 烏孫 민족과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이처럼 동물과 자신의 민족을 연결시키는 설명방식은, 민족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토템은 민족이 처한 생활환경을 가장 잘 나타내줄 수 있는 것이 선정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경제적 기반이 되거나 아니면 생활상의 위협요소가 되기 때문에 선정되는 것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선정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족의 시조인 포고리옹순의 후예(누르하치)가 백성들의 반란으로 쫓겨가게 되었을 때, 까치가 누루하치에게 날아와 시체처럼 가장하여 추적하던 병사들을 따돌리는데, 滿族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 까치가 다수 서식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烏孫의 幼主를 구한 늑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초원에 거주하는 유목민족에게 늑대는 빈번하게 마주칠 수 있는 동물이고, 또 상당히 위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동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늑대를 숭배함으로써 이들 동물과 인간과의 유대를 강조하게 된다. 늑대가 烏孫王 昆莫을 젖을 먹여 살린 것은 동물과 인간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인간을 해칠 수 있는 사나운 동물이지만 인간이 死境에 처했을 때 그 사나운 동물이 한 민족의 근본종자를 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늑대가 버려진 烏孫王 昆莫을 양육했다는 신화에서 우리가 염두에 두고 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흉노와의 관련성 문제이다. 주지하다시피 흉노는 북방아시아에서 최초로 성립된 유목제국이다. 때문에 유목민족은 이 흉노와의 연관성을 부각시키려는 요소를 끊임없이 보이고 있다. 烏孫王 昆莫이 후에 흉노로 들어가 單于2)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관련하여 돌궐계 부족의 하나인 高車 또한 늑대토템, 흉노와의 관련성 부각이란 측면에서 烏孫과 유사한 경향을 보여준다.3) 즉 高車王의 출생을 匈奴單于의 둘째 딸과 하늘에서 내려온 늑대의 결합에 의한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흉노족이 高車族과 혈연상 관련이 있는가? 史記 <匈奴傳>에 “(冒頓이) 北으로 渾庾․屈射․丁零․鬲昆․薪犁國을 복속시켰다.”는 내용을 참조하면 그럴 가능성은 없다. 丁零은 바로 高車의 선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혈연적인 관계가 있는 것처럼 설정하였을까? 이것은 高車의 선민이 바로 흉노에 복속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설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선민이 흉노족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그 후대 민족 또한 흉노와의 민족적 일체감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특히 高車族에게 흉노는 넓은 의미의 同族에 가까운 민족이었다고 하겠다.
이상에서 烏孫族이나 高車族은 모두 늑대토템을 가지고 있었고 흉노족과 일정 정도 관련성이 있는 민족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흉노족에게도 늑대토템이 있었던가? 흉노족의 민족기원신화가 알려져 있지 않아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烏孫族․高車族과 흉노족은 혈통적 연결보다는 통치범위상 관련되었기 때문에 烏孫族․高車族이 늑대토템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흉노족 또한 늑대토템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다만 이후에 등장하는 돌궐이나 위구르․카자흐․키르기스족 등에 일정 정도의 영향은 끼쳤을 것이므로, 이들 민족의 기원신화를 살피기 전에 흉노의 민족적 특징을 나타내줄 만한 요소를 확인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흉노족의 민족기원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요소는 祭天行事이다. 제천행사란 말 그대로 하늘에 대한 제사 행위를 말한다. 單于라는 말 자체에 이미 ‘하늘의 아들’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제천행사야말로 흉노족의 가장 중대한 행사였다. 정월, 오월, 구월에 세 차례나 天神께 大祭를 드리고,4) 그 제사를 지내는 곳을 蘢城이라고 했던 데서5)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흉노족의 이러한 하늘숭배는 烏孫族이나 高車族에서 확인되는 늑대토템 숭배보다는 분명히 정제된 의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高車族의 민족기원신화에서 늑대가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는 점을 감안하면 高車族에게도 하늘숭배사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바, 그것이 훨씬 구체화된 대상으로 설정되었다는 점은 다르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동물토템과 하늘과의 연결이다. 비록 흉노족에게는 이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지만 세 민족 모두 하늘숭배라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민족은 상호 관련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흉노 다음으로 거대한 유목제국을 세웠던 돌궐의 민족기원신화를 살펴보기로 한다. 돌궐족의 민족기원과 관련하여서는 주로 周書와 隋書에 그 내용이 실려 있는데,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아래에 두 종류의 자료를 제시한다.
(a) 돌궐은 흉노의 별종으로 성은 阿史那씨이다. 이들은 따로 부락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웃 국가의 침략을 받아 국가는 붕괴되고 族人들은 모두 滅殺을 당했다. 나이가 10살 난 한 아이가 있었는데, 적병은 그가 너무 어리므로 죽이지 않고 다리만 잘라 草澤 속에 버렸다. 그런데 암늑대가 고기를 물어다 그를 양육했다. 아이는 성장하여 늑대와 교합했으며 늑대는 임신을 하였다. 이웃 국가의 왕이 아이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자를 보내 그를 죽였다. 사자는 그의 곁에 늑대가 있는 것을 보고 늑대도 죽이려 했다. 그러나 늑대는 高昌國의 북쪽에 위치한 산으로 도망갔다. 산에는 동굴이 있는데 동굴 안에는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주위가 수백 리에 달하는 평탄한 草地가 펼쳐져 있었다. 암늑대는 이곳에 숨어 있다가 10명의 아들을 출산했다. 10명의 아들은 성장 후 모두 결혼을 하였으며 그 후예들은 각자의 씨족을 이루었다. 阿史那 씨족도 그 가운데의 하나이다. 자손이 번성하여 수백 가에 이르자 수대에 걸쳐 서로 굴을 나와 柔然에 복속 했다. 金山(알타이산)의 남쪽에 살면서 柔然을 위해 鐵을 공납했다. 金山의 형상이 투구와 비슷했는데 그들 언어로 투구를 突厥이라 부른다. 이후 이들은 突厥을 자기들의 部族名으로 삼았다.6)
(b) 돌궐의 조상은 흉노의 북쪽에 위치한 索國에서 나왔다. 그 部落大人을 阿謗步라 부른다. 형제가 17명으로 그 중 하나가 伊質泥師都이다. (이들은 모두) 암늑대에게서 태어났다. 阿謗步 등은 우매하고 어리석었기 때문에 나라가 멸망당했다. 泥師都는 이상한 기운과 잘 통했으며 비바람을 부를 수 있었다. 泥師都는 夏神과 冬神의 딸 두 명을 처로 두었는데, 그 중 하나가 잉태하여 4명의 아들을 낳았다. 한 아들은 하얀 기러기로 변했다. 한 아들은 阿輔水와 劒水 사이에서 契骨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한 아들은 處折水에서 나라를 세웠다. 한 아들은 踐斯處折時산에서 거주했는데 이가 큰아들이다. 산 위에는 阿謗步의 족속이 살고 있었는데 그곳은 아주 추웠다. 큰아들은 불을 피워 그들을 따뜻하게 해주었기 때문에 阿謗步의 족속들이 생존할 수 있었다. 이에 阿謗步의 족속들은 그를 군주로 추대했으며 (나라명을) 돌궐이라 불렀다. 그 군주가 바로 訥都六設이다. 訥都六은 10명의 처가 있었는데 태어난 아들들은 모두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阿斯那는 작은 처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訥都六이 죽자 10명의 처로부터 태어난 아들들은 자기들 중 하나를 왕으로 세우고자 했다. 이에 모두 큰 나무 아래에 모여 서약하기를 “나무를 향해 가장 높이 뛰어오르는 자를 군주로 삼는다.”고 했다. 阿斯那는 나이가 어렸지만 가장 높이 뛰어올랐기 때문에 諸子는 그를 군주로 추대한 뒤 阿賢設이란 칭호를 주었다. 이 설화는 아주 특이하지만 역시 (돌궐은) 늑대와 관계 있는 종족이다.7)
(a), (b) 자료 모두 늑대를 민족의 기원 및 시조와 연결시키고 있는 점에서는 烏孫族이나 高車族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특히 (a)는 烏孫族의 자료와 흡사한 면이 있다. 즉 적에 의해 부락민이 전멸을 당하고 한 어린아이만 살아남았는데, 그 아이가 늑대로부터 보호를 받는다는 점이 그러하다. 그러나 烏孫族의 경우, 늑대는 버려진 아이를 양육하는 기능밖에 하지 않았는데 (a)의 자료에서는 버려진 아이와 암늑대가 교합하여 자손을 번창시켜 하나의 씨족을 이루는 단계에까지 나아가고 있다. 즉 씨족의 시조신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a)의 자료는 高車族의 민족기원신화와도 상관성이 있다. 이렇게 볼 때 (a)는 烏孫族이나 高車族의 민족기원신화를 적절하게 결합시켜 새로운 민족기원신화로 만들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b)의 자료는 결말부에서도 지적하고 있듯 ‘아주 특이한’ 형식의 민족기원신화이다. 즉 늑대와의 결합을 통한 민족의 시조출생은 간략하게 처리하고, 늑대와의 결합에서 태어난 자식들의 결혼, 그리고 태어난 자식들이 어떻게 돌궐이란 나라를 세우게 되는가에 기술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b)의 기술내용은 다음과 같이 3대기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대 : 인간과 늑대와의 결합(자식 17명 출생) ― 索國을 세움
2대 : 伊質泥師都와 夏神․冬神의 결합(자식 4명 출생)
― 한 아들은 기러기로 변함,
― 나머지 세 아들은 각기 나라를 세움.
큰 아들(訥都六設)이 세운 나라가 돌궐(10명의 처로부터 자식 10명 출생)
3대 : 시합을 통해 막내인 阿斯那가 訥都六設의 왕위를 이음.
이렇게 정리하고 보았을 때, 두 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하나는 (b)의 자료가 씨족의 분화과정을 통한 부족의 형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a)에서 阿斯那가 늑대의 소생으로 제시되었지만, (b)에 와서는 그러한 요소가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a)에 비해 (b)는 상당히 복합적인 내용으로 구성된 신화이지만, 또한 대민족의 성립에 따른 체계적인 계보를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b)는 아마도 돌궐이 이미 강성의 유목제국을 건설하고 나서 만든 신화일 것이다. 특히 (a)에서는 阿斯那 씨족이 柔然에 복속되어 있으면서 철을 공납했다고 했는데, (b)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삭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돌궐의 민족적 주체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민족적 주체성의 강조와 관련하여, 위에서 (b)의 자료가 3대기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 점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a)의 자료에 비해 (b)의 자료에서 새로 추가된 내용이 伊質泥斯都에 대한 부분인데, 伊質泥斯都에 대한 부분만 제외하면 (a)와 (b)의 자료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b)는 伊質泥斯都에 대한 부분을 제외하면 ‘索國이 멸망당하고 남은 訥都六設이 늑대와 교합하여 10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그 중의 한 명이 阿斯那이다’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므로, 결국 (a)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伊質泥斯都에 대한 부분을 왜 끼어 넣은 것일까? 그것은 伊質泥斯都에 대한 부분을 분석해 봄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가 이상한 기운과 잘 통하고 비바람을 부를 수 있었다고 한 점을 주목해보자. 이상한 기운과 잘 통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그가 신과 接靈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비바람도 부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능력을 그가 소유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바로 伊質泥斯都가 바로 샤만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夏神과 冬神의 딸을 아내로 두었다고 한 것도 계절적 변화에 민감한 초원 유목의 환경과 관련한 대상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유목환경에서 여름과 겨울이 미치는 영향이 봄이나 가을에 비해 클 것이기에, 여름과 겨울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게 되었다는 것은 곧 지도자로서의 자질뿐만 아니라 사제자로서의 자질도 아울러 갖춘 것이 된다. 그가 阿謗步의 족속이 추운 곳에서 떨고 있을 때에 불을 피워 그들을 따뜻하게 해주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阿謗步의 족속은 불을 피울지 몰랐던 것인가?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伊質泥斯都가 겨울의 매서운 환경을 通御할 수 있는 능력을 보인 것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阿謗步의 족속에 의해 군주로 추대가 되고 있다. 이로 볼 때 그는 사제자의 성격뿐만 아니라 지도자로서의 성격을 아울러 갖추고 있는 자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서 흉노족의 單于를 떠올려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單于는 바로 제사장이자 군주이다. 하늘의 아들임을 자처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권리를 가질 뿐만 아니라 초목지를 획득하기 위한 능력 있는 군주이기도 한 모습이 바로 흉노의 單于이다. 伊質泥斯都는 바로 흉노의 單于와 같은 기능을 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역할이 매우 유사함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b)에 흉노족의 민족신화와 관련된 내용,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伊質泥斯都에 대한 내용이 끼어 들면서 3대기의 구성을 취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돌궐이 몽골어 민족인 柔然에 복속되었다는 등의 내용도 자연스럽게 삭제되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돌궐이 유목제국으로 성장하면서 몽골고원을 앞서 장악했던 柔然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즉 민족적 주체성을 강조하고 또 대제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흉노의 후예를 끌어들일 필요성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것이 돌궐족의 민족기원신화가 재편된 이유일 것이다.
그러면 이제 위구르, 카자흐, 키르기스 세 민족의 기원신화를 살펴보기로 한다. 차례로 자료를 들고 함께 연결시켜 논의를 한다.
위구르 : 月后가 눈병이 있었는데 임신하여 남자아이를 낳으니 아이의 얼굴이 푸른색이었다. 이후 우구즈칸이 어느 곳에서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데 사방이 어두워지면서 해와 달보다 더 빛나는 푸른 광선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우구즈칸이 그곳으로 가서 살펴보니 빛 가운데에 한 소녀가 있었다. 혼자 앉아 있는데 아름답고 부드러웠다.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녀가 웃으면 푸른 하늘 역시 웃었고 울면 (푸른 하늘) 역시 울었다. 우구즈는 그녀를 보자 이성을 잃고 사랑에 빠져 그녀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같이 누웠으며 욕구에 가득 차…그 후 그녀는 눈병이 나았으며 세 명의 아들을 낳았다. 큰아들의 이름은 태양이고 둘째는 달이고 셋째는 별이다. 또 어느 날 우구즈칸은 사냥을 나갔는데 연못 가운데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보았다. 나무 앞에는 소녀가 혼자 앉아 있었다. 그 소녀는 아름답고 부드러웠으며 눈은 푸른 하늘보다 더욱 푸르렀다. 그 후 그녀는 눈병이 났으며 세 명의 아들을 낳았다. 큰아들의 이름은 하늘이고, 둘째는 산이고, 셋째는 바다이다. 연희 후 우구즈칸은 대신 몇 및 백성들에게 명하기를 “회색 늑대는 나의 口令이다!…藍帳은 하늘과 같다!”… 40일 후 빙산의 기슭에 이르러 駐營했다. 잠을 자면서 휴식했다. 새벽녘에 天光과 같은 빛이 우구즈칸의 장막으로 들어왔다. 푸른 털과 푸른 수염을 가진 수늑대가 빛 속에서 나와 우구즈칸에게 말하기를 “공격하라! 내가 너를 인도하겠다.”라고 했다. 이후 우구즈는 營을 거둔 뒤 앞으로 진군했다. 푸른 털과 푸른 수염을 가진 수늑대가 군대의 앞에 서고 대군은 그 뒤를 따라갔다. 수일 후 푸른 털과 푸른 수염을 가진 큰 늑대가 홀연 멈추었다. 우구즈칸과 군대 역시 멈추었다. 그곳에는 이틸-무렌강이 있었다. 이후 우구즈칸은 또 푸른 털과 푸른 수염을 가진 수늑대를 보았다. 늑대는 우구즈칸에게 말하기를 “즉시 병사들을 말에 태워라.”고 했다. 우구즈칸은 말에 올라탔다. 늑대가 말하기를 “대신 및 민중들을 이끌라! 나는 앞에 서서 너에게 길을 안내하겠다.”고 했다. 다음 날 날이 밝자 우구즈칸은 수늑대가 대군 앞에 가는 것을 보고 환희에 차 따라갔다. …어느 날 푸른 털과 푸른 수염을 가진 수늑대가 가지 않고 다시 멈추었다. 우구즈칸 역시 멈추었다.…그는 또 말에 올라 푸른 털과 푸른 수염을 가진 수늑대와 같이 인도․탕구트 및 샤킴을 정복하러 갔다.8)
카자흐 : 옛날에 망망한 초원에 근면한 목동 청년이 있었다. 그가 정성껏 방목하여 양들이 매우 살쪘다. 어느 날 저녁 목동 청년은 天鵝가 날아와 그의 짝이 되는 꿈을 꾸었다. 다음 날 낮에 한창 양을 치고 있을 때에 한 마리 天鵝가 그의 옆에 날아와서 춤을 추며 노래를 하였다. 목동 청년이 넋을 놓고 있을 때에 갑자기 광풍이 불어 모래와 돌이 날리며 천지가 어두워졌다. 양은 광풍에 휩쓸려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초원에는 황사가 뒤덮이고 태양만이 대지를 불태웠다. 목동 청년은 흩어진 양을 찾아 밤낮으로 초원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가 피곤하고 굶주리고 갈증이 나서 몸에는 조금의 기력도 남지 않게 되었다. 목동 청년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데, 迷朦 중에 갑자기 한 마리 潔白한 天鵝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한 바탕 서늘한 바람이 불자 목동은 정신이 들어 또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얼마 후 또 쓰러졌다. 潔白의 天鵝가 날아와 淸水가 가득 묻은 버드나무 가지를 물고 와서 목동의 입에 넣었다. 天鵝의 도움으로 청년을 기력을 회복하고, 天鵝의 인도 하에 한 호숫가로 갔다. 호숫가에는 나무와 풀이 우거져 있었고, 흩어진 양떼가 거기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목동이 매우 기뻐했다. 이 때 天鵝가 羽衣를 벗고 아름다운 처녀로 변하였다. 이로부터 청년과 처녀는 호숫가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그들은 양떼를 방목하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그들의 후예를 카자흐라고 한다. 카자흐(Kazak)는 kaz-ak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鵝와 白의 뜻이다. 합치면 白鵝 또는 天鵝의 뜻이 된다.9)
키르기스족 : 夏依克滿蘇爾 聖人에게 阿納爾라는 누이가 있었다. 둘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阿納爾의 방에서 한 사람이 나왔는데, 그 사람과 부정한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고 수군댔다. 어느 날 오빠가 누이 阿納爾가 큰 산의 동굴로 갔음을 알고, 40명의 陌生人과 함께 갔다. 阿納爾가 오빠에게 山洞에 40인의 성인이 왔다고 말하였다. 오래지 않아, 夏依克滿蘇爾와 누이가 결혼한다는 謠言이 퍼졌다. 謠言이 국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국왕이 명령을 내려 夏依克滿蘇爾를 죽였다. 그러나 그의 시체가 소리를 내어 말하기를 “阿納爾는 淸白하다. 나도 淸白하다.”고 했다. 국왕이 이 말을 듣고 시체를 불태우고, 재를 성밖의 大河에 뿌리도록 했다. 호수에 물거품이 생기더니 물거품이 전과 같은 소리를 했다. 호수의 물은 국왕의 화원으로 흘러갔다. 마침 화원에서 놀고 있던 40인의 공주가 水泡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매우 기이하여 서로 다투어 水泡를 마셨다. 오래지 않아 국왕의 40명의 공주는 배가 불러갔다. 국왕이 임신했음을 알고, 모두 죽여버리라고 했다. 왕후와 대신들이 청하니 국왕이 死罪를 면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깊은 산의 숲 속으로 쫓겨났다?. 40명의 공주는 남아 20, 여아 20명을 낳았다. 이들이 커서 서로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다. 이후 자손이 繁衍하였는데, 사람들은 40명의 처녀의 후예가 키르기스족이라고 말한다. 키르기스는 바로 40명의 처녀라는 뜻이다.10)
위구르의 자료는 <우구즈칸의 전설>이라는 서사시이자 신화로, 우구즈칸은 위구르족의 건국시조이다. 태어날 때부터 늑대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며, 후에 인근 부족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늑대가 나타나 우구즈칸을 돕는다. 늑대가 민족의 토템임을 분명히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우리가 보았던 바와는 약간 다른 점이 있다. 高車族․突厥族에서는 늑대가 인간을 생산하는 주체로 기능을 하였으나, 위구르의 신화에서는 민족시조의 전쟁을 돕는 기능을 하고 있다. 또 민족시조의 출생과 관련하여서도 직접적으로 개입되어 있지 않다. 민족시조의 형상은 늑대의 형상이라는 것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점은 위구르족이 민족시조의 격을 높이려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구르의 자료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다른 데 있다. 위에서 지적된 늑대토템은 文面에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어 재론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우구즈칸이 맞이하는 두 번째 처이다. 우구주칸과 두 번째 처와의 결합은 늑대토템을 중심으로 한 민족시조 서술 경향과는 다른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리 말하자면 그 ‘다른 점’이라고 하는 것은, 흉노족의 민족시조 서술경향이다. 이것을 위구르의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처는 연못 가운데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 앞에서 발견된다. 여기에서 ‘연못 가운데에 서 있는 나무’는 神樹 또는 神竿일 것이다. 샤만교에서 神樹나 神竿은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때문에 돌궐족의 신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무를 향해 가장 높이 뛰어오르는 자가 군주가 된다.’는 것, 그것은 누가 하늘과 교통할 수 있는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가 된다. 우구즈칸도 伊質泥斯都처럼 비바람을 부르고 여름․겨울의 자연적 환경을 通御할 수 있는 능력을 ‘연못 가운데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 앞의 여자’와의 결합을 통해서 얻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낳은 자식들의 이름을 하늘․산․바다 등과 같은 우주의 구성물로 삼은 데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을 본다.
그런데 우구즈칸의 이러한 결합에서 눈여겨 볼 부분이 또 있다. 그것은 ‘연못’이라는 요소이다. 그냥 보아 넘길 수 있는 요소이지만, 이것은 상당한 의미를 담고 있는 요소로 판단된다. 이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시 흉노족의 민족시조 서술경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伊質泥斯都를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伊質泥斯都는 夏神․冬神과의 사이에서 4명의 아들을 얻는데, 그 중의 한 명이 ‘하얀 기러기’로 변하였다고 했다. ‘하얀 기러기’에서 ‘하얗다’는 부분은 이제까지 보아온 늑대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늑대의 이미지는 위구르의 우구즈칸에서 잘 드러나듯 ‘푸른색’의 이미지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첫 번째 부인을 얻을 때 ‘푸른 광선’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함으로써 여전히 ‘푸른색’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얗다’는 이미지는 무엇을 나타내는가? 그것은 바로 ‘연못’과 상관성이 있을 것이다. 물결이 쳐서 형성되는 水泡의 이미지가 바로 백색이다. 또한 백색 이미지가 부여된 대상이 ‘새’라는 점에서 그것은 하늘과 상관성을 갖는다. 神樹나 神竿처럼 새 또한 지상과 천상을 오가며 교통할 수 있는 매개체인 것이다. 이로 볼 때, 우구즈칸의 두 번째 처는 伊質泥斯都의 한 아들이 ‘하얀 기러기’로 변하였다고 한 것과 일정한 상관성을 갖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우구즈칸은 돌궐의 민족시조 서술경향과도 상관성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우구즈칸을 돌궐의 민족시조 서술경향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설정한 것일까? 자료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우구즈칸은 정복군주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위구르가 점차 세력을 획득해 가는 역사적 과정을 비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흉노족과 관련 있는 푸른색을 위구르의 상층사회에서 신성한 색깔로 여겼다는 점에서, 돌궐족 민족시조와 관련된 백색 이미지의 차입은 정치적 고려로 판단된다. 돌궐이 그러했듯, 위구르 또한 돌궐을 이어 북방 대륙의 강국으로 군림했던 유목제국이었다. 그 과정에서 피정복민족과의 일체감을 형성하려는 의도를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 정복군주는 피정복민족과 혼인을 통하여 그 결합을 공고히 하는 경향을 보이는바 우구즈칸 역시 그러한 경향을 보인 군주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카자흐도 위구르와 비슷한 경향을 보이는 민족으로 생각된다. 다만 위구르의 우구즈칸에서 보이는 혼합된 양상을 보이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즉 위에서 든 자료에서는 카자흐의 민족시조가 돌궐과 관련성이 있는데, 알타이산에 거주한 카자흐 乃蠻部族의 한 支派는 자신들의 민족기원을 늑대토템의 민족시조신화와 관련을 짓고 있다. 특히 후자의 신화는 고유명사만 달라질 뿐 돌궐의 민족시조신화와 그대로 닮아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카자흐족을 구성하고 있는 씨족이 각기 다른 씨족기원신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아마도 당연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카자흐족은 돌궐, 위구르처럼 통일된 유목제국을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처럼 분화된 민족시조 서술경향의 확인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그것은 위에서 살펴보았던 돌골․위구르의 민족시조신화는 바로 카자흐족에서 확인되는 분화된 민족시조신화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즉 분화된 씨족이 하나의 공통된 大民族을 형성해가면서 그 민족기원신화 또한 多層的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는 위에서 소개한 자료, 즉 돌궐과 관련성을 보이는 자료를 중심으로 카자흐의 민족시조 서술경향을 확인해본다. 왜냐 하면 카자흐 乃蠻部族의 한 支派가 보여준 민족시조신화는 이미 위에서 다른 민족의 시조신화를 분석하면서 충분히 지적되었고, 그것이 돌궐어족의 민족시조신화, 특히 烏孫族․高車族 등의 민족시조신화가 보여주는 하나의 특징임을 확인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의 재론은 필요 없을 것이다. 위에 소개한 카자흐 민족기원신화에서 목동을 구해준 대상은 백색 天鵝이다. 그리고 이 백색 天鵝는 연못에 그 거주처를 두고 있다. 늑대가 알타이산으로 가듯, 백색 天鵝는 목동을 데리고 연못으로 간 것이다. 때문에 이 연못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카자흐 민족의 始源이 시작된 곳이기 때문이다. 돌궐이나 위구르의 자료에서 하나의 요소로만 지적되던 것이 카자흐의 민족기원신화에 와서는 전체적 내용의 뼈대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11) 그런 점에서 이 카자흐 민족기원신화는 카자흐족과 돌궐족과의 관련성을 크게 부각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치 高車族이 흉노족과 민족적 혈통성을 연결시키려 했던 것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즉 烏孫族의 민족기원신화를 이어받으면서 한편으로는 돌궐족과의 혈통적 연관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카자흐족의 민족구성이 주로 烏孫族, 돌궐족의 두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키르기스족의 민족기원신화를 살펴볼 차례이다. 키르기스족은 위구르, 즉 回鶻汗國을 무너뜨리고 回鶻에 버금가는 유목제국을 세운 민족이다. 이것은 아마도 40명의 처녀와 夏依克滿蘇爾가 결합하여 40명의 자식을 낳았다는 것에서도 어느 정도 짐작이 된다. 그러면 키르기스족의 민족기원신화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분석해보기로 하자. 왜냐 하면 夏依克滿蘇爾와 阿納爾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전반부와 夏依克滿蘇爾와 40인의 공주와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후반부가 작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전반부의 내용은 고거족, 돌궐족 등에서 확인되는 구조와 비슷하다. 즉 버려진 아이를 늑대가 구해 인적이 드문 동굴로 데려가는 것이, 夏依克滿蘇爾가 후에 阿納爾가 있는 동굴에 찾아가는 것과 흡사한 것이다. 다만 夏依克滿蘇爾가 阿納爾를 직접 찾아가는 것으로, 阿納爾가 늑대의 형상이 아니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이들이 오누이 관계이면서도 성적 교섭을 가졌을 것이라는 謠言이 떠돌았고, 阿納爾가 그 거처를 동굴로 정했다는 점에서 高車族이나 돌궐족의 민족시조신화에서 확인되는 늑대의 거주지를 연상시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반부의 내용은 高車族이나 돌궐족의 민족기원신화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들의 관계는 부정되고 그 결과 夏依克滿蘇爾는 죽게 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키르기스족의 민족기원신화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고거족․돌궐족의 민족기원신화가 배제되었음을 말해준다. 그것은 자신들이 멸망시킨 회골에 대한 배제이기도 하다. 회골 또한 늑대를 토템으로 하는 민족시조신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키르기스족이 배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배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여기에는 숨어 있다. 즉 高車族이나 돌궐족, 위구르족에서 보이는 늑대토템 요소가 변형되어 존재하고 있는 것이 바로 키르기스족 민족기원신화이다. 夏依克滿蘇爾가 왕에 의해 죽지만, 즉 늑대토템적인 요소가 부정되지만 夏依克滿蘇爾는 죽어서도 계속 ‘결백’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늑대토템을 신봉하는 민족의 항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항거가 흉노, 돌궐의 자료에서 확인되는 伊質泥斯都, 위구르의 자료에서 백색 天鵝의 구조에 녹아들어 있다. 夏依克滿蘇爾가 연못의 水泡가 되어 40인의 공주를 임신시키는 것은, 위구르의 신화에서 확인되듯 목동이 백색 天鵝와 결합하는 양상을 떠올린다. 40인의 공주가 연못에서 놀았다는 것과 백색 天鵝가 연못에 거주지를 정하고 있는 것, 목동과 결합하여 민족을 번성시키는 것과 수포와 결합하여 민족을 번성시키는 것이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상호 기능이 바뀌어 있을 뿐이다. 즉 키르기스족의 신화에서는 남자인 夏依克滿蘇爾가 백색 天鵝의 기능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夏依克滿蘇爾가 죽어서 水泡가 된 것은 백색의 이미지로 화한 것이기에 백색 天鵝와 그 기능이 바뀌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로 볼 때, 키르기스족의 민족기원신화는 상당히 작위적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는 늑대토템적인 요소의 면면한 흐름을 기반으로 하여 돌궐의 伊質泥斯都에게서 확인되는 신화적 요소를 덧씌우는 식의 형태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돌궐어계 민족의 민족기원신화를 정리하여 보았는데, 그 특징은 처음에 지적한 늑대토템적인 요소 이외에, 돌궐의 伊質泥斯都에게서 확인되는 天鵝(또는 기러기) 및 水泡와 관련된 白色 신앙을 또 하나의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후자는 흉노와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바, 돌궐족․위구르족․카자흐족․키르기스족에게서 면면히 그 흐름이 확인되고 있다.
3. 몽골어계 민족
몽골어계 민족의 시조신화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日光感應 요소와 天女의 등장이다. 이것을 살펴보기 위해 몽골어계 민족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검토해야 할 민족은 鮮卑이다. 주지하다시피 鮮卑는 A.D. 2세기 중엽 檀石槐에 의해 몽골고원에 산재한 鮮卑諸部를 통합하여 만들어진 민족으로, 匈奴에 버금가는 유목제국이었다. 다음에 檀石槐의 탄생신화를 소개해 본다.
桓帝 때에 鮮卑는 檀石槐가 세운 것이다. 그의 아버지 投鹿侯는 처음에 匈奴軍에 3년 종사하였다. 그 아내가 집에 있으면서 아들을 낳았다. 投鹿侯가 돌아와 괴이하게 여겨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아내가 말하기를 “일찍이 낮에 가다가 雷震 소리를 듣고 하늘을 쳐다보니 우박이 입에 떨어져서 그것을 삼켰습니다. 그리하여 임신이 되었고 10달만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 아이에게는 반드시 기이함이 있을 것이니, 선처해 주십시오.” 投鹿侯가 듣지 않고 드디어 아이를 버렸다. 아내가 비밀리에 거두어 기르니 이름을 檀石槐라고 하였다.12)
檀石槐는 그의 어머니가 雷震 소리를 듣고 하늘을 쳐다보다가 우박이 입에 들어가서 임신이 되었고, 그 결과로 태어난 사람이다. 檀石槐帝國을 세운 인물답게 그 혈통이 상당히 미화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檀石槐의 어머니가 雷震 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天意를 들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빛의 이미지와 광대한 소리의 이미지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또한 그러한 이미지의 구체적 대상이 우박으로 설정되어, 그것이 결국 檀石槐를 태어나게 한 매개체가 된 것이다. 그런데 檀石槐의 출생과 관련한 이러한 요소들은 넓은 의미에서의 일광감응신화소로 볼 수 있을 것이다. 日光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늘에서 내리비치는 모든 빛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日光은 ‘하늘에서 내리비치는 모든 빛’을 가장 대표하는 요소일 뿐인 것이다.13)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민족은 檀石槐帝國이 붕괴한 후, 莫北 지역을 일시적으로 제패한 민족인 拓跋鮮卑族14)이다. 이 민족은 원래 興安岭 북단의 嘎仙洞 일대에 거주했다. 그러나 鮮卑族의 와해를 틈타 남하하여 A.D.386년 北魏를 건국하고 A.D.440년에는 마침내 북중국을 통일하게 된다. 그러면 北魏의 실질적인 개국주인 拓跋力微에 관한 신화를 살펴보기로 한다.
初聖武帝嘗率數萬騎田於山澤 欻見輜輧自天而下 旣至 見美婦人 侍衛甚盛 帝異而問之 對曰 我天女也 受命相偶 遂同寢宿 旦請還曰 明年周時 復會此處 言終而別 去如風雨 及期 帝至先所田處 果復相見 天女以所生男授帝曰 此君之子也 善養視之 子孫相承 當世爲帝王 語訖而去 子卽始祖也 故時人諺曰 詰汾皇帝無婦家 力微皇帝無舅家 帝崩 始祖神元皇帝諱力微立 生而英叡15)
拓跋力微는 魏書 <序紀>에 의하면 15번째 칸이다. 즉 毛-貸로-觀-樓-越-推寅-利-俟-肆-機-蓋-僧-隣-詰汾에 이르는 世系에서 15번째 인물이 바로 拓跋力微이다. 그의 선조 중 특히 拓跋推寅․拓跋詰汾 등은 당시 주변 정치 정세를 살피면서 끊임없이 남하를 시도하여 拓跋推寅 때는 컬렌호에, 아버지인 拓跋詰汾 때에는 匈奴故地[오늘날 허흐호트시(呼和浩特市) 주변]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조부인 拓跋隣에게 神人과 神獸이 나타나 남하를 인도하고 있는데,16) 이것은 이들의 남하가 天意에 의한 것임을 말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의 선조들은 拓跋力微가 北魏를 세우는 데 있어 발판을 마련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拓跋力微는 부족장을 계승한 후 주변세력의 침입을 받아 부족이 흩어지고, 그 자신은 沒鹿回部의 大人인 竇憲에게 歸附하였다가 후에 竇憲의 사위가 된다.17) 그리고 장인의 후원으로 長川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이전의 세력을 회복한다. 이후 장인이 죽자 沒鹿回部를 倂呑하고 세력을 확대18)하여 拓跋珪 때 北魏 제국을 성립시키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拓跋力微의 출생을 위에 소개한 것처럼 天女를 등장시켜 신비화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拓跋力微가 북위제국 성립의 토대를 닦은 것은 天意에 의한 행동이었음을, 즉 정당한 것이었음을 입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鮮卑나 拓跋鮮卑의 신화에서는 모두 天意를 강조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즉 선비의 신화에서는 日光感應的인 요소로써 나타냈다면, 拓跋鮮卑의 신화에서는 天女의 등장이라는 요소로써 나타나고 있다. 鮮卑나 拓跋鮮卑의 신화에서 확인되는 이러한 특징은 다음 시기에 패권을 잡게 되는 거란이나 몽고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거란족의 시조출생신화는 神人과 天女의 결합에 의한 시조출생이라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神人은 신과 같은 능력을 소유한 지상의 존재이다. 이에 비해 天女는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이 둘의 결합은 北魏 건국의 개척자인 拓跋力微의 출생 방식과 매우 흡사하다. 지상의 부족장인 拓跋詰汾과 天女가 결합하여 拓跋力微를 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에 거란족의 시조출생신화를 들어본다.
전하기를 神人이 있었는데 白馬를 타고 다녔다. 白馬를 타고 盂山 浮土河로부터 동쪽으로 가고, 한 天女는 靑牛를 타고 平地松林을 거쳐 黃河로 흘러 내려가 木葉山에 이르러 두 물이 합쳤지는 지점에서 서로 만나 부부가 되어 아들을 8명 낳았다. 그 후손이 점차 번성하여 8부로 나뉘었다. 매번 군사를 출전시키거나 春秋時祭 때에는 반드시 白馬와 靑牛를 사용한다. 근본을 잊지 않기 위함이라고 한다.19)
그렇지만 거란족의 시조출생신화가 拓跋力微의 출생신화와 구조상은 동일해도, 그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우선, 神人은 白馬를 타고, 天女는 靑牛를 타고 가다가 木葉山에서 만나 부부가 되었다는 것부터 보자. 여기에서 白馬와 靑牛라는 두 동물이 더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까? 토템으로 볼 수 있을까? 그런데 春秋時祭 때에 供物로 바친다고 한 것을 보아서는 토템으로 보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리고 ‘근본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는 말이 白馬와 靑牛를 春秋時祭 때에 사용하는 것과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白馬와 靑牛, 神人과 天女를 서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처음부터 서로 관련 없는 것으로 보자는 것이다. 위에서 ‘근본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는 말은 神人과 天女에 연결되는 말이지 白馬와 靑牛에 연결되는 말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白馬와 靑牛에 연결 지어 이것을 살핀다면, 민족의 시조를 이야기하면서 엉뚱하게도 이들이 타고 다녔다는 白馬와 靑牛를 숭배하는 신화가 되고, 또 설사 그렇다고 하면 자기들이 숭배하는 白馬와 靑牛를 제물로 사용한 것이 되니 이것은 처음부터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들의 짝은 처음부터 상호 관련이 없었던 것인데, 白馬와 靑牛가 동북아 샤만이즘 제사에서 제물로 많이 쓰인다는 것에 기인하여 덧붙여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遼史 <禮志>에 보면 木葉山에서 天神과 地神을 제사지냈다고 한 것으로 보아,20) 그리고 현재 木葉山 산 위에 遼의 始祖廟가 남아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21) 위의 거란족 시조기원신화는 神人과 天女가 중심인 신화이지 白馬와 靑牛는 하등 중요한 요소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마는 유목민족에 필수적인 동물이고 청우는 농경민족에 필수적인 동물로 보면, 이 신화는 바로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결합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바, 이러한 해석이 더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22)
다음으로 몽고족의 민족기원 관련 신화를 보자. 만족기원 관련 신화라고 한 것은 몽고족의 경우, 신성성을 갖춘 민족의 시조를 일대기 형식으로 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위에서 보았듯이 한 민족이 시작되려면 그 민족의 시조가 어떻게 출생했고, 후에 어떤 이름의 민족을 형성하였는가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가 제시되어야 할 터인데, 몽고족의 자료에는 그러한 정보가 없다. 대표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는 몽고비사만 해도 실질적인 건국주인 징키스카간을 평범하게 그려놓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몽고족의 경우 민족기원과 관련된 일부분만을 적시해서 논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먼저 자료부터 제시한다.
(a) 버르테-치노(Börte-Chino)설화 : 칭기스카간의 근원은 위 하늘에서 (이미) 정해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던 버르테-치노이다. 그의 부인은 코아이-마랄이다. 텡기스(호)를 건너왔다. 오난하의 상원에 (있는) 보르간칼돈(산)에 거주지를 정하고 (생활했다. 그리고 이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던 (아들이) 바타치칸이다.23)
(b) 알랑-고아(Alan-Go`a)설화 : 도본-메르겐이 죽은 뒤 알랑-고아는 장부도 없이 세 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 세 아들의) 이름은 보코-카다기, 보카토-살지, 보돈차르-몽카크이다. 전에 도본-메르겐에게서 태어났던 벨구누테이(와) 부구누테이 두 아들은 자기 어머니인 알랑-고아의 뒤에서 서로 속삭이기를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의 형이나 동생 (혹은) 친척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 명의 아이를 낳았다. 집안에는 단지 마알리크-바야오트 (씨족 출신의) 사람만이 있다. 이 세 명의 아이는 (아마) 그의 (아들일) 것이다.”라고 했다. (이들이 이렇게) 어머니의 뒤에서 속삭이는 것을 이들의 어머니인 알랑-고아는 (이 속삭임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고…“너희 (즉) 벨구누테이(와) 부구누테이 두 아들이 나에 (대해) ‘이 세 아들을 낳았다. (이 세 아들은) 도대체 누구의 아들일까?’ 라고 의심스럽게 서로 속삭였다. 너희들이 의심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밤마다 밝은 금빛 색을 띤 사람이 겔의 에루게 쪽의 天窓을 통해 빛처럼 들어와 나의 배를 비비자 그(가 띠고 있는) 빛이 나의 배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그 금빛의 사람이 나의 겔에서) 나갈 때는 태양(이 뜨고) 달이 (질 무렵인데 마치 그는) 노란 개처럼 서둘러 나갔다. 너희들은 함부로 말하지 말라. (방금 내가 말한) 이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위의) 표정은 (분명 이 세 아이가) 하늘의 아들(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너희들은 (이 세 아이를) 어떻게 평민들에 견주어 말하는가. (이후 이들이) 전체의 칸들이 될 때 비로소 평민들은 (이 아이들의 내력에 대해)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24)
위에서 든 두 유형 외에 두와 소코르형, 테무진형 등을 더 들지만25) 여기에서는 버르테-치노형과 알랑-고아형이 몽고족의 族源을 탐색하는데 긴요하게 생각되므로 이 둘만을 문제삼기로 한다. (a)의 버르테-치노형 설화는 蒼狼白鹿26)型 설화로도 이야기되는데, 그것은 버르테-치노가 ‘푸른 이리(蒼色狼)’의 뜻이고, 코아이 마랄27)은 ‘흰 암사슴(白鹿)’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유형의 설화는 이제까지 우리가 몽골어족에 속하는 민족의 기원신화를 본 데서 알 수 있듯, 몽골어족의 민족에게 ‘蒼狼白鹿’은 매우 생소한 신화소이다. 이에 비해 이 신화소는 돌궐어족의 민족에서 보편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역사적으로 돌궐족은 몽고족보다 선주민족이었고, 또 몽고족이 형성되는 데 있어서 돌궐을 포함한 여러 민족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 신화소는 몽고족이 몽골고원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그곳의 선주민이었던 돌궐족의 신화소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민족의 신화소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이것은 매우 정치적인 함의를 내재하고 있다. 이미 돌궐어족의 여러 민족에서 보았듯, 신화소의 습합은 북방 초원지대를 다투면서 마련된 ‘이민족 포용의 한 방법’이었다. 민족기원을 동일한 신화 내에서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이질적인 민족을 묶어줄 수 있는 강력한 ‘끈’으로 작용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몽고족의 형성에 있어 돌궐족은 ‘특별한’ 민족으로 인정되었던 듯하다. 이 버르테-치노설화 뿐만 아니라 두와 소코르형의 설화도 돌궐족의 신화소를 차용한 것이기 때문이다.28) 또 라시드의 集史에 들어 있는 칭키스 카한 부족의 기원설화에도 역시 돌궐족 기원신화의 영향이 미치고 있다.29) 이로 보건대 몽고족의 민족 계보에서 돌궐족의 신화소가 곳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몽고족과 돌궐족의 심정적 유대를 강화시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다음으로 (b)의 알랑-고아형 설화인데, (a)와는 다른 신화소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日光感應 신화소인데, 이 신화소는 몽골족 고유의 것으로 보인다. 칭키스칸의 어머니인 허엘룬이 아들을 훈계할 때 “그 옛날 알랑 어머니”30)를 스스럼없이 언급하고 있고, 元史에서 베르테-치노설화를 배제한 채 알랑-고아설화만을 소개하고 있다. 또 몽골비사에 기록된 몽골씨족들이 모두 알랑-고아의 후예로부터 분기되고 있고, 集史에서도 알랑-고아의 후예 씨족을 니론(Nirugun : 등이나 허리를 나타내는 몽골어로 聖骨을 의미함), 이와 계통을 달리하는 씨족들을 두룰루킨(Dürülükin : 隸屬集團)으로 분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b)의 내용을 보자. 금빛 색을 띤 사람, 즉 金人이 天窓을 통해 빛처럼 들어와서 알랑-고아의 배를 비비는 행위를 하고서, 마치 노란 개처럼 서둘러 나갔다. 그래서 알랑-고아가 임신하여 세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이 중 보돈차르-몽카크가 바로 보르지긴 씨족을 창시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이 설화는 보르지긴 씨족을 창시한 보돈차르-몽카크의 탄생신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설화에서 주목되는 점이 金人이 ‘天窓을 통해 빛처럼 들어왔다는 것’, ‘노란 개처럼 서둘러 나갔다는 것’ 등의 표현이다. 이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金人이 빛처럼 들어와서 노란 개처럼 나갔다.’는 것이 될 터인데, 연결관계가 어딘가 어색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두 행위의 주체는 金人인데, 왜 들어올 때는 빛처럼 들어오고 나갈 때는 노란 개처럼 나가는가? 金人이 ‘노란 개’와 동일시되는 대상임을 말한 것인가? 정황으로 볼 때, ‘金人’과 ‘노란 개’는 동일 대상으로 판단된다. 여기에서 ‘정황’이라고 한 것을 ‘근거’로 확정짓기 위해서는 알랑-고아 아버지인 알랑-고아의 아버지인 코릴라르타이-메르켄이 보르칸칼돈산의 주인이자 보르칸이라는 神堂을 열은 신치-바얀의 오리양카이 씨족처로 이동하였다는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의 이동설화를 들어본다.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이 (살고 있는) 코리-투메트(족 소유의 某) 地에는 담비(나) 회색쥐 (등 사냥할 수 있는 작은) 동물들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난획의 방지를 위해 혹은 이곳이 대세력자의 수중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 땅에서 사냥을 할 수 없게 되자 (사냥을 할 수 없게 만든 그들과) 아주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은 이들과 결별하여) 코릴라르라는 씨족을 만들었다. 보르칸칼돈(산은) 큰 사냥감이 많은 곳이라며 (그는) 보르칸칼돈(산)의 주인이자 보르칸(이라는 神堂)을 열은 신치-바얀의 오리양카이 (씨족처)로 이주해 왔다. (그러한 이유로) 코리-투메트(부)의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의 딸인 (알랑-고아가) 아리크-오손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도본-메르겐이) 알랑-고아를 거기서 만나 도본-메르겐의 (처로) 삼았던 까닭이 (바로) 이러하다.31)
위의 인용에서 보이는 오리양카이는 몽골부의 성립 이전부터 있던 동북아시아의 古族으로, 集史 <部族誌>에 의하면 몽고족 발흥 당시 바이칼호 남부지역의 삼림지대, 오난河 유역 일대로부터 滿洲 북동부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이 중 후자는 두둘루킨(隸屬集團이라는 뜻) 몽골씨족에 속하는 오리양카이라고 했다. 그런데 만주 동북부와 인접한 한국의 함경북도․남도에 오리양카이족의 유래에 관한 설화가 전승되고 있는데, 개와 인간처녀가 결합하여 오리양카이족의 시조를 출생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32) 이로 보면, 알랑-고아와 결합한 金色神人은 실은 ‘누런 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개에 대한 신앙은 몽골어민족인 烏桓族에게도 있고,33) 여진족계의 민족에서도 발견되고 있으므로,34) 민족간의 융합 결과 자신들의 신화 또는 설화에 반영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특히 신화의 경우 앞서의 논의에서 알 수 있듯 서로 다른 씨족이 결합하여 민족국가를 이룰 때, 정치적 의도에 의한 습합 경향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몽고족의 알랑-고아설화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를 할 수 없을까? 왜냐 하면 몽고족은 두룰루킨을 자신들의 예속집단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바, 이들을 단지 예속만 했을까, 그리고 이들의 신화소를 아예 배제하여 버렸을까 등의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 금색신인이 ‘누런 개’이기도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즉 전혀 다른 대상이 하나로 습합이 되어 이야기되고 있을 뿐이라는 가정을 해보기로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이 속해 있던 코리-투메트部의 족원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금색신인, 일광감응 등의 요소가 코리-투메트部의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논증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의 코리-투메트부는 주지나 설화 등으로 미루어 《論衡》을 위시한 《後漢書》, 《梁書》, 《魏略》에 기록된 北夷 槁離國과 어떤 상관성이 있지 않나 생각하고 있다. 사실 《몽골비사》에 수록된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의 이동설화는 高麗(槁離=Khori=貊)족의 남방 이동설화인 주몽설화와 비교해 볼 때 어느 면에서 高麗족의 서방이동을 묘사한 것이라고 간주해도 좋을 만큼 내용이나 명칭적인 면에서 유사성을 나타내고 있다. 또 몽골국의 학자인 Ш.가담바는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이 세운 코릴라르(Khorilar)란 씨족명칭은 ‘코리(Khori)에서 갈라져 나온 분족’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해석은 주몽설화 속의 “國號高句麗,因以高氏”라는 구절이 실제 北夷 槁離國을 계승한 또하나의 Khori(高麗=句麗)의 건국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35)
위의 논의에 기대면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이 속했던 코리-투메트부36)는 貊族에서 갈라져 나온 分族이다. 그리고 貊族은 고구려의 족원이므로 코리-투메트부와 고구려는 상호 밀접한 상관성이 있는 민족인 셈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주몽신화에는 일광감응 신화소가 있고, 또몽골어민족인 선비족의 민족기원신화에도 넓은 의미의 일광감응 신화소가 보인다. 따라서 코릴라르타이 메르겐이 속했던 코리-투메트부의 신화에도 일광감응 신화소가 있었을 것이고, 이것이 알랑-고아의 설화에 보이는 금색신인으로 제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렇게 보건대, 알랑-고아설화는 몽고족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일광감응신화소에 예속집단인 두룰루킨의 ‘노란 개’ 신화소를 받아들여 형성된 설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두룰루킨이 가지고 있던 ‘노란 개’ 신화소는 몽골어민족인 烏桓族에게서 개에 대한 신앙으로 나타나고 있는바, 이 신화소의 전승 또한 두룰루킨에게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몽골어민족 내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신화소들의 지속적인 전승은 이들 민족이 이동과 병합, 유목제국의 형성 등을 거치면서 이루어지고 있기에, 때로는 상호 습합되기도 하고 변모되기도 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몽고족의 알랑-고아설화도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다월족의 민족기원신화를 고찰해 본다. 자료부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 옛날, 늙은 어머니와 두 아들이 푸른 松柏이 우거진 산기슭에서 살았다. 큰아들은 庫如古熱, 작은아들은 卡熱古熱이라고 했다. 그들은 각자 한 필의 神馬가 있었는데, 매일 말을 타고 산에 가서 사냥을 했다. 그들에게는 庫如臥(神狗)와 庫如新(神鷹)도 있었다. 아들들이 모두 훌륭한 사냥꾼이었기에, 또 매와 개가 도와 사냥을 했기에 날마다 사냥물을 많이 가지고 돌아왔다. 아들들이 사냥을 나가면 늙은 어머니는 집을 보면서 밥을 했다. 어느 날부터 아들들이 매일 사냥을 나가고 난 후, 代尼烏音(선녀)들이 방 꼭대기에 내려와 “할머니, 할머니, 庫如古熱과 卡熱古熱은 집에 있습니까? 庫如臥 개는 뜰에 있습니까? 庫如新 매는 鷹架에 있습니까?” 할머니가 “모두 없다!”라고 하면 그녀들은 안심하고 羽衣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가 할머니의 일을 도왔다. 그리고는 일이 끝나면 황급히 날아가 버렸다. 그 후 어머니가 두 선녀를 며느리로 삼기 위해, 이들을 인간세계에 어떻게 머무르게 할 것인가를 아들들과 상의했다. 어느 날 아들들이 거짓으로 수렵을 나간 척 하면서 집에 들어와서는 선녀들의 옷을 불에 태워버렸다. 그래서 두 선녀는 하늘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어머니의 아들들과 각각 결혼하였다.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현재의 다월인은 바로 저 선녀가 낳은 후예이다.37)
위에 제시한 다월족의 민족기원신화는 우리에게 비교적 낯익은 설화인 <나뭇군과 선녀>와 흡사하다. 그러나 선녀들이 연못에서 목욕을 하는 내용이 결여되어 있다. 또한 사냥꾼 형제와 두 선녀가 결합하는 데 있어서, 두 선녀의 자발성이 미리 전제되어 있다. 즉 사냥꾼 형제가 사냥을 하러 나가면 이들의 집에 내려와서 홀로 있는 어머니의 집안 일을 돕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중에 선녀들의 옷이 사냥꾼 형제에 의해 불태워지고, 그 결과 선녀들과 사냥꾼 형제가 결혼하게 되었다는 것은 <나뭇군과 선녀>설화와 공통된 요소이지만, 이는 부연적인 설명에 가깝다고 본다. 이 이전에 선녀들이 사냥꾼 형제의 집에 내려와서 지속적으로 집안 일을 도운 것 자체가, 이미 사냥꾼 형제의 집안과 가족적 결합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월족의 민족기원신화는 <나뭇군과 선녀>설화와는 다른 내용을 가진 것으로 본다. 오히려 拓跋鮮卑族과 契丹族의 민족기원신화와 유사함을 볼 수 있다. 모두 지상의 남자와 天女와의 결합을 통해 민족시조가 탄생하고, 그로 인해 민족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다른 것은 다월족의 경우 두 형제가 각각 仙女(天女)와 결합한다는 점이다. 보통 민족시조의 출생은 한 부모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 상례인데, 다월족은 그것을 복수로 해놓고 있다. 그렇게 되면 형의 혈통과 동생의 혈통이 처음부터 갈리던가, 아니면 동생이 형의 씨족에 예속되던가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해명이 없다. 우리가 이제까지 본 바로는, 특히 돌궐의 경우에서 잘 드러나고 있듯 형제들은 각각의 씨족을 형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것에 기대면 다월족의 경우도 형제가 갈려 각각의 씨족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으로 몽골어민족의 민족기원신화를 살펴보았다. 그것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몽골어민족의 경우 주요 특징은 日光感應, 天女의 하강, 黃犬의 등장 등이 될 것이다.
4. 퉁구스어계 민족, 아이누
퉁구스어계 민족의 민족시조신화는 대체적으로 ‘天神+水神’의 결합에 의한 시조출생, 日光感應, 곰 숭배 등을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고아시아족인 아이누 또한 곰 숭배를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같이 논하기로 한다.
滿族의 선대 민족인 여진족은 주지하다시피 거란족의 뒤를 이어 나타나 북방의 대세력으로 성장하여 金朝를 세운 민족이다. 즉 安出虎水(현재의 阿什河)에서 발원한 完顔部 출신의 阿骨打가 A.D.1115년 金朝를 세워 A.D.1234년 몽골제국에 멸망당할 때까지 동북아의 대국으로 군림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진족의 金朝는 高麗와 상당한 유대감을 표하고 있는바, 이것은 여진족이 고려의 선대민족인 고구려와 민족적 일체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38) 그렇다면 고구려는 여진족의 후예인 滿族과도 민족적인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세 민족의 민족기원신화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는데, 여진족과 만족의 자료만 제시하고, 고구려의 것은 논의 중에 언급하기로 한다.
女眞族 : 옛날 長白山 일대는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였는데 다만 한 사람이 長白山 天池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고 있었다. 하루는 그가 고기를 잡고 있는데 오색구름 가운데 아홉 선녀가 날아내려 천지에 들어가 목욕을 하였다. 그 중에 아홉째 선녀가 그 사람의 앞으로 다가왔다. 다른 여덟 선녀는 사람이 있음을 보고 일제히 달아났는데 오직 아홉째 선녀는 달아나지 않았다. 천계의 법규로는 우연히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이 남자면 곧 그와 결혼하게 되어 있었다. 天神은 天兵과 天將을 보내 아홉째 선녀를 잡아오려 했으나 天池의 흑룡이 구조해 주었다. 뒤에 그 사람은 아홉째 선녀와 결혼하여 자손이 번성하게 되었는데 이들 이름을 女眞族이라고 한다. 女眞이란 女는 天女를 말하고 眞은 眞龍을 말한다. 여진의 후예가 滿族이다. 이로부터 長白山을 聖山으로 尊崇하였다.39)
滿族 : 滿洲는 원래 長白山 동쪽 布庫哩山 아래 布勒瑚里라고 하는 한 호수에서 일어났다. 일찍이 하늘에서 내려온 세 선녀가 이 호수에서 목욕을 했는데 첫째는 恩古倫, 둘째는 正古倫, 셋째는 佛庫倫이라고 했다. 목욕을 마치고 기슭에 오르니 신작이 朱果를 물어와 佛庫倫의 옷 위에 두었는데 빛깔이 몹시 아름다웠다. 佛庫倫은 그것을 아껴 차마 손에서 놓지 못했다. 드디어는 입에 물고 겨우 옷을 입다가 朱果가 그만 뱃속으로 들어갔는데 곰 감응이 있어 잉태가 되었다. 두 언니에게 “나는 배가 무거워 함께 올라갈 수 없는데 어쩌지?”라고 말했다. 두 언니는 “우리들은 이미 丹藥을 먹어 참으로 죽음의 이치와는 무관하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네 몸이 가벼워지기를 기다려 올라와도 늦지 않다.”라고 말하고는 드디어 작별하고 가버렸다. 佛庫倫은 나중에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면서 말을 할 줄 알았고 아주 빨리 성장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하늘이 너를 낳은 것은 실로 난국을 안정시키려 함이다. 저 싸우는 곳으로 가서 장차 네가 태어난 까닭을 하나하나 상세히 설명해라!”라고 말했다. 배 한 척을 주며 “물을 따라 가면 곧 그 땅이다.”라며 말을 마치자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그 아들은 배를 타고 물을 따라 내려가다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이르렀다. 물가에 올라가 버들을 꺾어 坐具를 엮으니 마치 의자와 같았다. 혼자 그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 때 長白山 동남쪽 鄂謨輝의 鄂多理40)에 세 성씨가 있었는데 족장이 되려고 다투어 종일 서로 살상을 하고 있었다. 마침 한 사람이 물을 길러 왔다가 그 아이의 행동거지가 기이하고 생김새가 보통이 아닌 것을 보고 싸우는 곳으로 돌아와 무리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싸우지 말라. 내가 물긷는 곳에서 한 이상한 남자를 만났는데 범인이 아니었다. 생각건대 하늘이 이 사람을 허투루 낳은 것이 아닌 것 같은데 어찌 가서 보지 않는가?” 三姓 사람들은 말을 듣자 싸움을 끝내고 함께 가 보았다. 가서 보니 과연 보통사람이 아니어서 이상히 여기며 그에게 물었다. “나는 천녀 佛庫倫 소생이고 성은 愛新覺羅이고 이름은 布庫哩翁順이다. 하늘이 너희들의 紛亂을 안정시키라고 나를 내려보냈다.”라고 대답하며 어머니가 당부한 말을 상세히 그들에게 고했다. 무리가 다 경이로워하며 “이 사람을 걸어가게 할 수는 없다.”라고 말하고 드디어 서로 손을 끼워 가마를 만들어 떠받들고 돌아왔다. 삼성 사람들은 분쟁을 끝내고 함께 布庫哩翁順을 받들어 군주로 모시고 百里女를 처로 삼게 했다. 국호를 滿洲로 정했으니 이가 그 시조이다.41)
언뜻 보아서는 여진족과 만족의 자료는 매우 유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장백산이라는 공간, 연못에 내려온 선녀라는 인물, 선녀와의 결합을 통한 민족의 출현 등에 있어서 유사함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두 신화는 이처럼 유사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또한 매우 다른 것이 사실이다. 가장 단적인 특징은 여진족의 신화는 민족의 유래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데 비해 만족의 신화는 민족의 시조출생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즉 여진족의 신화가 민족 단위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면, 滿族의 신화는 시조 개인 단위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전체 구조상 유사하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 세부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고, 이것은 결국 신화 전체의 구조를 다르게 인식하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여진족의 족원신화에서 추려볼 수 있는 주요 뼈대는 하늘에서 장백산 천지에 내려온 선녀와 어부의 결합이다.42) 이들의 결합에 의해서 여진족이 시작되는데, 그 과정에서 한 차례의 시련이 있게 된다. 즉 天神이 아홉째 선녀를 잡아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지에 사는 흑룡의 도움으로 어부와 선녀는 결혼을 하게 되고, 그리하여 자손이 번성하여 여진족을 형성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즉 어부와 선녀의 결합에 의해서 여진족이 시작되었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여기에 흑룡을 개입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이것은 천지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활했다는 어부가 평범한 어부가 아닐 거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다른 곳도 아닌 장백산 천지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생활했다고 한 것을 보면, 그리고 여진족을 비롯한 만족이 장백산을 聖山으로 尊崇하게 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어부는 신적 성격을 지닌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어떤 신적 성격을 지닌 것일까? 그것은 장백산 천지의 흑룡이 그를 도와 天神이 보낸 天兵과 天將을 물리친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천지의 흑룡이 왜 어부를 도왔을까? 그것은 천지의 흑룡이 어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굳이 도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부가 장백산 천지에서 물고기 잡는 것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흑룡은 천지에 머무르는 존재라는 점에서 둘은 동일 공간을 삶의 공간으로 하고 있다. 동일 공간을 삶의 공간으로 했다는 것은 이들이 실은 동일 대상일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즉 어부가 흑룡이고 흑룡이 어부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여진족의 족원신화는 어부와 선녀의 결합이기도 하지만 천지의 흑룡과 선녀의 결합이기도 하다. 때문에 족원신화라면 거의 공식적으로 덧붙여지는 民族名의 의미해석을, 여진족의 족원신화에서는 “女眞이란 女는 天女를 말하고 眞은 眞龍을 말한다.”라는 식으로 풀이했을 것이다. 즉 어부가 배제되고 흑룡과 선녀만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바, 어부가 실은 흑룡임을 말해주는 것이 된다.
그러면 이제 만주족의 시조출생신화를 보자. 여진족의 신화에서 파악되는 구조를 토대로 만주족의 신화를 보면, 여진족의 신화에서 등장하는 ‘어부 또는 흑룡’이 만주족의 신화에서는 ‘朱果로 인한 感應’으로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부 또는 흑룡’이 ‘朱果로 인한 感應’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다. ‘朱果로 인한 感應’은 곧 ‘日光感應’의 다른 표현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朱果’는 ‘붉은 색의 과일’이란 의미이고, 태양 빛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朱果로 인한 感應’은 곧 ‘日光感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布庫哩翁順이 三姓 사람들에게 “나는 천녀 佛庫倫 소생이고 성은 愛新覺羅이고 이름은 布庫哩翁順이다. 하늘이 너희들의 분란을 안정시키라고 나를 내려보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분명히 드러날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이중적인 신화 인식이 내재되어 있다. 여기에서 ‘천녀 佛庫倫 소생’이라고 한 것은 布庫哩翁順이 자신의 모계를 밝힌 것이다. 그리고 이 이하는 부계를 밝힌 것인데, 이 부분이 매우 이중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愛新’은 ‘金’이라는 뜻으로. 이것으로 姓을 삼았다는 것은 그 부계를 ‘金’과 관련된 것으로 보았다는 의미이다. 또 이름을 布庫哩翁順이라고 한 것도 부계와 관련이 있을 터인데 이것은 布庫哩翁順이 태어난 布勒瑚里와 관련이 있다.43) 즉 물의 정령과 관련이 있다.
‘물의 정령’은 여진족의 족원신화에서 어부와 동일시되었던 흑룡을 연상시킨다. 때문에 만주족의 신화에서 “성은 愛新覺羅이고”만 빼면 여진족의 족원신화와 만주족의 시조출생신화는 완벽하게 일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실제의 내용에서는 제외되었지만 그 이름에 사라진 신화적 내용이 남아있는 것을 볼 때, ‘朱果로 인한 感應’이 끼어 들 수밖에 없는 역사적 상황이 있었을 것이다. ‘朱果로 인한 感應’, 곧 日光感應은 유목민족인 선비족․몽고족․고구려 등의 민족에게서 보이는 신화소인데, 이것이 만족의 시조출생신화에 습합된 것은 布庫哩翁順이 鄂多理에 거주하는 三姓의 족장이 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滿洲事情案內所에서 펴낸 책에서는 鄂多理를 함경북도 會寧으로 비정하였는데, 이곳은 옛 고구려 거주지역과 滿族의 접경지역이다. 이곳을 布庫哩翁順이 접수하면서 고구려 민족의 신화소인 日光感應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것은 고구려의 주몽신화를 보면 보다 명백하게 드러난다. 주몽신화의 앞부분은 실제로는 해모수신화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인데 해모수신화는 우리가 위해서 논의한 만족의 시조출생신화 구조와 유사하다. 천신 해모수와 수신 유화의 결합을 문제삼고 있는바, 즉 ‘天神+水神’의 구조를 보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佛庫倫이 布庫哩翁順에게 “하늘이 너를 낳은 것은”이라고 할 때의 ‘하늘’은 ‘朱果로 인한 感應’을 두고 한 말이므로, 佛庫倫 스스로도 그 부 계통이 하늘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때문에 표면상으로는 佛庫倫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 이면을 따지고 보면 佛庫倫은 水神이 된다. 佛庫倫은 天神과 水神의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는바, 원래의 天神 형상에 水神으로서의 형상이 덧보태져 있는 것이다. 즉 여진족의 족원신화 구조 위에 고구려 신화, 더 거슬러 올라가 코리(穢)族이 가지고 있었던 신화의 구조가 겹쳐져 있다. 이로 보면 滿族은 여진족이 주체가 되어 세운 민족이라기보다는 코리족이 주체가 되어 세운 민족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이러한 추측을 하는데 유용한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청태조전설이다. 일명 누루하치전설이라고도 하는바, 함경북도 會寧 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 滿族의 시조출생신화와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滿族의 시조출생신화 또한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지역에서 채록된 자료를 먼저 제시하기로 한다.
함경북도 會寧郡에서 서쪽으로 15리 떨어진 곳에 西村이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의 土豪 이좌수는 年老 無子하고 다만 딸 하나만 있었다. 딸의 얼굴이 매우 예뻐서 깊숙한 규방에서 기르면서 매우 어여삐 여겼다. 하루는 그 어머니가 딸이 임신했음을 보고 깜짝 놀라 남편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大怒하여 딸을 때려죽이려다가 “아직 시집을 가지 않은 여자가 어찌 다른 사람과 通姦을 하느냐? 바른 대로 말하라.”고 하니, 딸이 밤마다 네 발 달린 짐승이 몰래 들어와 자고 간다고 말하였다. 그 아버지가 말하기를 “오늘밤에는 실꾸리를 준비하였다가 그의 발에 묶어 보내면 반드시 그 종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딸이 아버지의 말대로 하여 다음날 실을 따라가 보니 실이 인근의 작은 연못으로 들어가 있었다. 이에 이좌수가 사람을 동원하여 물을 퍼내니 바닥에 수달 한 마리가 잠복하여 있는데, 발에 실이 묶여 있었다. 수달을 잡아다가 때려죽이고 연못을 흙으로 매워버렸다. 딸이 아이를 낳았는데 黃頭를 가진 아이였다. 차마 죽일 수 없어, 母子를 별실에서 살도록 했다. 아이의 이름을 노라치라고 했는데, 자라면서 기질이 武强하고 성품이 민첩하였으며 잠수를 잘했다. 매일 연못가에 나가 놀면서 수달무덤을 지켰다. 하루는 어떤 蔽陽笠을 쓴 자가 노라치를 찾아와서 연못으로 가서 말하기를, “나에게는 堪輿의 기술이 있어 吉葬의 땅을 얻었는데 연못 가운데에 있다. 심연의 가운데에 臥龍石이 있는데 좌측 모퉁이에는 天子의 氣가 있고, 우측 모퉁이에는 王侯의 氣가 있다. 시신의 뼈를 그 모퉁이에 묻으면 그 자손이 반드시 상서로울 것이다. 나의 부모는 왼쪽에 너의 부모는 오른쪽에 묻어달라.” 이에 노라치가 왼손에 地師 아버지의 뼈를, 오른손에 자신의 아버지 뼈를 들고 들어갔다. 노라치가 물 속에 들어가서 잠시 생각하더니 서로 바꾸어 묻고는 잠깐만에 나왔다. 地師가 이미 그것을 알았으나 “이 또한 하늘의 뜻이다.”라고 탄식하면서 가버렸다.
노라치는 항상 다른 일은 않고 水獵만 했다. 鐘城郡 남쪽 10리에 水門洞이라는 마을에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 성품이 迂闊하고 意氣가 남자 못지 않았다. 이미 시집갈 때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청혼을 하였으나 여자는 내 짝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노라치가 그 말을 듣고 그 집에 가서 청혼을 하니 여자가 “그대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하니, 내가 그것을 시험해 보고자 한다.” 둘이 동시에 오줌을 누니 각자 三寸이나 땅이 패었다. 이에 결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세 아들을 낳으니, 셋째가 곧 淸太祖로 隆準 龍顔에 佳氣가 鬱蔥하였다. 아이 때의 이름은 漢이라고 했다. 부부가 서로 상의하되 이 땅은 淺露이니 오래 살 수 없다고 하고서 밤에 강을 건너 漢城峴44)에 숨어들었다.
本朝에 鄭忠信45)이라는 신하가 있는데, 무예가 뛰어나 鰲城府院君 李恒福의 문하에 있었다. 鰲城公은 乾文에 능통하였는바 북방국경 부근에 상서로운 기가 있어 그 땅에 大豪傑이 있음을 깨닫고, 鄭忠信에게 그 사실을 몰래 말하였다. 鰲城公이 鄭忠信을 조정에 천거하였는데, 처음에 保乙阿鎭 僉使職에 제수되어 북방 정찰의 일을 하였다. 부임 후 그 기미를 몰래 탐지하여 오다가 江北에서 병사를 양성한다는 것을 알고는 그것을 격파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는 四望城에 나갔다가 성 아래에서 상서로운 기가 올라와 가서 보니 작은 우물이었다. 우물에 상서로운 기가 가득 떠 있어 그 안에 異物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구하고서 보니 한 자루 보검이었다. 보검 위에 글이 있었는데 天子劒이라 하였다. 鄭忠信이 그것을 차고 돌아와서 벽에 감추어 두고 며칠을 생각하다가 이 검으로써 北岸에서 군사를 기르는 자를 없애고 천자에게 바치고자 하였다. 하루는 검을 가지고 강을 건너 태조를 찾아갔는데, 侍衛가 엄숙하여 대문에 이르기 전부터 두 다리가 떨렸다. 鄭忠信이 속으로 ‘내가 평생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는데 엄숙한 기가 사람을 범하니, 이는 반드시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몸을 단정히 하고 入侍하여 면회를 하였다. 잠시 바라보니 隆準 龍顔이었고, 눈을 감았다가 뜨면 電氣가 나와 감히 범할 수가 없었다. 鄭忠信이 태조에게 흠모의 정성을 略敍하고자 한다고 속이고는 태조의 뒤에서 칼을 뽑아 참수하려고 하였다. 태조가 거울을 통해 그것을 보고 고개를 돌리며 “무슨 검인가?” 라고 물으니 鄭忠信이 정색을 하고서 말하기를 “내가 이 검을 얻었는데 몰래 장군에게 드리고자 합니다.” 라고 했다. 태조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하늘에서 준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 한 필을 줄 터이니 발설하지 말라.”고 하였다. 鄭忠信이 문밖을 나와 보니 태조의 말이 사실과 다름을 알고 前槽의 말을 풀어 강을 건너 바로 鰲城公이 있는 北靑郡으로 갔다. 태조가 분노하여 뒤를 쫓아 北靑郡에 갔으나 말의 힘도 부족하고 그 자취를 찾다가는 반드시 玄機가 발설될 것으로 생각하고, 군사를 이끌고 寧古塔에 숨어 들어가 병사를 양성하여 중원을 통일하였다. 때문에 淸나라는 發祥의 땅이 되었다. 그 후 會寧邑 내에 淸鮮 양국이 매년 한 번 모여 시장을 열었다. 청조에서 계속해서 관리를 파견하여 會寧 시장에 나가서 會寧府使로부터 漢城古蹟을 조사하였다. 封陵築官의 계책을 안 부사가 군민이 큰 弊를 입을 것 같아 원래부터 이런 일이 없었다고 답했다. 부사가 鄕將吏民과 密通하고 이와 같은 대답을 한 것이었다. 청 관리가 몰래 조사하였으나 그 사정을 알지 못하였다. 北鮮 各郡의 志士들이 口口相傳할 뿐 郡邑의 史誌에 기록하지 않았다. 때문에 井淵의 古跡은 미상인 바가 되었으나, 그러한 사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46)
이야기 자체가 매우 구체적이어서 野史의 수준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전설을 보면 노라치의 부계가 수생동물인 수달로 설정되어 있음을 본다. 수달이 이좌수가 애지중지하여 깊숙한 방에서 기르던 딸과 결합하여 노라치를 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노라치의 부계를 수생동물로 설정한 것은 우리가 위에서 보았던 여진족 족원신화와 그대로 일치한다. 이로 보면 여진족 족원신화와 청태조전설은 매우 깊은 상관성이 있다. 더욱이 청태조전설이 만주족 시조출생신화와 그 서술방향을 달리 설정하고 있음을 감안하고, 또 ‘노라치’라는 어원을 따져보았을 때 그 상관성이 더욱 분명해진다.
노라치는 태어났을 때 그 머리가 ‘黃頭’였다. 즉 머리털의 색깔이 황색이었다. 다른 자료에서도 “십 개월에 이르러 한 동자를 낳았는데 그 두발 및 전신이 황색이었으므로 이름을 조선어로 노라[노라치](老爾冾赤)로 불렀다고 한다.”47)고 하여 머리털뿐만 아니라 전신이 황색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 황색을 한국어로 ‘노랗다’라고 하는데, 이 때문에 ‘노란 사람’을 뜻하는 ’노라치‘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48) 그런데 會寧 지역에서 전승되는 오리앙카이전설을 보면, 개가 인간처녀와 결합하여 자식을 낳았는데 그가 오리앙카이족의 유래가 되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인간처녀와 결합하는 양상도 같고, 거기에서 태어난 자식이 민족의 시조가 되는 것도 같다. 다만 결합하는 대상이 개인가, 수달인가만 다를 뿐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수달과 결합해서 태어난 자식이 ’黃色‘이었다 라고 하여, 그 형상으로만 볼 때 黃犬의 자식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리앙카이전설과 청태조전설은 동일한 이야기인가?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청태조전설은 오리앙카이전설의 구조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黃犬’ 대신 수생동물인 ‘수달’을 설정했을 것이다. 그것은 만족의 시조출생신화의 구조보다는 여진족 족원신화의 구조와 연결시키려는 발상으로 생각된다. 민간의 구비전승에서는 자신들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신화소로써 청태조의 출생을 결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로 볼 때 만족의 시조출생신화는 원래의 여진족 족원신화 구조에 코리족의 신화소인 日光感應이 덧보태져서 형성된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고구려의 주몽신화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즉 주몽이 金蛙의 동부여로부터 탈출하여 가서 淹淲水(지금의 鴨綠江 東北)에 이르렀을 때, “나는 천제의 孫이요, 하백의 外孫”이라는 말을 하는데 매우 흥미로운 내력 소개이다. 신화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내력을 소개할 때 부모를 강조하는 게 일반적인데, 주몽은 부모가 아니라 부모의 윗대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학계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듯, 주몽신화는 해모수신화와는 별개의 신화임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즉 ‘天神+水神’의 해모수신화와 ‘天神+地神’의 주몽신화가 그것일 터인데, 주몽신화는 바로 日光感應을 주된 신화소로 한 신화이다.49) 그렇지 않다면 주몽신화는 해모수와 유화가 이미 결합을 하였는바 그 후에 해모수가 日光으로 화하여 다시 결합한 것은 이중결합이자 이중임신이 되는, 매우 정치하지 못한 신화가 된다. 첫 번째 결합시도가 실패한 것도 아닌데, 다시 결합을 시도하는 것은 신화적 논리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여 볼 때, 고구려의 시조탄생신화인 주몽신화 역시 滿族 시조탄생신화와 비슷한 습합 과정을 露呈하고 있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다음으로 곰 신앙을 가지고 있는 민족들을 살펴보자. 한국의 경우 고조선족은 곰을 始祖母로 한다는 점에서 허저족․오르츈족․어웬커족 등과 같다. 그리고 肅愼의 후예인 勿吉族․靺鞨族 등에서도 곰을 숭배하였던 것을 보면,50) 동북아시아에서 곰 신앙은 朝鮮族․肅愼族 등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아이누에서도 곰을 극진하게 숭배하였던 것을 고려할 때, 아이누도 이들 민족과 일정한 상관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먼저 허저족․오르츈족․어웬커족의 자료를 들어본다. 그리고 고조선의 것은 따로 들지 않고, 논의 과정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허저족 : 한 부인에게 세 아들이 있었다. 두 아들이 숲 속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자 셋째가 찾으러 갔는데 그도 한 번 가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자 부인은 강변에서 목놓아 울었다. 홀연 곰 한 마리가 다가오자 놀란 부인은 급히 도망을 갔다. 곰은 따라오면서 왜 우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사연을 이야기했다. “울지 마라. 내가 너에게 다시 아이 몇을 낳게 하겠다. 모두 나나이인(那乃人 : 러시아에서 허저족을 부르는 명칭임)과 같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 방을 좀 치워라. 내가 곧 가겠다.” 여자가 집으로 돌아온 후 곰이 찾아왔다. 후에 여자는 과연 많은 아이를 낳았다. 아이들은 자란 후에 모두 나나이인과 같았다. 여자는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잘 지내거라, 나나이인. 이제 너희들은 이미 제 하라(哈拉 : 씨족)가 있다. 나는 곰과 함께 떠나야겠다. 기억해라. 3년 내에 곰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들에게 죽게 될 것이다.” 자식들은 두 해를 참다가 3년째는 결국 곰을 잡으러 나갔다. 그들은 물웅덩이 옆에서 곰 한 마리를 보았다. 잡아죽인 후 가슴을 벗기려고 보니 가슴 한 가운데 한 쌍의 큰 젖이 있었다.51)
오르츈족 : 한 사냥꾼이 사냥을 가서 나무등걸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을 보았는데, 마치 大蛤(개가죽으로 만든 옷의 한 종류)을 입은 듯했다. 그는 여기에서 이미 다른 사람이 사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막 돌아서려 할 때, 그 사람이 일어나서 긴 코와 붉은 혓바닥을 내밀었다. 이에 사냥꾼이 사람이 아니라 흑색 암콤인 것을 알고 활을 두 번이나 쏘았는데 맞추지 못했다. 도리어 곰이 뽑아서 던진 나무에 다리가 눌렸다. 그런데 곰이 나무를 치우더니 다리를 다친 사냥꾼을 업고 동굴로 데려갔다. 곰은 풀을 씹어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사냥꾼의 상처는 나아갔다. 이로부터 둘은 함께 지냈는데, 후에 반은 사람이고 반은 곰인 자식을 낳는다. 암콤은 다른 동물의 피해를 막기 위해 굴의 입구를 돌로 막아놓고 사냥을 나갔다. 그러나 사냥꾼은 고향을 잊지 못해 활을 들고 동굴을 나온다. 마침 뗏목을 타고 오는 사람이 있어서 사냥꾼은 뗏목을 타고 도망간다. 동굴에 돌아온 암콤이 뒤를 쫓아가서 사냥꾼을 발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암콤은 화가 나서 데리고 온 새끼를 찢어 반은 사냥꾼에게 던지고, 반은 자기가 가지고 돌 위에 앉아 한참을 운다. 후에 암콤이 가진 것은 곰이 되었고, 사냥꾼이 가진 것은 오르츈인이 되었다. 오르츈족 노인들은 오르츈족의 조상과 곰은 친척이라고 생각하고, 곰을 잡을 때에도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雅亞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오르츈인은 곰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죽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곰을 죽이면 성대한 風葬儀式을 거행하여 곰에게 용서를 빈다.52)
어윈커족 : 한 사냥꾼이 사냥하러 樹林 속에 들어갔다가 암콤한테 덥석 잡혔다. 암콤은 그를 산굴에 끌고 들어가 자기와 함께 살자고 强拍하였다. 막무가내인 사냥꾼은 핍박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산굴에서 암콤과 몇 해 같이 살았다. 그러다가 암콤이 새끼곰을 한 마리 낳았다. 나중에 사냥꾼은 기회를 타서 산굴에서 도망쳤다. 그것을 안 암콤은 새끼곰을 품에 안고 뒤쫓았다. 강가에 이르자 사냥꾼은 뗏목을 타고 달아났다. 화가 난 암콤은 그 자리에서 새끼곰을 두 쪽으로 찢어 한쪽은 사냥꾼에게 던져주고 다른 한쪽은 자기가 가졌다. 암콤이 남겼던 쪽이 후에 곰으로 자라나고, 사냥꾼에게 던져 주었던 쪽이 어원커 사람으로 자라났다.53)
위에 든 세 자료는 모두 곰과 사람이 결합하여 자식을 낳았는데, 그 자식이 번성하여 민족의 族源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고조선족도 마찬가지이다. 天神인 환웅과 곰여자인 웅녀가 결합하여 고조선족의 시조인 단군을 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고조선족의 단군신화는 민족의 기원이라기보다는 민족 시조의 기원을 언급한 것이어서 약간의 차이는 있다.
오르츈족과 어웬커족의 자료는 내용상 거의 비슷하다. 사냥꾼이 산에 사냥을 하러 갔다가 암콤에게 잡힌다. 그래서 사냥꾼은 암콤과 같이 부부생활을 하면서 자식까지 낳았다. 후에 사냥꾼은 암콤으로부터 도망을 치게 된다. 이에 뒤따라온 암콤이 자식을 반으로 나누어 사냥꾼에 던져준 것은 사람으로 되어 민족의 族源이 되고, 암콤이 가진 것은 곰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냥꾼과 암콤 사이에 난 자식이 반으로 갈리고, 그 각각은 곰과 민족의 族源이 되었다는 것은 곰과 사람이 형제임을 말해준다. 즉 혈연적으로 곰과 사람은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드러나고 있다.54)
그런 점에서 허저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곰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 허저족이 되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저족의 자료는 오르츈족․어웬커족의 자료와는 약간 다르다. 곰과 사람 사이에 난 자식을 반으로 갈랐다는 화소도 없고, 암콤이 아니라 수콤이 등장하고 있는 점에서도 그렇다. 또 허저족의 자료에서는 금기가 제시되고 있다. ‘3년 동안 곰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금기이다. 그런데 자식들은 이것을 지키지 않아 완전한 곰이 아니라 인간과 곰의 중간적 성격을 갖는 곰을 잡게 되는바, 그것은 자신들의 어머니였다. 곰과 관련된 금기는 특히 오르츈족․어웬커족․아이누 등의 민족에서 잘 확인되는데, 곰을 부를 때 특정 어휘를 사용하는 것, 특정한 방법에 따라 곰을 도살하는 것 등으로 제시된다. 이것은 곰을 숭배하면서도 또 생활의 양식으로 삼는 지극히 이중적인 사고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곰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곰을 인간의 조상신으로까지 승격시키는가, 아니면 숭배를 하면서도 아울러 생활의 양식으로 삼기도 하는가의 두 문제로 집약된다. 그런데 이 두 문제는 금기의 제시 여부에 따라 판단된다. 즉 금기가 제시되느냐, 제시되지 않느냐에 따라 갈리는 것이다. 만약 곰에 관한 금기가 있다면 곰은 숭배대상이면서 인간의 생활양식이 된다. 숭배하는 곰을 인간의 생활양식으로 삼기 위해서는 특별한 금기가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만약 이 금기를 지키지 않게 되면 곰을 죽이는 것은 곧 사람을 죽이는 것이 된다는, 무서운 사실의 확인으로 나타난다. 특히 일정 기간 동안은 곰을 잡지 못하도록 하고, 곰의 뼈나 머리를 특별한 의식을 통해 제사지내고 한 것은 곰이 다시 소생하여 번성하기를 바라는 인간의 소망이 반영되어 있다. 동북아 샤마니즘의 인식에 의하면 뼈에는 영혼이 들어 있어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 소생할 수 있다고 본다. 곰 뼈나 머리를 제사지내고, 특별한 기간을 설정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인식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곰과 관련하여 이러한 특별한 금기 및 의식이 마련되었을까? 이에 대한 이해는 이들 민족의 생활에 있어서 곰이 차지하는 의미가 매우 지대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할 수 있다. 즉 곰은 그 고기뿐만 아니라 가죽은 방한용으로 유용했을 것이다. 특히 북방지역의 酷寒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곰의 가죽이 필요했다고 본다. 그런데 무분별하게 곰을 사냥하는 것은 곧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죽이는 것이 된다. 때문에 일정 기간 사냥 금지의 기간을 두었고, 또 곰을 친족체계의 내의 호칭으로 불렀으며, 다시 소생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그 뼈나 머리에 특별한 의식을 치렀을 것이다. 오르츈족․어웬커족․허저족 등의 자료에는 이러한 사고가 내재되어 있고, 또 그 밖의 금기 형태로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조선족의 건국신화 속에 보이는 웅녀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고조선족의 건국신화에는 허저족의 자료에서처럼 일정기간의 금기를 제시하고 있다. 물론 그 금기의 의도는 다르다. 허저족의 자료에서는 완전한 곰이 될 때까지 일정기간 사냥을 금지한 것과 관련되고, 고조선족의 건국신화에서는 곰이 완전한 여자가 될 때까지 일정기간 동굴에서 마늘과 쑥을 먹으며 햇빛을 보지 말라는 금기이다. 즉 허저족의 경우 완전한 곰이 되기 위한 시간만큼 일정한 금기기간이 필요했다면, 고조선족의 경우 곰이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금기기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금기를 지켜야 할 목적이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다. 왜 이러한 상반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상반현상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르츈족이나 어웬키족의 자료에서 암콤이 남자를 잡아와서 동굴에 가두어두는 것을 생각해보자. 암콤이 남자를 동굴에 가두어두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그것은 인간을 곰의 생활에 적응시키기 위한 것, 즉 완전한 곰이 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고조선족의 건국신화에서 곰이 동굴에서 일정기간 있으면서 햇빛을 보지 않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 불가능한 것이 된다. 사람이 곰이 되려면 곰의 서식지인 동굴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은 곰 숭배와 관련된 신화의 논리상 마땅한 이치이지만, 곰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서식지에서 일정기간의 금기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곰 숭배와 관련된 신화의 논리상 성립되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우리는 다음의 가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곰 숭배를 갖고 있는 주변 민족을 참고해 볼 때, 고조선족의 건국신화가 곰 숭배와 관련하여 이치상 합당한 신화가 되려면 환웅이 암콤(웅녀)에게 잡혀온 것이 되어야 한다는 가정이다. 이러한 가정을 유용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고조선족의 건국신화는 곰 숭배의 특징을 잘 드러낸 신화가 될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족의 건국신화가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는 논의55)에 의하면, 즉 이주민족이 선주민족을 병합하는 과정이 신화에 반영되어 있다는 논의에 기대면, 고조선족의 건국신화는 천신숭배집단의 신화소와 동물토템숭배집단의 신화소가 습합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앞에서의 가정을 유용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고, 그에 따라 고조선족에서도 곰 숭배를 하였으며, 그것은 오르츈족․어웬키족․허저족․아이누 등에서처럼 혈연관계 내지는 친족체계 내에서의 관계, 신과 같은 대상으로서 관계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고조선족의 건국신화에 드러난 곰 숭배가 정착해 있던 민족의 것이라면, 고조선족 원래의 신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위에서도 지적했듯 천신숭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왜냐 하면 환웅이 하늘로부터 지상에 내려온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신숭배는 곧 태양숭배가 된다. 이 점을 살피기 위해 환웅이 태백산의 神壇樹에 내려온다는 점을 중시해보자. 환웅이 내려온 태백산의 神壇樹는, 곧 박달나무일 가능성이 많다. 박달나무는 자작나무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교목으로, 높이 200~2,000m 사이에 분포하며 600m 내외가 중심지대이고 山腹 이하의 광선을 잘 받는 곳에 많다고 한다. 묘목일 때는 陽光을 원한다. 또한 박달나무는 물에 거의 가라앉을 정도로 무겁고 단단하여 홍두께․방망이로도 많이 이용되었고, 가구재․조각재․곤봉․수레바퀴 등으로 이용된다고 한다.56) 여기에서 자작나무가 버들나무와 함께 만족을 비롯한 동북 민족의 숭배 樹木이라는 점, 또 광선을 잘 받는 곳에 많다는 점, 神壇樹로 이용되었다는 점, 神壇樹는 하늘숭배와 직결된다는 점57) 등을 고려하면 환웅이 神壇樹에 내려오는 것은 천신숭배 신화소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환웅은 神壇樹에 내려와 그 상대가 되는 짝으로서 누구를 만났을까? 시조신화 또는 건국신화의 논리상 환웅은 지상에서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가 神壇樹에 내려온다는 점을 다시 주목해보자. 박달나무가 태양광선을 잘 받는 곳에서 자라고 神壇樹라는 점에서 환웅은 神壇樹와의 결합을 통해 시조를 출생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아이누의 시조출생신화인 <시조신의 자서>에 보면 잘 드러난다. 즉 태양신이 聖山인 시누타프카산에 있는 느릅나무에 내려와서 느릅나무여신과 결합하여 시조신을 출생하고 있는 것이다. 느릅나무는 재질이 붉어 태양을 연상시키는 나무라는 점에서 태양신이 느릅나무에 내려온다는 인식이 가능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환웅이 神壇樹에 내려온 것은 박달나무가 태양광선이 있는 곳에서 자란다는 것, 특히 어린 묘목은 태양광선을 받아야 자랄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박달나무도 태양과 밀접한 상관성이 있는 나무이다. 또 박달나무가 神壇樹로 설정되어 있기에, 天神이 神壇樹에 내려와서 박달나무여신과 결합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고조선의 건국신화는 토착민족의 곰 숭배 신앙과 이주민족의 수목숭배 신앙이 습합되어 이루어진 신화라고 할 수 있다. 그 습합 과정에서 신화의 중심이 수목숭배 신앙이 되면서 ‘곰이 사람이 되기 위해 동굴에서 일정 기간 지내야 한다’는 논리상의 당착이 생겨나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한편 아이누는 挹婁(肅愼의 후예)의 후예일 가능성이 많고, 또 곰 숭배를 가지고 있으며, 버들나무에 대한 숭배가 대단하다는 점에서 한국을 비롯한 중국 동북민족과 여러 모로 유사한 점이 많다. 그리고 신화에 드러난 특징을 볼 때 특히 고조선족의 것과 유사한 바가 있는바, 환웅이 태백산의 신단수에 내려온 것과 태양신이 시누타프카산의 느릅나무에 내려온 것, 그리고 환웅이나 태양신이 모두 지상을 동경해서 내려온다는 점 등이 일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볼 때, 퉁구스어족 및 고아시아계 민족(아이누)의 시조출생신화 및 민족기원신화에서 드러나는 주요한 특징은 日光感應(천신숭배), 곰 숭배, 水神 숭배, 수목 숭배 등이 될 것이다.
5. 맺음말
이제까지 알타이어계 민족인 몽골어계 민족, 퉁구스어계 민족, 돌궐어계 민족과 고아시아계 민족인 아이누 등 제민족에서 전승되고 있는 시조출생 및 민족기원신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를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돌궐어계 민족 : 늑대 숭배(天降), 天鵝와 水泡로 상징되는 白色 숭배
몽골어계 민족 : 日光感應(天神 숭배), 天女의 등장, 黃犬 숭배, 말 숭배, 소 숭배
퉁구스어계 민족 : 日光感應(天神 숭배), 곰 숭배, 水神 숭배, 수목 숭배
아이누 : 곰 숭배, 수목 숭배, 天神 숭배
이상의 정리를 통해볼 때, 모두 천신 숭배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몽골어계 민족, 퉁구스어계 민족에서는 일광감응이라는 요소로써 천신숭배를 나타내고 있고, 아이누에서는 태양신이 지상에 하강하여 느릅나무와 결합을 하고, 이 결합을 통해 아이누의 시조신이 출생했다는 것으로써 천신숭배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돌궐어계 민족에서는 늑대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 것에서 동물숭배와 천신숭배의 습합을 읽을 수 있고, 또 백색숭배를 天鵝라는 새와 연결시키고 있는 점에서도 동물숭배와 천신숭배의 습합을 읽을 수 있다. 백색의 天鵝가 하강하는 것은 바로 태양이 지상에 내리쬐는 것의 신화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모두 동물 숭배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구체적인 동물숭배의 양상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돌궐어계 민족에서는 늑대와 天鵝, 몽골어계 민족에서는 黃犬․말․소, 퉁구스어계 민족과 아이누에서는 곰으로 그 숭배동물이 다르게 제시되고 있다. 이는 각 민족이 처한 자연적, 민족적 환경에 따라 그 숭배대상이 달리 설정되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민족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천신숭배와 동물숭배는 이들 민족이 공유하고 있는 종교인 샤만이즘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하늘과 동물에 대한 숭배는 샤만이즘의 가장 기본적이자 특징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각 민족이 처한 사정에 따라서 개별적인 편차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편 퉁구스어계 민족과 아이누의 자료에서는 상호 공통점이 다수 발견된다. 즉 천신숭배, 곰 숭배, 수목숭배가 그것인데, 아이누에서는 곰 숭배가 민족기원신화에서는 사라졌지만 곰제와 같은 祭儀를 통해서, 또 무속서사시인 카무이 유카르, 아이누 여인들이 구송하는 메노코 유카르와 같은 서사시를 통해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료의 성질상 본문에서 다룰 수가 없기에 여기에서 附言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목숭배는 이들 민족에 특징적으로 보이는 것인데, 수목숭배는 본질적으로 태양숭배와 관련이 있다. 그런 점에서 돌궐어계 민족과 몽골어계 민족, 그리고 일부의 퉁구스어계 민족에서 태양숭배와 동물숭배를 관련지어 설명하는 방식과 비교가 된다. 이러한 관련성은 이들 민족의 신화적 친연성을 높여주는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연구는 동아시아 알타이어계 민족과 아이누 등 제민족의 민족기원신화에 드러난 특징을 정리할 것일 뿐 심층적인 검토를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아시아 여러 민족의 기원을 신화적인 측면에서 검토한 의의는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앞으로 심층적인 검토를 통해 그 관련성을 탐색해보기로 한다.
<abstract>
Characteristics of East Asian Altaic People Group National Origin Mythologies
Choi, Won-Oh
This paper puts in order some characteristics of Altaic language group and Ainu national origin mythologies. Altaic peoples are divided into the Turkic, Mongolian, and Manchu-Tungus language groups, and compared with the Ainu, which are classified as an ancient Asian people group. The Ainu, however, are identical to the Altaic groups in both religion (shamanism) and various mythological elements as well. Thus it appears that the Ainu share much in common with the Altaic people groups.
Through this research I have taken a sampling of some of th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in the national origin mythologies of the Altaic people groups and the Ainu. One similarity is that all of the groups worship a heavenly god; this appears to be related to the identical shamanistic beliefs of these groups, since the most important characteristic of shamanism is the worship of such a heavenly god. All of these groups also worship animals, which can also be judged to be related to shamanism. Yet the differences appear in the specific target of worship. Wolf worship, for example, is strong in the Turkic language group, while the Mongol language group peoples worship the dog, horse, and cow, and the Manchu-Tungus language group peoples and the Ainu worship the bear. This can be understood to be a product of the natural and ethnic environments in which each people group exists. Also, a strong relationship is revealed in the bear worship and tree worship that the Manchu-Tungus share in common.
The above research is merely an organization of the characteristics of Altaic national origin mythologies, not a deep examination of the subject. Yet this research shows promise for a meaningful investigation of the origins of various East Asian people groups from a mythological perspective.
* 서울대 강사
1) 漢書 <張騫傳>.
2) ‘아주 광대한’이란 뜻을 지닌 Targü의 음역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북방민족의 샤마니즘과 제사습속, 국립민속발물관, 1998, 17-18면. 흉노에서는 單于를 ‘王號’로 사용하였다. 「單于姓攣鞮氏 其國稱[其主]曰 撑犂孤塗單于 匈奴稱天爲撑犂 爲子爲孤塗 單于者 廣大之貌也 言其象天單于然也」. 漢書 <匈奴傳>.
3) 魏書 <高車傳>.
4) 「歲正月 諸長小會單于庭祠 五月大會蘢城 祭其先天地鬼神 秋馬肥 大會蹛林 課校人畜計」. 史記 <匈奴傳>. ; 「匈奴俗 歲有三龍祠 常以正月五月九月戊日祭天神」. 後漢書 <南匈奴傳>.
5) 「深入匈奴 燔其龍城(顔師古注 : 燔燒也 龍城匈奴祭天處)」. 漢書 <嚴安傳>.
6) 周書 突厥傳. 「突厥者 蓋匈奴之別種 姓阿史那氏 別爲部落 後爲隣國所破 盡滅其族 有一兒年且十歲 兵人見其小 不忍殺之 乃刖其足 棄草澤中 有牝狼以肉飼之 及長與狼合 遂有孕焉 彼王聞此兒尙在 重遣殺之 使者見狼在側 幷欲殺狼 狼遂逃于高昌國之北山 山有洞穴 穴內有平壤茂草 周回數百里 四面俱山 狼匿其中 遂生十男 十男長大 外托妻孕 其後各有一姓 兒史那卽一也 子孫蕃育 漸至數百家 經數世相與出穴 臣於茹茹 居金山之陽 爲茹茹鐵工 金山形似兜䥐 其俗謂兜䥐爲突厥 遂因以爲號焉」.
7) 周書 <突厥傳>. 「或云 突厥之先出於索國 在匈奴之北 其部落大人曰阿謗步 兄弟十七人 其一曰伊質泥師都 狼所生也 謗步等性幷愚癡 國遂被滅 泥師都旣別感異氣 能徵召風雨 娶二妻 云是夏神冬神之女也 一孕而生四男 其一變爲白鴻 其一國於阿輔水劒水之間 號爲契骨 其一國於處折水 其一居踐斯處折施山 卽其大兒也 山上仍有阿謗步種類 幷多寒露 大兒爲出火溫養之 咸得全濟 遂共奉大兒爲主 號爲突厥 卽訥都六設也 訥都六有十妻 所生子皆以母族爲姓 阿史那是其小妻之子也 訥都六死 十母子內欲擇立一人 乃相率於大樹下 共爲約曰 向樹跳躍 能最高者 卽推立之 阿史那子年幼而跳最高者 諸子遂奉以爲주 號阿賢設 此說雖殊 然終狼種也」
8) 滿都呼 主編, 中國阿爾泰語系諸民族神話故事, 北京 : 民族出版社, 1997, 14-22면.
9) 耿金聲 著, 西北民族文學史, 北京 : 天津古籍出版社, 1995, 46-47면.
10) 耿金聲 著, 위의 책, 48-49면.
11) 다만 다른 것은 ‘백색 기러기’가 ‘백색 天鵝’로 바뀌었다는 사실인데, 이것은 기러기나 天鵝가 동일 조류로 인식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지 못한다.
12) 後漢書 <烏桓鮮卑列傳>. 「桓帝時 鮮卑檀石槐者 其父投鹿侯 初從匈奴軍三年 其妻在家生子 投鹿侯歸 怪欲殺之 妻言嘗晝行聞雷震 仰天視而雹入其口 因呑之 遂姙身 十月而産 此子必有奇異 且宜長視 投鹿侯不聽 遂棄之 妻私語家令收養焉 名檀石槐」.
13) 그런 점에서 부여의 <동명신화>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14) 拓跋은 ‘토지신’이라는 뜻이다. 「國有大鮮卑山 因以爲號 其後 世爲君長 統幽都之北 廣漠之野 畜牧遷徙 射獵爲業…黃帝以土德王 北俗謂土爲拓 謂后爲跋 故以爲氏」. 魏書 <本紀>.
15) 魏書, <序紀>.
16) 「獻皇帝諱隣立 時有神人言於國曰 此土荒遐 未足以建都邑 宜復徙居 帝時年衰老 乃以位授子 聖武皇帝諱詰汾 獻帝命南移 山谷高深 九難八阻 於是欲止 有神獸 其形似馬 其聲類牛 先行導引 歷年乃出 始居匈奴之故地 其遷徙策略 多出宣獻二帝 故人並號曰推寅 蓋俗云鑽硏之義」. 魏書 <序紀>.
17) 「西部內侵 國民離散 依於沒鹿回部大人竇憲」. 魏書 <序紀>.
18) A.D.258년에 본거지를 長川에서 盛樂으로 옮기고 성대한 제천행사를 한다. 이 행사를 보면 그의 세력 확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夏四月祭天 諸部君長皆來助祭 唯白部大人觀望不至 是徵而戮之 遠近肅然 莫不震懾」. 魏書 <序紀>.
19) 遼史 <地理志> 上京道․永州永昌郡條 「相傳有神人乘白馬 自馬盂山浮土河而東 有天女駕靑牛由平地松林泛黃河而下 至木葉山 二水合流 相遇爲配偶 生八子 其後族屬漸盛 分爲八部 每行軍及春秋時祭 必用白馬靑牛 云不忘本云」.
20) 「祭山儀 設天神地祗位于木葉山東鄕」.
21) 동북민족의 샤머니즘과 제사습속, 국립민속박물관, 1998, 218면. 木葉山은 현재의 내몽골 奈曼旗 동북의 老哈河와 西喇木倫河가 匯合하는 곳에 위치한 산이다.
22) 위구르․카자흐 등의 시조기원신화에서 보았듯, 이것을 백색과 청색의 대립쌍으로 설정하고 또 이것을 地와 天에 연결시켜 보면 神人과 天女의 出自에 부합하는 바가 있다. 그리고 샤만이 이들 조상신의 出自를 나타내줄 수 있는 동물가면을 쓰고서, 조상신을 기리는 행위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 하면 契丹國志 <初興本末條>에 군주가 동물가면을 쓰고 부족을 다스렸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뒤에 한 군주가 있었으니 迺呵라고 불렀다. 이 군주는 특히 하나의 해골이다. 겔 속에 넣어두고 그것을 氈으로 덮어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게 한다. 국가에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白馬와 灰牛로 제사를 지낸다, 처음에는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여 나와서 일을 보지만 겔 속에 들어가서는 해골이 된다. 나라사람들이 몰래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 소재를 잃어버렸다. 다시 한 군주가 있었는데 喎呵라고 했다. 들돼지 가죽을 쓰고 겔에서 살았다. 일이 있으면 나왔다가 물러나서는 다시 전처럼 겔 속에 들어가 숨었다. 후에 그 아내가 몰래 그 돼지가죽을 보았다. 그래서 그 남편을 잃어버렸는데, 어찌할 수가 없었다. 다시 한 군주가 있었으니 盡里昏呵라고 했다. 오직 20마리를 기르는데 한 번에 19마리를 먹고 1마리는 남겨두었다. 다음날 다시 20마리가 있었는데, 날마다 그렇게 하였다. 이 세 군주는 매우 나라를 다스림에 능력이 있었고 부족함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後有一主 號曰迺呵 此主特一髑髏 在穹廬中 復之以氈 人不得見 國有大事 則殺白馬灰牛以祭 始變人形 出視事 已卽入穹廬 後爲髑髏 因國人竊視之 失其所在 復有一主 號曰喎呵 戴野豬皮 居穹廬中 有事則出 退復隱入穹廬如故 後因其妻竊其猪皮 遂失其夫 莫知所如 次復一主 號曰晝里昏呵 惟養二十口 一食十九 留其一焉 次日復有二十口 日如之 是三主皆有治國之能名 餘無足稱焉).
23) 몽골비사 제1절. 몽골비사의 인용은 동북민족의 샤머니즘과 제사습속에 소개되어 있는 번역을 참조한다. 이하 동일함.
24) 몽골비사 제17-21절.
25) 조현설, 「건국신화의 형성과 재편에 관한 연구-티벳․몽골․만주․한국 신화의 비교를 중심으로」, 동국대 박사논문, 1997, 54면.
26) ‘등에 회색 반점이 얼룩얼룩 박힌 이리’, ‘황색이 감도는 아름다운 암사슴’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앞의 책(국립민속박물관), 256면.
27) 酉陽雜俎의 기록과 상관성이 있음. 「突厥之先 曰射摩舍利海神 神在阿史德窟西 射摩有神異 海神女每日暮 以白鹿迎射摩入海 至明送出 經數十年 後部落將大獵 至夜中 海神女謂射摩曰 明日獵時 爾上代所生之窟 當有金角白鹿出 爾若射中此鹿 畢形與吾來往 或射不中 卽緣絶矣 至明入圍 果所生窟中有金角白鹿起 射摩遣其左右固其圍 將跳出圍 遂殺之 射摩怒 遂手斬呵口爾首領 仍誓之曰 自殺此之後 須人祭天 卽取呵口爾部落子孫斬之以祭也 至今 突厥以人祭纛 常取呵口爾部落用之 射摩旣斬呵口爾 至暮還 海神女報射摩曰 爾手斬人 血氣腥穢 因緣絶矣」
28) 古突厥族의 서사시 <巴薩特斬除獨眼巨人之歌>에 獨眼巨人이 등장한다. 萬都呼 主編, 앞의 책, 23-25면.
29) 해당 부분을 들어본다. 「칭키스 카한이 태어나기 대략 이천여 년 전에 북방 초원의 몽골부락과 돌궐부락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몽골부가 패전하여 모두 살육 당하고 2남 2녀만 살아 남았다. 그들은 곤란과 위험을 거쳐 인적이 없는 깊은 산중으로 도망갔다. 그곳은 높은 산봉우리와 빽빽한 삼림으로 둘러싸여 통행하기 어려운 양의 창자 같은 작은 길을 제외하고는 다른 길이 없었다. 이곳을 額爾古涅-昆이라고 불렀는데, 昆은 ‘산비탈’, 額爾古涅은 ‘험준하다’는 뜻이다. 도망간 兩家의 성씨는 하나는 捏古思, 다른 하나는 乞顔이었다. 이 네 남녀가 서로 짝을 지어 오랫동안 그곳에서 번성해졌다. 오랜 후 사는 곳이 좁아 혼잡함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옛날의 小路가 막혀 나갈 수가 없었고 다른 출로를 모색했는데 협곡에 부딪쳤다. (그러다가) 나중에 철을 녹이던 옛 광산을 발견하고 전 부족이 모여 대량의 석탄과 땔나무를 준비하고 70개의 풀무로 한꺼번에 바람을 일으켜 불을 피우니 열기가 비등하여 곧바로 山壁을 녹였다. 이 巨事로 무수한 철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길이 열려 그들은 곧 다같이 넓은 초원으로 옮겨갔다. 熔山에 참가했던 弘吉刺惕部落은 의논도 없이 서둘러 먼저 나갔고 또 다른 부락의 부뚜막을 밟아 깨뜨렸기 때문에 그때로부터 유명한 疾足에 걸려 弘吉刺人들은 아주 고생하게 된다. 이후 칭키스 카한의 가족들은 이 壯擧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섣달 그믐이 되면 고로에 제련된 철을 모루 위에 두고 두드려 가늘게 만들어 조상에 감사를 표한다. 이 옛 습속은 계속 전해져 내려온다.」 라시드 著, 集史. 이 설화의 구조는 앞서 들었던 돌궐족의 민족기원신화의 구조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다만 신화적인 요소가 모두 제거되어 있을 뿐이다.
30) 몽골비사 76절.
31) 몽골비사 5-9절.
32) 今 西龍 遺著, 「朱蒙傳說及老獺稚傳說」, 朝鮮古史の硏究, 國書刊行會, 소화 45년, 503 - 505면.
33) 三國志 <烏丸傳>에 인용된 王沈의 魏書에 「貴兵死 斂屍有棺 始死則哭 葬則歌舞相送 肥養犬 以采繩嬰犬 幷取亡者所乘馬依物生時服飾 皆燒以送之 特屬累犬 使護死者神靈歸乎赤山 赤山遼東西北數千里 如中國人以死之魂神歸泰山也 至葬日 夜聚親舊圓座 牽犬馬歷位 或歌哭者 擲肉與之 使二人口頌呪文 使死者魂神俓至 歷險阻 勿令橫鬼遮護 達其赤山 然後投犬馬依物燒之」 보면 개가 망자의 영혼을 안내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1970년대 초 遼寧 北栗縣 西官營子에 소재한 北燕의 馮素弗墓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개의 뼈가 출토되었다고 한다.(黎瑤渤, 「遼寧北栗縣 西官營子北燕馮素弗墓」, 文物, 1973-3. 동북민족의 샤마니즘과 제사습속, 68면 참조). 개가 망자의 영혼을 안내하는 것은 아이누의 구비서사시 <시조신의 자서>에서도 확인된다.
34) 遼史 <禮志>에 「八月八日 國俗 屠白犬 于寢帳前七步瘞之 露其喙 後七日中秋 移寢帳于其上」이라 하였고, 大金國志 初興風土條에 「其疾病無醫藥 尙巫祝病者 殺猪狗以禳之」라고 했다. 또 흑룡강 일대에 거주하는 錫伯族, 烏爾奇族에게서도 보인다. 한국의 경우 이북지역인 황해도나 함경도 지방에서 만구대탁굿을 할 때 개를 잡아 가죽을 벗긴 뒤 속을 짚으로 채워놓고 신당에 안치한다. 한국의 이북지역에서만 개 신앙 및 개와 관련된 오리양카이족 시조설화가 전승되고 있는 점은 매우 주목되는 현상이다.
35) 앞의 책(국립민속박물관), 287-288면.
36) 코리-투메트부는 Khori는 부족명과 萬(Tümen)의 복수형인 Tümed가 결합된 명칭으로 ‘다수의 코리’라는 의미를 지닌다.
37) 滿都呼 主編, 앞의 책, 183-184면.
38) 「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來 年已六十餘矣 兄阿古迺好佛 留高麗不肯來 曰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 吾不能去也 獨與弟保活里俱 始祖居完顔部僕幹水之涯 保活里居耶懶 其後胡十門以曷蘇館歸太祖 自言 其祖兄弟三人相別而去 蓋自謂阿古迺之後 石土門迪古乃保活里之裔也 及太祖敗遼兵于境上 獲耶律謝十 乃使梁福幹答刺招諭渤海人曰 女眞渤海本同一家 蓋其初皆勿吉之七部也」. 金史 <世紀>. 또한 高麗史 睿宗 12년 3월 癸丑條를 보면 A.D.1117년 阿骨打가 고려에 국서를 보냈는데 “高麗爲父母之邦”라고 하였다. 그리고 金史 <張行信傳>에서는 金朝가 宋朝와 정통논쟁을 벌일 때, 張行信이 “按始祖實錄止稱自高麗而來 未聞出於高辛”라는 발언을 통해 고려와의 민족적 일체감을 표시하고 있다.
39) 陶陽․鍾秀 著, 中國創世神話, 上海 : 上海人民出版社, 1989, 257면.
40) 滿洲の 傳說と 民謠(滿洲事情案內所 編, 康德 5년, 11면.)에서는 朝鮮의 會寧으로 보았다.
41) 滿洲實錄 권 1. 「滿洲 原起於長白山東北 布庫哩山下一泊 名布勒瑚里. 初天降三仙女浴於泊 長名恩古倫 次名正古倫 三名佛庫倫 浴畢上岸 有神鵲銜一朱果 置佛庫倫衣上 色甚鮮姸 佛庫倫愛之 不忍釋手 遂銜口中 甫著衣 其果入腹中 卽感而成孕 告二姊曰 吾覺腹重 不能同昇 奈何. 二姊曰 吾等曾服丹藥 諒無死理. 此乃天意 俟爾身輕上昇未晩. 遂別去. 佛庫倫後生一男 生而能言 倏爾長成. 母告子曰 天生汝 實令汝以定亂國 可往彼處將所生緣由 一一詳說. 乃與一舟. 順水去 卽其地也. 言訖 忽不見. 其子乘舟順流而下 至于人居之處 登岸折柳條爲坐口 似椅形 獨踞其上 彼時長白山東南鄂謨輝地名鄂多理城名內有三姓爭爲雄長 終日互相殺傷. 適一人來取水 見其子擧止奇異 相貌非常 回至爭鬪之處 告衆曰 汝等無爭. 我於取水處遇一奇男子 非凡人也. 想天下虛生此人盍往觀之. 三姓人聞言罷戰 同衆往觀. 及見 果非常人 異而詰之. 答曰 我乃天女佛庫倫所生 姓愛新漢語金也覺羅姓也 名布庫哩雍順. 天降我定汝等之亂. 因將母所屬之言詳告之. 衆皆驚異曰 此人不可使之徙行. 遂相揷手爲輿 擁捧而回. 三姓息爭 共奉布庫哩雍順爲主 以百里女妻之 其國定號滿洲 乃其始祖也」.
42) 앞에서 들었던 金史 <世紀>에 보면 “女眞渤海本同一家”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여진과 발해가 동일 민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족원신화나 민족시조신화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발해 쪽의 자료 결핍으로 인해 이 문제는 논의할 수가 없다. 그런데 발해의 대표적인 설화 <紅羅女>에 보면 절대미인 紅羅女와 어부의 사랑이 주된 내용으로 되어 있고, 분석에 의하면 이 자료는 신화적 성격이 매우 짙은 설화이다. 이런 점을 바탕으로 여진족의 족원신화와 비교하면, 두 자료에서 모두 어부와 신성한 여인과의 결합을 문제삼고 있다. 그런 점에서 “女眞渤海本同一家”는 구전설화에서도 확인된다. 다만 <홍라녀>에서는 그 결말이 비극적인데, 이것은 신화적인 요소의 소멸과 함께 전설적인 자료로 바뀌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紅羅女> 설화는 필자가 다음 논문에서 처음으로 다루었다. 拙稿, 「<紅羅女>전설의 신화적 특성」, 燕居齋申東益博士停年紀念論叢 國語國文學硏究, 서울 : 경인문화사, 1995.
43) 성과 이름을 제시했다는 것은 만주족의 신화를 순수한 민족시조기원신화로 보기 힘들게 한다. 성과 이름의 제시는 비교적 후대 요소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44) 崔基南의 협주에 이르기를, 漢城峴은 會寧郡 서쪽 30리에 있는 保乙阿鎭이다. 진의 북문은 두만강과 접해 있다. 강의 北岸에 山城의 옛터가 있다. 중국 元朝 때의 五國城이 이것이다. 속칭 漢城峴이라고 하는데, 漢이 성 아래에 거주하면서 병마를 길렀기 때문이라고 한다.
45) 東稗洛誦에서는 鄭忠信에 대해 다음과 기술하고 있어, 참고로 제시한다. 「錦南君鄭忠信在北邊 與魯花赤相親 花赤請飯酒 使諸子來拜 錦南偃坐受之 及第六子熱視起敬 花赤曰 汝何見此兒起敬 曰 不意秦始皇亦見 花赤笑曰 汝獨不知此乃唐太宗也 此則金汗而後果代大明爲天子」.
46) 이것은 隆熙 2년에 崔基南이 <雲淵實跡(淸朝發祥古蹟)>이라는 제목으로 기록한 것을 今 西龍에게 건넨 것이다. 今 西龍, 「朱蒙傳說及老獺稚傳說」, 今 西龍 遺著, 朝鮮古史の硏究, 國書刊行會, 491-495면.
47) 「十箇月ニ至リ一個ノ童子ヲ産メ其頭髮及全身黃色ナル故名ヲ朝鮮語ニテ[ノラヂ](老爾冾赤)ト云ヘリ云々」. 위의 논문, 502면.
48) ’~치‘는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이다.
49) 주몽이 동부여로부터 도망한 것은 씨족이 달랐기 때문이다. 즉 金蛙는 ‘개구리 형상’으로 태어나는 바, 日光感應으로 태어난 주몽과는 그 氏族的 성격을 달리한다. 금와신화는 오히려 여진족 족원신화나 노하치전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노하치전설에서 수달대신 개구리가 제시되기도 한다는 점은 이들 씨족간의 近親性을 떠올리게 한다. 개구리가 등장하는 노하치전설은 위의 논문, 499-501면 참조할 것.
50) 魏書 勿吉國條에 “나라 남쪽에 徙太山이 있다. 魏書에 태백이라고 한다. 범, 곰, 이리가 있는데 사람을 해하지 않는다. 사람은 산 위에서 오줌 같은 것을 배설하지 못하며, 그 산을 지나가는 자는 다 물건을 천신하고 간다.”고 하였고, 隋書 靺鞨國條에 “徙太山이 있는데, 그것을 경외하는 습속이 있다. 산 위에 곰, 범, 이리가 있는데 사람을 해하지 않으며 사람도 또한 감히 죽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51) 施騰伯格, 著作與資料集, 502면. 徐昌翰․黃任遠 著, 赫哲族文學, 哈爾濱 : 北方文藝出版社, 1991, 37면 재인용. 이 책에 있는 다음의 자료도 곰과 사람의 관련성을 말해준다. 「백발 노부부가 산에 들어간지 16일 후에 몸에 검은 털이 나더니 곰으로 변했다. 어떤 집 아들과 부모간에 갈등이 생겨 칼로 죽으려 하였다. 노파가 제지하고 둘이 함께 산으로 들어갔다. 숲에서 큰 나무 하나를 찾았는데, 16일 후 두 사람은 곰이 되었다. 전에는 세상에 곰이 없었는데 이들 둘을 통해 곰이 많아졌다. 아들이 부모와 싸우고 단숨에 깊은 산에 들어가 동굴을 파고 숨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곰으로 변했다. 형제가 분가하는데 한 사람이 많이 가졌다고 한 놈이 산으로 들어가 굴을 파고 살며 곰이 되었다.」
52) 本書編委會 編, 中華民族故事大系 15, 上海 : 上海文藝出版社, 1995, 699-701면. 다음의 이야기도 역시 인간과 곰의 밀접한 연관성을 말해준다. 「중년의 오르츈 부인이 나물을 뜯고 과일을 따러 산에 갔다가 길을 잃어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오래 산에서 지내다가 그는 점점 곰으로 변하였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이 이곳에 사냥을 왔다. 한 마리 곰이 화전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것을 보고, 창을 찔러 단번에 죽였다. 사냥꾼은 칼을 꺼내어 가죽을 벗기기 시작하였다. 앞다리를 벗기는데 칼이 들어가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붉은 팔찌를 끼고 있었다. 바로 자기 부인이 손에 끼고 다니던 그 붉은 팔찌였다. 급히 땅에 무릎을 꿇고 팔찌를 집어서 버드나무 가지로 함을 만들었다. 곰의 머리와 팔찌를 함에 넣고 나뭇가지 사이에 모셔놓고 애도하였다. 그 이후 오르츈족은 곰을 사냥하고 먹을 때 이 의식을 행한다. 그들은 곰은 사람이 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孟淑珍 著, 鄂倫春民間文學, 黑龍江省民族硏究所, 1993, 39-43면. 김재용․이종주 공저, 왜 우리 신화인가, 서울 : 도서출판 동아시아, 1999, 326면 재인용.
53) 박연옥 편, 중국소수민족설화, 서울 : 학민사, 1994, 38면.
54) 어윈커족의 자료에서 눈여겨 볼 대목이 암콤에 의해 찢겨진 새끼곰이 곰과 어윈커 사람으로 자라났다는 부분이다. 곰을 수렵인을 나타낸 것으로, 사람을 문화인을 나타낸 것으로 보면, 이는 수렵인에서 문화인으로 변천하여 온 어윈커족의 역사를 암시해주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55) 황패강, 「단군신화의 한 연구」, 백산학보 제3호. 1967.
56) 趙武衍, 「박달나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8, 성남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899면.
57) 샤마니즘 제의에서 神竿을 세우는데, 그것은 샤만이 하늘과 교통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