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래커cracker
- 이민하
식후에 우린 가볍게 봉지를 뜯고 이야기를 하나씩 꺼냈다. 사람이 많구나. 손끝
으로 벤치를 쓸어대면서 이야기에 침을 바르고 겹치지 않는 순서를 기다렸다. 어
제가 나왔고 지난겨울이 나왔고 옛날이 쏟아졌다. 어릴 적 맛보았던 건 지금도 눈
물 나는데
산불이 나오고 특검이 나오고 폐업들이 쏟아졌다.
어디선가 위암이 나오고 빙의가 지나가고 변사체들이 축구공처럼 굴러왔다. 화들
짝 졸린 눈을 부릅뜨면서
지문을 없앴다잖아. 면식범일 가능성이 높은 거래. 손가락을 자르는 살인마들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누군가 캑캑거리면 나도 숨이 막히고
날씨가 좋구나. 건강에는 좋지 않은 이야기를 입에 잔뜩 품고서
마지막은 누구의 몫일까. 입을 쓱 닦으며 서로에게 미루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옆
에서 떠나갔다.
부서지는 것들은 흘려도 티가 안 나고
살찐 비둘기들이 먼지처럼 날아가고
이를 쑤시던 다음 사람들이 빈 의자 위에 앉았다.
빈 봉지가 쌓여 가는 무더기 속에서
토막 난 이야기들이 튀어나왔다. 여기서 팔 하나가 나오고 저기서 불쑥 머리가 나오
고
목이 점점 늘어져 삼켜도 삼켜도 우물 속인데
어디서 끊어야 하나.
밤은 오는데 삼삼오오 기린처럼 앉아서
저건 내 이야긴데 앞사람의 입에서 씹혔다. 내가 입을 열었는데 옆 사람이 흐느꼈다.
이야기마다 손가락이 잘려 있었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만질 수 없다. 내 몸을 만지면 죄 짓는 것 같았다.
ㅡ계간 《포지션》(2024,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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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는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채로 일상을 누립니다
사람들은 크래커를 심심풀이로 하나씩 꺼내어 씹고 뜯고 깨물지만 결론은 그저 허망입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듯이 살아있는 것도 살아가는 것도 같은 듯 전부가 다릅니다
어제는 영일만 부근에 엄청난 규모의 천연가스와 원유가 매장되어 있을 수 있다는
정부를 대표한 대통령의 발표가 있었네요
이야기가 이야기를 만질 수 없어서 빈 풍선이 아니기를 바라봅니다
토막지는 이야기들이 여의도 하늘 위에서 솟구치다가 슬그머니 사라지고 있네요^*^